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강. 로마서 서론 (롬 1:1-2)
롬 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성경(聖經)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낼 땐 그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편지 속에는 상대방의 의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편지를 받는 사람은 편지를 읽으면서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읽지 말고 편지를 보낸 분의 입장에서 읽어야 한단 말입니다. 상대방은 책망을 하는데 그걸 칭찬으로 들으면 안 되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어린아이에게 넌 아직 차 운전을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네가 차 운전을 할 수 있어?” 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녀석이 예! 전 잘 할 수 있어요! 라고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전 부정적으로 말을 했는데 그 아이는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면 편지를 완전히 잘못 읽은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그래요. 하나님께서 너희는 안 된다는 뜻으로 “넌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서 날 사랑 할 수 있어?” 라고 했는데 인간들이 예!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럼 완전히 헛 다리 짚는 거예요.
이 시대 교인들이 이렇게 성경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겁니다. 마치 대전에서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할 차가 부산으로 내 달리는 것과 같아요.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해요.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를 지내려고 하지 말고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알라고 하신 겁니다. 충성이 아니라 긍휼을 배우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 알라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제발 여호와를 좀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소리친 겁니다. 호세아가 지금 여호와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놈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자 자칭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놈들이 호세아의 외침에 콧방귀를 끼면서 별 미친놈 다 보겠네! 라고 외면하고 저리 꺼져 라고 하면서 핍박을 한 겁니다.
제사가 아니고 앎이에요. 앎!
그럼 먼저 예수님께서 성경을 어떻게 읽으셨는지를 보면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 당시에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바울도 구약의 모든 성경을 예수님으로 해석했어요. 이러면 우리도 모든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쓴 성경입니다. 그럼 로마서도 예수님 이야기이겠지요. 왜냐하면! 로마서도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는 아무나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아무나 성경을 보아도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를 보고도 십자가에 죽이는데 어찌 글자로 된 성경을 보고서 예수를 알겠어요. 예수가 비밀이면 성경도 비밀이란 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란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기록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주의 지혜이고, 인간의 지혜는 피조물의 지혜에요.
쉬운 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하늘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지혜는 땅입니다. 하늘에선 땅에 일을 훤히 알 수 있지만 땅에선 하늘의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어요. 하늘은 땅에겐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면 성경은 인간들에겐 비밀(秘密)의 책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해석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비밀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해석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비밀로 준 것은 자기 사람들만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으면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열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맞아요. 성경은 하늘의 지혜인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알 수가 있어요. 결국 이 세상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과 해석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과 육으로 난 사람 두 부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두 가지 성경 해석이 있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 간에 성경의 해석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늘 차원에서 해석을 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땅 차원으로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할 것이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문자적으로 인간 중심으로 해석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하고 이야기 하는데 인간은 자기 이야기로 듣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간에 성경해석을 놓고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는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인간이 해석하는 것과 성령이 해석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인간이 해석하게 되면 인간 중심의 해석을 하게 되고, 성령이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 주체가 누구냐로 갈라지게 되어요. 인간중심으로 보면 말씀을 지킬 주체가 인간이 되지만, 예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을 지킬 주체가 되는 겁니다. 결국 내가 말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을 지킨 것을 믿을 것인가로 남게 됩니다.
이걸 로마서에선 의(義) 싸움이라고 해요. 한마디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만든 율법에 의(義)를 신앙으로 내어놓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예수님의 의(義)를 믿을 것인가의 싸움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이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과 육으로 난 사람 간에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서로 상극(相剋)인 해석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던져 보면 두 인간상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아래서 태어난 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한 아담 안에서 나온 자이지만 그 속에서 두 인간으로 분류하고 계세요.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한 엄마 뱃속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지만 소속이 다른 인간으로 구분한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두 민족으로 분류를 했어요. 야곱은 천국백성이고 에서는 지옥백성으로 나누어 놓았어요.
그래서 성경은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근본(根本)이 다른 이 두 민족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표면적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이면적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을 말해요. 영적 이스라엘이란? 언약적 이스라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혈통적 이스라엘과 언약적 이스라엘은 근본이 달라요. 혈통적 이스라엘은 땅에서 나지만 언약적 이스라엘은 하늘로부터 나아져요.
야곱과 에서는 육신이라는 의미에선 동일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선 하늘과 땅처럼 달라요. 야곱은 언약의 후손이고 에서는 혈통적 후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누가 언약의 후손이고 누가 혈통적 후손인지 몰라요.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로 갈라지게 되어요. 결국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인간들이 알기를 바랄까요?
솔직히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지 않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모르면 진노를 퍼 붓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시 2: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12절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세상에 공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냈다는 말입니다. 외모로는 우리하고 똑 같은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몸에 빛이 나고 이마에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고 적혀 있으면 척 알아 볼 터인데 그게 없어요. 그냥 우리와 똑같아요.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선 난감한 겁니다.
그런데 정작 더 난감한 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입을 맞추라는 말은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사귐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입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노를 퍼붓겠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하겠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보낸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이러면 예수를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요.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가 예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심판주로 보내신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느냐 죽느냐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 때문에 망할 자들도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어요.
이러한 것은 인간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해요. 아니 예수를 사랑하고 안 하고는 인간의 자유잖아요.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유에요.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펴면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이겠대요. 그러니 인간 입장에서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께서도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를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를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왕의 명을 듣고 참석으로 하였고, 어떤 사람은 자기 볼일이 바빠서 참석을 하지 않았어요.
참석하고 안 하고는 본인들 마음입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극과 극입니다. 왕이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군대를 보내서 진멸을 시켜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참석한 사람은 천국으로 갔고 참석치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갔어요.
왕은 참석하지 못한 사람의 사정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아요. 왜? 참석하지 않았느냐만 따집니다. 이건 왕과 신하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란 뜻입니다. 신하는 왕에게 귀속 된 자에요. 그러므로 신하에겐 왕의 명을 거절할 자유가 없는 겁니다. 한마디로 신하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이런 관계에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도 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천국 이야기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시편기자가 말한 하나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것이나,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한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저주를 받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예수 믿기라고 봅시다. 그럼 예수를 믿는 것은 내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멸시킨다는 것은 참석치 못한 자들 입장에서 보면 강한 자의 폭력일수가 있어요. 아니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지옥으로 보내느냐 에요.
인간 쪽에서 보면 이건 엄연히 왕의 독재이고 폭거입니다. 맞습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폭력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걸 성경에서는 신앙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신앙이라고 한다면 내가 먹고 사는 일보다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더 중요해 집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사는 일보다 더 중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니까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인간의 운명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의 의중은 묻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난 이렇게 일을 한다고 통고하는 겁니다. 받아들이면 신앙이고 안 받아 들이면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누가 누구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 추상같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서 예수를 사랑하고픈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별 도리가 없어요. 그럼 저주 받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고픈 생각이 안 생기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은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등 떠밀어도 사랑하기 싫어요. 사랑을 강요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이겠대요.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합니다. 인간들 입장에선 불쾌하고 기분 나빠요. 하나님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화가 나는 겁니다. 그건 내 마음이지 왜? 당신이 예수를 믿으라 말라고 하느냐 라고 성질을 내게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을 간다고 하면 화를 내는 이유도 누구 마음대로 지옥에 가느냐 라고 해요.
이건 마치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가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내 놓으라고 한다고 하자 바로가 하는 말이 아니~ 여호와가 누구관데! 여호와가 어떤 놈이기에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 말라 하느냐고 화를 내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하나님이 하는 일이 너무도 일방적이라서 화가 나잖아요.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궁시렁 거리면서 원망하고 불평을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애굽에 바로 왕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처럼 우리 인생이 우리 것이라고 살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을 해도 너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합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너의 인생은 내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이세요. 구원자세요. 주인이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다니면서 너! 너 하면서 불러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호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호출 당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거역을 못해요. 뭔가에 홀려서 끌려가듯이 집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예~ 하고 따라다녀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꼼짝하지 못하고 따랐어요.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다는 것은 이 시대 말로 직장을 그만 두고 따랐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걸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사람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고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믿음을 받은 자를 찾아내고자 함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준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성도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아요. 이러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을 찾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예수에게 입 맞추고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이에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어떤 분인가요? 이 시대 예수 이야기가 너무도 난해해요. 교회마다 목사들마다 다 예수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다 달라요. 교파가 많고 교회가 많다는 것이 이를 자증하고 있어요.
같은 예수일 것 같으면 지역마다 교회를 하나씩만 세워놓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한 집 건너 하나가 교회에요. 그러면서 서로 자기교회만 정통이라고 합니다. 다 자기가 믿는 예수가 진짜라고 해요.
그러니 이 시대 예수는 교회 수 만큼이나 다 달라요. 이러면 복잡해집니다. 다 진짜라고 하니 어느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를 모르잖아요? 누가 진짜 예수를 증거하는 목사이고 누가 가짜 예수를 증거하는 목사인줄 헷갈리잖아요.
이렇게 되면 내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 집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보다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수인가? 아니면 가짜 예수인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에요. 분별이 안 되면 예수 믿는 것이 골치 아파져요. 골치 아프니까 에라 모르겠다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이 진짜겠지 라고 가서 숨어버리잖아요. 큰 교회가 진짜고 정통이겠지 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다수가 진리라고 믿어요. 그러니 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토록 교회마다 예수가 다를까요? 이는 마귀가 짝퉁 예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오공이 머리카락으로 도술을 부려서 가짜 손오공을 수없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다른 예수를 퍼뜨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조심하라고 했어요. 사도 요한도 영(靈)을 다 믿지 말라고 했어요.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많이 나왔으니 영(靈)을 분별하라고 했어요. 성경에 다른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다른 예수가 판을 쳤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부터 짝퉁 예수가 판을 치기 시작했어요. 다른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했어요. 이러면 누가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다 복음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곧 다른 예수와 전쟁의 역사에요. 그런데 어느 시대이고 진짜는 적고 가짜는 많았다는 것입니다. 진짜가 가짜 취급을 당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했어요. 마치 예수님이 버림 당하듯이 진짜들도 그 시대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고 버림을 당하였어요. 이런 일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어지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진짜들이 가짜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 수(數)가 차기까지 계속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진짜들이 가짜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몰고 가는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이 마귀에게 장악 당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마귀라는 놈은 항상 짝퉁으로 진품을 가려요. 가짜이면서도 진짜 예수님(하나님)으로 행세를 해 왔어요. 이 가짜가 진짜로 둔갑한 예수님(하나님)은 죄인들은 분별 할 수가 없어요. 오직 하늘로 난 자들만이 분별해요.
죄인은 마귀와 한 통속이에요. 한 통속이다 보니 통해요. 마귀가 심어 놓은 짝퉁 예수가 너무도 편하고 친근해요. 다른 복음이 듣기 좋아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은 인간의 생각과 척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짜 예수님이 좋은 것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가짜 예수로 위장해서 다정다감하게 다가와요. 내 귀에 캔디처럼 달콤하게 속삭여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주리 실 때 찾아온 마귀를 보세요. 얼마나 다정합니까?
40일을 굶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떡도 주고! 세상 부귀영화도 주고! 권세와 명예도 주겠다고 하잖아요. 세상에서 성공 시켜 주겠다고 하잖아요. 이건 인간들이 바라는 것들이에요. 우린 눈만 뜨면 이런 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어요.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야! 배 고프제! 뭐든지 말만 해라! 내가 다 들어줄게! 이 얼마나 고마운 이야기에요.
지금도 마귀는 우리에게도 찾아 와서 세상 것으로 달콤하게 속삭여요. 정 목사 뭐 필요한 것 없나! 교회 부흥시키고 싶지 않나! 내게 절만 해라! 그러면 다 해줄게! 그러고 미혹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진짜 예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분이란 것이 드러납니다. 진짜 예수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분이란 것으로 드러나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니까 자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는 사람들이 싫어해요.
인간들이 싫어해야 진짜 예수인 겁니다. 참 복음을 들으면 왠지 화가 나고 기분이 찜찜해야 되어요. 왜냐하면! 진짜 예수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진짜 예수를 전하는 목사도 싫어하고 미움을 받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 내가 만약에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수는 가짜 예수란 말입니다. 그럼 다른 예수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봅시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일찍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야기를 기피하고 떠나는 겁니다. 왜? 떠나는가 보았더니 거짓 선지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좋아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른 복음이 뭔가 살펴보았더니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이었어요. 한마디로 듣기 좋은 말을 하더라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의 비위를 살살 맞추어주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비위를 맞추는가 하면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했어요. 어떤 복음인가 하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예수만 믿지 말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키라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이 교인들에게 달콤하게 들렸는가 하면 유대인들에겐 예수를 믿으면 출교를 당하고 극심한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유대교는 원수였어요. 예수님이 유대교 신앙을 뿌리째 뽑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유대교를 떠나야 했고 유대교를 믿으면 예수를 죽여야 했어요. 유대인들은 민족 자체가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쫓겨나서 먹고 살지를 못해요. 생존에 문제가 걸렸어요.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거짓 선지자들이 다니면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솔깃합니까.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어주는 적당주의를 가르친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피에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슬며시 끼워 넣은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이 없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갈라디안식 신앙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건 아니다. 그런 믿음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을 다 이루신 것인데 뭘 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느냐! 그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고 예수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늘 일어나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 갈라디아교회와 같아요. 예수 믿기에 성화라는 인간의 행함을 섞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십자가만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도를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만이나 십자가도라는 끝에 글자인 “만”자와 “도”자는 글자 한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요.
십자가만은 오직 십자가뿐이란 말입니다. 십자가가 전부이다! 십자가에서 다 끝났다! 십자가 밖에 없다! 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피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도는 한 부분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은 부정하진 않지만 그래도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에다 인간의 행함을 슬며시 신앙으로 끼워 넣은 겁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성화신앙입니다. 성화(聖化)란?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을 말해요. 성화신앙의 바탕엔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깔려 있어요. 이러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거룩해 진다고 하니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인간이란? 자기의 존재에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자들이잖아요. 내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준다고 하니 얼마나 뽀대가 납니까? 그러니 성화주의 신앙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것을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십자가만 말하면 반쪽 복음이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고! 예수를 믿어도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합니다! 라고 십자가도를 말하면 온전한 복음이라고 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겁니다.
야고보서를 봐라! 믿음과 행함이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행함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믿음과 행함이 따로 따로인 것으로 생각해요. 성화주의자들은 믿음과 행함이 하나인 줄 몰라요. 믿음 속에 행함이 있는 줄을 몰라요. 그러니 믿음만 있으면 안 되고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미혹하는 겁니다.
믿음과 행함이란? 몸과 영혼과 같아요. 몸과 영혼은 분리 될 수가 없어요. 분리되면 죽어요. 믿음과 행함도 그래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함이에요. 믿음 따로 행함 따라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란 말입니다.
살아 있으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겁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거에요. 그래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행함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믿음이 살았다면 반드시 행함은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거에요. 가짜란 말입니다. 귀신의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화주의자들은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행하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움직여 주어야 교회가 운영이 될 것이 아니냐에요. 결국 교회라는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 교인들의 정성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 피만 말하지 말고 인간의 정성도 신앙으로 인정해 달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다 했다고 말하지 말고 인간들이 할 여지를 남겨 두라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열심을 내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할 것이 아니냐 에요.
안 행하니 성화를 신앙으로 둔갑을 시켜서 행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이건 죽은 나무에게 물을 주는 것과 같아요. 산 나무는 물을 주면 자라지만 죽은 나무에게 물을 주면 썩어요. 믿음 없는 자에게 행함을 강조하면 점점 더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대적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에다 인간의 행함을 섞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과거 감리교 신학대학 총장으로 지내던 변선환 목사라는 분이 있었어요. 이 분의 주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기독교만이 아니고 다른 종교로서도 나아갈 수가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다른 종교도 용납해 주자는 겁니다.
그 논리를 산 정상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했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산 정상이라고 한다면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는 겁니다. 동쪽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서쪽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남쪽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북쪽에서 오르는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불교로도 구원의 길이 있고! 이슬람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세상 모든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온 인류는 하나라는 거예요. 온 인류가 하나이면 하나님께 다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비록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같기 때문에 꼭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말은 너무 이기주의이고 편협한 사고라는 겁니다. 좀 대승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교회들이 불교의 석가탄신일에 연등도 걸어주고 축하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성탄절이 되면 절간에 성탄 트리를 세워 축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서로 화목하고 상생하니 얼마나 좋으냐 에요. 더 나아가 목사들이 절에 가서 설교도 하고 스님들도 교회에 초청해서 설법을 강론하게 하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선 대승적 차원에서 좋다고 하고선 조00 목사를 승가대학원에서 초청했어요. 조00 목사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스님들 앞에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어요. 서로 인정하고 착하게 살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했어요. 자기는 은퇴하면 종교 화합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참으로 얼마나 대승적으로 포용력이 있는 열린 목사입니까? 스님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어요. 역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하는 목사는 그릇이 다르다고 엄청난 칭찬을 받았어요.
세상 적으로 보면 온 인류는 모두 한 형제들이고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같으니 서로 평등하다고 하니 얼마나 멋집니까. 종교다원주의라는 치마폭에 불교를 폭 감싸고 있잖아요? 이걸 성경에선 음녀라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 인간을 한 형제로 보지 않고 두 부류로 보아요.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 속에 야곱과 에서처럼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두셨어요. 육적으로 인간이라는 의미에선 한 통속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한 통속이 아니에요. 두 부류에요. 그러니 아무 종교나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한 길 예수라는 길 뿐이에요.
그러니 십자가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뿐이고 다른 길은 없다는 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십자가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 말고도 다른 여러 방법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만과 십자가도는 달라요. 비록 “만”자와 “도” 자는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이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제 이름이 정낙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정락원이라고 쓰는 분들이 있어요. 한문(漢文)으로 하면 뜻이 같아서 사용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 따지지 않아요. 그런데 한글로 컴퓨터에 입력을 하면 완전히 달라요. 정낙원이라고 입력하면 울산목양교회 정낙원 목사라고 하면서 우리 블로그로 안내가 되는데! 정락원이라고 치면 전혀 다른 것이 나와요. “낙” 자와 “락” 자는 “ㄴ” 과 “ㄹ” 이라는 자음 하나 차이인데 전혀 달라요.
이처럼 십자가 “만”과, 십자가 “도”는 완전히 달라요. 십자가 만을 말하면 한국교회에선 이단으로 취급당해요. 하지만 십자가 도를 말하면 쫓겨나지 않아요. 그래서 목사들이 십자가만을 말하지 못하고 십자가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십자가 만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십자가 도를 말하면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게 되어서 성화도 인정하고, 개혁도 인정해요. 이렇게 되면 인간의 착한 삶도 의로운 것이 되어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의(義)를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의(義)를 율법적 의(義)라고 하는데 로마서는 이걸 죄라고 하고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주셨는데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오는 의(義)라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의 핵심 사상이에요.
신앙생활은 의(義) 싸움이에요. 이게 모든 성경의 중심사상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 지킴으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인간의 행함에선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의 신앙은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안 지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라고 따돌림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이 다니면서 야~ 우리가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말리지 않겠는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율법은 우리 조상대대로 지켜온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키면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 아니냐! 라면서 미혹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따랐어요.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듣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믿고 천당도 가고, 율법을 지켜서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으니 얼마나 좋아요. 일석이조(一石二鳥)잖아요. 꼭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고 성화도 해서 사람들로부터 착하다고 칭찬도 들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자 사도바울이 야~ 이 사람들아!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언제 그런 복음을 전했느냐! 그건 가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왜? 예수의 피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 과거 이력을 말해 줍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갈 1:11-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땐 골수 율법주의자가 아니었느냐! 자신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조상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내가 지금 내가 말하는 것처럼 율법신앙을 폄훼하고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예수님께서 삼년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복음을 알려 주셨는데 이건 과거 우리 조상들이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의(義)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너희들 말대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식으로서 의(義)가 두 가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의 출처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학교에 가서 배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므로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에 의(義)를 폐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그런 신앙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해요.
만약에 율법을 지켜서 의(義)가 된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헛 죽음이 되고 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율법지킴과 예수 믿음은 하나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둘은 빛과 어둠처럼 이질적이라서 본성적으로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용납이 안 되어요.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선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어요. 이는 곧 율법 지킴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온전한 신앙이라고 칭찬을 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책이에요. 무엇을 말하고자 기록했느냐 하면 율법 외에 다른 의(義)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율법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의(義)냐! 예수님의 의(義)냐의 차이에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에요.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에요.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에서만 나와요. 율법을 준 것은 인간에게선 하나님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나왔어요. 하나님 나라를 말해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것은 전부 하나님 나라에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와 같은 것입니다. 진짜가 아니고 가짜에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어요. 형상이란? 본이에요. 복사본이란 말입니다. 그럼 인간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림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을 말해요.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시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그 자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예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여도 동일해요.
그럼 예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인간 속에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상인 겁니다. 진짜가 아니고 가짜란 말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를 보여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양자라고 하는 겁니다. 양자는 친 아들이 아니고 가짜 아들이에요. 양자는 친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아들인 겁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태양이라고 하고 인간을 달로 표현하는 것은 발광체와 발암체의 차이를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발광체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빛 자체를 말하고! 발암체는 발광체에서 뿜어 준 빛을 받아서 반사해서 보여주는 빛을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라고 한 겁니다. 낮은 발광체가 주관하는 영에 영역이고, 밤은 발암체가 주관하는 육에 영역을 상징해요.
예수님은 빛이세요. 우리는 그 빛을 받아서 세상에 반사시켜주는 빛이에요. 성도를 일컬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는 말은 너희는 세상 속에 예수를 보여주는 존재로 서 있다는 말이에요. 이걸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은사로 부어주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님에게로부터 받은 은사로 세상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주시면 사랑을 토해내고! 예수님이 용서를 주시면 용서를 토해내고! 예수님이 긍휼을 주시면 긍휼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선 뿌리에서 공급하는 진액이라고 했구요. 성도는 스스로 토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므로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받은 것을 토해내게 하시려고 성령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고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속에선 두 가지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받은 것을 토해내는 도구로서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습을 그려내는 도구로서의 모습이에요.
여기에 인간의 몸은 반발하면서 죄를 쏟아내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믿음에 이끌려 가면서 죄를 토해내는 겁니다. 그럼 성령께선 우리의 이런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고 알려주세요. 우리 몸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공로만 몸에 남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에 대하여 조금만 더 살펴봅시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어요. 그러니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거울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짝퉁인 것입니다.
세상 빛을 통해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함이고!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의 생명을 말해주고자 함이고!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은 인간의 의(義)는 예수님의 의(義)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짝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어요.
바울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를 열면서 인간의 의(義)가 아닌 그 아들에 의(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오직 하나에요. 모든 성경은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도 이 아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바울의 주장을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유대인들의 주장은 선지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도록 말했지 언제 예수님을 말했느냐 입니다. 왜? 성경을 왜곡하느냐고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래 나도 과거엔 너희들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우리가 이단이라고 죽인 그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는 것은 곧 우리가 보아온 성경 해석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대대로 지켜온 율법을 근거해서 예수를 조사해 보니 이단이라고 판명이 되어서 죽었는데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냈다는 겁니다. 나도 예수를 죽이는 편에 서 있던 사람으로서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 조상대대로 지켜온 율법 신앙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예수님 편을 들어 주셨으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다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수님을 가지고 구약 성경을 재해석 해 보자는 거에요. 예수님이 자기 몸이 성전이라고 하고!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도 하고! 자기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했고! 내가 곧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고! 누구든지 자기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했고! 그러면서 자기가 율법을 온전케 하였다고 하였다는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율법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고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해석해 보자는 겁니다.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년동안 계시를 받아 보니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이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예수를 믿으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율법 외에 다른 의(義)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義)가 주어진다는 거에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럼 율법은 뭐냐고 합니다. 율법은 폼으로 준 것이냐! 이에 바울은 율법은 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끝에 가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야지 인간의 행함이 나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애초부터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하면서 너 미쳤구나! 아니 어떻게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성경 해석을 무시하느냐!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생각일 뿐이고! 도깨비 같은 괴변(怪變)이고! 유대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속임수 같은 궤변(詭辯)이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그래서 너도 이단이라고 유대교에서 축출하고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같으면 바울과 유대인의 주장 중에서 누구 주장이 옳다고 손을 들어 주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아니 바울의 손을 들어 줄 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교인들이 훨씬 많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갈라디안식 신앙을 선호하고 있어요. 갈라디안식 신앙이 뭔고 하니 예수도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건은 어느 시대고 동일한 맥(脈)으로 나타나요. 갈라디안식 신앙을 이 시대로 말하면 일명 개혁주의 성화주의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신앙은 없다는 겁니다. 신앙은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율법을 지킬 것인가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할까의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믿을까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과 인간의 행함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율법적 행함은 의미가 없어지고, 율법적 행함을 의미가 있다고 고수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섞일 수가 없어요. 반드시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갈라디안식 신앙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변증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서는 의(義)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겐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善)이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은 의인에서만 나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가 없는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이란 죄인에게선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선(善)하게 사세요! 라고 합니다. 이건 악(惡)을 전제하는 말이에요. 이는 곧 당신 안에는 선(善)과 악(惡)이 있는데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선악과(善惡果) 속에 선(善)과 악(惡)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구분도 되지 않을뿐더러 분리 할 수도 없어요. 그러므로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인간에겐 선(善)과 악(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에요.
선(善)이 죽으면 악(惡)도 죽고, 악(惡)이 죽으면 선(善)도 죽어요. 선악의 나라에선 선과 악은 서로 하나로 공존하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선악(善惡)의 나라입니다. 인간 자체가 선악과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없애라고 하지 않아요.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나눈다면 나중에 심판 할 때 선의 중수(重數)와 악의 중수를 서로 달아서 선이 많으면 천국으로 보내고 악이 많으면 지옥으로 보내는 식이 되어 버려요. 이러면 천국 입구에 저울을 같다 놓고 선과 악을 달아서 결정해야 할 겁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행위로 결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는 예수 밖에 있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밖에선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선악의 교육을 받아요. 선악의 교육이란? 인과응보(因果應報)식 교육이에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응보식 교육이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평상시에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하고 나쁘게 살았으면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 앞에선 죄이고 악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에요. 인간이 내어 놓는 선이든 악이든 다 죄에요. 그러니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논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죄에요.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불신앙이에요.
죄인에게 선과 악은 마치 육신과 영혼이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에요. 이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선(善)과 악(惡)으로 따로 따로 구분시키지 않아요. 그러니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된 인간에게 나오는 행함을 가지고 선(善)이다 악(惡)이다 를 구분하고 나누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에요. 넌 죄인이라는 겁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죄이지 그 속에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지 인간 외부로 나타나는 행함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 인간들이 바퀴벌레를 백해무익한 놈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같아요. 인간들은 바퀴벌레의 행함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인간에게 바퀴벌레는 그냥 악이에요. 바퀴벌레 자체가 인간에겐 무가치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퀴벌레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나와서 주인님 나는 어제 저녁에 옆집에 굶고 있는 바퀴벌레에게 내 밥을 주었습니다! 병든 바퀴벌레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나 착하지요! 그러면 주인이 그래 착하구나!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도리어 어이쿠~ 여기 바퀴가 있네! 하고 콱 밟아 죽여요.
바퀴벌레 세계에선 분명히 자기 밥을 이웃에게 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선(善)일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선 바퀴벌레에게선 인간이 바라는 선(善)이 나올 수 없어요. 이는 인간에겐 바퀴벌레 자체가 사라져야할 악의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서에 보면 욥과 그 친구들이 바퀴벌레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욥기 35장입니다.
욥 35:1-8=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과 그 찬구들은 욥의 고난을 가지고 욥의 행함에서 찾고자 한 겁니다. 욥에 친구들은 욥에게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다 잘못 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매 맞을 짓을 했으니 고난당한다는 거에요. 그러자 욥은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난 매 맞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둘 다 선악의 법으로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후를 보내서 책망하는 겁니다. 야~ 이 등신들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뭐가 답답해서 너희들 하는 짓거리를 보고 좌다 아니다 하느냐입니다. 이는 하늘에는 하늘에 죄관이 따로 있고 땅에는 땅에 죄관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땅에 죄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오시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죄관을 틀렸다고 책망을 해요. 기존에 죄관은 욥과 그 친구들과 같은 죄관이에요. 율법적인 죄관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죄관을 주셨어요.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 언약 때에는 옛 언약의 죄관으로 다스렸어요. 그러나 새 언약이 이르러서는 새 언약의 죄관으로 다스려요. 새 언약 안에서 옛 언약적 죄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적 죄관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로 판단했어요. 그럼 새 언약에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로 죄다 아니다를 판단하면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옛 언약은 인간하고 언약을 맺은 언약이에요. 그래서 옛 언약에선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주체였어요. 인간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면 죄가 되었어요. 그러나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언약을 맺었어요. 그럼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새 언약 하에선 자기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말씀을 대신 다 지켰다는 것을 들고 나아와야 되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인간이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라고 들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함을 인간들 관점에서 틀렸다 맞다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관점에서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행함 속엔 하나님의 의(義)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잘 이해하세요.
인간 속엔 양심(良心)이 있어요. 하지만 이 양심은 선악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양심 속엔 선과 악이라는 두 법이 있어요. 선악과를 바탕으로 한 양심은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선과 악으로 구분해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악과가 주는 양심이 있으므로 본능적으로 선으로 살든지 악으로 살든지 요구받게 되어 있어요. 선이 주장하면 착한 행동을 하게 되고 악이 주장하면 악한 행동을 하게 되어요. 여기서 착한 행동이다 악한 행동이다는 인간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말하는 선과 악은 하나님 기준의 선과 악이 아니고 인간 기준의 선과 악이에요.
인간 기준의 선과 악은 인간들에게 어떻게 대하였느냐 로 결정이 되어요.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악한 것이 되고 남에게 유익을 주었으면 선한 것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과 악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선과 악이지 하나님의 선과 악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선과 악은 마치 바퀴벌레들의 선과 악과 같아요. 그러므로 인간의 양심이 원하는 선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선이라고 들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선악과가 주는 양심으로 율법을 지킨 것은 선이고 안 지킨 것은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 행동에서 의(義)다 불의(不義)다 또는 선과 악을 나누어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단호하게 율법 속엔 하나님의 의(義)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율법에선 하나님이 원하는 선(善)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냐! 봐라! 율법이 전부 하라 하지 말라로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은 아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려고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너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로 갈라지게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를 알아봅시다.
먼저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자 보세요.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이 죄를 지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율법을 주지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면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죄가 없으면 율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율법과 죄는 한 셋트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사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항상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없는 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죄들을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에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율법이 인간들 속에 있는 죄들을 실 뽑아내듯이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내서 너는 죽을 놈이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인간은 나이와 환경에 따라서 죄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요. 어린아이 때 짓는 죄의 모습과, 청년 때 때 짓는 죄의 모습과, 장년 때 짓는 죄의 모습과, 늙어서 짓는 죄의 모습이 달라요.
그러니 죄의 모습은 무궁무진한 겁니다. 우리인생이 이처럼 변화무쌍해요. 그러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율법이 살아서 우리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넌 죽을 놈이야 라고 고발해요.
그런데 바울은 이 율법도 예수님이 올 때까지 한시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한시적이란? 정한 기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고 합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하나님이 보내겠다고 창세전에 약속 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창세전에 약속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이세요. 그럼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라진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 안으로 귀속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새로운 죄관이 생겨나요. 이젠 예수님을 중심으로 죄다 아니다 를 판단해요.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로 달라져요. 예수 안은 의(義)고, 예수 밖은 죄(罪)에요. 예수 안은 선(善)이고, 예수 밖은 악(惡)이에요. 이러면 기존에 우리 행함으로 판단하던 죄관으로 사는 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로 달라진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몽학선생이란? 길잡이에요. 율법이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인 겁니다. 율법이 왜? 인간이 율법 지킴으로서 의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에게서만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지를 알게 해 주어요.
창세전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세계에 예수님을 보내기로 했어요. 왜? 보내는가 하면 자기백성들이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서 죄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 율법이 누구에게로 끌고 오는가 하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요. 왜?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는가 하면 너희는 죄에 갇혀 있는데 예수님이 너희를 건져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정리하면 이래요.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죄인이라고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애당초 없었어요.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들이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 죄인들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기 위함이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죄인으로 정죄를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을 정리하면 이래요. 첫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인간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 봅시다.
롬 7:7-9=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로마서 7장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율법이 아니었으면 죄가 뭔 줄 몰랐다는 겁니다. 탐심이 죄인 줄 몰랐는데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들어오고 보니 내 속에 있던 탐심이 죄로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분명히 죄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죄라고 누가 지적해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니까 내 속에 죄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내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이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라고 하면서 죄를 자꾸만 만들어 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율법이 나를 더욱 더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하는 겁니다. 죄를 더 짓게 한다고 해서 없는 죄를 더 생산해 낸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해 버린단 말입니다.
죄인은 죄 덩어리에요. 우리 속엔 온통 죄로 가득해요. 마치 쮸쮸바 속에 얼음이 가득하듯이 우리 속에도 죄가 가득해요. 짜면 죄가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우린 율법을 받기 전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았어요.
그래서 율법으로 인간들 속에 있는 죄를 하나 둘씩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모든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수술하는 칼처럼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이는 인간 전부를 해부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발가벗긴다고 하지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인간의 언행심사 모두가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 죄고 아니고가 없어요. 우리가 의(義)라고 내어 놓는 것조차 몽땅 죄라고 규정해 버려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엔 인간의 양심으로 죄다 아니다를 구분했어요. 그래서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사기치고, 처 자식도 모른채 맨 날 술을 쳐 먹고 개구신 짓을 하면 나쁜 인간이고, 지극히 도덕적이고 반듯하게 가정적으로 도란 도란이 반듯하게 살면 착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율법을 받고 보니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내 행동과 상관없이 넌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기분 나쁜 겁니다. 마치 교회 밖에선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교회에 오니 죄인이라고 하니 기분 나쁜 것과 같아요. 교인들이 죄인이란 말을 싫어해요. 자꾸 죄인 죄인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율법이 없었을 땐 내가 죄인인줄 몰랐기 때문에 내가 괜찮은 인간인줄 알고 큰 소리치고 살았는데 율법이 오고 나니 내가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 아주 나쁜 놈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율법이 내 자존심과 내 꿈을 산산조각 다 깨트려 버리고 말았어요. 아주 쪽 팔리게 만들었다고요. 그러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얼굴에 똥 묻은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 얼굴에 똥이 묻은지 몰라요. 그래서 혼자 깨끗한 척 뻐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사가 거울을 주고 간 겁니다. 거울 속에 아주 더러운 놈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울 속에 있는 놈 보고! 야~ 넌 누구냐! 라고 하니 거울이 하는 말이 바로 네 놈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화들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내가 이렇단 말인가! 내 얼굴에 이런 똥이 묻어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난 그것도 모르고 깨끗한 척 잘난 척하고 살았더란 말인가! 아이쿠! 쪽팔리고 창피해라! 와~ 죽겠네!
율법은 이처럼 인간을 절망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율법을 지켰다고 잘난 척하고 있는 겁니다. 우린 거룩하다! 우린 의롭다!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시골에 사는 분이 장에 갔다가 거울을 하나 부인에게 사 주었어요. 그런데 이 부인은 거울이 뭔 줄 몰라요. 남편이 밖에 잠시 나간 사이 그 거울을 들고 보니 그 안에 웬 여자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자 화가 나서 이 놈이 시장에 가서 웬 여편네를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밖에서 들어오는 남편 앞에서 거울을 박살을 내고 남편을 홍두깨로 두들겨 팼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꼭 유대인들과 같아요. 율법으로 자기 꼬라지를 보라고 했더니 자기 꼬라지는 안 보고 예수를 죽인 겁니다. 율법으로 절망해야 하는데 도리어 치장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바울이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율법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율법 속엔 의(義)를 담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지켰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하면서 그럼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냐? 이에 바울은 무슨 소리!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는데! 그러므로 율법이 살아서 죄를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인간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율법을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고 죄를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율법이 살아서 인간을 자꾸만 절망케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절망 속에서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꼬! 라고 하면서 구원자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서 열심히 죄인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율법 유용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서 우리 인간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예수님이 더욱 더 빛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율법관이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어서 그래요. 말로는 죄인! 죄인 그러는데 실제 자기가 아주 나쁜 죄인임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십자가 도(道)를 관념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처절함들이 삶 속에서 묻어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함이 없어요. 죄를 짓고도 뻔뻔스러워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어요.
십자가 피를 아는 것이 신앙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이 도리어 힘이 되어서 그래 나 죄인이다! 어쩔래! 죄인이 죄 짓는 거 당연한 것이지 라면서 사람들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로 서 있는 겁니다.
이건 율법을 오해하여서 그래요. 그래서 바울은 무슨 말이냐! 그건 너희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율법이 살아서 우리 죄를 자꾸만 고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지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성도는 율법으로 심판을 당하진 않지만 율법으로 죄를 고발 받아야 해요. 율법이 예수님의 의(義)를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둠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의(義)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도 천사들이 손을 빌어서 온 신령하고 선한 것이라고 했어요. 어째서 그러합니까!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무용론자나, 율법 폐기론자는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율법도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율법은 적극적으로 왜? 하나님의 의(義)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율법관은 로마서를 풀어가면서 계속하여 반복되어서 말해주는 부분이에요. 오늘은 전체 개괄적인 의미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괄적인 것이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인간은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의(義)를 만들고자 하는 종자들이란 겁니다. 선악과적인 선악관을 발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義)를 쌓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가만두지 않고 자꾸만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는 식으로 일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함입니다. 이에 바울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이라고 로마서를 통해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인간은 이미 율법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겁니다. 율법 아래 가두어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율법에 의(義)를 끄집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반복되어져요. 마치 문방구 앞에 게임기 속의 두더지처럼 두들겨 패면 쏙 들어 갔다가 이내 또 머리를 내 밀듯이 그래요. 우리 안에 죄가 그래요.
우리는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눕는 것처럼 늘 그래요. 우린 이러지 맙시다! 가 아니라 우린 이런 자입니다! 를 알아야 해요. 죄를 짓지 맙시다! 가 아니라 우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세요. 신앙생활은 캠페인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실존을 알고 예수님 의(義)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개이고 돼지에요. 개와 돼지에게 무슨 의(義)가 나오겠어요. 자신이 개와 돼지인줄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기대하지 않아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암튼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두더쥐처럼 자기 의(義)를 내 밀면 여지없이 얻어터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얻어터지면서도 그것을 또 고집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어기고 사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신 의(義)로 사는 자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로마서를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만끽하시고 행복해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으로 배부름을 얻게 하시고 예수님의 피 뿌림에 은혜를 더 깊고 더 넓게 더 높이 더 길게 알아가는 시간들이 되어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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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