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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출어차(彼出於此)
저(彼)라는 개념은 이(此)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는 뜻으로, 개념이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생겨남을 이르는 말이다.
彼 : 저 피(彳/5)
出 : 날 출(凵/3)
於 : 어조사 어(方/4)
此 : 이 차(止/2)
출전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이 성어는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초(楚)나라 현인 남곽자기(南郭子綦)와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에서 비롯된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지극한 도(道)는 무엇에 가리어져 참과 거짓이 있으며, 말은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가 이는가?
道惡乎隱而有真偽.
言惡乎隱而有是非.
도가 어디에 간들 없으며, 말도 어디인들 받아들여지지 않으랴!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그러나 도는 작은 성공(분별 지식)에 가리워졌고, 말은 화려함에 가리어져 있는 것이다.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그래서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시비가 일어, 서로 그르다는 것은 옳다고 하고, 옳다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그르다고 할 양이면, 본연의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만 못할 것이다.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모든 사물에는 저것 아닌 것도 없으며,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저편에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보면 안다.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도 또한 저것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 있느니, 이는 곧 저것과 이것은 잇달아 생긴다는 뜻이다.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그러나 잇달아 생기자 잇달아 죽고, 잇달아 죽자 잇달아 생기며, 옳음이 있자 옳지 않음이 있고, 옳지 않음이 있자 곧 옳음이 있으며, 옳음은 그래서 옳다가 그래서 그르고, 그래서 그르다가 그래서 옳게 되는 것이다.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그래서 성인(聖人)은 이런 고리 안을 떠나 순수한 하늘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이것이 곧 저것이요, 저것이 곧 이것이다.
是亦彼也, 彼亦是也.
저것은 저것대로 하나의 시비가 되며, 이것은 이것대로 또 하나의 시비가 된다.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저것과 이것을 갈라 세울 수 없는 그곳을 도의 지도리(樞)라 한다.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지도리라야만 비로서 그 고리의 한복판에서 무궁에 응하는 것이다.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옳은 것도 하나의 무궁이요, 그른 것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기 때문에 본연의 밝음에 비춰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莊子/齊物論)
莊子 內篇 第2篇 齊物論 第1章
道는 '一'이며 또 無로서 인간의 知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09. 모든 사물은 상대성을 지닌다.
절대적인 경지에서 보면 옳음(是)도 무궁(無窮)한 변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름(非)도 무궁한 변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밝은 지혜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이다.
物無非彼(물무비피), 物無非是(물무비시).
모든 존재[物]는 저것[彼]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自彼則不見(자피즉불견), 自知則知之(자지즉지지).
저것(彼)의 입장에서는 저것(彼)이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저것(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故曰(고왈) : 彼出於是(피출어시), 是亦因彼(시역인피).
그래서 '저것(彼)은 이것(是)에서 나오고, 이것(是) 또한 저것(彼)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彼是(피시), 方生之說也(방생지설야).
이것이 저것(彼)과 이것(是)이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雖然(수연),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
비록 그렇지만 나란히 생(生)하고 나란히 사(死)하고, 나란히 사(死)하고 나란히 생(生)하고,
方可方不可(방가방불가), 方不可方可(방불가방가).
나란히 옳고 나란히 옳지 않으며, 나란히 옳지 않고 나란히 옳으며,
因是因非(인시인비), 因非因是(인비인시)
옳음(是)에 비롯되어 그릇됨(非)에 비롯되며, 그릇됨(非)에 비롯되어 옳음(是)에 비롯된다는 주장(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
(注)
○ 物無非彼(물무비피) 物無非是(물무비시) : 모든 사물은 저것[彼]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지금 나를 이것[是]이라 부르고 그를 저것[彼]이라 할 때, 그를 저것(彼)이라 부르는 나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저것[彼]이므로 모든 존재는 이것[是]이기도 하고 저것[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물(존재)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결국 모든 존재는 저것인 동시에 이것이다. 곧 모든 존재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고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저것으로 지칭할 수 있기 때문에 彼此(彼是)의 구분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自彼則不見(자피즉불견) : 저것(彼)의 입장에서 보면 저것(彼)이 보이지 않음. 곧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하지 않는 한 상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저것(彼)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 自知則知之(자지즉지지) : 스스로 알게 되면 그것을 알게 됨. 곧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저것(彼)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彼出於是(피출어시) 是亦因彼(시역인피) : 저것(彼)은 이것(是)에서 나오고 이것(是) 또한 저것(彼)에 따름. 彼와 是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구분은 상대적인 것임을 밝힌 명제이다.
○ 彼是方生之說也(피시방생지설야) : 저것(彼)과 이것(是)이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 논리학자(論理學者) 혜시(惠施)의 주장으로 저것(彼)과 이것(是)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기준에 따라 때로 저것(彼)이 이것(是)으로 되기도 하고 이것(是)이 저것(彼)로 되기도 하므로 저것(彼)과 이것(是)은 상즉적(相卽的)이며 상호규정적(相互規定的)으로 성립하는 상대적(相對的) 개념(槪念)이라는 주장이다.
○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 : 나란히 생기고 나란히 소멸되며, 나란히 소멸되고 나란히 생김. 이것(是)이 생기는 순간에 저것(彼)이 생기고 저것(彼)이 생기는 순간에 이것(是)이 생기므로 두 개념은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이다.
○ 方可方不可(방가방불가) 方不可方可(방불가방가) : 나란히 옳고 나란히 옳지 않으며 나란히 옳지 않고 나란히 옳음. 위의 ‘方生方死 方死方生’과 같은 내용이다.
○ 因是因非(인시인비) 因非因是(인비인시) : 옳음(是)에 따르고 그릇됨(非)에 따르며, 그릇됨(非)에 따르고 옳음(是)에 따름이다. 상호의존적으로 시비(是非)가 생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뒤의 '聖人不由'와 연결시켜 이 문장의 맥락을 따져보면 혜시(惠施)의 이와 같은 명제[彼是方生之說]를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성에 대한 지적만으로 그쳤기 때문에 진리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장자(莊子)가 주장하는 만물일체(萬物一體)는 시(是)와 비(非)를 둘 다 잊은 망언망지(忘言忘知)의 경지에서 도(道)와 노니는 것[遊]을 말하는데 비해 혜시(惠施)는 어디까지나 언지(言知)를 사용하는 논리적(論理的) 분석에 시종하고 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天下〉편에 보이는 혜시(惠施)의 ‘歷物十事(역물십사)’ 이하의 문장도 참조할 것.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
장자의 제물론은 만물에 대한 규정에 대해 쓴 장이다. 물론 만물이란 것에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도 포함된 것이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정의내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들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어떤 것들에 대한 정의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내리는 사물에 대한 판단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라는 끊임없는 질문의 반복이 제물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면서 제물론에서 장자는 소요유에서 보여준 생명에 대한 외경을 계속 이어간다. '하늘의 피리소리에 대해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자기가 말했다. '무릇 만물에 숨을 불어 넣어도 같지 않고 그 스스로가 자기가 되게 하는 무엇이 있어 각기 스스로가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리를 나게 하는 게 누구일까?'
제물론의 서론격이라 할 수 있는 남곽자기와 그의 제자인 안성자유와의 대화인데 도의 입장을 이야기하면서도 만물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 작용이 투과되는 사물이지만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저마다의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독립된 사물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을 수 도 없고 간섭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뒤에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에 일관되고 있는데 수많은 변설가의 이야기나 유가나 묵가의 말다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의 상대성을 이야기하면서 성인은 상대적인 것에 의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연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제물론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화가 세 가지가 나온다.
첫 번째가 조삼모사(朝三暮四)란 사자성어가 탄생된 우화이다. 같은 양의 먹이를 아침에 세 개주고 저녁에는 네 개 주나 저녁에 세 개주고 아침에 네 개주나 하루 먹는 양은 같은데 이 방법이 좋나 저 방법이 좋나 다투고 있는 원숭이들에 견백론이나 백마비마론 등을 말하고 있는 변설가들을 빗대고 있다.
두 번째는 그림자들끼리의 대화인데 조금 옅은 그림자가 짙은 그림자에게 묻고 답하는 우화이다. 그림자는 어떤 사물이 태양이나 달 또는 촛불에 비춰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물의 형체와는 닮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옅은 그림자와 짙은 그림자와의 대화니 사물은 하나일 것이고 사물을 비추는 빛은 하나일 수도 또는 두 개나 세 개가 될 수 있겠다.
빛이 여러개인 경우는 야간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축구장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뛰는 선수는 한명이지만 그 선수에게서 나온 그림자는 보통 서너개가 넘는다. 선수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그림자들은 짙고 여린 그들의 옷을 갈아 입는다.
이 장에서는 빛이 한 개인 경우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짙은 부분과 옅은 부분으로 나뉘어 진 그림자들의 대화로 볼 수 있다. 짙은 부분은 물체와 가깝고 옅은 부분은 실체보다도 더 멀다.
그러니 옅은 그림자는 실체와 더 멀리 있어 오직 짙은 그림자를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옅은 그림자는 짙은 그림자 너머에 있는 물체가 존재하는 지조차 모른다.
옅은 그림자가 짙은 그림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아까는 걷더니 지금은 멎고, 아까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서 있소. 어째서 일정한 절도가 없는거요?' 자신도 똑같이 그러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을 남에게 묻고 있다.
다른 그림자가 대답한다. '나는 기대고 있는 것을 따라서 그러는 걸까요? 그러면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또 달리 그가 기대고 있는 것에 따라 그럴테죠.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이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따위일까요? 어째서 그런지 알 수 없고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도 알 수 없소.'
도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나 만물은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그 무엇에 비추어 진리나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남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진정한 도리의 가장 끝 부분(그것도 이미 진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의 한 자락을 가지고 내리는 그림자들의 헛된 평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짙은 그림자와 옅은 그림자를 그림자의 중심과 주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체에 비추어진 다른 빛들이 만든 두세개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장자는 제물론의 앞부분에서 비판하고 있는 유가나 묵가 그리고 수많은 변설가들의 이론들이 모두 도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그림자들의 헛된 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제물론이 만물에 대한 장자의 생각이나 도에 대한 생각을 서술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유가나 묵가 또는 변설가들의 이론들이 상대적인 가치로서 상대적인 가치를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서술하면서 '도란 이런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물론의 끝에서 우화라는 형식을 빌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 번째 우화로는 장자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유명한 우화이다. 사실 이 우화가 제물론의 마지막이라는 것도 의미심장 하다.
금강경이나 도덕경의 마지막을 보면,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도의 요체라는 것이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말을 하면서 도를 설명했다. 사실 설명이라고 해도 유가나 묵가 또는 변설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 짬짬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다였지만 이것도 자신이 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우화를 빌어 나타내고 있다.
장자의 글쓰기가 읽기에 재미있는 것은 단도직입으로 말을 하다가도 우화 등으로 스리슬쩍 눙치고 넘어가는 글줄 속에 숨어있는 해학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꿈속에 나비나 현실속의 장주는 분명히 구별이 있지만 어느 것이 실체인지 모른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하고 있는 장주가 말을 한 것인지 아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챙겨 먹으라는 말을 은근슬쩍 하면서도 장주는 '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장자가 나비일 수 있고 나비가 장자일 수 있는 이것을 물화라고 한다는 것에서 사물의 차별이 없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물론을 말하면서 소요유에서 말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썼는데 바로 이 구절이 생명에 대한 외경을 한마디로 나타낸 말이다.
내가 나비도 될 수 있고 나비도 내가 될 수 있다를 넘어서 나비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서 어찌 만물의 존재감이 그 전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형태에서 차이는 있지만 가치에서 차별이 없는 세계를 보는 장자의 사고가 단 몇 줄로 멋지게 표현된 우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물화라고 한다.
齊物論 / 莊子
南郭子綦隱机而坐, 仰天而噓. 荅言似喪其耦.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육신이 해체되어 흡사 몸이라는 짝을 버린 듯했다.
顔成子游立侍乎前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 非昔之隱机者也.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육신을 마른 장작 같게 하고 마음을 참으로 불꺼진 재와 같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계신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子綦曰: 偃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汝聞人籟而未聞地籟. 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언아, 어리석구나, 그런 질문을 하다니. 지금 나는 나를 잊었는데 자네가 이를 알겠는가! 자네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게야. 설령 땅의 피리소리는 들었더라도 하늘이 내는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네.'
子游曰: 敢問其方.
자유가 말했다. '부디 그 도리를 말씀해 주십시오.'
子綦曰: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窺怒呺.
자기는 대답했다.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게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단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린다.
而獨不聞之翏翏乎. 山陵之畏佳, 大木百圍之竅穴, 似鼻似口似耳似枅, 似圈似臼似洼者, 似汚者激者謞者叱者.
너는 저 윙윙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겠지. 산림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앝은 웅덩이 같고, 거친 물소리 같고, 씽씽 화살나는 소리 나직이 나무라는 소리 같다.
吸者叫者, 譹者宎者咬者, 前者唱于而隨者唱喁.
흐흑 들이키는 소리, 외치는 듯한 소리, 울부짖는 듯한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앞바람이 가볍게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바람은 보다 더 무거운 소리를낸다네.
冷風則小知, 飄風則大和, 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바람이 살짝 불면 구멍들은 가볍게 응답하고, 바람이 사납게 불면 온갖 구멍들은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구멍들은 고요해져, 혼자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가?'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자유가 말했다. '그렇다면 땅의 피리란 땅위에 있는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란 대나무의 그것이군요. 그런데 하늘의 피리란 어떤 것입니까?'
子綦曰: 夫天籟者.
자기가 대답했다. '하늘의 피리란 사람의 말이라네.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사람마다 하는 말이 각각 다르지만,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네.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모두 스스로 얻은 소리인데 말소리를 내는 건 그 누구인가.
大知閑閑, 小知閒閒.
커다란 지혜는 아주 한가롭지만, 자그마한 지식은 몹시 바쁘다.
大言炎炎, 小言詹詹.
훌륭한 말은 담백하고 맑으나, 하찮은 말은 따지고 헤아린다.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與接爲搆, 日以心鬪.
잠들어서도 쉴새없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활동을 시작해, 사물과 접촉하면서 나날이 서로 다툰다.
縵者, 窖者, 密者.
싸우는 사람 중에는 우유부단한 사람, 음흉한 사람, 치밀한 사람등 갖가지이다.
小恐惴惴, 大恐縵縵.
조금 두려운 일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크게 무서운 일에는 두렵지 않은 체한다.
其發若機栝, 其司是非之謂也.
그 말투는 화살을 쏘는 것같이 모질어, 시비를 판결하는 재판관이라도 된 것 같다.
其留如詛盟, 其守勝之謂也.
무언가를 감추는 경우 마치 목숨이라도 되는 듯 마음 속에 꼭 품어 어떻게 해서든지 고집으로 이기려 한다.
其殺若秋冬, 以言其日消也.
따라서 가을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과도 같이, 그는 나날이 소진해 간다.
其溺之所爲之, 不可使復之也,
이런 인물은 자기 주장에 푹 빠져 다시는 참됨을 회복할 수 없으며,
其厭也緘, 以言其老洫也.
욕심에 억눌려 무언가에 꽉꽉 막히는데 늙을수록 더해진다.
近死之心, 莫使復陽也.
이 같은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喜怒哀樂.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慮嘆變慹.
또한 걱정과 한탄을 하기고 하고 변덕을 부리거나 집착하기도 한다.
姚佚啓態.
또 재앙을 당하기도하고 교만을 부리기도 하며 솔직하기도 하고 꾸미기도 한다.
樂出虛, 蒸成菌.
진정한 기쁨은 허(虛)에서 나오지만, 곰팡이는 습한 곳에서 생긴다.
日夜相代乎前, 而莫知其所萌.
아침과 저녁이 바뀌어도,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
已乎. 已乎,
그만두자. 이제 그만두자.
旦暮得此.
아침과 저녁도 이를 얻어 생긴 것이다.
其所由以生乎, 非彼無我, 非我無所取.
저것이 없으면 내 몸이 있을 수 없고, 육신이 없으면 저것이 가탁할 곳이 없다.
是亦近矣. 而不知所爲使.
이것을 얻으면 도에 가까우리라. 그렇지만 본래 그러하므로 따로 그 무엇이 부리는지는 모르겠다.
若有眞宰, 而特不得其眹;
참된 자기가 있기는 있어도 다만 그 조짐은 알수가 없고,
可行已信, 而不見其形.
참된 자기의 움직임은 일상에 있어 또렸하나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有情而無形.
참된 자기는 실재하지만 형체가 없을 뿐이다.
百骸九竅六藏, 賅而存焉, 吾誰與爲親.
100개가 넘는 뼈, 9개의 구멍, 6가지 장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을 나로 삼을까?
汝皆說之乎. 其有私焉.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자기로 삼겠는가? 그러면 자기가 여럿이 되므로 하나인 몸에 여러 사람이 있게 된다.
如是皆有爲臣妾乎.
其臣妾不足以相治乎.
이와 같이 주인은 없고 신하와 첩만 있는 것일까? 신하와 첩은 다투기만 할 뿐 서로 다스릴 수 없다.
其遞相爲君臣乎. 其有眞君存焉.
교대로 왕이 되기도 하고 신하가 되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참된 왕은 존재한다.
如求得其情與不得, 無益損乎其眞.
구했다고 늘지도 않고 구하지 못했다고 줄지도않은 채 참된 주인은 의연히 존재한다.
一受其成形, 不化以待盡.
일단 몸을 받았으므로 잠시라도 이 육신에서 떠날 수 없으니 다 할 날을 기다리자.
與物相刃相靡, 其行進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사물과 서로 다투어 삶이 말을 달리듯 순식간에 지나가도, 싸움을 그치지 않으므로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평생토록 애를 쓰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도 돌아갈 안식처가 없으므로 애달프지 아니한가!
人謂之不死, 奚益.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아직 살아 있다고 좋아하지만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겉 모습이 늙어감에 따라 그 마음도 함께 찌들어 가므로 매우 가엾지 아니한가.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인간의 삶이란 이다지도 무지 몽매한 것일까!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아니면 나만 혼자 어리석고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은 것일까!
夫隨其成心而死之, 誰獨且无師乎.
본래 지니고 있는 참마음을 좇아 스승으로 섬긴다면 그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어찌 육신이 거짓 자기임을 알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얻은 사람에게만 스승이 있겠는가!
愚者與有焉.
어리석은 자에게도 똑같이 있는 법이다.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자기 참마음을 얻지 못하고 시비 다툼을 벌이면, 이는 오늘 월나라로 떠나면서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是以無有爲有.
이것은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을 있다고 억지로우기는 처사이다.
無有爲有, 雖有神禹, 且不能知.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는 자는, 성왕인 우왕이라 하더라도 어찌 알아줄 수 있겠는가!
吾獨且奈何哉.
하물며 내가 어찌 알아 줄 수 있겠는가!
夫言非吹也.
무릇 말이란 무심하게 불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言者有言, 其所言者特未定也.
말이란 기심(機心)에서 나오므로 말한 내용은아직 옳은지 그른지 정해져 있지 않다.
果有言邪, 其未嘗有言邪.
과연 말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其以爲異於鷇音.
사람의 말은 새끼 새의 울음 소리와는 다르다.
亦有辯乎, 其無辯乎.
그렇다면 과연 시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도는 왜 가리어져 참과 거짓이 발생하게 되고, 참된 말은 어디에 가리어져 시비 다툼이 생기는것일까?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도는 어디 가서 오지 않고, 참된 말은 어디에 있기에 시비 논란이 있는 것일까?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도는 자그마한 분별 지식에 가려지고, 참된 말은 허황된 말에 가려진다.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따라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이 벌어져 상대가 주장하는 바를 비판하고 한쪽이 거부하는 것을 굳이 긍정한다.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상대가 틀리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한쪽이 옳다고 하는 것을 틀리다고 함은, 대도에 밝음만 같지 못하다.
物无非彼, 物无非是.
사물을 저것 아닌 것이 없으며, 옳지 않은 것이 없다.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저것으로 부터 보면 자기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면 모두를 알게 된다.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 것이다.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이 있는 것이다.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옳음이 있으므로 옳지 않음이 있다. 옳음에 연유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을 근거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따라서 성인은 상대적인 시시비비를 떠나, 홀로 도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 말로 크나큰 긍정이다.
是亦彼也, 彼亦是也.
이것이 또한 저것이며, 저것 또한 이것이다.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저것에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저것과 이것의 대립이 그치는 것을 도추라고 일컫는다.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도추라야 비로서 환중을 얻어 무궁한 변화를 제어할 수 있다.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옳음도 하나의 무궁한 변화이고, 틀림도 또한 하나의 무궁한 움직임이다.
故曰莫若以明.
그러므로 '대도에 밝음만 같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저 말을 가지고 나의 말이 저 말이 아니라고 가리키는 것은, 나의 말을 가지고 저 말이 나의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고, 만물도 하나의 말일 따름이다.
可乎可, 不可乎不可.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면 나도 옳고, 다른 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면 나도 옳지 않은 것이다.
道行之而成. 惡乎可.
이 모두를 도에 맡긴 채 행하는 자는 현재 이루어진 그대로일 뿐 시비의 분별이 필요하지 않다. 어째서 그렇게 될까?
可於可, 惡乎不可. 不可於不可.
좋은 것에는 본래 좋다고 할 것이 갖추어져 있고,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가? 좋지 않은 것은 원래 좋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만물은 참으로 본래 그런 바가 있으며, 사물마다 원래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無物不然, 無物不可.
어떤 사물이건 본래그런 바가 없지 않으며, 어느 것이라도 옳지 않음이 없는 것은 없다.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恑憰怪, 道通爲一.
따라서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예를 들면 커다란 대들보와 자그마한 집기둥, 문둥이와 서시라는 미인, 그리고 허풍쟁이나 사기꾼이나 궤변가 혹은 괴이한 것을 말하는 사람, 모두 도(道) 가운데에서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
其分也成也, 其成也毁也.
파괴는 곧 완성이며, 완성은 곧 파괴이다.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하지만 만물은 본래 완성도 파괴도 없이 다 함께 하나이다.
唯達者知通爲一, 爲是不用而寓諸庸.
오직 도에 능통한 사람이라야 만물과 하나됨을 알아,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일반 사람에게맡겨 둔다.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그대로 맡길 뿐으로 이미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는 것을 도(道)라고 일컫는다.
努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하나가 되려 해도, 끝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
謂之朝三. 何謂朝三.
이를 '조삼'이라 일컫는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원숭이 사육사가 상수리를 원숭이에게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
衆狙皆怒, 曰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벌컥 화를 냈으므로 사육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 하니, 원숭이들이 한결같이 기뻐했다.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명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기쁨과 노여움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그대로 맡겨야 할 따름인 것이다.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釣, 是之謂兩行.
따라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의 평등'에서 쉬게 하는데 이를 '양행'이라 일컫는다.
古之人, 其知有所至矣.
옛사람은 지혜가 지극했다.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盡矣. 不可以加矣.
무엇을 지극하다고 하는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자리이므로 지극하고 극진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는 경지이다.
其次, 以爲有物矣, 而未始有封也.
그 다음은 사물은 있으나 구분하지 않는 경지이다.
其次, 以爲有封焉, 而未始有是非也.
그 다음은 사물이 구분은 되지만 아직 시시비비가 없는 경계이다.
是非之彰也, 道之所以虧也; 道之所以虧, 愛之所以成.
그러나 시비 분별이 횡행함에 도가 가리어졌고, 도가 가려지자 애욕이 발생하게 되었다.
果且有成與虧乎哉.
果且無成與虧乎哉.
그런데 완성과 파괴가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완성과 파괴가 과연 없는 것일까?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완성과 파괴가 있는 것은 옛날 소씨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완성과 파괴가 없는 것은 소씨의 거문고 연주 이전이기 때문이다.
昭文之鼓琴也, 師曠之枝策也, 惠子之據梧也, 三子之知, 幾乎皆其盛者也.
소씨가 거문고를 탄 행위, 사광이 북채로 박자를짚었던 일, 혜자가 책상에 기댄 채 변론한 행위, 이 세 사람의 재주는 모두가 그 극치에 다다랐다.
故載之末年, 唯其好之也; 以異於彼, 其好之也, 欲以明之.
따라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종사했으나, 이 세 사람의 좋아하는 바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 자신들이 즐기는 바로써 사람들을 계몽하려 했다.
彼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
혜자의 경우 자신도 진리에 밝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했으므로, 견백론이란 어리석은궤변으로 시종한 것이다.
而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若是而可謂成乎.
소씨의 경우도 아들로서 아버지의 손재주만 흉내냈을 뿐 평생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다. 이를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雖我無成, 亦可謂成矣. 若是而不可謂成乎.
나에게 이룬 것이 없어도 나 역시 성공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物與我無成也.
그렇다면 만물과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으리라.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따라서 자신의 빛을 감추는 일은, 바로 성인이 도모하는 바이다.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以明.
성인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대신 세상 사람들의 소견에 맡겨 둔다. 이를 본래의 밝음에 따른다고 일컫는다.
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가령 여기에 한 변론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인과 한 분류인가? 아니면 다른 분류에 속하는가?
類與不類, 相與爲類, 則與彼无以異矣.
같은 부류이든 아니든간에 그가 성인의 마음에 부합하면 그는 성인과 아무런차이가 없는 것이다.
雖然, 請嘗言之.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한번 말해 보기로 하자.
有始也者, 有未始有始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처음이 있고, 처음이 아직 태동하지 않은 때가 있고, 처음이 아지기 태동하지 않은 때마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有有也者, 有无也者, 有未始有无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않음도 태동되지 않음이 있다.
俄而有无矣.
그런데 홀연히 있음과 없음이 생긴다.
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하겠다.
今我則已有謂矣, 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 其果无謂乎.
지금 나는 이미 말을 하였으나 나의 말이 과연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모르겠다.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大山爲小.
천하에 가을날 짐승털의 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도 털 끝보다 작다.
莫壽於殤子, 而彭祖爲夭.
일찍 죽은 갓난아이보다 장수한 이는 없고,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천지도 나와 함께 생긴 것이고, 만물도 나와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이미 하나가 되었는데, 이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旣已謂之一矣, 且得无言乎.
이미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했을진대,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이는 또한 말이 아니겠는가.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하나의 말이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自此以往, 巧曆不能得, 而況其凡乎.
이렇게 나아가면 유능한 계산기라도 헤아릴 수 없거늘, 어찌 일반 사람이 셈 할 수 있겠는가!
故自无適有以至於三, 而況自有適有乎.
따라서 無에서 有로 나아가는 셋이 되는데, 有에서 有로 진행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无適焉, 因是已.
상대적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맡길 따름이다.
夫道未始有封, 言未始有常.
무릇 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말에는 정해진 내용이 없는 것이다.
爲是而有畛也.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다툼이 생기는 법이다.
請言其畛.
한 번 대해 논쟁에 이야기해 보자.
有左有右有倫有義,
有分有辯有競有爭.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있고, 倫이 있으면 義가 있고, 분별이 있으면 변론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경쟁이 있다.
此之謂八德.
이를 '팔덕'이라 일컫는다.
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
육합 바깥을 성인은 그대로 놓아둘 뿐 말하지 않고, 육합 안에 대해서도 대강만 말할 뿐 자세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春秋經世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춘추'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선왕의 뜻이었으나, 성인은 이에 대해 명분과 품절만 밝힐 뿐 시비 곡절을 따지지는 않는다.
故分也者, 有不分也; 辯也者, 有不辯也.
그러므로 나눌 경우 나눌 수 없는게 있고, 분별하더라도 분별할 수 없는게 있다.
曰何也, 聖人懷之, 衆人辯之以相示也.
왜 그럴까? 성인은 만유를 품어 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분별함으로써 자기 소견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故曰辯也者, 有不見也.
따라서 '변론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夫大道不稱, 大辯不言, 大仁不仁, 大廉不嗛, 大勇不忮.
무릇 大道는 헤아릴 수 없고, 참된 변론은 말하지 않고, 지극한 인은 어질지 않고, 참다운 청렴은 가득 차지 않고, 진정한 용기는 해를 입히지 않는다.
道昭而不道, 言辯而不及, 仁常而不周, 廉淸而不信, 勇忮而不成.
도를 말로 분명하게 드러내면 도가 아니고, 말이 시비 다툼에 쓰이면 도에 미치지 못하게 되며, 仁이 어딘가에 고착되면 아무것도 아루지 못하고, 청렴해 맑기만 하면 미덥지 못하고, 남을 해치는 용기는 참되지 못하다.
五者无棄而幾向方矣.
이 다섯 가지는 원래 참된 實德이었으나 점차 한쪽에 치우쳐 모나게 되었다.
故知止其所不知, 至矣.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데에 그칠 줄 알면 지극한 것이다.
孰知不言之辯, 不道之道. 若有能知, 此之謂天府.
어느 누가 말없는 변론과 도가 아닌 도를 아는가. 만일 이를 알면 '천부'라 이름하리라.
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
아무리 물을 거기에 퍼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마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而不知其所由來, 此之謂葆光.
그러나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보광'이라 일컫는다.
故昔者堯問於舜曰: 我欲伐宗膾胥敖. 南面而不釋然, 其故何也.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다. '나는 종, 회, 서오 세 나라를 정벌하려 하네. 그러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확연하지 않으니 왜 그런 것일까?'
舜曰: 夫三子者, 猶存乎蓬艾之間. 若不釋然何哉. 昔者十日竝出, 萬物皆照. 而況德之進乎日者乎.
순이 말했다. '세 나라는 아직 쑥풀이 무성한 미개한 부족 국가입니다.마음이 꺼림칙한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옛적에 10개의 태양이 일시에 만물을 샅샅이 비춘 일이 있습니다. 하물며 마음의 덕이 태양보다 밝다면 무슨 꺼리낌이 있겠습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만물이 하나임을 아십니까?'
曰吾惡乎知之.
이르기를, '내가 어찌 알겠나.'
子知子之所不知邪.
'선생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曰吾惡乎知之.
이르기를, '내 어찌 알겠는가.'
然則物无知邪.
'그렇다면 아는 게 없으십니까?'
曰吾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
이르기를, '어허, 어찌 알겠나.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디 한번 말해 보기로 하지.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안다고 하는 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또한 내가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게 아닌 줄은 어떻게 알겠나!
且吾嘗試問乎汝.
이제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民濕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木處則惴慄恂懼, 猨猴然乎哉.
사람은 나무 위에 있을 경우 벌벌 떨지만 원숭이는 무서워하던가?
三者孰知正處.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民食芻豢, 麋鹿食薦,
蝍蛆甘帶, 鴟鴉嗜鼠.
사람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지.
四者孰知正味.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 것일까?
猨猵狙以爲雌, 麋與鹿交, 鰌與魚游.
원숭이는 편저를 짝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놀지.
毛嬙西施,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모장과 서희는 세상 사람들이 미녀라고 칭송하지만, 그들을 보면 물고기는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결사적으로 달아나지.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미인을 아는 것일까?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
내가 보건대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시비의 길을 어지럽게 주장하는데, 나라고 어찌 그것들을 가려낼 수 있겠나!'
齧缺曰: 子不知利害, 則至人固不知利害乎.
설결이 물었다. '선생님은 이해를 모르시는데 지인은 참으로 이해를 모르는 것입니까?'
王倪曰: 至人神矣. 大澤焚而不能熱, 河漢冱而不能寒.
왕예가 대답했다. '至人은 심묘한 사람이라네. 커다란 연못을 다 태워도 그를 태울 수는 없으며, 황하와 한수를 꽁꽁얼려도 그를 얼릴 수는 없다네.
疾雷破山而不能傷,
飄風振海而不能驚.
사나운 우뢰가 산을 부수고 상하지 않고, 태풍이 파도를 몰아쳐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
若然者, 乘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內.
이런 인물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부리면서 사해(四海) 바깥에서 노닌다네.
死生無變於己, 而況利害之端乎.
생사로도 그를 움직일 수 없거늘, 어찌 이해 따위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瞿鵲子問乎長梧子曰: 吾聞諸夫子, 聖人不從事於務, 不就利, 不違害, 不喜求, 不緣道, 无謂有謂, 有謂无謂, 而遊乎塵垢之外.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공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인은 세상 일을 좇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도 해로움을 피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도를 따르지도 않고, 말은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아 초연히 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夫子以爲孟浪之言, 而我以爲妙道之行. 吾子以爲奚若.
공자는 이를 맹랑한 소리하고 일소에 붙였으나, 저는 묘도를 체득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長梧子曰: 是皇帝之所聽熒也, 而丘也何足以知之.
장오자가 말했다. '이는 황제가 들어도 믿지 않거늘 공구 따위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且汝亦大早計. 見卵而求時夜, 見彈而求鴞炙.
자네도 지나치게 성급하네. 알을 보자마자 새벽 닭소리를 기다리고, 화살을 보자마자 올빼미 구이를 찾는 격이군.
予嘗爲女妄言之, 女以妄聽之奚.
이제 자네에게 헛소리를 할 터이니, 자네도 그리 알고 망녕되게 듣는 게 어떻겠는가.
旁日月, 挾宇宙, 爲其脗合, 置其滑涽, 以隸相尊.
성인은 해와 달과 나란히 하고, 우주를 손바닥에 든 채 두 입술을 합치듯 온갖 변화와 하나가 되고, 혼탁한 속세를 그대로 놓아 버려 노예 상태로 서로 멸시하거나 존대하게 되지.
衆人役役.
모든 사람들이 부림을 당해 외물에 얽매이게 되지.
聖人愚芚, 參萬歲而一成純, 萬物盡然, 而以是相蘊.
성인만이 홀로 어리석고 우둔한 듯해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천연의 천진을 그대로 보전하지만, 만물이 다하도록 사람들은 자기 주장에 집착해 시비 다툼만 늘어 가지.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삶을 좋아함이 미혹한 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이 어려서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감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나?
麗之姬, 艾封人之子也.
여희는 예라는 지방의 관리의 딸이었네.
晉國之始得之也 涕泣沾襟.
진나라에서 강제로 끌고 갈 적에는 그녀는 눈물로 옷깃을 흠뻑 적셨지.
及其至於王所, 與王同筐牀, 食芻豢, 而後悔其泣也.
진나라 왕궁에 이르러 왕과 함께 화려한 생활을 하고 맛있는 고기 요리를 먹게 되자, 그녀는 눈물 흘린 일을 후회했다고 하네.
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살기를 고대했던 것을 나중에 후회할지 내 어찌 알겠나!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꿈속에서 유쾌하게 술을 마신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울게 되고, 꿈 속에서 구슬프게 운 사람은 사냥놀이 갈 일이 생긴다네.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또한 꿈을 이리저리 풀어 보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야 꿈인 줄 알지.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우리네 삶은 이와 같아서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삶이 한바탕 꿈 속인 줄 알게 되지.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牧乎固哉.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하여 짐짓 아는 체하면서, 왕입네, 재상입네 과시하려 들지.
丘也與女, 皆夢也.
予謂女夢, 亦夢也.
참으로 어리석구나, 공자여! 자네도 또한 꿈구고 있는 사람이네. 자네더러 꿈꾼다고 지적하는 나의 말도 또한 꿈 속의 헛소리라네.
是其言也, 其名爲弔詭, 萬世之後而一遇大聖, 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이런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기는 하지만, 오랜 뒤에라도 성인이 한번 출현해 이 말의 의미를 알아 준다면 이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것과 다름없겠네.
旣使我與若辯矣. 若勝我, 我不若勝, 若果是也, 我果非也邪.
내가 자네와 논쟁한다고 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지면, 진정 자네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일까?
我勝若, 若不吾勝, 我果是也, 而果非也邪.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내게 지면, 정녕 나는 옳고 자네는 그른 것일까?
其或是也, 其或非也邪.
其俱是也, 其俱非也邪.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린 것은 아닐까?
我與若不能相知也.
나도 자네도 어떤지 알 수 없네.
則人固受黮闇, 吾誰使正之.
그런데 사람마다 어둠속에 갇혀 있으므로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있겠는가!
使同乎若者正之, 旣與若同矣, 惡能正之.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이미 자네와 같은 생각이므로 어찌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使同乎我者正之, 旣同乎我矣, 惡能正之.
나와 소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볼 경우, 벌써 나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使異乎我與若者正之, 旣異乎我與若矣, 惡能正之.
나와도 자네와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조회하면, 이미 두 사람 모두와 의견이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말할 수 있겠는가!
使同乎我與若者正之, 旣同乎我與若矣, 惡能正之.
나와도 자네와도 입장이 같은 사람에게 조회할 경우,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 而待彼也耶.
그렇다면 나도 자네도 또 어느 누구도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는데, 그 누구를 기다려야만 할까?
化聲之相待, 若其不相待, 和之以天倪, 因之以曼衍, 所以窮年也.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소리에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음과 마찬가지로서, 모든 것을 조화시키고 만연에 모든 것을 맡겨 둠이 천수를 다하는 방법이오.
何謂和之以天倪.
그러면 천연한 대도로 조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曰是不是, 然不然.
대답하기를, '옳다는 주장이 있으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따르고, 그렇다는 입장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생기지.
是若果是也, 則是之異乎不是也, 亦無辯.
만일 옳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다면, 옳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과 다르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네.
然若果然也, 則然之異乎不然也亦無辯.
그렇다는 입장이 실제로 그렇다면, 그렇다는 입장이 그렇지 않다는 입장과 다르다고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네.
忘年忘義, 振於無竟. 故寓諸無竟.
나이도 의리도 잊으면 무궁한 경지로 뻗어나가게 되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이 무한한 경지에 놓아 두는 것이요.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无特操與.
바깥 그림자의 그림자가 안쪽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대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 나는구나. 왜 그리도 지조가 없는 게야!'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蜩翼邪.
안쪽 그림자가 대답했다. '의지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의지하는 것도 기대는게 있어서 그러네. 혹시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어째서 그런 줄 알며 왜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게 장주였다네.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다른 존재일 것이므로 이를 '물화'라고 일컫는다네.'
莊子의 자유인의 삶의 모습
요약
모든 사람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그 어떤 구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가지지 못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혹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착이나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구속한다. 사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버리면 쇠사슬에 얽매인 마음이 풀어지면서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탐욕에 끌려 다닌다.어쩌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감옥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그 안에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莊子의 입장에서 보면 있고 없는 것도 별 의미가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없으며 높고 낮음도 결국엔 모두가 땅위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올려다보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점점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것에 미혹되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으니 그 좋아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오면 참다운 편안함과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다.
莊子는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外物로 인한 成心으로 보아 心齋와 坐忘을 통하여 수행을 하여 성심을 제거하고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본심인 常心으로 돌아가면 대립이나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니 자연적으로 욕망과 집착이 없어지면서 온갖 구속의 쇠사슬에서 벗어난다.
그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공감되면서 자신의 깨달음의 목적이 결국엔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어 혼자 고요함과 평온함에서 자유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莊子가 그렇게 원했던 자유인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떤 구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가지지 못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혹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집착이나 성취욕 등의 사슬에 매여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 사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버리면 쇠사슬에 얽매인 마음이 풀어지면서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탐욕에 끌려 다닌다. 어쩌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감옥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莊子의 입장에서 보면 있고 없는 것도 별 의미가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없으며 높고 낮음도 결국엔 모두가 땅위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올려다보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점점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것에 미혹되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지만 그 좋아 보이는 것의 실상을 깨닫고 분별심을 없애면 진정한 편안함과 고요함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한지를 莊子의 자유사상과 곽암선사의 십우도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무엇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는가?
인간은 어떤 구속을 받고 있을 때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사회제도나 관습 혹은 종교나 혈연관계 등의 외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적인 인간관계나 자신의 문제로 인한 구속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각가지 욕망들로 인하여 받는 구속은 더욱 힘들다.
볼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기에 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고 있으며 도대체 그 마음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다스리기가 어려워 마치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지 이에 대해 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人心排下而進上, 上下囚殺, 淖約柔乎剛彊, 廉劇彫琢, 其熱焦火, 其寒凝冰. 其疾俛仰l之間而再撫四海之外, 其居也淵而靜, 其動也縣而天. 僨驕而不可係者, 其唯人心乎.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쉬워서 누르면 내려가고 일으키면 올라간다. 그 오르고 내림이 마치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해로운 것이다. 부드러워서 강한 것을 유약하게 하고 모난 것을 깍고 그 뜨겁기는 마치 타는 불과 같고 그 차가움은 찬 얼음과 같다. 그 빠르기는 순식간에 사해의 밖을 두 번이나 돌 수 있고 그 거처함은 깊은 못과 같이 고요하다. 그 움직임은 하늘만큼 동 떨어진다. 억세고 오만하여 매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뿐이다.
마음이란 너무도 변화무상하여 예측하기 힘들고 섬세하면서도 상당히 예민하여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그 몸이 늙어감에 따라 마음도 그 같이 늙어간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생애란 본래 이렇듯 어리석은 것일까? 나만 홀로 어리석고 사람들 중에는 역시 어리석지 않는 자들도 있는 것일까? 대체로 자신에게 자연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마음에 따라 이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스승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라고 말했는데 이는 형체가 변화됨에 따라 마음도 그 형체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대체로 개인의 편견에 따라서 기준을 삼는다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준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혼란을 초래하므로 개인의 편견에 의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또한 자기중심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의 본연함을 상실하여 道로부터 이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莊子는 인간의 일상적인 마음의 양상이 대체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때때로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사회까지도 소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며 사람의 마음을 常心과 成心으로 구별하였다.
莊子는 '德充父'에서 本然之心으로 표현되는 常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계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수양함에 있어서 자기의 지혜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그 변함없는 常心을 터득했습니다(常季曰: 彼爲己. 以其知得其心, 以其心得其常心).'
여기서 말하는 常心이란 虛寧하여 일체의 사고나 감각지 등이 들어올 수 없는 마음이며 하늘이 본래부터 부여한 그대로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마음으로 순수하고 전혀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이는 다른 말로 一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본래부터 부여받은 맑고 깨끗한 분별지가 없는 無心의 마음으로 그 어떤 편견이나 오염에 물들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成心은 어떤 마음인가? 成心이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의지작용으로서 주관적 견해 발생의 심리적 근거이며 이 成心에서 是非가 나와 자기주장을 설립하는 각 주체의 상호 대립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현상을 낳는다. 특히 인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는 근본 원인을 外物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집착된 마음이 成心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是非를 통해 상대에게서 찾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成心을 제거하지 않으면 마음은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를 이룰 수 없으며 늘 괴로워한다.
그래서 莊子는 인간 본래의 마음으로 복귀하려면 이 成心을 초월하여 자기중심적인 자의적인 가치판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라고 하였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보다 깊이 성찰하여 성숙한 인격형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成心은 모든 주관적인 是非나 독단적인 태도 및 배타적인 현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으로 자기중심적인 ‘나’라는 관념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비교나 경쟁이 바로 ‘나’와 ‘너’라는 구별이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스스로 자기를 저것이라고 한다면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자기를 이것으로 본다면 알 수가 있다.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생겨나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저것과 이것은 방생의 설이다(物無非彼,物無非是. 自彼則不見,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 彼是方生設也).
사람은 태어나서 살면서 '나'라는 것을 형성하고 '나'라는 것에 의해서 경험속의 사물이나 사건들은 차별되거나 취합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아는 것만을 고집하게 된다. 일상적인 지식 또한 자기중심적인 '나'에 의해서 취합되기에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있고 이러한 분열이 대립과 투쟁을 만들게 되면서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
齊物論에서 "무릇 일정한 成心에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스승이 없는 사람이 있으랴. 어찌 눈앞에 차례로 나타나는 감정을 판별하는 현자라야만 스승을 가지게 된다고 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스승은 있는 법이다. 마음에 성견이 없는데 是非의 판단이 생긴다 함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거기에 도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셈이 된다(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爲有)"라고 말했다.
즉, 인간 모두가 成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항상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서 是非와 분쟁이 생기기 때문에 成心이 眞僞를 가리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결국 인간사회의 모든 是非논쟁은 인간이 成心을 표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자기기준에 맞추려 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문제의 근원과 是非를 밖에서 찾으려 하기에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하면 세상 사람은 저를 어리석다고 하고 알고 있으면 오히려 이것저것 제 몸을 근심케 합니다. 또 어질지 않으면 남을 해치게 되고 어질면 오히려 남의 몸을 걱정하다가 내 몸을 염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제가 불의한 짓을 하면 다른 사람을 손상하게 되고 의로우면 오히려 저 자신을 근심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제 괴로움을 康桑楚에게 간청하여 선생님을 찾아와 묻게 된 겁니다.
남영주의 물음에 老子가 대답했다. "당신이 이것저것 번거롭게 신경을 쓰는 것은 마치 부모를 잃었다고 해서 장대를 내걸고 바다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소. 당신은 이미 본성을 잃은 사람이며 걱정으로 마음이 멍청해져 버렸소. 당신이 자기 본래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으니 정말 불쌍하군요(老子曰: 向吾見若眉睫之間, 吾因以得汝矣, 今汝又言而信之. 若規規然若喪父母, 掲竿而求諸海也. 女亡人哉, 惘惘乎. 汝欲反汝情性而无由入, 可憐哉)."
여기에서 남영주의 마음이 곧 成心이다. 그에게 지식이란 알지 못하면 남들이 나를 어리석다 하고 알면 그것이 자신의 몸을 근심케 하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인간의 삶은 道를 얻은 사람의 눈에는 ‘마치 부모를 잃고 장대를 들고 부모를 찾아 바다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成心을 가질 때 발생되는 모든 집착과 탐욕 때문에 마음이 구속되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사실 자유라는 것은 가지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본래 모두의 마음에 다 들어 있는데 成心에 가려져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니 자신의 마음속을 고요히 들여다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莊子는 인간의 마음은 바로 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은 物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이 바로 成心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莊子가 말하는 物의 의미는 매우 다양한 것으로 모든 사건과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 욕망, 감정, 인의예악 등이 다 物에 포함된다.
우선, '무릇 모양과 象과 소리와 색을 갖는 것은 모두 物이다(凡有貌象聲色者,皆物也)'에서는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을 物이라 했고 '언어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物의 조야한 것이요 의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物의 정미한 것이다(可以言論者, 物之粗也; 可以意致者, 物之精也)'와 '지사는 변란으로 지모를 쓸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고 변사는 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으며 찰사는 말다툼해서 상대방에게 이기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 이들을 모두 物에 구속되어 있다(知士無思慮之變則不樂, 辯士無談設之序則不樂, 察士無凌誶之事則不樂, 皆囿於物者也)'에서는 의식하는 대상들도 物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하 사람들은 모두 仁義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린다. 이야말로 仁義로써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한번 말해보자. 하․은․주 삼대 이후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物 때문에 자기의 본성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다(天下莫不奔命於仁義, 是非以仁義易其性與. 故嘗試論之, 自三代以下者, 天下莫不以物易其性矣)'라고 말하면서 도덕적 가치도 物에 해당하며 심지어 사람도 物에 포함시켜 '자연으로부터 명을 받아 오직 요순 임금이 우뚝하고 바르니 만물의 으뜸이다(受命於天,唯堯舜獨也正, 在萬物之首)'라고 말했다.
物의 양에는 끝이 없고 시간은 멈춤이 없으며 각기 사물의 운명도 차례로 변하여 일정함이 없고 처음과 끝은 되풀이 되어 집착이 없소(夫物, 量無窮, 時無止, 分無常, 終始無故)에서는 무한하고 끝이 없는 양을 가진 物은 그 모습과 상태가 일정하지 않으며 시공간적 위치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항상 변화하고 있는 物의 특성으로 '天地의 만물은 각기 모두 종류가 다르고 형체가 다르므로 서로 이어가며 변화하게 마련이다. 처음과 끝이 고리 같아서 그 순서를 알 수 없다(萬物皆種也, 以不同形相禪, 始卒若環, 莫得其倫)'라고 말했다.
그 마음이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物에 통하려 함이다(其心之出, 有物採之)라고 했는데 여기서 겉으로 들어난다는 것은 본래의 위치를 떠나 밖으로 질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이 物의 유혹을 받으면 겉으로 들어나고 그러한 마음은 物을 따라 옮겨가며 是非나 好惡이 생겨난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懸解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건 外物이 얽혀 매듭져 있기 때문이다(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而不能自解者, 物有結之).
이처럼 인간들 대부분은 이러한 物에 묶여서 자신의 주체성도 정체성도 잊고 본연의 순수한 마음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갈망하는 무엇인가에 얽매여 여러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번뇌하는 것이다.
物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형체 없는 것에서 형체를 취하고 그 형체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단 한시도 일정한 법이 없다. 物의 죽음이나 삶은 천지와 함께 영원히 순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物의 정기마저 떠나는 것일까? 物은 정해진 곳도 없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처럼 이 세상에는 온갖 物事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 가운데 단 하나도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 옛날 聖代의 도술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다. 莊周는 이러한 취지를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芴漠無形變化無常. 死與生與天地竝與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莫足以歸. 古之道術有在於此者. 莊周聞其風而設之).
Ⅲ. 어떻게 자유에 이를 것인가?
莊子는 사람들이 物로 인하여 구속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부자유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자기가 될 수 있는가를 갈망하면서 物에 얽힌 마음을 해체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心齋와 坐忘을 말했다. 우선 心齋란 마음 안에 일체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경험을 통하여 집착하였던 관념들을 해체하는 방법이다.
莊子는 '너는 정신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의 기능은 사물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만 기운의 질서는 虛하면서도 일체의 사물에 응한다. 道는 오로지 虛에 모인다. 虛가 ‘心齋’이다(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라고 말했다.
즉,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서 감각적 욕망을 배제하고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분별지를 제거하여 정신을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에 대한 추구이며 그 추구란 부귀, 장수, 명예, 몸의 안락 등으로 자기 아닌 것에 대한 갈망이다. 이런 욕망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만나면 곧 소멸되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강한 욕구로 남아서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자연의 본연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心齋란 이목과 마음을 버리고 기운의 성질이 자득하는 바에 부합하여 虛로써 만물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감각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을 부정하고 기운의 공능을 통하여 세계를 알게 한다.
心齋와 관련된 기운은 무엇보다도 지각기능을 지닌 마음의 부정적인 양상을 무력화하고 이를 폐기하는 해체적 기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운이 虛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응하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虛를 極致로 삼는다'라는 것은 自我가 정기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無知無慾을 체득하면서 고요한 상태로 텅 비게 되며 이렇게 텅 비어있어야 일체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용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心齋이다.
外物이나 사욕, 또는 잘못된 감각이나 분별에 의하여 흐려진 마음의 상태인 成心을 본래의 허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돌려진 인간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소박한 마음을 지닌 선한 존재로 회복되어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고 개체의 생명의 자유를 존중한다.
이러한 인간은 어떤 초월적이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을 찾아 만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자연적 인간이다. 이런 자연적인 인간이 되려면 극단적인 사고․善惡판단, 허구적 自我개념, 불신, 소외, 욕심, 집착, 주저, 조급 등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마음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마음을 찾게 되니 成心이 없어지고 본래의 마음 상태인 常心이 되어 物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얽매였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莊子사상의 최대 목표는 모든 상대성을 뛰어 넘어 절대에 대한 확실성을 얻으려는 자유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사의 잡다한 차별을 잊어 버리고 초월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식을 없애야 하는데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구별과 차이를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상대를 잊고 넘어서는 것으로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이르게 되는 하나의 무차별의 세계로 이끄는데 이를 莊子는 坐忘이라고 했다.
莊子는 '大宗師'에서 말하기를, "顔回가 '저는 나아졌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가 대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顔回가 다시 '저는 仁義를 잊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仲尼가 '좋지만 아직 멀었다'고 한다. 다른 날에 다시 顔回가 仲尼를 보고 '저는 더욱 나아졌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가 '무슨 말이냐?' 하고 물으니 '저는 禮樂을 잊었습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仲尼가 다시 '괜찮으나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날에 顔回가 다시 仲尼를 보고 '저는 전보다 더욱 나아졌습니다' 하니, 仲尼가 묻기를 '무슨 말이냐?'하니, 顔回가 대답하기를 '저는 坐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는 놀라서 '무엇을 坐忘이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四肢와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없애고 形體를 떠나고 지식을 버려서 大通하는 道와 합하는 것을 일러 坐忘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仲尼는 '大道와 한 가지가 되면 好惡의 차별심이 없어지게 되고 변화에 순응하면 하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인이다. 나 너의 뒤를 좇으리라'라고 했다(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禮樂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여기에서 顔回는 먼저 仁義를 잊고 다음에 禮樂을 잊고 최종적으로 感覺이나 思慮의 절대화를 잊어버리는 순서를 거쳤다. 최종적인 坐忘을 통해서 모든 차별적인 是非를 잊고 형체에만 집착하는 것을 벗어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坐忘은 心齋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心齋가 마음을 無知無慾의 고요한 상태로 텅 비게 하여 일체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氣의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라면 坐忘은 氣로 환원된 心齋의 상태로 자기를 잊고 모든 사물도 잊고 결국엔 自他와 內外가 없어지면서 모든 만물과 하나 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心齋가 物我兩忘의 단계 이전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과정으로 비우는 단계라면 坐忘은 깨끗이 비워진 마음이 모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구별은 없지만 각자 개체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를 비교하여 優勢나 美醜 또는 善惡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이를 天地與我並生, 萬物與我爲一 즉, 萬物齊同 혹은 齊物論이라고 한다.
이는 心齋와 坐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이고 미혹된 마음도 이것을 통하여 본성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物에 얽힌 마음을 해체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心齋와 坐忘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心齋와 坐忘의 경지를 어떻게 현실생활에 적용하여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우선, 자기를 비워야 한다.
세상의 온갖 물질적인 탐욕과 집착을 가지고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고 또한 자신의 근원인 고향 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마음속의 모든 것을 비우고 또 비워내야 한다.
그래서 '육신을 버리고 지식을 제거하면 大通과 동화된다(離形去知, 同於大通).' '지식과 기교를 제거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른다(去知與故, 循天之理)', '당신의 육신을 잊어 버리고 껍질을 제거하고 마음을 씻고 욕심을 제거하고서 사람 없는 들녘에서 노닐게(吾願君刳形去皮, 酒心去欲, 而遊於無人之野)'라고 말했다.
육신적인 욕망, 지식, 기교 등을 다 버리면 大通의 세계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사람 없는 들녘을 거닐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또한 莊子는 근원적인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性을 닦아 德에로 되돌아가서 德이 지극하게 되면 태초와 같아진다(反其性情而復其初)', '그의 성정을 돌이켜서 그 시초를 회복한다(繕性於俗學, 以求復其初)라고 말하면서 '저 虛靜, 恬淡하며 寂寞無爲한 것은 만물의 뿌리이다(夫虛靜恬淡寂寞無爲者, 萬物之本也)'라고 했다.
이는 천지만물의 근원세계가 虛靜, 恬淡, 寂寞, 無爲하다고 보았다. 虛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이고 靜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염담은 마치 물맛처럼 어떤 맛도 아닌 담박함이고, 적막은 어떤 소리도 아닌 고요함이고, 무위는 어떤 의도나 작위가 없는 행위이다.
이를 알고서 남면한 것이 요임금이 임금 노릇함이오, 이를 알고서 북면한 것이 순이 신하 노릇한 것이다. 이로써 아래에 처한 것이 현서, 소왕의 道이다. 이로써 물러나서 한가로이 노닐면 산수 간에 숨어사는 선비들이 감탄할 것이오. 이로써 세상에 나아가 백성들을 다스리면 공명을 크게 떨쳐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하면 안으로 성스럽고 움직이면 밖으로 천하를 그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다툴 수 있는 것이다(明此以南鄕,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以此處上, 帝王天子之德也; 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閒游, 則江海山林之士服; 以此進爲而撫世, 則功大名顯而天下一也. 靜而聖, 動而王, 無爲也而尊, 樸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고 말했다.
결국 근원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性情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향을 자기 밖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결국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을 보기 위해선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莊子는 인간은 우주 안에 속해 있는 만물들 가운데 하나의 지극히 미약한 존재자일 뿐이라고 했다.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멩이와 조그마한 나무가 큰산에 있는 것과 같으니 바야흐로 내 존재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아 내었으니 또 무엇을 가지고 자만하겠소. 사해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을 계산해 보건대 돌멩이의 작은 구멍이 큰 못 속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중국이 사해 안에 있는 것을 계산해 보건대 싸래기가 큰 창고 안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物의 수를 만이라고 하나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할 뿐이다. 이들 사람은 만물과 견주어 보건대 털 끌이 말 몸 위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吾在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方存乎見少, 又奚以自多!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不似礨空之在大澤乎. 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大倉乎.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人卒九州,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라고 말하면서 天地에 비해 인간은 작은 조약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天地 사이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백구가 조그마한 틈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공간에서조차 지극히 왜소한 존재라고 했다. 혹은 백구를 준마 혹은 햇빛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구가 틈 사이를 지나가듯이 인생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에게 찾아온 생명을 사양할 수도 없고 그로부터 떠나갈 수도 없다며 '오는 생명을 물리칠 수 없고 가는 생명을 막을 수 없다(生之來不能卻, 其去不能止)고 했다.
이렇게 짧고 순간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얼마나 많은 욕망과 집착으로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 놓는지 모른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바람을 움켜잡으려는 헛된 시도를 그만 두고 잠시 왔다가 가는 세상임을 안다면 붙잡고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게 된다.
셋째, 우주의 변화를 이해하고 生死를 초월해야한다.
만물은 무궁한 시공간 안에서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소멸이 아니라 조화로운 융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生死도 변화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생명도 이와 같다.
莊子는 ‘만물은 하나이다’라는 견지에서 인간의 生死도 하나라고 보았다. 만물이 하나라는 관점에서는 貴과 賤, 善과 惡, 美와 醜의 대립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니 만유를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生死의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莊子는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氣의 합산과 분산으로 보았다. 氣가 모여지면 생명을 가지나 氣가 흩어져 없어지게 되면 이를 곧 죽음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이 죽었을 때 처음에는 슬퍼했지만 生死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는 노래를 부르며 부인을 보내 주었다.
이처럼 인간의 生死는 대립되는 두 가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니 살아 있음에 기쁘기도 하겠지만 죽음도 기꺼이 맞는 마음 자세도 함께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삶의 입장에서 죽음을 보기 때문이다. 상대적 입장에서 보면 죽음은 또 다른 별개의 세계가 되어 두려움의 세계로 다가오지만 만물이 하나라는 자리에 도달하면 삶도 죽음도 다 같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어떤 상대적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다. 옛날 여희가 진왕에게 끌려갈 때 처음에는 두려워 눈물을 흘렸지만 왕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가 즐비한 것을 보자 왜 그때 울었는지 후회했다고 한다.
죽음의 세계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生死의 경계를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와 오고 가는 것에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Ⅳ. 자유의 경지는 어떠한가?
첫째, 평화로운 삶을 즐긴다.
莊子는 “莊子와 혜시가 호수의 징검다리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
莊子가 말했다. '물고기가 한가하게 헤엄치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莊子曰: 儵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
혜시가 말했다. '너는 물고기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惠子曰: 子非魚, 安知魚之樂)?'
莊子가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다.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가(莊子曰: 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
혜시가 말했다.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에 너를 알지 못한다. 너는 물론 물고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惠子曰: 我非子, 固不知子矣; 子固非魚也,子之不知魚之樂,全矣).'
莊子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말해보자. 너는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말인가? 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내게 물은 것이다. 나는 호수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莊子曰: ‘請循其本. 子曰; 汝安知魚樂 云者,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라고 말했다.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라고 한 것은 곧 莊子가 물고기로 화한 것이다. 이 대화에서 莊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천진난만한 본성으로 돌아가서 자유인이 되면 만물과 하나 되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 차별심이 없는 평등심을 갖는다.
莊子는 '사람이 안다는 것을 헤아려보면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사는 시간이란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렇듯 아주 작은 것이면서 턱없이 큰 세계를 규명하려고 하니까 혼란을 일으켜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以其至小求窮其至大之域, 是故迷亂而不能自得也)라고 말했다.
이는 우주 만물은 무궁무진한 반면에 이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을뿐더러 아는 것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是非를 가리고 貴賤을 논하며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키는 것이 莊子가 보기에는 지극히 상대적이라 사물의 입장이 아닌 道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자고 했다.
道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貴賤이 없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를 귀하다 하고 상대방을 천하다고 한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貴賤의 구별은 자기에게 없다. 차별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큰 것에 대해 크다고 한다면 크지 않은 것이 없고 각기 작은 것에 대해 작다고 한다면 작지 않은 것이 없다(以道觀之,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以差觀之, 因其所大而大之, 則萬物莫不大).
(…)
사물의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쓸모 있는 것을 보고 쓸모 있다고 한다면 만물은 쓸모없는 것이 없고 각기 쓸모없는 것을 쓸모없다고 한다면 만물은 쓸모 있는 것이란 없게 된다(以功觀之, 因其所有而有之, 則萬物莫不有, 因其所無而無之, 則萬物莫不無).
(…)
취향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옳은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만물은 옳지 않은 것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만물은 옳은 것이 없게 된다(以趣觀之, 因其所然而然之, 則萬物莫不然; 因其所非而非之, 則萬物莫不非).
이처럼 사물, 세속, 차별, 작용, 취향 등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만물의 貴賤, 大小 등은 모두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나는 귀한 존재이고 너는 천한 존재라는 우월감이나 구별화된 대립적인 관념에서 벗어나니 더 이상 차별심을 갖지 않게 된다.
차별심이 없어지면 모든 사물 혹은 사람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편견 없는 공평한 자세를 취하며 또한 계급적인 신분에서 벗어나 평등한 마음으로 모두를 귀하게 여긴다.
셋째, 평상심을 유지한다.
莊子는 인간이 만물의 본모습과 천지의 이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할 때 많은 오류를 범하고 그러한 인간이 판단하는 是非도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道를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道를 아는 자는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게 되고 이치를 통달한 자는 반드시 임기웅변의 조치에 밝아지고 임 기웅변의 조치에 밝은 자는 사물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일은 없다(知道者必達於理, 達於理者必明於權, 明於權者不以物害己)라고 했다.
곧 인간이 왜 道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다. 道는 시작과 끝이 없지만 사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사물에서의 완성이란 道에서는 변화일 뿐이다.
사물은 때로는 텅 비고 때로는 꽉 차 있어서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기에 그 완성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물은 말이 달리듯 빨리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는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고 시간의 흐름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본 모습이고 자연의 이치이며 道의 참 뜻이다. 이러한 道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사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유지하면서 지극한 德을 갖추게 된다.
지극한 道를 가진 자는 불도 뜨겁게 할 수 없고 물도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추위나 더위도 해를 끼칠 수 없고 금수도 해칠 수 없다(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不能賊).
지극한 德을 지닌 사람은 천지자연과 함께 노닐기 때문에 어떠한 만물도 그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지극한 德을 가진 자는 안전과 위험을 잘 살피고 禍와 福에 대해 마음의 흔들림이 없이 편안해 하고 행동에 있어서 나가고 물러남이 신중하기 때문에 어떤 만물도 그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심지어 짐승들도 해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는 만물과 하나 되어 나 아닌 다른 것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 즐기며 아무런 대립이나 구별없는 고요한 마음상태를 갖는다. 늘 평온한 평상심을 유지하며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生死를 초월하니 삶에 대한 모든 집착과 애욕으로 부터 벗어나 道와 더불어 이 세상을 멋지게 逍遙한다.
그래서 莊子가 말하기를, '眞人은 역경을 거스르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일을 꾀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아니하며 잘 되어도 스스로 득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이는 지식이 道에까지 승화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것이다. 옛날의 眞人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아니하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었다. 음식은 맛있는 것을 찾지 않고 그 숨 쉬는 것이 깊고 고요하였다. 眞人은 발꿈치로 숨을 쉬며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外物에 굴복한 자는 그 목에서 나는 소리가 토해 내는 것 같고 욕심이 많은 자는 그 마음의 작용이 천박하다. 옛날의 眞人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시초를 모르고 그 끝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돌려보낸다. 이런 것을 마음으로써 道를 버리지 않으며 인위로써 하늘을 돕지 않음이라 한다. 이 같은 사람을 眞人이라 한다. 이 같은 사람은 그 마음이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얼굴은 적막하며 이마가 널찍하다. 서늘하기가 가을 같고 아늑하기는 봄과 같다. 기쁨이나 노여움이 사계와 같고 만물과 잘 조화되어 그 끝을 알 수 없다(眞人, 不逆寡, 不雄成, 不謨士. 若然者,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若然者,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 是知之能登假於道者也若此. 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 其嗌言若哇. 其耆欲深者, 其天機淺.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損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若然者, 其心忘, 其容寂, 其顙頯; 淒然似秋, 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而莫知其極)'고 했다.
Ⅴ. 자유를 얻은 후의 삶은 어떠한가?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공평하게 보는 평등사상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귀히 여기며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평상심으로 우주 공간 안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그토록 莊子가 원했던 자유를 얻은 마음 상태라면 莊子는 왜 그렇게도 자유인이 되고 싶었을까?
또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의 모습은 그전까지의 삶과는 다르게 홀로 고귀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逍遙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얽매여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을 껴안으며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며 살아갈 것인가?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여러 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된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곽암선사의 '十牛圖(혹은 尋牛圖)'와 연결하고자 한다.
十牛圖는 본래 도교의 八牛圖에서 유래하였으나 12세기 중엽 宋代의 廓庵선사가 2장면을 추가하여 十牛圖를 그렸다. 우리나라에는 宋나라 때 제작된 곽암본과 보명본이 전해지는데 곽암본이 더 유명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곽암본의 十牛圖를 중심으로 한다.
十牛圖는 소를 잃어버린 아이가 야성으로 돌아가 있던 그 소를 다시 찾아내 길들임으로써 소와 하나 됨을 실현한 다음 다시 저잣거리에 돌아와 중생구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깨달은 자의 참 모습을 열 개의 연속된 그림이다.
이 十牛圖에는 自己라는 본질적인 문제, 즉 自己가 겪어가는 自己의 온갖 모습과 그 사이의 관련성을 각각의 단계에서 自己가 自己에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나타남을 참된 自己를 꿰뚫는 자각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단계적인 自己를 초월해 참된 自己로 통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莊子가 心齋와 坐忘을 통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는 大通이 되어 道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십우도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10장의 그림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보여준다. 그 각각의 단계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尋牛로 소를 찾아나서는 단계로 곧 참된 自己를 찾는 태도이고, 두번째는 見跡으로 소의 자취를 발견하는 단계로 열심히 수행하여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수준이다.
세 번째는 見牛로 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드디어 소를 보게 되는 단계이니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는 見性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得牛로 드디어 찾던 소를 얻었지만 아직도 마음은 갈 길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과정이다. 잃어버린 본래의 참 마음을 찾아서 변화의 새로운 모습으로 가기위한 첫 단계이기도 하다.
다섯째는 牧牛로 소를 길들이고 과정으로 고행과 수행을 통해 제멋대로인 마음을 길들이는 즉, 자신의 본성을 깨끗하게 닦는 과정이고 여섯 번째는 騎牛歸家로 소와 아이가 한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自己에 대한 분열과 갈등은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無碍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때이다.
일곱 번째는 忘牛存人으로 소는 잊고 사람만 존재하는 단계로 마침내 소를 얻었다는 생각마저 없는 상태로 본래의 자기 마음을 찾아 이제 나와 하나가 되었으니 굳이 본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여덟 번째는 人牛俱忘으로 사람도 소도 잊는다. 모든 것이 無 속으로 사라졌다는 텅 빈 원만이 그려져 있는데 이 無는 한계가 없고 모든 편견과 벽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단계로 객관이었던 소가 없으면 주관이었던 나도 없다는 것으로 나와 남이 사라진 진정한 공이다.
아홉 번째는 返本還源으로 모든 것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 것으로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열 번째가 入廛垂手인데 이는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마지막 단계로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여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다시 괴롭고 복잡한 인간세계에 들어가 利他行을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치는 데서 그 깨달음이 증명된 것으로 大悟한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중생교화라는 것이다.
이렇게 각 단계를 살펴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은 처음에는 세속에서 탈출하여 수행의 정상에 올라 진정한 自己를 돌아간 후에 다시 타인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즉 깨달은 후에 열려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무연대비로서 중생을 포용하여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실천행이다.
다시 말해서 道를 세상에 돌리니 남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경지로 결국 깨달음은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남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면서 다시 돌려주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莊子가 그렇게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결국 괴롭고 힘든 세상에 먼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미련한 인간들도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나와 참된 自己를 얻어서 함께 자유를 누리며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莊子의 깨달음을 얻은 자의 眞人의 모습 가운데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
마음으로써 道를 해치지 않고 그저 자연의 道를 따름이라 에서 말하는 자연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自他의 구별도 인간과 자연의 구별도 없는 상태로 모든 사람들은 無爲의 자비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상대적인 관념을 초월하고 大通하였다는 것은 ‘나’와 ‘너’라는 구별이 없어졌으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니 어찌 홀로 유유자적하게 즐기겠는가. 十牛圖의 열 번째 入廛垂手의 단계에 머물면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莊子의 자유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활에 적용하였다.
첫째, 가장 낮은 곳에 거한다.
莊子가 생각하는 삶은 신비롭거나 초월적인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함께 하는 삶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세속에서 물질에 오염되어 같이 뒤엉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道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산 정상에서 사는 신선 같은 삶이 아니라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그 곳에서 모든 차별을 인정하고 초월하여 무차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莊子는 사람과 동떨어져 사는 신선 같은 삶을 원하지 않았으며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것에서는 절대로 낮은 곳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예수님도 탄생 역시 가장 낮은 천한 사람들조차 가기 싫어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인류를 구제하였고 원효대사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 저작거리에서 곱추춤을 추면서 백성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들을 교화하려고 하였다.
비록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지만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 내려가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들을 위해 자신이 몸을 기꺼이 던져주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미래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개개인의 발달과정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싫고 좋음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으니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는다. 莊子에서 인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보기 좋은 것을 취하려고 미운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 차별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莊子는 이러한 편견을 깨고 싶어서 부족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등장시켜 보이는 것에만 집착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보배를 놓치는 사람들을 조롱했듯이 모든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면서 각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이해와 공감을 하면서 기다려준다.
莊子는 인간사회의 모든 논쟁은 인간이 成心을 표준으로 삼고 이 成心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자기기준에 맞추려 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成心이 가로막고 있는 무엇이 있는 한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고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是非를 통해 상대에게서 찾으려 한다.
이러한 是非를 가리는 분별된 마음이 늘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데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是非의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是非를 가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어떤 모양의 사람이든 어떤 형태의 사물이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면서 이해와 공감을 하여 상대방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넷째,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한다.
莊子는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곧 한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인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개성을 자발적으로 나타내면 자기완성을 이루게 되고 그러면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여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莊子는 노나라 임금이 새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새를 기르고( 己養養鳥也), 학의 다리가 길다하여 자르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하여 모두 이어주는(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등의 우화를 말했는데 이는 모두가 자기 기준에 따라서 획일적인 방법을 개인에게 강요했을 때 생기는 비극을 말한 것이다.
즉, 인위적으로 개성을 변화하게 하면 그 자체의 본성이 상실되어 본래의 참된 가치나 참된 의미가 상실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개성과 개인차를 인정하고 각각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아 서로를 존중하여야 한다.
Ⅵ. 마무리 하면서
莊子가 추구하는 인생철학은 모든 大小, 貴賤, 是非, 生死 등의 상대적인 관념들에서 초월한 정신적 절대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면 다 누릴 수 있지만 자의적으로 사물의 가치를 분별하고 그 분별된 가치를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간주하여 그것에 구속되는 삶의 태도로는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분별을 초월하고 주객의 모든 속박과 제한을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天地가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도 나와 하나가 된다고 말했는데 이가 곧 진정한 逍遙이고 진정한 자유이다. 이러한 삶이 莊子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이다. 이러한 삶은 앞에서 이미 열거했듯이 자신의 부정을 통해 나오지만 종국에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것은 매우 험난한 일이지만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 버리고 없애고 다시 합하면서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사람 사이에서 경쟁심을 버리고 명예와 이익도 버리는 삶을 통해 비로소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나무를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잠자는 것과 같은 자유와 여유를 즐길 수 있다면 결코 헛된 삶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깨달은 것을 이룬 것을 느낀 것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도록 다시 되돌려 주여야 하는데 되돌려 주는 방법이 곧 우리들의 삶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모습일 것이다.
▶️ 彼(저 피)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皮(피; 원줄기에서 갈라지는 뜻)로 이루어졌다. 갈라진 길의 뜻으로 원줄기에서 갈라져 가는 데서, 먼 곳의 물건 또는 사람을 가리킨다. ❷회의문자로 彼자는 '저'나 '저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彼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皮(가죽 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皮자는 동물의 생가죽을 벗겨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죽'이나 '겉'이라는 뜻이 있다. 彼자는 본래 '길 바깥쪽으로 걷다'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래서 '겉'이라는 뜻을 가진 皮자에 彳자를 결합해 '길 바깥쪽'이라는 뜻을 표현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彼자는 '저'나 '저쪽', '그'와 같이 바깥쪽이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彼(피)는 ①저 ②그 ③저쪽 ④덮다 ⑤아니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아(我), 이 차(此)이다. 용례로는 저것과 이것을 이르는 말을 피차(彼此), 저쪽이나 저편을 이르는 말을 피변(彼邊),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우리편을 피아(彼我), 저 사람을 이르는 말을 피인(彼人), 저 땅을 이르는 말을 피지(彼地), 저곳을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을 피처(彼處), 소송 행위에서 당사자가 서로 상대편을 이르는 말을 피척(彼隻), 강의 건너편 기슭을 피안(彼岸), 저편과 이편의 사이를 이르는 말을 피차간(彼此間), 그와 나와의 사이를 이르는 말을 피아간(彼我間),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르다는 말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저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는 말을 피시차비(彼是此非), 저것이나 이것이나 마찬가지를 이르는 말을 피차일반(彼此一般), 이것이나 저것이나 또는 이러나 저러나를 이르는 말을 이차이피(以此以彼), 저기의 것을 걷어내어 이곳에 얽어 만듦을 이르는 말을 철피구차(撤彼搆此), 오늘 내일 하며 자꾸 기한을 늦춤을 이르는 말을 차일피일(此日彼日),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 이라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자기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 동시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망담피단(罔談彼短) 등에 쓰인다.
▶️ 出(날 출, 단락 척)은 ❶상형문자로 岀(출)은 통자(통자), 齣(척)의 간자(簡字)이다. 식물의 싹이 땅위로 돋아나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나다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出자는 '나가다'나 '떠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出자는 사람의 발이 입구를 벗어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出자의 갑골문을 보면 움푹 들어간 것 위로 발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발이 입구를 나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出자는 이렇게 출구를 나오는 모습으로 그려져 '나가다'나 '떠나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후에 형태가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본래는 입구에서 발이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래서 出(출, 척)은 ①나다, 태어나다, 낳다 ②나가다 ③떠나다, 헤어지다 ④드러내다, 나타내다 ⑤내놓다 ⑥내쫓다, 추방하다 ⑦돌려보내다 ⑧내어주다, 셈을 치르다 ⑨버리다 ⑩게우다 ⑪샘솟다, 뛰어나다 ⑫이루다 ⑬시집가다 ⑭자손(子孫) ⑮처남 ⑯꽃잎 그리고 ⓐ희곡(戱曲)의 한 단락(段落)(척) ⓑ연극의 한 장면(척)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낳을 산(产), 살 활(活), 날 생(生), 낳을 산(産),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들 입(入), 빠질 몰(沒), 떨어질 락(落), 들일 납(納), 이지러질 결(缺)이다. 용례로는 배가 돛을 달고 떠남으로 단체가 새로 조직되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출범(出帆), 길을 떠남 또는 일을 시작하여 나감을 출발(出發), 무슨 지방이나 학교나 직업 등으로부터 나온 신분을 출신(出身), 자금을 냄이나 밑천을 냄을 출자(出資), 사회적으로 높이 되거나 유명해짐을 출세(出世), 어떤 자리에 참석함을 출석(出席), 근무처로 일하러 나가거나 나옴을 출근(出勤), 나가고 들어감을 출입(出入), 선거에 입후보함을 출마(出馬), 책이나 그림 따위를 인쇄하여 세상에 내보냄을 출판(出版), 집을 떠나 감이나 속세를 떠나서 승려가 됨을 출가(出家), 시험 문제를 내는 것을 출제(出題), 사물이 나온 근거를 출처(出處), 뭇 사람 속에서 뛰어남을 출중(出衆), 같은 사물이 거듭 나오거나 생김을 중출(重出), 국내에서 외국으로 재화를 팔기 위하여 실어 냄을 수출(輸出), 문안이나 의견이나 법안 등을 내어놓음을 제출(提出), 용매를 써서 고체나 액체에서 어떤 물질을 뽑아 내는 일을 추출(抽出), 대부하기 위하여 지출함을 대출(貸出),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금전을 지불하는 일을 지출(支出), 새로 이루어서 생겨 남을 창출(創出), 뿜어 나옴이나 내뿜음을 분출(噴出), 한 목적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기 금품을 냄을 각출(醵出), 감춰지거나 가려져 있는 대상이나 사실을 보이거나 알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을 노출(露出), 불필요한 물질을 밀어서 밖으로 내보냄을 배출(排出), 위험한 상태에서 구하여 냄을 구출(救出),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자신에게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출이반이(出爾反爾), 부모님께 나갈 때는 갈 곳을 아뢰고 들어와서는 얼굴을 보여 드림을 일컫는 말을 출곡반면(出告反面),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평판이나 명성을 일컫는 말을 출람지예(出藍之譽), 봄이면 새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 위에 올라앉는다는 뜻으로 사람의 출세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출곡천교(出谷遷喬), 하늘이 낸 열녀란 뜻으로 절개가 굳은 여인을 이르는 말을 출천열녀(出天烈女), 평범한 부류에서 훨씬 뛰어남을 일컫는 말을 출류발췌(出類拔萃), 들고 나는 것이 비할 데 없이 잦음을 일컫는 말을 출몰무쌍(出沒無雙), 어떤 일이 뜻밖에 일어남을 일컫는 말을 출기불의(出其不意), 출가한 딸은 남이나 마찬가지임을 일컫는 말을 출가외인(出嫁外人), 하늘이 낸 효자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출천지효(出天之孝) 등에 쓰인다.
▶️ 於(어조사 어, 탄식할 오)는 ❶상형문자로 扵(어)의 본자(本字), 于(어)는 간자(簡字)이고, 烏(까마귀 오)의 옛 글자의 약자이다. 까마귀의 모양을 본떠, 음을 빌어 감탄사, 관계, 비교를 나타내는 어조사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於자는 '~에'나 '~에서'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於자는 方(모 방)자와 仒(구결자 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仒자는 한문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 용도로 쓰이는 글자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게다가 於자는 方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於자의 금문을 보면 烏(까마귀 오)자에 仒자가 결합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於자는 본래 까마귀가 내는 소리에 빗대어 '아아'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얼마 쓰이지 않은 채 지금은 다양한 '어조사'로만 쓰이고 있다. 烏자는 해서에서부터 方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於(어)는 (1)한문 투의 문장에서 장소를 표시하는 말이 얹히어에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조사(~에, ~에서) ②기대다, 의지하다 ③따르다 ④가다 ⑤있다, 존재하다 그리고 ⓐ탄식하다(오) ⓑ아아(감탄사)(오) ⓒ까마귀(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까마귀 오(烏)이다. 용례로는 이제야 또는 여기에 있어라는 어시호(於是乎), 마음속 또는 주로 ∼에 꼴로 쓰이는 어심(於心), 벌써나 어느새는 어언(於焉), 가운데가 되는 정도라는 어중(於中), 바둑판에서 배꼽점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어복(於腹), 거의 중간쯤 되는 데를 일컫는 말을 어중간(於中間), 부인이 예장할 때 머리에 얹는 다리로 만든 커다란 머리를 일컫는 말을 어유미(於由味),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으로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말하기에 따라 사뭇 달라짐을 일컫는 말을 어이아이(於異阿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을 일컫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를 일컫는 말을 어사지간(於斯之間), 썩 흡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량족의(於良足矣), 자기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분족의(於分足矣), 온갖 일을 일컫는 말을 어천만사(於千萬事), 그때를 한창으로 함을 이르는 말을 어사위성(於斯爲盛), 그것으로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사족의(於斯足矣),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을 일컫는 말을 어언지간(於焉之間), 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청출어람(靑出於藍),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라는 뜻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들 사이에 끼여 괴로움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간어제초(間於齊楚), 가마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생명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어부중(游於釜中),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은 최고의 선에 도달하여 그 상태를 유지함을 이상으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어지선(止於至善),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논봉의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을 설망어검(舌芒於劍), 백성은 신의가 있을 때에 안정된다는 뜻으로 백성은 신의에 의해서만 잘 다스려진다는 말을 민보어신(民保於信), 먼저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익사한다는 뜻으로 개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경어구독(經於溝瀆) 등에 쓰인다.
▶️ 此(이 차)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그칠 지(止; 그치다, 발자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匕(비; 줄짓다, 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계속 이어진 발자국의 뜻이 전(轉)하여, 지시사(指示詞) '여기'란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此자는 '이곳'이나 '이것'과 같이 가까운 곳을 뜻하는 글자이다. 此자는 止(발 지)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발을 그린 止자가 더해진 此자는 사람과 발을 함께 그린 것이다. 此자는 이렇게 사람과 발을 함께 그려 '사람이 멈추어 있는 곳'이란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此자는 가장 가까운 곳이란 의미에서 '이곳'이나 '여기'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此(이 차)는 ①이 ②이에(발어사)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때마침 주어진 이 기회를 차제(此際), 이 뒤나 이 다음을 차후(此後), 이 번을 차회(此回), 이 밤 또는 이날 밤을 차야(此夜), 이승을 차생(此生), 생사의 세계로 나고 죽고 하는 고통이 있는 이 세상을 차안(此岸), 살아 있는 이 세상을 차승(此乘), 이 시기나 이 계제를 차기(此期), 이것들이나 이들을 차등(此等), 이것도 또한을 차역(此亦), 이 밖이나 이 외를 차외(此外), 이때나 지금을 차시(此時), 이 마음을 차심(此心), 이 사람을 차인(此人), 이 땅이나 이 지방을 차지(此地), 이와 같음이나 이렇게를 여차(如此), 저것과 이것이나 서로를 피차(彼此), 이것과 같이 본을 떠서 함을 방차(倣此), 이곳을 지남을 과차(過此), 이렇게를 약차(若此), 이로부터나 이 뒤를 종차(從此), 오늘 내일 하며 자꾸 기한을 늦춤을 일컫는 말을 차일피일(此日彼日), 이 달 저 달로 자꾸 기한을 미룸을 일컫는 말을 차월피월(此月彼月), 이 시름을 잊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술을 이르는 말을 차망우물(此忘憂物), 이 일로 미루어 다른 일을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추차가지(推此可知), 이 한번으로 담판을 짓는다는 뜻으로 단 한 번의 거사로 흥하거나 망하거나 끝장을 냄을 일컫는 말을 재차일거(在此一擧),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요차불피(樂此不疲),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을 일컫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어떠한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그 구속을 벗어날 수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재차한(不在此限), 이미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같음을 일컫는 말을 여개방차(餘皆倣此), 저것이나 이것이나 마찬가지로 다 같음을 일컫는 말을 피차일반(彼此一般), 이미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지차(事已至此), 이 일로 미루어 다른 일을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추차가지(推此可知)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