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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축일:6월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ST. JUSTIN MARTYR St. Justinus, Mart San Giustino Martire St. Justin Martyr, Philosopher, Apologist, and Martyr Born:c.100 at Nablus, Palestine Died:beheaded in 165 at Rome, Italy Canonized:Pre-Congregation Patronage:apologists, lecturers, orators, philosophers, speakers Giustino = onesto, probo (sign. Intuitivo) = honest, probo (sign. Intuitivo)
철학자이고 순교자인 유스띠노는 2세기초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여 많은 글을 썼다. 그 중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 두 가지만 보존되어 내려온다. [The first apology in defense of the Christians by Saint Justin, martyr] [Dialogue of Saint Justin Martyr with Trypho] 로마에 학원을 세워 여기서 공개 토론을 개최했다. 165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
성 유스띠노와 그 동료들의 순교사기에서 (Cap. 1-5: cf. PG 6, 1566-1571)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도들은 체포된 후 루스티쿠스라는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법정으로 끌려 나아가자 총독 루스티쿠스는 유스띠노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먼저 제신들을 믿고 제왕들에게 순종하라." 그러나 유스띠노는 "우리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발당하고 억압받을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는 무슨 교설을 신봉하느냐?" 하고 루스티쿠스가 물었다. 유스띠노는 대답했다. "저?온갖 교설을 알아보려고 노력한 후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받아 들였습니다. 비록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해도." 그러자 총독은 "이 불쌍한 녀석아, 그게 바로 네가 신봉하고 있는 교설이란 말이냐?"하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스띠노는 이렇게 대답했다."예,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기에 따르고 있습니다."
총독은 물었다. "그건 무슨 가르침인가?" 유스띠노는 대답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태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고, 구원의 전달자와 탁월한 가르침의 스승으로서 사람들 가운데 오시리라고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저는 이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해 올바로 말할 자격이 없는 일개 인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리 말씀 드린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예언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예언의 힘을 필요로 함을 알고 있고 또 그분께서 사람들 가운데 내림하시리라고 예언한 예언자 들은 그 예언의 힘을 하늘에서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루스티쿠스는 "그렇다면 너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냐?" 하고 물었다. 유스띠노는"예,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총독은 유스띠노에게 말했다. "너는 스스로 학식 있고 참된 교설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 내 말을 듣거라. 내가 너를 매로 치고 목을 자른다면 너는 천국에 올라가리라고 믿느냐?" 유스띠노는 대답했다. "제가 만일 귀하가 말하는 것을 견디어 낸다면 주님의 집에서 살게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삶을 살아간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이 되면 천상 상급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총독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천국에 올라갈 때 어떤 합당한 상급을 받으리라고 상상한단 말이냐?" 유스띠노는 서슴없이대답했다. "그건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총독은 말했다.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핵심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은 이것이다. 너희는 함께 앞에 나와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라." 그러나 유스띠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아무도 참된 신앙을 포기하고 거짓 신앙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총독은 고집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자비하게 고문당할 것이다." 유스띠노는 대답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문당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그것이 우리 소원입니다. 이 고통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고 우리가 구세주이신 주님의 준엄하고 공정한 심판대 앞에 나아갈 때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 모든 순교자들도 똑같이 말했다. "귀하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상에게 제사 지내지 않겠습니다." 총독은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이자들은 제신들께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고 또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이자들을 끌어내어 매질을 하고 법에 따라 처형하라." 거룩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늘 형을 집행하던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 곳에서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구세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가톨릭홈에서)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참고자료
유스티노는 ’의로운’이란 뜻이다. 유스티노는 다년간 여러 가지 이방인의 철학을 연구하고 난 뒤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아 있었다. 젊었을 때 그는 플라톤 학파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가 철학보다 생명과 존재라는 크나큰 문제에 더 나은 해답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철학을 연구하였으며 첫 그리스도인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희랍 철학의 가장 훌륭한 요소와 결합시켰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이란 그리스도의 인도자이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육자라는 것이다. 유스티노는 이방인들의 오해와 공격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저술로 옹호한 옹호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호교론 가운데 두 가지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것들은 로마 황제와 원로원에 제출한 것이다.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확고한 자세 때문에 165년에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유스티노는 철학자들의 수호자로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이용하도록 영감을 준다. 특히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인 생활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활용하게 한다. 사람들은 곧잘 오류를 범하는데다가 더 나아가 특히 생명과 존재에 관한 심오한 문제에서는 잘못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을 종교적인 진리에 비추어 교정하고 확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의 박학한 성인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고 진리의 명확한 이해이다. 그리고 행복은 이러한 지식과 이해에 대한 보상이다."(유스티노, ’트리폰과의 대화’ 3장)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유스티노 순교자(100-165년경)라고 불리는 이 위대한 철학자는 사마리아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사람으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코 - 로마인이다. 30세쯤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는 로마에 철학학교를 세우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는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이 가장 유명하고, "트리폰과의 대화" 역시 비슷한 비중을 지니는 저서로써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온다. 유스티노는 크리스찬의 첫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 신학자이기도 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태생인 그의 부모는 그레꼬-로마인이다. 그는 철학, 수사학, 역사 그리고 시를 공부하였고, 또 에페소에서 어느 노인으로부터 무슨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그는 에페소에서 잠시 교사직에 봉직하다가 크리스챤 성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30세쯤 되어, 유스티노는 크리스챤이 되면서부터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이웃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는 이방인 철학자들과의 논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로마로 와서, 철학 학교를 세웠다. 그는 당대 최고의 호교론자였다. 그는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 한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하여 로마 집정관 루스띠쿠스에게 끌려갔다. 이때 그는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하는 요구를 받고 거절하자,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치명하였다.
유스띠노는 크리스챤의 첫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의 주요 저서는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이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반대자에게 보낸 첫 번째 문서이다. 그 다음에는 "트리폰와의 대화"인데, 이책은 트리폰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부산교구홈에서)
제2세기에 출생한 성 유스티노는 초대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성인 중의 한 사람이고, 그의 업적은 성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기록에 의해 비교적 명백하게 알 수가 있다.
그는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70년 로마 황제 디도의 군대가 성지를 침입하던 무렵 예루살렘 같이 폐허가 되어 버렸으나 그 뒤 로마와 그리스의 이민자가 연속 이 땅에 들어와 유다인을 압박했다. 유스티노의 아버지도 이러한 그리스 이민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양친은 다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유스티노도 우상교인 미신을 어려서부터 신봉했으나, 청년 시대부터는 극히 진실한 태도로 연구하기를 좋아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사방의 철학자를 스승으로 삼고 모든 학파의 서적을 읽으며 연구했지만 스토아파, 베리바데트파, 피타고라스파, 플라톤파의 학설도 그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그 결과 그는 회의론(懷疑論)에 빠져 버렸으나, 하루는 명상에 골몰하고자 바닷가를 걷다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너무나 경건한 태도였으므로 그도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서 자신의 사상(思想)의 고민을 밝혔더니, 노인은 매우 동정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약의 예언서를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타일러 주었다. 그 후 유스티노는 그 말씀대로 그리스도교를 연구해 본 결과 전에는 전혀 몰랐던 기이한 마음의 평화를 깨달았으므로, 마침내 30세에 이르러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자기를 평화로 인도해 준 그 노인을 꼭 한 번 만나려고 애썼으나 그 뒤 결국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신자가 된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의 학설을 가장 좋은 학설로 받을 뿐 아니라 아울러 최상의 종교, 최상의 도덕으로써 매일 실천하며 그가 맡은 책임을 완수했으며 자진해 공덕을 닦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타인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 굳은 결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일부러 철학자의 망토를 입고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들어와 사방의 도시를 순회하고 나서 로마에 도착해, 당시의 부호 디모테오가 설립한 대목욕탕의 부근에 학교를 설치하고 일반 철학을 가르침과 동시에 계시(啓示)의 진리인 그리스도교도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어느덧 그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의 단체도 생기고 단원은 그를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스티노가 사제였던가는 확실치 않다.
2세기 중엽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안토니로 피오 황제는 성품이 온순하며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대했으나, 유다인들의 거짓 증언을 믿고 박해를 시작하려고 했으므로 유스티노는 이를 크게 염려해 호교론을 정리하여 황제에게 상서했다. 황제는 이론이 바르고 정연함에 감동되어 체포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음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65년경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유스티노는 신변의 위험도 돌보지 않고 이번에도 호교론을 작성해 바쳤으나, 황제는 진리를 승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에 유스티노와 토론하다가 패배한 글레센스라는 철학자의 모함을 신용하고 유스티노와 그의 제자 수명을 체포하게 되었다.
그 뒤 유스티노와 그의 제자들은 로마 시장 루스티고 앞에 끌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시종일관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으므로 모두 태형에다가 참수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게 된 영광을 기뻐하며 유스티노가 앞장서서 시편을 읆으면서 사형장에까지 이르러 깨끗이 형리의 칼 아래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영광스러운 순교의 월계관을 획득했다. 때는 165년 4월 13일이었다.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해 자아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의 주요 저서는 안토니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이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반대자에게 보낸 첫 번째 문서이다. 그 다음에는 “트리폰과의 대화”인데, 이 책은 트리폰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철학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는 신앙과 철학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일단 심오한 사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신앙을 고집한다면 더 이상 철학적 사유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 유스티노는 철학과 신앙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플라톤 학파를 비롯한 여러 철학과 종교를 섭렵하며 진리를 구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첫 번째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되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오감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면, 우리는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차원에 머물지 말고 반드시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사고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진리의 발견이 결코 우리의 신앙을 파괴할 수 없다는 확신은 진리를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성 유스티노는 “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며 진리에 대한 명백한 이해다. 그리고 행복은 진리를 앎으로써 받는 보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이곳에서,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두려움 없이 진리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맹목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왜 믿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첫댓글 행복한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