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다"…3대 걸쳐 독립운동가 11명 배출
기자명 오종명 기자
경북일보 기사 지면게재일 2023년 08월 14일 월요일 지면 3면
석주 이성룡, 독립운동 위해
임청각·전답 팔아 자금 마련
'호연지기' 정신 후손에 자긍심
일제가 철길을 놓아 반토막이 난 임청각(보물 182호) 복원이 본격화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 집안이 대대로 살던 임청각에서는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석주 가문은 3대 동안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동생 상동·봉희, 아들 준형, 조카 형국·운형·광민, 손자 병화, 당숙 이승화까지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여기에 석주 선생 부인 김우락 여사, 손자 며느리이자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여사까지 11명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석주 이상룡 집안은 3대가 줄줄이 독립운동을 했다. 그들이 겪었을 고생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집안은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치는 바람에 해방 후에는 자녀들이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투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서슬 퍼런 감시로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해방 후에는 가난 탓에 학교에 다니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석주가(家)에는 다른 어떤 가문보다 더 고귀한 유산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이다. 개인적인 손익을 따지지 않고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이와 같은 호연지기의 정신은 오늘날 그 후손들이 다시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구한말 퇴계학통의 유학자였던 석주 이상룡은 고성 이씨 17대 종손으로 안동시 법흥리 안동댐 진입로에 위치한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그는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1911년 1월, 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고 떠나 현재 사당에는 봉인된 신위가 없다.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건립했으며 항일독립운동단체 경학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한족회 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했다.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아들 이준형은 10여 년 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협박과 함께 변절의 요구를 받자 1942년 이상룡 선생의 문집인 ‘석주유고(石洲遺稿)’ 정리를 마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현충원 내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이름 지은 안동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이다. 사당과 별장형 정자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이상룡 선생은 이곳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웠다.
안채 튼방 앞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우물방이 있다. 우물방은 진음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실제로 임청각의 외손들 중에서 여러 명의 정승이 나왔고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임청각 출신 9명의 독립유공자 모두 이 방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을 포함하여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고성(固城) 이씨 가문의 종택인 안동 임청각
분 류 : 건물
지 정 : 보물 182호 (1963. 1. 21)
시 대 : 조선시대
이 건물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 영산현감 이중공이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이거하여 그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이다.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온 오래된 건물이다.
대청에 걸려있는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로 알려져 있다.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별당건축이다. 정면 2칸에 측면도 2칸인 대청이며 남향으로 세웠다.
그 서쪽에 연접해서 丁자형으로 온돌방을 부설했는데 그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건물의 주위에는 쪽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다.
온돌방의 한부분은 각주를 세워 굴도리를 얹은 간단한 구조로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청은 원주를 사용하고 그 위에 이익공계통의 공포와 그 사이에 화반을 1개씩 배치하였으며 겹처마로 만들었다.
공포는 건물의 외면에서는 쇠서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간소하게 초공으로 꾸며져 있다. 벽은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에는 판문을,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아 놓았다.
처음에는 대청전체에 단청을 하였던 것 같으나 현재는 내부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청의 대들보 위에 얹은 대공은 접시받침과 첨차 및 초각반을 갖춘 동자주 형식이며, 종량위에는 상부에 첨차가 가로 낀 제형대공이다.
종량을 길게한 3분변작법을 채택하여 지붕의 합각부분이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임청각 서쪽에 위치한 본채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잡았는데 총 50칸을 넘는다.
전면 아래서부터 동서 길이 12칸의 행랑채와 그 후면에 다시 같은 길이를 이룬 두채가 병행되는데 제일 뒤 건물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전면 좌우에는 앞뒤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어서 안마당은 세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서단은 다락방으로 남북을 연결하였으며 이들은 곳간으로 사용되고 부엌도 이쪽편에 위치하였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이고 맞배지붕들인데 대청은 소슬지붕이다.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집이나 안채와 대청은 굴도리집이다. 건축양식상으로는 대청의 가구재로서 포대공이 눈에 띤다. 대청의 규모는 3칸×4칸인데 전면에 퇴가 달렸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인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국보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으로 높이는 17m, 기단부 7.5m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법흥리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다. 또한 기단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는 단층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칠층전탑의 구조는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돌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초층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 단· 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 탑은 목탑을 모방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동오이(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상유금동지식이고철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上有金銅之飾 李股撤面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임청각&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