반일정좌 반일독서
여름철에는 아침 먹기 전에 할 일이 있고 먹고 난 후에 할 일이 있다.
밭일이나 풀베기는 해 뜨기 전에 해야 땀이 덜 나고 지치지도 않는다.
상추나 고추 등 농작물도 해뜨기 전에 수확해야 싱싱하고 부드럽다.
아침 해가 뜨고 나면 마당도 쓸고 화분에 물도 준다.
그런 다음에는 햇살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마을길을 가볍게 산책하고 돌아온다.
아침 나절의 내 일과는 이렇다.
오전 10시 사시 예불을 할 때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이럴 때는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비를 흠뻑 맞은 수목들의 생기 넘치는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이 내 일과의 백미다.
남송의 유학자 주자의 시에 이런 표현이 있다.
오무죽오무예소 반일정좌반일독서
다섯 이랑은 대나무를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갈고
한나절은 좌선하고, 한나절은 글을 읽는다.
추사 선생도 이 글귀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서 충남 예산에 있는 그의 고택에도 이 내용을 주련으로 써 놓았다.
밭이랑을 뜻하는 묘는 독음할 때는 ‘무’로 읽어야 한다.
이런 글을 읽고 있으면 잔잔한 기쁨이 고이면서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다.
비록 대나무는 아니지만 다양한 나무가 있고 채소 심을 밭이랑이 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하지 않은가.
또한 반나절은 독서하고 조용히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또한 조촐한 복이라 여긴다.
중년의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 번거롭거나 분주한 삶은 좀 멀리하고 싶다.
몇몇 벗들은 벌써 은거하냐고 물어보기도 하지만 이런 소박한 생활이 좋다.
누구나 전원생활을 은퇴 후의 계획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늦은 나이다.
환갑 지나서 허리 아프고 무릎 부실한데 어찌 논밭을 일구겠는가.
은퇴 후의 일이라 하더라도 미리미리 연습하고 즐겨야 한다.
시골 생활은 즐기지 않으면 힘들고 귀찮은 일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인생은 타성적인 흐름보다는 주체적인 흐름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인생의 노후는 타성에 떠밀려 마주친 상황이 되면 허망하고 쓸쓸하지만 주체적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상황이라면 의미 있고 활기차다.
따라서 젊은 시절부터 동경하고 즐겨하던 삶의 모습이 노년의 그림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스스로의 가치관을 물질 중심에 세속화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가꾸어야 한다.
이곳에 살다 보면 새벽 창으로 번지는 여명은 자명종이나 다름없고 지저귀는 숲속의 새소리는 반가운 아침 인사처럼 들린다.
어젯밤에는 샘물 소리를 베개 삼아 잠들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숲속의 청아함이 나를 깨운다.
이것 외에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홀로 사는 이에게는 맑고 투명한 이런 시간이 은은한 기쁨이다.
이럴 때는 종일 대문 빗장을 걸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
불쑥불쑥 방문하는 손님들로 인해 한적한 고요가 방해받을 때도 많다.
손님이 한나절의 한가를 얻을 때 주인은 한나절의 한가를 잃는다는 옛말이 있다.
손님과 주인의 입장차를 말한다.
맞이하는 입장과 방문하는 입장은 반대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은 그로 인해 일상에 방해를 받는 것이다.
어제도 늦은 오후에 김매는 일을 하고 있는데 예고 없이 손님이 방문했다.
일을 하다가 손을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님을 우두커니 세워 놓을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일의 흐름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쑥불쑥 남의 집을 방문할 일이 아니다.
귀와 눈이 열리는 운명적 만남도 있지만, 일상적인 범속한 만남은 때때로 시간 낭비이며 무례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이 좋고
자고 일어나 차를 마시니
그 맛이 더욱 향기롭다.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빈집에 부처님과 함께 지내니
근심 걱정이 없네
고려 선승 원감(1226-12930) 국사의 선시다.
음미할수록 그 맛이 깊고 담백하다. 탈속한 경지가 잘 드러난다.
신선처럼 산다는 것은 마음이 신선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 아무리 신선이 노닐 만한 절경이라도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그곳은 자기를 구속하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하루하루의 생활 때문에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몸은 속진에 있더라도 마음은 이런 삶을 즐기고 동경할 줄 알아야 현재의 고난을 위로받을 수 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어 보라. 종래에는 그 꿈이 내 삶의 방향을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