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줄
김길중
묶여있던 시간에서 풀린 것처럼
세월의 외곽을 뚫고 나온 것처럼 고집스러워 보이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이 뿌리는
어릴 적 본 아버지 팔뚝의 힘줄 같고
시장 통 노파의 손등에 불거진 검붉은 핏줄 같다
생의 언저리에서 생긴 질김으로
구불구불해진 저 뿌리에 걸려 넘어졌으니
탓할 일은 아니다
땅을 박차고 나와
무뚝뚝하게 뻗어나간 것이
문득 한 나무를 끌고 가는 고집스런 줏대 같아
내게도 삶이 몸살에 걸려 넘어졌을 때
나를 끌고 가는 고래심줄 같은 게 있었으면 싶어진다
심줄은 질겨야 제맛이라고
아주 질기고 질긴
--김길중 시집 {군말 없이}(근간)에서
독일 정신은 뿌리로 말하고 영국 정신은 열매로 말한다. 이태리 정신은 잎으로 말하고, 프랑스 정신은 꽃으로 말한다. 잎과 꽃과 뿌리와 열매는 모든 식물들의 아주 중요한 기관이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뿌리 깊은 나무가 가장 좋은 나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꽃과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김길중 시인의 [심줄]은 ‘나무의 뿌리’와 ‘아버지의 심줄’을 결합시킨 시이자 ‘심줄의 미학’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산책을 하다가 “묶여있던 시간에서 풀린 것처럼/ 세월의 외곽을 뚫고 나온 것처럼 고집스러워 보이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뿌리는/ 어릴 적 본 아버지 팔뚝의 힘줄 같고/ 시장 통 노파의 손등에 불거진 검붉은 핏줄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생의 언저리에서 생긴 질김으로/ 구불구불해진 저 뿌리에 걸려 넘어졌으니/ 탓할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무의 뿌리는 힘줄이고 핏줄이며, 이 핏줄은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이자 혈관과도 같다. 뿌리와 심줄과 힘줄과 핏줄은 다같은 말이며, 따지고 보면 이 [심줄]은 고산영봉의 산맥이나 강과 들과 호수와 바다, 또는 숲과 나무와 동식물계의 그 모든 뿌리와도 같다. 돌의 기원도 뿌리이고, 나무와 풀의 기원도 뿌리이다. 새와 코끼리의 기원도 뿌리이고, 강과 호수와 바다의 기원도 뿌리이고, 모든 학연과 혈연과 지연의 기원도 뿌리이다. 뿌리는 심줄이고 핏줄이며, 모든 생명체는 이 심줄의 힘으로 움직이고, 이 심줄을 통해서 살아간다.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나무와 오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한국인들도 뿌리 깊은 나무이며, “땅을 박차고 나와/ 무뚝뚝하게 뻗어나간 것이” 우리들의 [심줄]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를 끌고 가는 “고래심줄 같은” 역사, 따라서 우리들의 “심줄은 질겨야 제맛”이고, 아주 질기고, 또 질기지 않으면 안된다.
힘, 힘, 힘, ‘심줄의 힘’----.
에비 없는 자는 뿌리 뽑힌 자이며, 뿌리 뽑힌 자는 그 어떤 꽃과 열매도 맺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