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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사가 전하는 말
요한계시록 14:6-13
6 <세 천사가 전하는 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6-13 / [세 천사의 전갈]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과 부족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영원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7) 그 천사는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ㄱ)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 심판주로서 심판석에 앉으실 때가 왔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모든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라.' (ㄱ. 출20:11 참조, 시146:6) 8) 그때 또 다른 천사가 그 뒤를 따라 날아가면서 말하였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모든 민족들을 현혹하여 부도덕한 행위와 죄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대가이다.' 9) 그러자 세번째 천사가 뒤따르면서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바다에서 올라온 그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그의 낙인을 받는 사람은 10)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는 결코 물을 타서 묽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이 보는 앞에서 불과 타오르는 유황의 구덩이에서 고통받게 될 것이다. 11) 그 고통스러운 연기는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타올라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짐승의 낙인을 받은 자들을 괴롭힐 것이다. 12) 그러니 우리 성도는 다 이에 격려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끝까지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의지하여 닥쳐오는 어떠한 시련과 박해에도 견디고 나아가야 한다.' 13) 또 나는 바로 내 머리 위에서 '기록하라. 드디어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보상받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도 '그렇다. 그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수고와 시련에서 벗어나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착한 행실이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세 천사가 등장하여 자신들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첫째 천사(6-7) 사도 요한이 또 다른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번 환상에서는 첫째 천사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영원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공중에서 날아갔다는 표현은 선포의 대상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이란 말이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복음을 누릴 수는 없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복음을 자기의 것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짐승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만물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천사는 ‘심판의 시간’이 임박을 경고하여 복음을 영접할 기회가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합니다.
둘째 천사(8)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바벨론은 종교,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짐승, 곧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악의 제국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음행은 하나님을 버린 배도의 행위를 의미하며, 이러한 음행을 조장한 주체는 바벨론, 곧 짐승의 거대한 조직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진노의 포도주,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으실 진노의 잔입니다(계 16:19).
셋째 천사(9-11) 셋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아서 자신이 짐승에게 속한 것을 밝힌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진노는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12-13)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받을 진노는 반대로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모든 진노를 면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땅에서는 잠시 득세하지만 천상에서는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잠깐이지만 하늘의 것은 영원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들은 땅에서는 순교를 당할지라도, 천상에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성도는 이를 바라보고 이 땅에서 인내합니다. 각종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참된 것,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치심은 소유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빛과 어둠을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왔더라도 오늘부터는 마음을 열어 이상과 꿈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좀 더 밀접하도록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꿈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에 바로 선 자에게 나타나는 천사의 노래입니다. 성령을 간곡히 원하는 자들에게 성령은 임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자의 실상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간곡히 바라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임하셨습니다. 이들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지금 이 시대에 기독교를 일으킨 주역들입니다.
호크마 주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 8:13에서 독수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땅에게 거하는 자들에게 화(禍)를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게 본절에서는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며 '큰 음성'(7절)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이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 )은 본서에서 이곳에만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리는 복음이 아니라 7절에서 언급된 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며 그의 심판을 알리는 내용이다. 천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인정할것을 불신자들에게 선포하고 있다(Morris, Mounce).
=====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 '큰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듣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Morris).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곧 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실 것임을 암시한다(13:7).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천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직도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벧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었던 자로다 하더라 - 둘째 천사는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들었던 큰 성 바벧론의 멸망을 예고한다. '큰 성 바벧론'은 단 4:30을 반영한다. 이는 세상 권세의 모형이며 불신과 부도덕이 팽배한 대도시를 상징한다(사 14장). 구약에서 바벧론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적이었으며사 21:9;렘 50:2;51:8) 본절에서 바벧론은 하나님께 반항하며 대적하는 배도적인 국가를 상징한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제국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권력을 사용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정황과 묵시문학적 표현 방법으로 보아 바벧론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Swete). 그러나 바벧론이 단순히 로마 제국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은 물론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핍박하는 권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한다(Johnson, Morris).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오이누 투 뒤무테스 포르네이아스'(* )는 병렬오 된 두 개의 문장, 즉 '음행의 포도주'와 '진노의 포도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렘 51:7, 8을 반영한 것으로 사단으로 인한 악이 모든 나라들로 취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
적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 6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천사의 메시지는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본절도 6절부터 계속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것 역시 불신자들을 향한 천사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본절은 혹자의 주장대로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계속하면'이란 의미를 지닌다(Beasley-Murray). 즉 7절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하라는 천사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설사 불신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회개와 믿음으로 천사가 전하는 용서와 구원의 '영원한 복음'(6절)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짐승에게 경배할 경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10절)를 마시게 될 것이다.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포도주 잔'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욥 21:20;시 75:8;사 51:17;렘 25:15-38).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즉, 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는 독주에 해당할 만큼 그 농도가 짙어 사람들이 그것을 마시게 되면 금방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맹렬하여 한번 당하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파괴력으로 번죄한 인간을 엄하게 심판하신다(신 75:8;사 51:17). 한편 본절에서 '진노'로 번역된 헬라어들은 비록 개역성경에서는 동일하게 번역되었으나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이다. 처음 '진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무'(* )는 뒤에 나오는 '진노'의 헬라어 '오르게스'(* )보다 감정적으로 격한 것을 나타내며 '오르게스'는 감정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분노를 나타낸다. 대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 후자이며 '뒤무'는 본절과 롬 2:8절에서만 사용된다. 이렇듯 '진노'에 대해 다른 두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분명한 사실로 엄중하고 공의로움을 시사한다(Ladd).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 '불과 유화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하였던 자들에게 내려질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주 나타난다(19:20;20:10;21:8). 이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형벌이가도 하다(20:10, 15;사 34:9, 10;눅 16:23).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과 연결된 표현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관한 것을 온전한 기독교 교리로 보지 않고 '준 기독교적'(sub-christian)인 것으로 본다(Glasson). 이들은 배교한 자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저버린 자들이 받게 될 고통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Preston, Hanson). 그러나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함을 예수께서 치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막 9:43, 48;눅 16:19-31, Mounce). 짐승을 경배하며 그를 끝까지 따라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짐승과 함께 그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고난에 처하게 되는 반면에(10, 11절) 성도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인해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으며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본절에서 성도들에게 인내로 하나님과 예수께만 충성할 것을 권면한다. 그 충성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예수'(* )는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믿음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14:13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본절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번째 복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아밋한다.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Mounce). 본절의 '자금 이후로'는 두 가지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1) '자금 이후로'가 무엇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죽는'을 수식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Plummer). 2 혹자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를 수식한다고 주장한다(Mounce). 두 가지 견해 중 문맥상 뜻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가 타당하다. (2) '자금 이후로'에서 '자금'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2 혹자는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ckwith). 3 혹자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최후의 심판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 , 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예수께 대한 '믿음'(12절)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단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천사 셋이 전하는 메시지
계 14장 6~13절 /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벌어질 일곱 대접 재앙의 사건 앞에 보여주는 환난의 끝(계11:15~19), 그리고 마지막 대의 두 짐승의 출현(계13:1~13) 등 해설이 계속된다. 지난 시간에는 계14:1~5을 읽고 새 노래를 부르는 천사의 찬양을 배울 자, 14만 4천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계속해서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통해 장래 가져야 할 참된 신앙의 태도를 깨닫게 해준다.
요한은 천사를 보았다. 많은 물소리 같고 우렛 소리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새 노래를 부르는 천사들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천사는 다른 천사다. 노래하는 천사가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는 또 다른 천사다. 계14:6~20에는 “또 다른 천사”, “또 다른 천사” 하면서 다른 천사 여섯이 나타난다. 각각의 천사의 역할 중 먼저 세 천사가 무엇을 하는가?
1. 첫째 천사의 말 -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외친다.
계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영원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대개 요한계시록을 말한다고 하는데 본 구절에서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계14:7에 나온다.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는 것이다.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가져올 재림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심판이 곧 시작된다. 주님이 곧 오신다.”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내용, 전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행14:15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즉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전도요 복음을 전하는 이유다. 이처럼 천사도 외친다.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영광 돌려라. 경배하라.”는 관용구적 표현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재앙은 사실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다. 갈수록 두렵고 무서운 재앙의 환난을 가만히 앉아서 맞이한다면 이런 불행이 어디 있는가? 계14:6의 말씀대로 “땅에 거주하는 자들!” 즉 만인들이 죄인들이고 심판에서 건짐을 받을 대상이다.
“어서 돌아와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하자. 하나님께 나아오세요!” 이 초청의 제시는 복음을 깨달은 바울과 바나바와 베드로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영원한 복음을 가진 하늘의 천사가 이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심판이 눈 앞에 다가왔다. 지체하고 미루고 딴 짓 할 시간이 없다. 긴박하게 움직여 긴박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이다.
복음은 간단하다. 지금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돌아오면 심판을 면한다. 돌아오면 살게 된다. 누구에게나 쉬운 구원에로의 초청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2. 둘째 천사의 말 -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한다.
계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라고 하였다.
여기 “무너졌도다”라는 선언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바벨론의 큰 성은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성이기에 우리의 기대와 달리 무너진 성임을 분명하게 하려고 거듭 외친다. 바벨론 제국은 그 성의 둘레가 96Km였다. 높이가 90m의 이 성곽은 외벽과 내벽으로 만들어져 있고 20~40m 사이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성문으로 들어오려면 인공 강을 만들어 놓아 다리를 놓아야 들어올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런데 심판의 때에 바벨론은 다 무너진다.
어떨 때는 이 지상에 세워진 지상의 도성이 더 견고하고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너지고 만다. 바벨론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상을 뜻하지만 당시의 로마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 대신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게 한 로마가 바벨론이다. 벧전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바벨론이 로마다. 영적으로 바벨론과 로마는 하나다. 구약의 바벨론은 우상 숭배와 불신앙의 도시였다. 그런데 여기 로마로 보여지는 바벨론의 무너짐의 이유가 바로 우상 숭배였다.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모든 나라에게 마시게 하는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다. 로마는 삶 자체가 쾌락을 쫓는 삶이었다. 육체의 음행도 음행이지만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황제 숭배 사절단이 있어서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의 본거지였다. 영적 음행은 실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하는 죄악이었다.
오늘도 이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진노의 포도주를 먹는다. 정신을 혼돈시키고 거짓 것에 사로잡혀 살게 만드는 거짓된 사상과 이념, 사이비 종교와 성공 신화에 빠져 미혹을 당하고 영적 음행의 죄를 짓고 있다. 바벨론이 주는 것이 멋지고 즐겁고 영원할 것 같지만 그러나 무너진다. 무너져 버린다. 세상의 도성은 영원하지 않다. 소망을 눈에 보이는 것에 두지 말라. 강하고 든든하게 보이는 도성에 두지 말라. 보이는 것은 무너지는 것, 허무한 것이다.
3. 셋째 천사의 말 - 짐승을 경배하지 않는 복 있는 자가 되라.
신앙 생활을 하면서 미혹에 속아 짐승을 경배하게 되면 안된다. 짐승의 표를 받아서도 안된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거나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에 받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계14:10) 바벨론이 음행한 연고로 진노의 포도주를 마셨다면 짐승 경배나 표 받는 것 역시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 다만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하였으니 심판의 극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강도를 말한다. 대개 물과 포도주를 섞어서 사용했는데 섞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견디지 힘든 고통인가를 암시한다. 계14:10下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으니 짐승 경배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처음부터 이겨야 한다. 거절하고 돌아서야 한다.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계14:11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성도의 인내가 필요하다. 싸워 이겨야 장차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는다. 신앙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참된 안식에 들어간다.
계명과 믿음을 지켜 사는 인내의 성도가 되자. 짐승께 경배하지 않는 성도가 복 있는 성도다. 힘들고 어려워도 복이 있는 자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다. 지금 이후로 짐승을 경배하면 다 잃어버린 자가 된다. 허나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되면 복이 있다.
셋째 천사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라. 짐승을 경배하는 자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 기다릴 뿐이다. 영원한 두 번째 사망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짐승에게 경배를 거절하는 자는 행한 일에 대한 마땅한 상급이 따르고 수고를 그치는 안식이 주어진다.
주 안에서 죽자! 시절이 좋든지 나쁘든지, 세월이 마지막 때든지 아니든지, 핍박의 악마가 미혹을 하든지 못하든지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자!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 안에서 죽는 자가 되자. 인생은 수고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주 안에서 죽을 때 그 때부터 안식과 행함에 대한 보상이 따른다. 그리고 이 복 있는 죽음은 성령이 동의하신다. 성령이 “그러하다”고 감화해 주신다.(계14:13) 그러므로 반드시 쉼과 보상이 있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또 다른 천사인 넷째, 다섯 째, 여섯 째 천사의 이야기는 두 개의 심판에 대한 예고 심판이다. 확실히 알려주고 확실히 세상 끝을 준비시키려는 메시지다. 세 천의 메시지 그대로
첫 번째 천사의 말
1. 영원한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경배하는 자는 알곡으로 거두어진다.
허나 영원한 복음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는 자는 포도주 심판을 만난다.
두 번째 천사의 말
2. 바벨론의 음행을 이겨내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알곡으로 거두어진다.
허나 하늘의 도성의 영원함을 모르고 땅의 도성, 바벨론이 좋아서 그 바벨론의 음행에 가담하는 자는 포도주 심판을 만난다.
세 번째 천사의 말
3. 짐승 경배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인내의 성도는 알곡으로 거두어진다.
허나 먹고 살려고, 경제 활동을 하려고 짐승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아 짐승의 것이 되어 버리면 포도주 심판을 만난다.
알곡 심판은 거두어드려지는 심판이다. 주님이 모으시고 창고에 드리시는 심판이다. 그러나 포도주 심판은 틀에 던져져 밟히는 심판이다. 깨지고 터지고 압착시켜서 피가 흐르는 심판이다. 그 피가 1600스다디온에 퍼지는 심판이니 산술적으로 남한 면적에 흘러 넘칠 피의 심판이고 4×4×1000의 숫자를 보면 온 세상을 뒤덮은 진노의 심판이다.
우리 인생 앞에는 두 개의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 그리스도 재림에 있을 심판이다. 천사가 알게 해주고 준비시키는 심판이다. 오늘 우리는 장래 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이 말씀이 영원한 복음의 하나다. 두려움으로 주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며 창조주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면 곡식으로 거둬들여진다. 버려지고 밟히는 대상이 되지 말자.
나는 오늘 이 메시지를 어떻게 다루는가? 이것을 믿고 준비하는가? 그 사람이 지혜롭고 복된 사람이며 말씀을 제대로 안 지혜자이다. 영원한 복음 앞에서 피하지 말라. 취하라. 그리고 알곡이 되자.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들으면 산다.
말세 인류에게 주시는 세 가지 경고
계 14장 6~12절 / 이삼규목사
14장 초두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으로 어린 양을 따르는 144,000명에 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말세에 처한 인류에게 주는 세 가지 경고가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어떤 자세로 기다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천사들을 통해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천사의 경고-영원한 복음
계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첫째 천사는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말세에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어느 나라도, 어느 족속도, 어느 방언도, 어느 백성도 제외됨이 없이 말입니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면 천사가 전하여 준 영원한 복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하나님을 경외하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여기에서 '두려워하며'라는 말은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놀라다, 존경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우주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곧 근본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수준에만 머무를 뿐 아무 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2)하나님께 영광돌리라!
이 말은 성경에서 관용구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써 다른 말로 말하면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범죄한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아간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 7: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기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이 회개하라는 의미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복음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시면서 범죄한 인간을 그토록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는데도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별 수 없이 그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 심판이 임박한 것입니다.
4)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
모든 우주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우선으로 드높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분을 통해서 인생이 전개됨을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돌아오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하나님께 삶을 바치고 그분 앞에 엎드리라"
이것이 영원한 복음입니다. 이 영원한 복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상당히 쉽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쉽게 써 놓은 것을 너무 심오하게 풀이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지식이 신앙에 방해가 되지는 않으나 신앙 없는 지식은 교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글씨를 못 읽는 분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천사가 영원한 복음을 들고 달리면서 전달할 자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복음을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모든 족속 모든 나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 7절에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우리가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사단이란 음악의 천사장인 루시퍼였는데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거절함으로 타락한 마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원한 경배의 대상이란 말씀은 루시퍼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인류가 받아들여야 할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면류관의 상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밀러박사는 "아스팔트 위의 낚시질"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면 한 평생에 평균 6000번 이상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 8000번 이상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또 20000번 이상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는 평균 10번 이상을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상 받을 것을 모두 거부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천사의 경고-바벨론의 멸망
"또 다른 천사 두 번째 천사가 말하되" 8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벨론이란 하나님 없는 세상의 문명과 육체적 향락의 소굴이 된 이 세상을 상징하는 명칭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세속성을 대표하는 바벨론의 원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바벨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0장입니다. 니므롯이 바벨의 시조입니다. 11장을 보면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도 니므롯이 선동했기 때문에 쌓아졌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벨탑을 쌓았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에 대비해서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내자는 주장,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이러한 모든 사고 방식과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을 음녀라고 한 것은 음녀가 본 남편을 배반하듯이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본문에서는 무너진 이유를 음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적인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의 쾌락을 좋아하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형태의 마지막은 파멸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나라를 중심으로 살지 않는 태도를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가 없이는 인생의 공든 탑이 모두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의 결과는 비참함과 허무밖에는 없습니다.
렘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바벨론적인 삶의 원리를 따라 살던 사람이 바벨론과 함께 멸망 받지 않으려면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안티 바벨론 적으로 사는 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의 원리입니다.
렘 51:7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렘 51:8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두 번째 천사가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진정한 애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세를 사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3. 세 번째 천사의 경고-짐승 숭배자들의 영원한 멸망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라는 메시지입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데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선포입니까?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결국은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요?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란 아주 독해서 한 잔만 마셔도 정신이 핑 도는 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이 지옥에서 받을 고통이 너무도 극심하다는 것을 이런 독한 술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천사와 어린 앞에서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 666을 받는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을 받습니다.
12절은 말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역사의 마지막이 빠르게 다가올수록 마귀는 더욱 무서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신앙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막습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달콤하게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또 어떤 성도에게는 힘든 고난의 십자가를 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인내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내라는 말은 단순히 감정의 억제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망 중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미래에 주신 상급 미래에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는 인내는 내일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과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보며 나갈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 그 영원한 상급, 그 영원한 칭찬, 주의 기뻐하심을 인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내의 결단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인내로서 더 열심히 믿고 인내로서 더욱 주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늘에서 큰 면류관의 주인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하나를 심겠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로 내일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명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내일 마지막이 온다 할지라도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인은 열심히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가는 사업도 정성껏 진심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모든 일에서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인내하라...지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아나갈 때 우리의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이르고 영원한 승리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밤낮 쉼이 없는 곳
계 14장 9~12절 / 박덕기목사
삼복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이같은 무더위를 일컬어 찌는 듯 하는 날씨라고도 하고, 푹푹 삶는 듯한 날씨라고도 합니다. 찌는 듯 하고 삶는 듯한 날씨로 인하여 밤에는 열대야 현상까지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새벽녘에는 조금 시원하여 단잠을 잘 수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삼복 더위 중에서도 가끔은 비가 와서 불타는 듯한 대지를 식혀 주기도 하고, 또한 선풍기도 있고, 에어컨도 있고, 샤워도 할 수 있어서 그런 대로 더위를 이겨낼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무더위를 피하여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가는 바캉스철의 피크 타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같은 바캉스는 꼭 필요한 삶의 요소라고도 할 수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인간의 휴식을 제도상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계명 4계명을 흔히 하나의 명령인 줄 알지만 사실은 둘입니다.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 이것이 첫째이고, '이레 되는 날은 온전히 쉬라' 이것이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일하라' '쉬라' 두 계명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일하라!'고 했는데 일 안하고 빈둥거리는 사람은 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놀다가 쉬다가 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킬 자격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또 '하루를 온전히 쉬라!' 했는데 쉬지 않는 사람도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G. N. P 20000 달러가 넘는 선진 서구 사회에서 실행되고 있는 주 5일 노동제가 우리 나라에도 도입되어서 걱정되는 바가 많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데다가, 신자들이 토요일부터 주일까지 휴가를 떠나면 주일 성수 개념이 다 파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5일 노동제가 완전히 실시되더라도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반드시 주일을 성수 하시기 바랍니다. 토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휴식하는 날로 갖더라도, 주일만은 반드시 주님의 날로 성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거룩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안식과 쉼을 주시기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시고, 안식년을 주시고, 희년을 주시고, 장차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안식과 쉼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열두 제자가 파송을 받고 각처에서 전도한 다음에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를 드렸을 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동안 많이 수고하였으므로 좀 쉬어야 하겠는데, 그러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와글와글 들끓었기 때문에,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을 만큼 잠시도 쉴 틈이 없을뿐더러, 쉴 만한 환경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하였다고 했습니다.
휴식은 육체 노동 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도 필요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영원의 빛안에서 살아가기에, 매사의 삶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의 부단한 공격과, 죄와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자 하는 끊임없는 투쟁에서, 우리들의 영혼은 피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기만 하면 모두 얼마 동안의 휴가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휴가가 올바르고 유용하게 사용된다면, 우리는 영혼의 상처와 피로한 심신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욱 왕성한 기력으로 선한 싸움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밤낮 쉴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영원토록 쉴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지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거부감을 갖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이다'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누가 지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습니까? 바로 지옥에 갈 사람들 일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지옥이나 가라'고 하면 모두 화를 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어쩌면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공포가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사람이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이지, 지옥이 있긴 뭐가 있어? 다 목사 밥벌어먹기 위해 하는 소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있다는 것은 양심이 증거하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으로 그를 두려워하라' 이렇듯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全知性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무서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지옥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가장 두려운 명칭은 아마 '불못'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계 20:14-15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섭씨 35.6도 되는 무더위도 이처럼 견디기가 힘든데, 지옥의 불못은 어떠할까요?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 서울 지방에는 극심한 가뭄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볕 더위가 한 달 이상 계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저는 참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목전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지구의 종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속되는 불볕 더위는 저를 두렵고 떨리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 하00 라고 하는 여집사님이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분은 첫 부인과 사별한 남자와 재혼을 한 분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고 전 부인이 낳은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헌신적으로 길렀습니다. 그 집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장례식을 하게 되었는데 火葬을 하게 되었습니다. 벽제에 있는 화장터에 도착하여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시신을 화장하기 위하여 화덕으로 옮겨가는데, 그 광경을 본 자녀들이 그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신을 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어머니가 아니었는데도 시신을 불로 태운다는 사실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것이지요. 매장하고 달라서 화장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지옥의 불못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사진을 보십시오. 독일의 뮨헨에 있는 '다카우 수용'에서 시신을 화장했던 화덕의 모습입니다. 다카우 수용소는 독일이 세운 최초의 유대인 포로 수용소입니다. 1933-1945년 동안 20만명을 수용한 곳인데, 그중 3만명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수용소의 방명록에 '오 하나님 이같은 죄악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폴란드에 있는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무려 350만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카우 포로 수용소를 둘러보면서 영원한 수용소 지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악명높은 다카우 수용소에도 예배당이 있어서 신자들은 예배를 드리게 해주었던 것 같고, 낮에는 중노동을 하더라도 밤에는 몇 시간 잠도 자고 쉴 수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패망과 함께 수용소에 살아 남아 있었던 포로들은 해방을 얻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죄인들의 수용소 지옥의 불못은 잠시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대신,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기간도 무한정이고, 단 한 사람도 탈출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어떤 곳일까 좀더 살펴보실까요? 마 3:12에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고 막 9:48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고, 마 25:30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라 했으며, 마 25:41에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고 했고, 계 20:10에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으며, 계 21:8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으로 온 어떤 사람에게 지옥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여기는 3곳이 있으니 어느 곳이든 네가 선택하라' 1)초대형 후라이 판 위에 사람들이 튀겨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여기는 안 들어가겠습니다'고 했습니다. 2)초대형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 못이 박혀 있어 빙빙 돌 때마다 사람들의 몸을 이리저리 쑤셔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고 했습니다. 3)똥물속에 사람들이 들어가 목만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여기가 제일 좋겠다 싶어 그곳을 선택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백만년만에 쉬는 5분간 휴식끝, 잠수' 하더라는 것입니다.
희랍신화에 보면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 중에 탄타로스와 시지프스가 제일 유명합니다. 부르기아의 왕이었던 탄타로스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서 있는데 바로 코끝에는 먹음직스런 열매가 달린 나무가지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탄타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과실을 따먹고자 손을 뻗치면, 나무가지는 바람에 날려서 높이 올라가고 맙니다. 그래서 탄타로스는 과실과 물을 눈앞에 보면서도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신의 명령을 어긴 죄로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지고 산꼭대기로 끌어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죽을힘을 다하여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까지 짊어지고 올라가면, 바위는 다시 수천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바위 덩어리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고, 올라가면 또 굴러 떨어져 버리고....이렇게 그는 영원토록 노역에 종사하는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지옥의 무한한 고통을 말해 주는 신화들입니다.
C. C. C 수련회 프로그램 가운데 김준곤 목사님의 유명한 백문일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월드컵 4강에 들게 하셨습니까? '이 민족 역사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누가 선선한 날씨를 주셨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백문 일답을 모방해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지옥에 대한 60문 일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여러분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1)지옥의 불이 꺼질 때가 있을까요?
2)지옥의 불을 끌 소방수가 있을까요?
3)지옥의 불을 하루쯤 견딜 수있을까요?
4)지옥의 불을 한 시간쯤 견딜 수있을까요?
5)지옥의 불을 오분 정도 견딜 수있을까요?
6)지옥에 피난처가 있을까요?
7)지옥에 탈출구가 있을까요?
8)지옥에 편히 쉴 집이 있을까요?
9)지옥에 콘도가 있을까요?
10)지옥에 해수욕장이 있을까요?
11)지옥에서 5분이라도 휴식할 수있을까요?
12)지옥에서 피서 갈 수있을까요?
13)지옥에 휴가가 있을까요?
14)지옥에 선풍기가 있을까요?
15)지옥에 에어컨이 있을까요?
16)지옥에 부채가 있을까요?
17)지옥에 냉장고가 있을까요?
18)지옥에서 샤워할 수있을까요?
19)지옥에 바다가 있을까요?
20)지옥에 강물이 있을까요?
21)지옥에 시원한 계곡이 있을까요?
22)지옥에 수돗물이 있을까요?
23)지옥에 아이스크림이 있을까요?
24)지옥에 사이다나 콜라가 있을까요?
25)지옥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있을까요?
26)지옥에 병원이 있을까요?
27)지옥에 의사가 있을까요?
28)지옥에 고통을 덜어 줄 진통제가 있을까요?
29)지옥에 낮이 있을까요?
30)지옥에 햇빛이 있을까요?
31)지옥의 깊이를 알 수있을까요?
32)지옥에 계절이 있을까요?
33)지옥에 겨울이 있을까요?
34)지옥에 자유가 있을까요?
35)지옥에서 여행 다닐 수있을까요?
36)지옥에서 장기두고 바둑을 둘 수있을까요?
37)지옥에 노인당이 있을까요?
38)지옥에서 친구들과 놀 수있을까요?
39)지옥에서 화투치고 담배피울 수있을까요?
40)지옥에서 제사 음식 먹으러 올 수있을까요?
41)지옥에서 단 한 가지라도 희망을 가질 수있을까요?
42)지옥에서 공부할 수있을까요?
43)지옥에서 사업을 할 수있을까요?
44)지옥에 작은 위안이라도 있을까요?
45)지옥에 조그만 기쁨이라도 있을까요?
46)지옥에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47)지옥에서 쾌락을 누릴 수있을까요?
48)지옥에서 기회가 있을까요?
49)지옥에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있을까요?
50)지옥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있을까요?
51)지옥에서 예수믿을 수있을까요?
52)지옥에서 구원받을 기회가 있을까요?
53)지옥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있을까요?
54)지옥에 형벌의 기간이 있을까요?
55)지옥에서 자살 할 수있을까요?
56)지옥에 죽음이 있을까요?
57)지옥에 가정이 있을까요?
58)지옥에서 부모가 자식을 도울 수 있을까요?
59)지옥에서 자식이 부모를 도와 드릴 수있을까요?
60)여러분의 식구 가운데 지옥에 갈 사람이 있는가요?
정말로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여자 성도에게 '남편 전도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이 날 이 때까지 그 남자 만나서 고생 고생했는데 영원까지 같이 살면 지겨워서 안되겠어요' 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태리의 밀라노에는 그 입구에 의미심장한 문구가 적혀 있는 성당이 있습니다. 오른편으로 장미 화환 조각이 있는데, 그 밑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가시로 된 십자가 조각이 있으며, 문 윗편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잠시 동안에 사라집니다. 휴가는 빨리 끝나며,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통과 시련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도 언젠가 모두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의 세계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둘 다 영원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의 최후 순간이 찾아 왔을 때,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식들은, 사랑하는 여러분의 부모 형제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어느 집사님이 돌리는 이상한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지옥에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집사님은 만나는 사람들에 게마다 그 전도지를 주면서 '그 뒤를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별 다른 내용이 씌어 있지 않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큰 글씨만 씌어 있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결단이 없다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건이 없이 가만히 있으면, 지옥은 저절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 속에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분은 설교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고 외쳐 댔습니다. 존 웨슬레도 말하기를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지옥에 가면 가지 별 수 있나?' 하고 마치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듯한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로 너무도 무서운 형벌의 장소, 고통의 장소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서울의 대연각 호텔에서 큰 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호텔안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로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뜨거운 불길이 덮쳐 오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무모하게 뛰어내렸습니다. 지옥에도 불이 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무섭고 뜨거운 불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뜨거움을 피해 뛰어내릴 창문도 없습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은 분명 존재합니다. 천국이 분명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은 사람이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에 들어간 다음에는 결코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지옥을 면하고 천국으로 갈 수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 가운데 1분 1초도 쉼이 없는 끔찍스런 지옥으로 떨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바라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다
계 14장 13절, 히 11:33 / 장경준목사
손양원목사 설교집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 36회 총회 주최로 거행한 고 최봉석 복사 고 주기철 목사 순교 추도예배 설교)
1944년 4월 31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입니다. 내가 청주 옥중에 있을 때에 아버님에게서 암호 편지가 왔습니다. “전략.... 여숙 최권능씨는 4월 19일 본 고향 가고, 여형 주기는 4월 21일 오후 9시에 본 고향 갔다... ‘운운 한 편지였습니다. 즉 고 최봉석 목사님과 고 주기철 목사님의 별세하신 내용의 암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부모 자식이 별세했다는 소식보다도 더 슬퍼서 30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애곡하였습니다. 곁의 사람들이 ’친구를 이 같이 사랑하는가?‘하였지만 나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우리 조선 교회를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추모하는 이 밤 새삼스럽게 내 맘이 뜨겁습니다.
계시록14:13에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했습니다. 그 자취와 그 피 떨어진 이 강산이 복되고 소망이 많다. 내가 이 지구를 바라보니 큰 무덤과 같이 보인다. 과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은 무덤이 이 지구 속에 묻혔다. 세계 통계상으로 보면 1초 동안 한 사람 반씩이 죽는다하니 인간 육천년 동안 묻힌 무덤은 얼마나 많으랴! 나도 죽어서 땅 속에 묻힌 해골들에게 물을 수 있다면 즉 ‘너희들은 무엇 하다가 죽었는가’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나는 복통으로 나는 두통으로 나는 전쟁으로 죽었소라고 말 하겠지만 순교자 스데반의 뒤를 이은 최봉석 주기철 목사님들께서는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피 흘리고 왔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이 밤에 그들의 뒤를 이을 준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목적은 천태만상이겠지만 이들을 종합하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극단의 이기주의자는 그 일생 동안 자기 평강만 위하여 살다가 죽었으니 죽는 그 날에는 안 것도 남지 않는 소위 개죽음입니다.
2) 倫情을 위해 죽는 자이니 부모를 위하여 효성을 다 하였으면 죽은 후에 효자비가 남겠고 남편을 위해 죽었으면 열녀라는 이름을 얻겠으며, 자녀만 위하여 수고하다 죽으면 노경에 좀 평안하여 질 것입니다.
3) 나라를 위하여 죽는 자이니 충신이 되어 국사에 이름이 남아 자손만대에 그 이름이 전해지겠습니다.
4) 인류 도덕을 위해 죽는 자이니 공자 석가 같은 사람들입니다. 국경을 초월하여 인도를 심다가 죽었으니 인간 역사가 있는 동안에는 그 이름이 남아 있겠으나,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 같이 말려지고 각 산과 섬이 녹아질 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을 위하여 인생을 눈물과 피를 흘리다가 죽는 자입니다. 이제 까지 말한 사람들은 영생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공산주의니 인도주의니 하지만 결국 영생의 세계에서는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살다가 죽을 바에는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죽을까요? 성경에 “행한 일이 따름이다”고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주께로 갈 것입니다. 죽을 판 살판 자기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일하고 죽은 후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주의 일을 하여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의 일은 무엇입니까?
사농공상 간에 무슨 직업이던지 하는 일이나 직업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중심의 문제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여 유창하게 설교하며 밤낮 기도한다고 해도 이기주의에서 하였으면 이 땅 위에서는 칭찬을 받을 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생활입니다.
경남 울산에 어떤 할머니가 부흥회에 가서 성신을 받았다고 하여 며느리가 ‘아이좀 보아 주세요’하였더니 나는 ‘성신 받았는데 아이 보겠는가?’했답니다. 이는 큰 잘못입니다. 성신 받고 아이보고 성신 받고 불 때고, 성신 받고 밭 갈고, 성신 받고 교육하고, 성신 받고 정치해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가 많지만 그 중심을 우리는 모르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 제일주의가 곧 주를 위해 죽는 자입니다. 일본 구세군 산실군평 선생이 어릴 때에 어머니과 사별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죽으면서 유서를 쓰기를 ‘하나님 제일이다’고 했습니다. 이 교훈을 받아서 주께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을 검토해야 합니다. 자를 중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는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 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옛날 수영수사가 기독교를 박해 할 때에 독실하게 믿는 부자가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내일은 우리가 죽임을 당할 것인데 너는 어찌하려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나도 아버지를 따라 죽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순교하는 것을 본 아들이 마음이 변하여 ‘아버지는 늙었으니 주를 위해 죽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아직 어리니 더 살다가 죽은 것이 좋겠다’하여 변심하고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29일 만에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밥 90 그릇을 더 소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일 좋은 죽음은 주를 위해 죽는 죽음이니 한없이 복됩니다. 나는 이제 살기를 도모하기보다 어떻게 하여야 주를 위해 죽을까 결심하고 기도합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스데반 이후 많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히기도 하고 칼에 베임을 당하기도 하고, 톱에 켜임을 받기도 하고, 불에 태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일제 말기에 최목사님을 위시하여 50여명의 순교자가 났습니다. 나는 오늘 밤에 어떤 조직적인 설교를 하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흘린 땀 흘린 피의 길을 가자고 하는 것뿐입니다. 최목사님의 외치던 '예수! 천당!‘의 음성이 내 귀에 쟁쟁합니다.
‘주여 이 소리가 이 땅에서 끊어졌나이다. 나도 따라가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기도를 할 뿐입니다. 그들의 흘린 땀 흘린 피는 이 땅위에 아직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운 곳이 피땀을 흘리다가 마지막 피 뿌린 곳이 아닌가요? 나도 피 한 가지만 흘리다가 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에 편히 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 땀 그 피는 아직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목사님 최목사님의 피의 설교가 이 밤에 여러분의 귀에 들리기를 바랍니다. 제가 전도사 때에 주목사님께서 ’손조사 큰일 났다‘하시고 울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던 그 모습이 내 눈에 훤합니다. 우리 주목사님이 밤에도 주님의 반열에 서서 우리 총회 위하여 염려하며 기도함이 내 눈에 환한 것 같습니다. 이 밤을 기하여 우리도 이 순교자들의 피의 설교를 듣고 따릅시다. 피의 호소는 반드시 이룹니다. 스데반의 피의 설교는 어떤 이론적 설교보다 강합니다. 그 설교를 인하여 바울의 심정이 깨어졌고, 유대주의적 기독교가 세계적 기독교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최목사님과 주목사님의 피에 따라 순교의 정신을 가집시다.
순교한 스데반이나 야고보 같은 이들이 귀하지만 순교 정신 가졌던 백발의 요한 사도도 귀하였습니다. 깨끗한 죽음 귀한 죽음으로 죽으려면 평소에 깨끗한 아름다운 생활을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한 가지 하시기 위하여 3년간 준비가 있었던 것입니다. 잘 죽고 싶으냐? 생활을 잘 하십시오. 주목사님은 평소에 ‘내가 아무래도 이 문제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순교의 각오를 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순교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서간 순교자들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말만하지 말고 실천에 옮깁시다. 먹고 마시는 것을 주를 위해하고, 자자 다른 인간을 높이기 위해 살지 맙시다. 주 만 높이다가 죽는 자가 됩시다.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 후에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이는 복이 있나니
계 14장 13절 / 인명진목사(갈릴리교회)
얼마 전에 제가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연구기관에서 1945년 생, 마침 제가 45년생인데 1945년생이 100세까지 살아있을 확률이 23.8%에 달한다고 합니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사람 중에 백세까지 살 확률이 4명 중의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1958년생이100세까지 살 확률은 이분의 일로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백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보고에 의하면 저도 100세까지 사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100세까지 살게 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갈릴리교회가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7년 동안 주었던 생활비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데 이 교회의 무거운 짐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사택도 제가 죽으면 다시 교회에 돌려준다고 했는데 긴 시간 동안 돌려받지 못하면 교회 재정이 어렵겠구나 생각하니 이쯤 되면 아마 제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걱정도 되고 비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번째 교회도 교회지만 남아 있는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장장 30년을 누구와 같이 살까, 건강이 따라주면 다행이지만 혹시 아프기라도 하다면, 치매가 걸린다면,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나를 도와줄까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고 참담한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젊은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연세가 드신 분들은 틀림없이 저와 같은 걱정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연세 드신 분들을 만나보면 ‘오래 살지 말아야 할 텐데, 오래 아프지 말고 잘 살아야 할 텐데.’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시는 노인들을 보면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을 무작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건강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인도 건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고생을 시키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가 많은 사람들의 걱정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 있는 젊은 분들은 자신의 노년이나 죽음에 대해서 실감나게 생각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부모님의 노후에 대한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고생하지 말고 잘 돌아가실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오래 병석에 누워계시면 자식이지만 만사를 다 그만두고 수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동안에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는 것을 잘 죽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well being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well dying 과 같은 말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마지막 노년이 편안하지 못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죽어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 여기 저기 몸에 구멍을 뚫고 동물 취급을 당하며 마지막에는 식구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라도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양원에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구들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처음 보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품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때때로 ‘나는 어떤 조선족 여인의 품에서 죽게 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존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존엄한 죽음, 행복한 죽음을 죽지 못하는 것일까요? 더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누구든지 겪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죽음에 대해 준비하지 않으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은 우리 부모들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고 준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식들이 해야 할 중요한 효도입니다.
제가 이 교회를 목회하면서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나 교인의 부모나 식구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인생을 저렇게 마무리해서는 안 되는데, 사랑하는 가족이나 부모님을 저렇게 죽게 해서는 안 되는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은 본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죽음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수요일 성경 공부 시간에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것을 잘 정리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며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죽음에 대한 책을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식구들에게도 형제들에게도 꼭 읽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형제들 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상시에 형제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해서 함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긴 말씀은 드리기 어렵지만 죽음에 대해 간단하게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의학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물론 그런 판단을 내리기까지 여러 가지 의학적인 진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이 내려지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하나님이 우리 부모님을 식구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냉정하게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세상적으로 보면 불행한 것일 수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은 고난의 삶입니다. 죽음은 이와 같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입니다. 이제는 그만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라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주심으로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삶에 쉼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가리켜 잠을 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잠자리에 들어가면 모든 근심과 걱정과 어려움을 다 잊고 편안히 쉬게 됩니다. 육신도 쉬고 정신도 쉽니다. 만약 우리에게 잠이 없다면 얼마나 힘든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잠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생명을 연장해주십시오.” 물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지만 안 들어주실 때도 많습니다.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100년, 200년을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이 땅에 살거나 하나님 나라에 살거나 그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꼭 이 땅에 두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로동에서 사나 목동에서 사나 뭐가 다릅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살다가 지방으로 이사 간다고 큰일이 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거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거나 그게 그것이니까 살려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해주신 하나님, 제 생명을 연장해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할 때 히스기야 왕은 “제가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이웃에게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을 보시고 제 생명을 연장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살지 못하고 평생 욕심만 부리고 살다가 히스기야 왕처럼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 없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왕의 생명이 15년 연장 되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 왕이 므낫세 왕으로 이 왕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알고 히스기야 왕을 죽게 하신 것인데 히스기야 왕이 생명을 연장 시켜달라고 하니 들어주신 것입니다. 결과는 안 좋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히스기야 왕이 15년 전에 죽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으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나에게 좋은 일을 하신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멀쩡하게 걸어 들어가서 사망 선고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 병자가 되고 맙니다. 병원 치료를 해서 1, 2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통계에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기 1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36%를 쓴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6%를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기 6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절반 이상을 쓰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33%를 쓴다고 합니다. 무작정 살려고 애를 쓰지 말고 정말 이 만한 돈을 들여서 더 살 가치가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살면서 선한 일, 좋은 일 하지 못한 것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고 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돈 병원비로 사용해야 고작 1, 2년 생명 연장하는 것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죽음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인입니다. 갈릴리공동체계약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이 세상의 삶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고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도록 늘 준비하겠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늘 잊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아프지 않도록,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행복한 죽음을 죽을 수 있도록, 죽을 때 외롭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왜 이렇게 힘들까 하지만 그 이유는 기도로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루어주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여름 비바람 치는 날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는데 정말 비바람 치는 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증조할머니께서도 따뜻한 날 사흘만 아프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렇게 되셨습니다. 한상범 집사 아버님 토요일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정말 말 대로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돌아가시면 주일에 교인들이 다 오셔서 볼 수 있고 또 월요일에 장례를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의학적 치료를 얼마나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의료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금방 죽을 사람도 병원에 가면 살아나서 1, 2년은 더 삽니다. 생명을 쉽게 연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도 죽음이 닥치면 살고 싶어 합니다. 옆에서 보면 틀림없이 얼마 못 살 것 같은데 희망을 갖습니다. 어디 가서 무엇을 먹으면 살 수 있다고 하면 다 하고 싶어합니다. 온갖 유혹이 많고 그런 병원도 많습니다. 거기다 돈 다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1, 2년 연장합니다. 요즘 심폐소생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목에서 음식이 안 넘어가니까 위장에다 구멍을 뚫어서 직접 음식을 넣어준다고도 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이런 치료를 받으면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이 세상의 삶만 있다면 단 하루를 더 산다고 해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구태여 여기서 고생하고 쓸데없는 일에 돈을 쓸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본인이 잘 결정해야 합니다.
요즘 존엄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료행위, 만일 고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산소호흡기를 한다거나 심폐소생술을 한다든가 심장박동기를 달게 한다거나,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양제를 놔서 며칠 동안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본인이 결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결정하지 못합니다. 어떤 자식이 부모 치료하는 것을 중단하고 평생 죄책감에 살려고 하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정신이 온전할 때 결정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서약서를 준비했습니다. 추석 때 식구들이 모이면 이것을 다 의논하십시오. 여기에 보면 나는 쓸데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본인이 서명 날인하고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이 서약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입회인 두 명을 세워야 합니다. 의식이 분명할 때 의사에게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 절대로 중환자실에서 죽지 않아야 합니다.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외롭게 거기서 죽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일인실을 빌려야 합니다. 요즘은 병원마다 임종실이 따로 있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서 손 붙잡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죽어야 합니다. 담임목사의 손을 잡고 죽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절대로 중환자실에서 죽지 말고 절대로 간병인 손에서 죽지 말고 식구들의 찬송과 기도를 들으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정사진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부고도 쓰고 누구에게 알릴지 명단을 적어놓아야 합니다. 또 예배순서도 정해놓아서 찬송은 몇 장을 하고 설교는 어느 목사님이 하고 매장지는 어디이고 매장 방법은 어떠한지 본인 스스로 잘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가족들에 대한 죽음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본인이 준비해야 할 일도 많지만 주변에서 준비해야 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추석 때 가족들이 모이면 나는 이렇게 죽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가족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행복하게 죽을 수 있도록 행복한 죽음을 준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 교회의 목사로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십시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행복할 수 있고 좋은 일을 힘쓰고 선한 일을 힘써야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고 이 세상 떠날 때 주님 손잡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행복한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고 먼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여러분 모두 저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행한 일에 따르는 상급
계 14장 13절 / 석원태목사
정배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받은 반드시 속히 될 종말의 계시는 실로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그 중에도 오늘 우리가 받은 요한계시록 14장 가운데 시온산에 서있는 14만 4천인을 보게 됩니다(계 14:1).
저들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배우지 못할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14만 4천인은 요한계시록 7장 4절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다르게 표현한 성경이 있는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하였습니다(계 7:9). 저들은 어린양의 피에 속죄를 받은 표로 흰옷을 입었고, 세상에서 당한 여러 유의 큰 환난들에서 승리한 자들로서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7:1-14). 저들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 보좌 앞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21:26).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는 이 14만 4천인을 가리켜 어린 양 예수와 함께 승리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 14만 4천인은 여자(如字)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금 이후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의 총수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인내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절대 신앙 수절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도 요한은 열린 천국의 광경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 요한의 귀를 열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또 한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저들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고 구원얻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저들의 죽음을 가리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4). 복이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보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기록적인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14만 4천인 가운데 속한 자들입니다. 저들에게 따라오는 상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상급이 무엇인가?
Ⅰ. 수고 후에 받는 안식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은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여기 ‘쉰다’는 말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 안식은 ‘수고가 끝났음’에 대한 사실상 보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온갖 싸움의 격전지에서 무공을 세운 병사들이 즐거운 휴가를 얻음과 같습니다.
저들의 안식은 사실상 이 세상의 인생고를 끝낸 안식이었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모든 십자가적 사명의 삶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 얻은 안식이었습니다. 저들의 안식은 천국에 영존(永存)하시는 예수님과 직접 함께 하는 안식이었습니다.
다익(Dr. K. Dijk)은 저들의 안식에 대하여, ① 죄악의 고통에서 완전히 떠난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마귀와의 투쟁을 마친 후의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모든 고통거리와 적대행위를 당하지 않는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애쓰는 괴로움에서 떠나는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한 모든 사업의 고통에서 떠난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라면, 여기 세상이라고 하는 탄식의 마당에서 이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곧 영원한 집을 덧입는 즐거움입니다(고후 5:1-2).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세상에 있으면서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3-4).
이렇게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한 말은 저희의 행한 일에 따라오는 안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온갖 인생고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수고해서 얻을 때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가장 힘든 일을 하고 난 후의 안식만큼 달콤한 때가 없습니다. 힘써서 땀흘리고 일한 후에 맞는 수면, 그것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죽음의 풍랑을 겪은 후의 적막! 격전을 치른 후의 평화! 수고로운 삶 후에 맞는 죽음! 고통의 슬픔 후에 맞는 기쁨! 그 얼마나 맛좋고 달콤한 안식인가!
Ⅱ. 행한 일에 따르는 보상의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은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이 말은 저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수고스럽게 행한 업적이 금세에서도 따라오고, 내세에서도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수고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히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행득구(以行得求)주의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이 구원문제와 관계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을 육체가 아무도 없다고 하는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의 이름으로 행한 선행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선행이 그의 구원의 공로는 못되나, 금세 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러서 반드시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이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급(축복)은 예수를 믿은 후 성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선행의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의 협동적 산물입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이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42절에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저희 행한 일에 따라오는 보상의 축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엔젤레스 산 마리노(San-Marino)에는 헌팅톤 도서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서관은 전 미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연구시설과 역사적인 자료들과 20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도서관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서들과 18-19세기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희귀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쿠덴베르크 성경전사(1455), 토마스 게인스버그의 역작인 ‘The Blue Boy’(1770)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도서관을 설립한 사람은 다름 아닌 헨리 에드워드 헌팅톤(Henry E. Huntington, 1850-1927)입니다. 모태신자였던 그는 1850년에 미국 뉴욕 오네온타(Oneonta)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20세에 삼촌 콜리스 헌팅톤(Collis P. Huntington)을 따라 당시 중앙태평양 철도회사에서 감독직을, 나중에는 총본부장과 회장의 보좌관 그리고 회장까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삼촌이 그 철도회사의 회장이었는데, 그는 삼촌으로부터 독립하여 남 캘리포니아와 연결하는 철도수송 수단을 확장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삼촌이 사망했을 때 그는 삼촌으로부터 일천오백만불(1900년 당시 한화로 180억) 상당의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60세 되던 해 전격적으로 철도사업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유한 600에이커의 산 가브리엘 계곡(San-Gabriel Valley) 산 마리노(San-Marino) 목장의 조경과, 희귀한 도서와 소장품들을 수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삼촌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즐겁게 쓰여져야 된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1919년, 산마리노에 있는 자신의 동산과 부동산 그리고 수많은 수집품들을 포함한 전 재산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설 비영리 교육기업의 설립을 위해 기꺼이 양도할 것을 서명하였습니다.
그는 1919년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문과 예술과 과학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 사회복지를 촉진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죽기 전에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헌팅톤 도서관이야말로 내가 여러분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헌팅톤 도서관은 그가 1880년부터 모아온 뛰어난 희귀 도서들과 수집품들을 소장하기 위해 192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도서관 주변에는 1만 5천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식물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도서관과 그 주변 시설들은 연간 50만여 명의 일반사람들과 1800여 명의 학자들 그리고 2만 5천 개 학교 학생들의 교육 장소로 무료로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정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남 캘리포니아 개척자의 명단 중에서 가장 으뜸 가는 자리에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1927년, 기관지 폐렴의 악화로 그의 나이 77세에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따라 도서관을 헌팅톤 도서관이라 부르고, 이 도서관과 식물원에 그의 후손들을 유급관리직원으로 채용하여, 조상의 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심을 갖게 하면서 그 유산 보호에 이바지하게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헌팅톤 도서관을 통하여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 74년 된 지금에도 그의 행한 일이 금세에서도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내세에서도 그의 행한 일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일하는 세상에 출생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세상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남은 곧 이 세상에서의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일, 어떤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요 6:27). 이는 육신을 목적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배(腹)가 자기의 섬기는 신(神)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빌 3:19). 그것은 인본주의의 삶이 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요 6:2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목적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는 구원운동입니다. 바로 구령운동입니다. 그런 삶에는 축복의 보상이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6절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보면 심판 날에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15장 7절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그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나그네 되었을 때에 장막으로 영접함을, 벗었을 때에 옷을, 병들었을 때에 돌봄을,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위로를 행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35-37). 저들이 행한 일에는 상급이 따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이미 우리가 행한 일에 상급이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일에 축복의 상급이 따르고 있음을 여러 경우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전(교회당)을 건축한 일에나 신학교 운동이나 세계선교운동이나 전도운동이나 기타 교회 봉사에서 행한 일이 따르고 있습니다.
행한 일에 축복의 상급이 따름은 이것이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 영의 일, 진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금세와 내세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상급을 주시는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상급을 받을 사람이 살아서 영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따르는 그 상급의 내용이 또한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 상급의 내용이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빛나는 면류관 같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계 2:7),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계 2:26), 새벽별(계 2:28), 생명책에 빛나는 이름(계 3:5), 하나님의 성전 기둥(계 3:12), 보좌에 앉게 하여줌(계 3:21) 등이기 때문입니다.
행한 일에 따르는 상급! 확실히 그것은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축복입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4). 행한 일에 따르는 상급이 있는 축복의 삶, 믿음의 삶, 소망의 삶, 사랑의 삶을 삽시다. 희생의 삶, 충성의 삶을 살아갑시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계 14장 13절 / 이삼규목사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을 보면 천국에 들어가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될 성도들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끝까지 참아서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절대 신앙 수절 자들입니다.
그후에 주님은 사도 요한의 귀를 열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또 한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제가 지금까지 목회 하면서 100여 번이 넘는 장례를 집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여 설교를 한 본문이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냥 읽어만 주어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장례를 집례 할 때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저들의 죽음을 가리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4). 복이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보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기록적인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아담에게는 생소한 말입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죽는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담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즉 인간의 끝에 대해서 미리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으로 창조되었고 무엇에 의해서 유지되는가를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인간의 힘에 의해서 세상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창조물이 말씀과 상관이 없어진다면 창조의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흙은 히브리어에서 '아파르'라고 합니다. 아파르는 영어에서는 'dust' 즉 티끌 또는 먼지를 가리킵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아무런 쓸모 없는 티끌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티끌과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된 존재가 말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말씀의 능력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이고 말씀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 인간이라면 결국 처음의 상태, 즉 티끌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 3:19절에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즉 너의 처음은 흙이니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마지막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다는 것은 결코 인간은 마지막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마지막을 아는 자입니다. 인간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마지막은 무엇으로 인해서 온 것인지, 이것을 아는 인간이 지혜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 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런데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인간의 끝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창 3:4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것은 결코 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만 먹으면 끝이 아니라 현재의 성공만이 너희를 기다릴 것이라는 말로 인간을 유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끝을 보는 대신에 하나님 같이 된다는 현재의 성공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씀의 능력 아래 있지 않는 인간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과연 인간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사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오직 현실입니다. 마지막이 어찌되었든 관심 있는 것은 현재의 성공이며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끝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 끝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현실에 집착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영광이 되는 것을 얻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거부하겠다는 것이 욕망에 끌려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인간의 끝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인간에게 끝이 있음을 알고 그 끝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를 마음에 새기면서 인생의 끝에 서서 현실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고 희망적이지 못하고 발전적이지 못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끝을 언급하면서 삶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삶에 대해서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소망하고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을 사는 자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도 복된 죽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장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져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웃으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죽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두려운 죽음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까요? 그것은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후에 어떤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보증합니다.
1. 안식의 복입니다.
우리 본문은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여기 ‘쉰다’는 말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 안식은 ‘수고가 끝났음’에 대한 사실상 보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온갖 싸움의 격전지에서 무공을 세운 병사들이 즐거운 휴가를 얻음과 같습니다.
저들의 안식은 사실상 이 세상의 인생 고를 끝낸 안식이었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모든 십자가적 사명의 삶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 얻은 안식이었습니다. 저들의 안식은 천국에 영존(永存)하시는 예수님과 직접 함께 하는 안식입니다.
다익(Dr. K. Dijk)은 저들의 안식에 대하여, ① 죄악의 고통에서 완전히 떠난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마귀와의 투쟁을 마친 후의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모든 고통거리와 적대행위를 당하지 않는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애쓰는 괴로움에서 떠나는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한 모든 사업의 고통에서 떠난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라면, 여기 세상이라고 하는 탄식의 마당에서 이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곧 영원한 집을 덧입는 즐거움입니다(고후 5:1-2).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세상에 있으면서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3-4).
이렇게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한 말은 저희의 행한 일에 따라오는 안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온갖 인생 고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수고해서 얻을 때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가장 힘든 일을 하고 난 후의 안식만큼 달콤한 때가 없습니다. 힘써서 땀흘리고 일한 후에 맞는 수면, 그것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죽음의 풍랑을 겪은 후의 적막! 격전을 치른 후의 평화! 수고로운 삶 후에 맞는 죽음! 고통의 슬픔 후에 맞는 기쁨! 그 얼마나 맛좋고 달콤한 안식인가!
2. 보상의 복입니다.
본문은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4:13). 이 말은 저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수고스럽게 행한 업적이 금세에서도 따라오고, 내세에서도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수고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히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행득구(以行得求)주의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이 구원문제와 관계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을 육체가 아무도 없다고 하는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의 이름으로 행한 선행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선행이 그의 구원의 공로는 못되나, 금세 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러서 반드시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이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급(축복)은 예수를 믿은 후 성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선행의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의 협동적 산물입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이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42절에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저희 행한 일에 따라오는 보상의 축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 산마리노(San-Marino)에는 헌팅톤 도서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서관은 전 미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연구시설과 역사적인 자료들과 20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도서관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서들과 18-19세기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희귀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쿠덴베르크 성경전사(1455), 토마스 게인스버그의 역작인 ‘The Blue Boy’(1770)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도서관을 설립한 사람은 다름 아닌 헨리 에드워드 헌팅톤(Henry E. Huntington, 1850-1927)입니다. 모태신자였던 그는 1850년에 미국 뉴욕 오네온타(Oneonta)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20세에 삼촌 콜리스 헌팅톤(Collis P. Huntington)을 따라 당시 중앙태평양 철도회사에서 감독직을, 나중에는 총본부장과 회장의 보좌관 그리고 회장까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삼촌이 그 철도회사의 회장이었는데, 그는 삼촌으로부터 독립하여 남 캘리포니아와 연결하는 철도수송 수단을 확장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삼촌이 사망했을 때 그는 삼촌으로부터 일천오백만불(1900년 당시 한화로 180억) 상당의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60세 되던 해 전격적으로 철도사업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유한 600에이커의 산 가브리엘 계곡(San-Gabriel Valley) 산마리노(San-Marino) 목장의 조경과, 희귀한 도서와 소장품들을 수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삼촌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즐겁게 쓰여져야 된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1919년, 산마리노에 있는 자신의 동산과 부동산 그리고 수많은 수집품들을 포함한 전 재산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설 비영리 교육기업의 설립을 위해 기꺼이 양도할 것을 서명하였습니다.
그는 1919년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문과 예술과 과학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 사회복지를 촉진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죽기 전에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헌팅톤 도서관이야말로 내가 여러분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헌팅톤 도서관은 그가 1880년부터 모아온 뛰어난 희귀 도서들과 수집품들을 소장하기 위해 192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도서관 주변에는 1만 5천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식물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도서관과 그 주변 시설들은 연간 50만여 명의 일반사람들과 1800여 명의 학자들 그리고 2만 5천 개 학교 학생들의 교육 장소로 무료로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정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남 캘리포니아 개척자의 명단 중에서 가장 으뜸 가는 자리에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1927년, 기관지 폐렴의 악화로 그의 나이 77세에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따라 도서관을 헌팅톤 도서관이라 부르고, 이 도서관과 식물원에 그의 후손들을 유급관리직원으로 채용하여, 조상의 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심을 갖게 하면서 그 유산 보호에 이바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헌팅톤 도서관을 통하여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지금에도 그의 행한 일이 금세에서도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내세에서도 그의 행한 일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일하는 세상에 출생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세상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남은 곧 이 세상에서의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일, 어떤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요 6:27). 이는 육신을 목적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배(腹)가 자기의 섬기는 신(神)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빌 3:19). 그것은 인본주의의 삶이 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요 6:2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목적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는 구원운동입니다. 바로 구령운동입니다. 그런 삶에는 축복의 보상이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6절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보면 심판 날에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15장 7절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그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나그네 되었을 때에 장막으로 영접함을, 벗었을 때에 옷을, 병들었을 때에 돌봄을,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위로를 행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35-37). 저들이 행한 일에는 상급이 따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행한 일에 축복의 상급이 따름은 이것이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 영의 일, 진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금세와 내세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상급을 주시는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상급을 받을 사람이 살아서 영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따르는 그 상급의 내용이 또한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 상급의 내용이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빛나는 면류관 같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계 2:7),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계 2:26), 새벽별(계 2:28), 생명책에 빛나는 이름(계 3:5), 하나님의 성전 기둥(계 3:12), 보좌에 앉게 하여줌(계 3:21) 등이기 때문입니다.
행한 일에 따르는 상급! 확실히 그것은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축복입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4).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시렵니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높은 권세나 명예가 있으면 뭐합니까? 그것들이 펄펄 끓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그것들이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행위에 따른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마십시오. 나중에는 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쌓아두십시오. 그것만이 진정한 투자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이 '주 안에서 죽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행한 일이 따름이라
계 14장 13절 / 김명혁목사
오늘 아침에는 천국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조춘국씨의 이야기,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 이기풍 목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들이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들었을 말씀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천국에 갈 강변교회 성도들이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씀들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서 주님의 칭찬과 상을 많이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서 주님의 칭찬과 상을 별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현신애 권사란 분이 어느날 꿈 속에서 천국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멋지고 좋은 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있을 집은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 목사님, 아무 장로님, 아무 집사님의 집들은 멋지고 좋은데 자기 집은 이렇게 초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천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하늘에 쌓을 보화들을 많이 하늘로 올려 보냈는데 현 권사님은 하늘로 올려 보낸 보화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현 권사님은 너무 놀랐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한다고 했지만 너무 자기의 이름을 많이 나타낸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서 북한 선교 헌금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일들이 천국에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한 일들이 천국에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한 기도와 믿음으로 한 전도와 믿음으로 한 구제가 천국에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위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자는 [하늘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2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또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마25:34,35,41,42).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행10:4).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1. 어린 아이처럼 믿고 어린 아이처럼 순종하며 전도한 분
강변교회 초창기에 조춘국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시작하기 전 몇 달 동안 성경공부를 인도한 일이 있었는데 그 성경공부 반에 50대의 여자 한 분이 나왔습니다. 아주 단정하고 깔끔한 분인데 평생 불교를 믿으며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시작하기 얼마 전부터 척추암에 걸렸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고 사죄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가득했던 분노와 미움이 차츰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칼로 찔러 죽이고 싶어하던 친구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를 결혼식장에서 만났는데 그녀는 그 친구의 손을 붙잡고 자기는 그 친구를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 뱉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조춘국씨가 척추암으로 인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던 중 그녀의 몸 속에서 검은 돌 같은 것들 이십여 개가 나온 후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녀는 기쁨에 못 이겨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뛰어 다니면서 자기 친구들 대부분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암에 걸려 고통을 당하던 보사부 차관을 지낸 분도 그녀와 나의 전도로 주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누렸고 후에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조춘국씨의 믿음은 단순했고 철저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믿었고 어린 아이처럼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나중에 척추암이 재발해서 극심한 고통으로 자리에 눕곤 했는데 내가 그녀를 방문하고 그녀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녀는 극심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걷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면 아픈 것이 다 없어져요."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고 전도의 사명을 다한 후 가족들과 몇몇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그녀는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녀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준 담임목사가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축복의 장면이었습니다. 조춘국씨가 주님 품으로 가기 얼마 전 방에 누어 있는데 방안에 마귀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찬송가를 집어 던졌더니 마귀 새끼들이 모두 창문을 열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저는 조축국씨가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세상에서 척추암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느냐? 너는 병든 몸으로 전도하러 뛰어 다니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느냐? 많은 사람들이 너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느니라. 너는 내 말을 그대로 믿었고 그대로 순종했느니라. 너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일도 했느니라. 착하고 충성된 사랑하는 딸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2. 무소유로 살다가 무소유로 가신 분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날 새벽 1시 45분 한 평생을 사랑의 빛을 비추며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 우는 장기려 박사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무료로 진료했고 평생 무소유로 살았습니다. 1975년 정년 퇴임 후 집 한 채 없이 고신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0여 평 관사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1950년 아내를 북에 두고 남한에 와서 사는 45년 동안 아내를 애타게 그리며 마지막까지 홀로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월남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한 평생을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분은 작은 예수로 살았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가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명예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너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느니라. 너는 오직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하는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노라.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더럽혔지만 너는 내 이름을 빛나게 하며 살았느니라. 너는 땅에는 아무 보물도 쌓아두지 않았지만 여기 하늘에 수 많은 보물을 쌓았느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
3. 생명을 바쳐 전도하며 교회를 세운 분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일곱 분이 탄생했는데 그들 가운데 한 분이 이기풍 목사였습니다. 이기풍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평양에서 유명한 불량배로 살았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무조건 때려 눕혔고 술집에 들어가서는 술을 독 채로 퍼 마시며 행패를 부리곤 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쌤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피를 흘리게도 했고 새로 건축하던 교회당을 때려 부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스왈렌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의 땅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것이 다반사였고 몰매를 맞아 죽을 뻔 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도에 15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그 후 광주에서 목회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병세는 악화되어 거의 절망적이었지만 2년 만에 완쾌되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후 순천과 고흥에서 그리고 다시 제주도에 가서 남은 생명을 다 바쳐 복음을 전하며 교회들을 부흥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전라남도의 여러 낙도들인 우학리, 돌산도, 완도 등지를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나중에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하는 일경을 향해 이기풍 목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날 배반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배반하겠소." 70이 훨씬 지난 고령이었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결국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저는 이기풍 목사가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나를 박해한 적도 있지만 나를 인해서 수 많은 박해를 받았구나. 너는 내 교회를 때려 부신 일도 있었지만 수많은 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너의 재산과 생명을 다 바쳤구나. 너는 내 이름을 욕한 일도 있었지만 내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기 위해 수많은 고문과 모진 매를 다 맞았구나. 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저 버리고 신사참배를 했지만 너는 믿음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죽도록 충성했느니라. 너의 전도로 인해서 제주도와 전라남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느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
여기 계시는 분들도 조만간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한 믿음의 일들이 여러분들을 따를 것입니다.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나님과 성령님이 분명히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행한 일이 많이 따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행한 일이 별로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안흥규 장로님에게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불치의 병을 몸에 지니고서도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병을 이기며 나를 섬겼노라. 너는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내 집을 지어 헌당하기 위해 모든 수고와 모든 노력을 다했노라. 너는 많은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많은 양무리들을 온유함으로 돌보았느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 아마 한도정 권사님에게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한권사님은 오래 전부터 개척 전도와 선교와 구제와 봉사의 일을 남모르세 많이 해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직접 선교지에는 가지 못했지만 나의 종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노라. 너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 아마 백혜란 집사님에게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많은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도 나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품고 기도의 제사를 그치지 않았노라. 그리고 약한 자들과 아픈 자들을 사랑의 손길로 끊임없이 돌아 보았노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조만간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갈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한 일들이 우리를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 기도와 믿음으로 행한 전도와 믿음으로 행한 구제가 따를 것입니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여러분들이 천국에 이를 때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많이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4장 6-13절 / 조정의목사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했다’라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를 떠나는 탈교회, 탈기독교 현상이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외부의 탄압이나 내면의 타락에 의해 믿음을 잃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는다. 결국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다(딤전 1:19). 배교한다.
대환난 기간만큼 성도들의 인내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을 통치할 적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핍박으로 밤낮 쉼 없이 괴롭히고, 온갖 거짓으로 미혹하여 어떻게든 배교하게 만들기 위해 무섭게 달려들 것이다.
가장 믿음이 약해질 수 있는 시대, 인내가 요구되는 마지막 때, 주님은 성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절). 주 안에서 죽으라는 말, 죽기까지 주 안에 있으라는 말이다. 주 안에 복이 있으니 절대로 떠나지 말라는 호소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라는 명령이다.
주님은 모든 시대 자기 백성에게 인내할 것을 요구하셨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먼저,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자.
1. 인내 하는 삶은 영원히 승리하는 삶이다(12-13절)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지 요한은 분명히 밝혔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성도의 인내하는 삶은 적극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나 환경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많은 핍박과 유혹 중에도, 항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 순종의 동기는 기복이나 두려움 또는 의무감이 아니라 경외심(떨며 즐거워함)이다. 순종의 삶은 매 순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고, 인내하는 성도는 중심 없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중심의 진실함으로 순종의 예배를 드린다.
성도의 인내하는 삶은 또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삶이다. 믿음이 흔들릴 때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의지적으로 나의 믿음을 나 자신이나 환경, 타인이나 그 어떤 것에 두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믿음은 이기는 믿음이다. 죽임당할지라도 “주 안에서 죽는 자들”로 남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11, 13절).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지켜낸다. 멈춰있는 삶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계속해서 달리는 삶이다(고전 9:25-26).
이렇게 인내하며 순종하는 성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최후 승리, 영원한 승리를 얻는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절).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다. 죽기까지 충성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이를 변하지 않는 약속으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다. 성령님도 아멘(그러하다)으로 화답하시고, 성도에게 약속된 영원한 승리 곧 안식과 보상을 확증하셨다. 이 땅에서 밤낮 쉼 없이 믿음을 지키느라 수고한 성도는 이제 영원히 안식할 것이다.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한 일(선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다시 말해 수고한 모든 일에 관한 상급을 영원히 누릴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도 중에는 인내하는 믿음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처음 사랑을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죽도록 충성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회개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져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빼앗지 못하도록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정확하게 이것을 요구하셨다.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켜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런 자들에게만 영원한 승리가 주어진다고 약속하셨다.
요한이 본 세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경고하신 말씀도 동일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이 듣도록 큰 음성으로 천사들이 외친다. 인내 없는 삶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2. 인내 없는 삶은 복음을 부정하는 삶이다(6-7절)
첫 번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친 것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다(6절).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복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은 아주 명료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절).
임박한 심판을 알리며 천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창조주 하나님 곧 세상의 기초인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시작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을 계획하신 그대로 창조하신 주권자를 인정하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라고 명령한다.
마귀와 악한 세상 권세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 복음은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대환난 때).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이 복음은 계속해서 인내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인내 없는 삶은 복음을 부정하는 삶이기 때문이다(인내하는 삶이 복음에 합당).
믿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성도, 믿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성도의 삶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실제적 무신론자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입술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고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인정하지만, 실제 삶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감찰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자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믿는 자는 “반드시 그가(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건강을 잃고 나서 과거에 아주 건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옛날 자기 몸 상태를 떠올리며 지금 나빠진 건강을 돌보지 않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심했던 특별한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 나빠진 신앙 상태를 돌보지 않는다. 믿음을 거의 잃어버린 것처럼 살면서 과거 뜨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아무런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환난, 곤고, 박해, 기근(굶주림), 적신(헐벗음), 위험(위협) 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주신다(롬 8:35).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사망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과 높음과 깊음과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주신다(롬 8:38-39). 복음의 능력으로 무한한 사랑을 항상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으실 것처럼 사는 자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다.
3. 인내 없는 삶은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다(8절)
요한이 본 둘째 천사는 앞선 천사 뒤를 따라 말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8절).
큰 성 바벨론은 고대 시대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던 나라다. 신약 성경엔 로마 제국을 같은 이유로 바벨론이라 부르기도 했다(벧전 5:13). 다니엘은 적그리스도 왕국을 바벨론이라 불렀다(단 4:30). 세상의 임금 마귀는 모든 시대 세상 권세를 통해 사람들을 반역의 길로 이끌어 왔다. 특별히 대환난 시기, 온 세상을 통치할 적그리스도를 앞장세워 모든 나라를 우상숭배로 인도할 것이다(음행). 세상에 속한 모든 자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도록(사 21:9; 렘 51:8), 마귀는 세상 풍조를 따르는 모든 자를 심판으로 몰아넣는다.
둘째 천사가 외친 소리는 진노의 자녀를(엡 2:3) 생산하는 마귀의 나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확실히 무너졌다는 선언이다. 이 메시지는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믿음이 결국 승리한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한편 인내 없는 삶에 관하여 무서운 경고를 하는데, 인내 없는 삶이 무너질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무섭게 책망한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당신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귈 수 없다. 세상과 하나님이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인내하지 않는 성도의 삶에서 하나같이 발견되는 것은 그 마음에 다른 경외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배하는 대상은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성령이 아니라 육신이 기뻐하는 것, 영혼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 알아주는 것. 그것을 동경하고 추구하고 얻으려는 삶을 사는 자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 참고 절제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성도의 인내가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를 절대 가벼운 신호로 받지 말라. 당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4. 인내 없는 삶은 영원히 심판받는 삶이다(9-11절)
요한이 본 셋째 천사는 앞선 천사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외쳤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9-11절).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결단으로 이마나 손에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에게 영원한 심판,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다(영원한 지옥 형벌, 막 9:48). 요한은 심판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했는데, 특별히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조금의 은혜나 긍휼이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순수한 분노(눅 16:24), 거룩한 공의만 담긴 끝이 없는 심판이 마귀 편에 속한 자,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원수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환난 때,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최후통첩이다. 반대로 참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이는 최후 승리의 선포다. 예수께 둔 믿음을 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의 성취를 마침내 맛보게 된 것이다(요 3:16). 이 말은 곧 인내 없는 성도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받는 삶에 가깝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목사가 교회 계속 출석하지 않는 성도 때문에 고민이 되어 바울과 베드로에게 물었다. ‘교회 계속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자 바울과 베드로가 답했다. ‘나는 왜 당신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예화가 주는 교훈은 성도의 삶은 마땅히 복음을 부인하는 삶이 아니라 시인하는 삶이어야 하고, 세상을 동경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미워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하는 성도만이 영원히 심판받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과 함께 승리자의 자리에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절).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인내다.
신학적으로 ‘성도의 견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중도하차 하는 성도는 없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혼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요 18:9). 하나님 편에서 구원은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우리 편에서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인내하는 삶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인하고 계신다는 은혜의 증거가 삶에 분명히 나타난다.
죄를 미워하고 회개한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실질적 무신론을 버리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 불평·불신·불안을 버리고 감사, 신뢰, 기도에 힘쓴다. 세상에 잠시 눈길을 줄 수 있지만, 완전히 몸을 돌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기로 다시 결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그분과 달콤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말씀을 간절히 찾는다. 성도와의 교제를 원한다.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주님을 만나러 온다. 주 안에서 죽는 그날까지, 성도는 인내한다. 끝까지 ‘이기는 자’, 인내하는 성도만이 어린양이 약속하신 것들을 받는다.
요한계시록 14:6-13
찬송가 212장 / (작성: 김광욱)
요한계시록 12장에서 14장의 내용은 3개의 일곱 심판 중간에 있는 막간입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막간은 ‘일곱 나팔’ 심판과 ‘일곱 대접’ 심판 사이에 있습니다. 12장은 여자와 용, 13장은 짐승 두 마리, 14장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십사만 사천 명의 찬양과 천사들이 전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섯 천사 중 세 천사가 전하는 심판입니다.
그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이니(6-7절)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첫째 천사가 소개되는데 ‘다른 천사’라고 합니다. 다른 천사라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비교 대상의 천사는 이때까지 등장한 천사와는 구별된 천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첫째 천사가 공중을 날고 있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천사는 어디든지 쉽게 그리고 빠르게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갈 수 있습니다.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입니다. 즉 온 세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첫째 천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내용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냥 복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복된 소식은 영원불변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이란 복음서에 있는 나오는 주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모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도 복음입니다. 심판의 환상을 통해 죄인이 회개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본 구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복음은 일차적으로는 7절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천사가 말하는 복음은 궁극적으로는 복음서에서 전하는 복음과 복음서 이외 신구약 성경에서 전하는 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함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안다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함을 압니다.
오늘날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주 만물이 자연 발생했다고 믿으며 모든 생물종이 진화했다고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겠습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니 심판이 임박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영원한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진노의 포도주, 불과 유황(8-12절)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첫째 천사가 심판의 시간이 임박했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할 것을 선포하였는데, 둘째 천사는 심판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들의 행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천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말하는 대상은 ‘큰 성 바벨론’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시대에 바벨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벨론은 과거 교만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처럼 일차적으로는 ‘로마’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교만했던 바벨론처럼 타락한 악의 실체를 뜻합니다. 17장 5절을 보면, 큰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18장 2절에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악의 실체인 ‘큰 성 바벨론’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실체입니다. 본 구절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데,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음행’으로 번역한 ‘그’는 여성 인칭대명사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번역하면 ‘그녀의 음행’이 됩니다. 이는 바벨론의 음행입니다. 바벨론을 여성에 비유하였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자 구원받은 성도들인 ‘십사만 사천의 사람들’을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했는데, 성도들은 타락한 악의 실체이자 음녀인 바벨론에 의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악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악의 실체인 ‘큰 성 바벨론’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악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 즉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게 합니다. 우리는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지 않도록 악의 실체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주는 것들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울 수 있으나 그것이 진노의 포도주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짐승의 실체는 큰 성 바벨론의 실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악의 실체입니다. 짐승이 사람들에게 표를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실체인 짐승에게 넘어가는 사람은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에 받습니다. 그 표를 받는다는 것은 곧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악의 실체인 큰 성 바벨론에 넘어간 사람들도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짐승과 짐승의 우상을 섬기며 그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도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여기서는 포도주에 물이나 어떤 것을 넣어 희석하지 않는 원액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임을 선포하므로 아주 강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알려줍니다. 가차 없는 심판, 냉혹한 심판, 에누리 없는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으로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불과 유황의 고난을 받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받는 고난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최후 심판 때 받을 형벌이 불과 유황입니다. 19장 20절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20장 10절에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마귀들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괴로움을 당한다고 합니다. 21장 8절에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유황불에 던져진다고 하는데 죽는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괴로움을 당한다’,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악의 실체와 그에게 넘어간 자들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괴로움을 영원히 당한다는 뜻입니다.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고난의 연기가 쉬지 않고 세세토록 올라가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악의 실체와 그를 따랐던 자들의 형벌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있는 죄수는 교도소에서 있을 때 노동을 합니다. 노동을 하더라도 쉬는 시간이 있고 잠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 심판의 형벌에는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곳을 안다면 어찌 악의 실체인 바벨론을 따를 수 있으며,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며 이마와 손에 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악의 실체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행하지 못할 때 ‘짐승 같은 인간’ 또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것이란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돌과 나무와 금속의 형상을 만들어 ‘신’이라고 말하며 경배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같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 경배하는 사람이 이와 같은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상 숭배는 과거보다 더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만 우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복잡하고 다변한 세상에 짐승의 유혹도 다양합니다. 이러한 유혹 가운데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하는 성도가 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오직 말씀과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인내하게 만들며, 나를 짐승의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13절)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6절부터 12절까지 세 천사가 전하는 말을 들은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개의 복 선언 중 둘째입니다. 첫째 복 선언인 1장 3절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 구절에서는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순교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순교는 성도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는 자’라는 표현처럼 주님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수고는 무엇이며, 그들의 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의 수고는 12절의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수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킴은 쉽지 않으며 수고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의 쉼이란 짐승의 세력과 그의 핍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 쉬는 이유는 ‘그들의 행한 일’로 인함입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란 수고의 일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성도로서 환난과 핍박이 있는 이 세상에서 인내하며 수고한다면, 최후 심판의 때에 수고를 그치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악의 실체인 ‘큰 성 바벨론’과 짐승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성경 66권을 매일 열어 말씀의 빛을 받아야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매일 만나는 사람이 주님과 매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성경을 열어 주님을 만나 주님과 동행하므로 이기는 자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의 바벨론을 이기고 짐승을 이길 수 있도록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악의 실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옵소서. 물질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하시옵고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땅에서의 수고를 인내하여, 주님을 만날 때 쉼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성경을 열어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첫째 천사가 전할 영원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2.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대상자들은 누구입니까?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는 무엇을 뜻합니까?
3. 셋째 천사가 전하는 성도들의 인내는 무엇입니까? 나는 인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4. 주님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주님 안에서 죽을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5.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수고를 그치고 쉴 때가 오는데, 그 쉼은 행한 일에 따른 보상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계 14장 6-13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요한계시록 14장 6-7절에 첫 번째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가 전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둘째,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셋째, 그분을 경배하라.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토록 오시지 않을까… 2천 년이나 지났는데 오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심판을 Delay 하고 계신 것이죠.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둬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 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풀어야 할 것은 “큰 성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정체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당시 로마제국을 상징합니다. 물론 이 바벨론도 구약의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벨론과 로마제국이 갖는 특별한 하나의 공통점은 예루살램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제국이 갖는 압축적인 의미는 성도들을 압제하고,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는 가해자의 대명사입니다.
바벨론은 사탄을 섬기는 세상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손과 이마에 666의 표를 받게 한 제국… 우상이나 황제를 경배하게 한 제국… 만일 숭배하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하고 생계를 끊어버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핍박과 유혹 속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영적인 음행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큰 성 바벨론 은 그 당시의 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 당시의 문학에서 자주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큰 성 바벨론”이란 이 세상의 ‘권력’과 맘몬, 즉 돈의 위력을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그런 가치와 사고에 매혹되어 이미 잠식 당해 있습니다. 보이는 문화, 느끼는 문화, 돈의 위력에 모두가 빠져 있습니다.
8절을 보니, 둘째 천사가 이 바벨론을 향하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하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나간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일들을 계시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말이 미래시제로 나와야 합니다. 정확한 맥락이라면 “무너질 것이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과거시제로 그 것도 두 번이나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강조 하기 위해 사용한 문학기법 중 하나입니다. 미래에 이루어 질 일이 너무 분명하고 확실하다면, 과거동사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대방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넌 이미 죽었어.’’라 고 하면 “너 확실히 죽는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패망할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과거 시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셋째 천사로 넘어갑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 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계 14:9〜11)
첫째로 등장한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을 경배하라 심판의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며 온 우주적 운명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승리와 완성으로 결말 날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천사가 이 세상에 모든 심판 당해야 될 대상들이 패망 할 모습을 반드시 될 일이라고 매우 확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등장하는 천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떤 고난 속에 있는가를 아주 실재적으로 보여줍니다.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서 고난을 받는데,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갑니 다.
요한계시록 14 장 1절에서 시온 산에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사만 사천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과 정반대로 9〜11절에서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를 힘입지 않고 끝까지 이를 거역하던 무리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상반된 그림을 보여주는 뚜렷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는 최종적인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싸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말을 미리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까 하는 싸움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 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결말을 보고 간다는 것은 우리 가 이 전쟁의 승부를 아는 것입니다. 승부를 미리 알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끊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을 충실히 믿는 성도들은 이런 때 인내가 필요하다.’
(계 14:13 상반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13절 상반절을 보니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체 글을 받아 적고 있는 상황입니다. 듣고 있기만 한 것도, 어떤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고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습니다.
받아 적는 사람한테 왜 “기록하라”고 재차 강조를 하겠습니까? 꼼꼼하게 살펴보니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 전체에 12번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사용될 때마다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기록하라’’는 말은 극적인 장면의 전환을 앞둘 때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때 집중하게 하 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듣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더 중요할 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 극적인 장면의 전환과 혹은 그 내용이 매우 강조 되어야 될 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인데, 그 내용이 바로 등장을 합니다.
첫째,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4:13) 기독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복 되다고 말 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만이 죽은 자들 앞에서 부르는 찬송이 있 습니다. 그렇다면 왜 죽은 자들을 복 되다고 했을까요? 첫째는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둘째는 부활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이미 우리도 그 자리에 같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순간, 우리 죄는 일순간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함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이제는 죄 문제로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분 이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큼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 소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면 살아서 할 일이 있고, 죽으면 죽어서 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의 문제를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의 경계선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수고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의 하반절 내용을 살펴봅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셋째, 수고와 충성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이 땅에서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 안에서 머물며 살았던 눈물과 수고와 충성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4장 13절을 통해서 아주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약속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고, 그 복의 의미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 해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그칠 것이며, 이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온전한 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주님 앞에 충성 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따르는 결론은, 결국 공정하고 객관적인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 들의 삶은 절대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무조건 하나님 편을 들다 주님이 오라 하실 때 가는 것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눈치를 너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영원한 복음
요한계시록 14:6-13 / 민병석목사
서론
‘복음’유앙겔리온,ε?αγγ?λιον은 신약성경 전반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은 명사名辭 자체로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식어修飾語와 관형사冠形詞가 조합을 이루어 그 뜻을 더 빛나게 하거나, 복음의 주체主體를 명확하게 하기도 한다. 다음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에 다양하게 나타난 용례들이다.
‘천국 복음’(마4:23)으로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나와 복음’(막 8:35), ‘하나님 나라의 복음’(눅16:16),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 ‘하나님의 복음’(롬1:1), ‘그의 아들의 복음’(롬1:9), ‘그리스도의 복음’(롬15:19),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후4:4), ‘너희의 구원의 복음’(엡1:13), ‘우리 주 예수의 복음’(살후1:8), ‘우리의 복음’(살후2:14),‘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1:11) 그리고 ‘영원한 복음’(계14:6)으로 마쳐진다.
‘천국 복음’에서 ‘그리고’ 앞의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까지, 주요 의미는 예수님 초림에 관해서이다. 물론 이 ‘복음’ 안에 재림이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림 없이 초림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유일하게 ‘복음’이 기록된 요한계시록 14장 6절의 ‘영원한 복음’은 그 전에 기록된 ‘복음’과 성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1)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구절의 문맥을 보면 확연히 구별할 수 있게 된다.
1)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도 ‘복음’(유앙겔리센,ευηγγελισεν)이 등장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면 일반적 ‘복음’(유앙겔리온,ε?αγγ?λιον)이 갖는 의미와 차이가 있다(“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계10:7)).
전술한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에서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본문에만 나타난다. 이 단어 전후 문장은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로 말씀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은 ‘에콘타 유앙겔리온 아이오니온 유앙게리사이’?χοντα ε?αγγ?λιον α??νιον ε?αγγελ?σαι이다.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복음’ε?αγγ?λιον α??νιον, The Eternal Gospel(NIV), The Everlasting Gospel(KJV), An Eternal Gospel(NASB), 성경에 복음이라는 말은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원한 복음’이라는 용어는 이곳에만 등장한다. 복음 자체가 갖고 있는 뜻이 영원한 것이라는 점과 영생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익히 알고는 있다. 그러함에도 ‘영원한 복음’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지는 않는다. ‘영원한 복음’ 이렇게 두 단어를 묶어서 하나로 부르는 것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음은 복음인데 ‘영원한 복음’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그것은 재림이다. 영원한 복음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신앙을 말한다.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림과 함께 재림을 증거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이 논지의 당위성이며 목적이다.
결혼을 앞 둔 신부는 그 누가 아닌 오직 신랑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결혼 약속을 믿고 신랑이 와서 데려가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랑을 기다리지 않으면 신부가 아니다. 재림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기에 믿고 기다려야 한다(계22:20).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명하시는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신랑을 맞이하기에 합당하게 준비된 것이 재림의 신앙이다. 바로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 신부가 누구를 자랑해야하는가? 신랑을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자랑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앞으로 내가 맞이할 신랑은 이런 분이다”고,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고 엉뚱한 곳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신자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이다. 본고는 ‘영원한 복음’을 제하로 초림과 함께 재림을 전파해야 할 구체적인 성경적 입증을 본문 강해식으로 기술하였다.
본론
1.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해야 할 구체적인 성경적 입증 첫 번째는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세 천사가 등장한다. 6절에 ‘다른 천사’가 첫째 천사. 8절에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둘째 천사. 9절에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셋째천사이다. 이 세 천사가 순서대로 공중을 날아가면서, 차례대로 하나님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 중 첫째 천사가 7절 중간에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둘째 천사도 그 뒤를 이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8절에 소리쳤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지구를 말한다. 이 땅이 ‘무너졌도다’ 역시 심판을 말하고 있다. 10절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라고 셋째 천사가 외친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는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을 말한다. 이것을 ‘마시리니’라는 말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 천사가 공히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다.
심판은 무거운 주제이다. 그렇다고 이 주제를 회피하려고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심판받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는 심판을 알아야 한다. 들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그래야 심판에 빠지는 일에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요한복음 3장 16절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이 말씀을 가리켜 성경중의 성경이라고까지 한다.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어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고 16절에 이어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간절하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그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우리에게 나타난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함에도 끝까지 그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자들은 요한복음 3장 16, 17절에 이어, 18절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멸망’과 ‘영생’이라는 말이 나오고, 17절에는 ‘심판’과 ‘구원’이라고 했고, 18절에는 ‘심판받지 않을 자’와 ‘심판받을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서로 대비하면서, 우리에게 “멸망과 심판, 심판받을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영생과 구원을 얻어 심판받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중의 성경이요. 복음중의 복음이며, 보석 같은 말씀인 요한복음 3장 16절에도, 멸망, 심판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들보다 영생, 구원이라는 단어가 친숙하다. 가깝게 다가온다. 듣기 좋다. 기쁨으로 받았다. 이것은 좋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멸망과 심판을 듣지 않으려하거나,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생과 구원도 우리에게 현실로 올 것이고. 멸망과 심판도 불신자가 현실로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이 분명한데도, 왜! 심판에 대하여 들어야 하는가? 마태복음 11장 20-24절에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다(마11:20-2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이야말로 심판 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경고하고 계신다.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신다. 세계에서 인구 비례 예배당이 가장 많고, 교회의 목회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전함에도, 무반응인 사람들이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 그들에게 찾고 또 찾아 전해야하는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몸은 교회에 나오고 겉보기에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심령으로 진정 애통하며 자복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교만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돌이켜 보며, 회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회개는 다른 성도의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멸망 받지 않는 영생을 얻은 성도, 심판받지 않는 구원을 얻는 성도가 된다. 심판의 설교를 왜 들어야 하는지를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로마서 8장 1절에 말씀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로마서 8장 39절에 결론한다. 이렇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성도가 받은 구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심판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도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심판의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긴 것임을 더욱 상기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회개치 않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음부에까지 낮아’짐과 같은 종국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심판의 설교는 믿지 않는 자는 물론이고. 구원받은 자도 들어야 한다. 심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가 심판을 들어야 할 중요성은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8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심판은 이미 시작 된 것이다. 지금도 예수 믿는 자는 천국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이다. 심판은 이렇게 현재 진행이면서, 마지막 심판 최종적인 심판이 있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같은 말이다. 재림과 종말 그리고 최종 심판도 같은 말이다. 이 날이 가깝기에 성도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거나, 피하려 하면 안 된다.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심판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설교를 귀 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심판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이 자세가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하는 성도의 성경적 자세이다.
2. 심판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다.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해야 할 구체적인 성경적 입증 첫 번째는 이렇게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심판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을 행하실 때 그것을 피할 자가 없다.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8절에 둘째 천사가 하늘을 날면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친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지구를 상징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대양육대주가 ‘무너졌다’고 말씀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반복하며, 이 세상이 종국에는 멸망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심판으로 무너져버린 이 땅에서 피할 자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지금 당장 오시지 않고, 앞으로 20-30년 후에 오실 수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다. 언제 오시는 날을 알 수 없으니 그 때 오실 수도 있다. “그러면 그 때가서 지구 말고 다른 행성에 살면 예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지금도 화성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정착촌을 건설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미 1986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우주위원회에서 ‘달·화성 인간정착촌’을 30년 이내에 세운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었다.
근래에는 테슬라모터스Tesla Motors와 스페이스엑스SpaceX CEO인 엘론 머스크Elon Musk,1971-가 이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종말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 홀먼 젠킨슨 주니어는 ‘구세주Saviour 일런 머스크'라는 이름의 기명 칼럼을 통해, “50년 뒤 우주에 공장과 호텔이 세워지고 화성에 정착촌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스페이스X의 공"이라며, ”인류의 지성이 태양계 너머로까지 확장되는 먼 미래의 후손들은 머스크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칭송에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오바댜 1장 4절에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보면 네가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 내리리라’고 하신다. 이 온 우주도 누가 만드셨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이 온 우주를 누가 주관하시는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지구 말고 다른 행성에 살지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음에도, 심판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지옥’을 이야기하면, 성도는 예수님 믿고 천국가고 지옥에 가지 않는데도, 지옥 그러면 기분이 유쾌할 수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 겉으로는 “지옥 그까지 것 뭐가 대수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뭔가 불안해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지옥 가면 나만 가나 저렇게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숱한데”라는 쓸데없는 군중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쓸데없는 군중심리의 연장으로 심판 같은 말에도 안중에 없는 것이다.
이 심판에 대하여 8절에 ‘음행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나온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큰 성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사는 예수 안 믿는 모든 자들이 ‘음행’의 죄로 하나님 ‘진노의 포도주’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음행’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은 ‘음행’ 죄는 심판의 죄와 직결된다는 말이다. 음행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음행’에서 빨리 돌이켜야 한다.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음행한 자이다. “나는 하나님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없고 나는 나만 믿고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우상숭배자들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상숭배 즉 음행하는 자이다. 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도 예전에는 모두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때’는 우리가 예수 믿기 이전을 가리킨다. 예수 믿기 이 전 누구나 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마귀를 따랐다’고 말한다.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마귀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전에는 우리 모두도 다 마귀를 따라 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 자들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 본문의 ‘진노의 포도주’와 같은 말이다. 이렇게 예수 믿기 이전 ‘음행’, ‘우상숭배’, ‘마귀’를 따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고 멸망 받을 자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에베소서 2장 4-5절에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수밖에 없다고 본문에 말씀하고 있다. 이 지구 어디에 살던 설사 다른 행성에 거하는 자들이라도 말이다.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듣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 더 많아지는 것 같다. 필자가 중?고등학생시절 한국교회 최고의 부흥을 이루었을 때, 대한민국 인구 4천 만 명이었다. 1983년에 인구 4천 만 명을 돌파했다. 그 때 개신교 성도 수가 1천만 명이었다. 인구의 1/4이었다. 그런데 지금 인구가 5천 만 명인데 개신교 성도 수는 많이 잡아 7백 만 가량이다. 과거 25%에서 14%, 무려 11% 감소한 것이다. 단순히 수로만 놓고 보아도 심판 받을 자가 점 점 더 많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76%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판에 대하여 무감각해 하고 있다. 좀 후하게 쳐줘서, 막연히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음행, 우상숭배, 마귀를 따르는 불순종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만도 심판에서 피할 수 없는 이들이 76%나 달함으로 보고 기도해야 한다.
“저들이 속히 심판이 임박함으로 알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피함을 얻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목사님에게 권능을 주셔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미정착자와 새신자를 돌볼 때 교회로 인도되고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교우들 기업과 교회의 재정에 권능을 주셔서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물질을 허락 하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이 자세가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하는 성도의 성경적 자세이다.
3. 심판이 시작되면 구원은 없다.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해야 할 구체적인 성경적 입증 첫 번째는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심판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심판이 시작되면 더 이상 구원은 없기 때문이다.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9-10절에 셋째 천사가 하늘을 날면서 큰 음성으로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다.
“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계14:9-10)
먼저 ‘짐승’이 등장한다. 짐승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도 좋은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은 상징인데 이 상징인 짐승의 실제는 적그리스도이다. 지난 금요일 성도들과 함께 신년산상기도회를 위해 한 기도원에 갔다. 그 날 강사가 설교 중에 “적그리스도는 예수를 잘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다”라고 했다.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어로 ‘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만 보면,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는데, 방해하는 사람이던, 사상이던, 환경이던 다 적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은 그러한 것이 아니고, 단일 인격체를 말한다. 장차 종말에 등장할 한 인물이다. 똑같은 인간이나 많은 사람들을 심판에 이르게 할 자이다. 이 자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6장에는 ‘청황색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근데 이 자의 이름이 ‘사망’이다. 짐승,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을 성경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이 사망이나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고 하였다. 음부는 지옥이다. 적그리스도를 따르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와 같은 말씀이다.
구체적으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이라고 말씀한다. 짐승 즉, 적그리스도를 따르거나,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는 그 적그리스도의 동상에 절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666’, ‘육백육십육’ 짐승표 적그리스도의 표를 말한다(계13:16). 이 ‘짐승’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는 지금 존재해 있지는 않다. 혹 현존해 있다하더라도 그가 활동할 시기가 아직은 아니다. 본문에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는 이 세상의 종국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한 것처럼, 마지막 날 예수님 재림 이 전에 등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할 적그리스도도 아직은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은 종말의 때 이 자를 따르거나, 이 자를 본 뜬 우상에 경배하거나, 이 자가가 주는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짐승, 적그리스도에 미혹되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지옥 형벌을 말한다.11절에는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하였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종말에 세계의 영웅이다. 인류를 구할 자이다. 물론 그 정체는 가짜인데 깨어있지 못한 자들은 속게 된다. 이렇게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시대에 모든 민족과 나라를 미혹하게 할 자이. 그럼으로 절대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따르거나, 그 자를 그리스도로 오인하고, 그 자의 동상에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아서는 안 된다. 적그리스도를 따르면 곧장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불과 유황으로 고난’ 받는다. 이 지옥에서 ‘밤낮 쉼을 얻지’못하고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때에는 회개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 그래서 재차 삼차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하셔서 심판을 행하실 때는 끝이다. 적그리스도에 미혹된 죄를 회개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더 이상 구원은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고린도후서 6절 2절에 말씀한다. 지금은 누구나 어떤 죄를 범하였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함 얻고 구원을 받는다.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의 시대가 마쳐지고 종말의 때, 배교에 빠져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회개해도 용서 받을 수 없다. 은혜의 시대가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이 시작되면, 구원은 더 이상 없기에 우리는 지금 강권해야 한다.
인격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싫으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강권한다는 말은 상대방이 원치 않아도 말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세 천사가 순서대로 하늘을 날면서 차례대로 이 심판을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강권이 필요하다. 때로는 강권으로 상대방과 마찰을 빚고,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차라리 말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하였다”는 생각지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에게 전하라 예수 믿지 않으면 심판이다”고 하시면, 그에게 전해야 한다. 왜 강권해야 하는가? 안타까우니까 강권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갖기에 강권하게 되는 것이다. 강권하다가 부딪힘보다 강권으로 심판을 듣지 못해 멸망 받는 자가 되도록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자세가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하는 성도의 성경적 자세이다.
결론
심판이 시간이 이른 이때 우리는 심판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 심판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거나 피하려 하면 안 된다.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심판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설교를 귀 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또한 심판에는 예외가 없기에 기도해야 한다. 심판을 피할 수 없음에도 그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속히 심판이 임박함으로 알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피함을 얻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목사님에게 권능을 주셔서 설교를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미정착자와 새신자를 돌볼 때 교회로 인도되고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교우들 기업과 교회의 재정에 권능을 주셔서 심판에서 구원 받는 역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물질을 허락 하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심판이 시작되면 더 이상 구원은 없기에 강권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심판을 상대가 듣기 싫어해도 입을 열어야 한다. 강권하다가 부딪힘보다 강권으로 심판을 듣지 못해 멸망 받는 자가 되도록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자세가 영원한 복음, 초림과 재림을 함께 전파하는 성도의 성경적 자세이다.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앞 구절들과 연결하면 초림과 재림의 말씀과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영생과 멸망, 구원과 심판을 말한다. 심판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심판에 빠지는 일에 가까이 가지 않게 된다. 기도해야 된다. 다른 것보다.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말이다. 이러한 권능을 있는 교회 그리고 목사님과 성도님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강권해야 한다. 이러한 데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한다.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13절에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하셨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음에도 복있는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은 자의 죽음이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말씀한다. 구원받은 자의 천국에서 참된 안식을 말한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이 땅에서 예수 믿지 않았으면 심판으로 예수 믿었으면 구원으로 그 결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설교를 들어야하고 심판의 임박함을 알고 당함을 받는 자가되지 않도록 기도해야하며, 그들에게 강권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