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김호남 부부의 딸, 朴在玉의 手記
朴正熙 대통령의 큰딸 朴在玉이 지난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와 전부인 김호남 사이에서 태어난 故人은 朴槿惠보다 열네 살 위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고인은 남편 韓丙起와 함께 해외에서 생활했다.
박정희의 副官 출신 한병기는 1958년 고인과 결혼하여, 제8대 국회의원, 駐칠레·유엔·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중 고인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실린 수기에서, 고인은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이혼과 힘들었던 사춘기, 대통령 아버지를 두고서도 ‘없는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시절 등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 집에 돌아오면 책만 읽던 아버지
할머니(박정희의 모친 백남의)는 나를 끔찍하게 보살피셨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활발하고 씩씩한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축 처진 내 모습을 보실 때마다 할머니는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엇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무엇이든 바지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다가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나를 찾으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늘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최고라고 칭찬하셨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괴롭고 외로우셨다.
대가족의 살림을 챙기느라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
남편도 없고, 아이가 더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의 사랑은 온통 내게 쏠렸다.
아버지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고향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늘 말이 없고 무뚝뚝했지만, 내게는 인심이 후한 아버지였다.
담배 한 갑 사오라고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여주시면, 담뱃값이 얼마든 관계없이 잔돈은 늘 내 차지였다.
철없던 나는 그저 잔돈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기뻐서 좋아 날뛰었다.
고향 집에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책만 읽으셨다.
어떤 날은 아침상을 물리고 나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하루에 한 권을 다 읽으시는 날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 책이 다 내 머릿속에 있다.
자, 물어봐라. 다 알고 있으니까”라면서 책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산 날은 훗날 서울에서 산 것까지 합해도 몇 년 되지 않는다.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났다 헤어지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시간은 짧고, 집을 떠나 계시는 기간은 길었다.
◎ 부모님의 이혼
6·25 직전의 일이니까 내가 열 살이 좀 넘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구미 상모리 집에 오셨다.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을 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남편도 없는 집에서 막내 며느리로 일만 죽어라고 한 게 10년이 넘었는데, 그 대가가 이혼이라니, 어머니가 나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셨다.
“너의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꼬리를 흐리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엄마, 이혼이 뭐예요?”
“내가 이제 너희 집에서 못 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때 말씀하셨다.
“절대 내 손으로는 이혼 안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을 썩었으니, 자기도 좀 당해봐야 돼.”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과 함께 자리 잡았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왜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가 보기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엄마는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 아버지의 재혼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나를 데리고 상모리를 떠났다.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긴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싫었던 나는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열네 살 때 “내겐 우리 식구가 있고 아버지가 계신데, 여기 있을 수는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게로 갈 거야”라면서 어머니 곁을 떠났다.
이후 나는 외할머니댁과 구미의 사촌 오빠 집 등을 전전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나는 아버지에게 원망에 찬 편지를 쓰곤 했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 오빠가 나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나도 힘들고….」
내가 투정 섞인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와 陸英修 여사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근혜가 태어난 후였으니, 1952년쯤이었을 것이다.
집안 어른들이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재혼하신 후에도 용돈과 학비를 꾸준히 보내주셨으므로,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던 영옥이언니(박영옥, 김종필의 부인)가 “서울에 와서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왔다.
나는 좋아라 따라나섰다.
영옥이 언니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 데다, 나에게 워낙 잘해주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제기동의 언니 집에 살면서 동덕여고에 다녔다. 언니는 내게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육 여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친척들은 육 여사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누구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육 여사에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다들 나를 없는 것으로 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기동 언니 집으로 육영수 여사가 불쑥 찾아왔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기에, 나는 두말하지 않고 육 여사를 따라나섰다. 훗날 안 일이지만, 친척들이 그렇게 쉬쉬한 나의 존재를 육 여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결혼 전에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신 후에 알렸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왜 갑자기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결심했는지, 그 이유도 아직 모르겠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첫 만남이었으나, 육 여사의 인상은 아주 좋았다.
깔끔한 한복 차림에 조용한 분인 것 같았다.
그날, 내가 아무런 미련 없이 육 여사를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 영옥 언니는 아마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그렇게 잘해준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매를 맞고 살아도,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육 여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는 기쁘고 감사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나중에는 계모든, 서모든, 아픈 어머니이든, 미친 어머니이든 내게는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육 여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신 후에 만나 결혼하신 분이니, 나로서는 육 여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나는 노량진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혼자서 몇번이고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자.”
야무진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