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멀쩡한 슈퍼컴을 폐기할까?
올해 초 미국 정부는 세계 22위 슈퍼컴퓨터 '로드러너(Roadrunner)'를 폐기처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세계 최초로 페타플롭스(1초 1000조회 연산 수행)의 벽을 돌파하면서 세계 1위의 슈퍼컴으로 화려하게 등장했고, 현재 한국이 보유한 슈퍼컴의 총 성능과 맞먹는 5년 밖에 안된 '멀쩡한' 시스템을 왜 버리려고 할까?
<사진>로드러너 슈퍼컴퓨터: 2008년 세계 최고 컴퓨터로 화려하게 등장하였으나 불과 5년 만에 고철이 되었다 (출처: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소유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슈퍼컴퓨터 운영에 필요한 총소유비용은 (1)시스템 및 기반시설 등 초기투자 성격인 자본지출(CAPEX: Capital Expenditure)과 (2)전기료 및 인건비 등 지속적으로 필요한 운영경비(OPEX: Operating Expenses)로 나누어진다.
특이한 점은 슈퍼컴의 경우 운영경비가 자본지출보다 많은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 올해 유럽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슈퍼컴의 평균 운영경비는 자본지출의 3배에 달하며, 전기료 하나의 항목만도 자본지출의 60%에 근접한다.
다른 요인은 기술발전에 따른 가격대비 성능의 빠른 증가이다. 단순한 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동일한 가격에 대해 슈퍼컴의 성능은 무어의 법칙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93년 국내 최고의 슈퍼컴인 'Cray C90'은 현재 KISTI 국가슈퍼컴연구소가 운영하고 있는 '타키온2' 시스템과 비교해 가격은 비슷하지만 그 성능은 2만분의 1에 불과하다.
<사진>Cray C90 슈퍼컴퓨터: 1993년 도입되어 5년간 한국최고의 슈퍼컴으로 군림하였다. 현재 KISTI 국가슈퍼컴연구소의 시스템과 비교하여 약 2만분의 1의 성능이다 (출처: Cray)
이러한 이유로 기존의 슈퍼컴을 계속 운영하는 것에 비하여 가격대비 성능이 우수한 신제품으로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연합 등에서는 슈퍼컴퓨터의 운영기간을 4~5년으로 산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로드러너의 전력소모 2.3MW에 비하여 후속기종 Cielo의 값은 1.2MW에 불과하다. 미국 평균 전기료인 KWh 당 10센트를 기준으로 연간 백만달러(약 11억원)의 비용이 절약되는 셈이다. 또한 Cielo는 훨씬 적은 설치면적을 필요로 한다.
로드러너가 퇴역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 독특한 구조에 있다. 시스템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CPU와 함께 플레이스테이션3(Playstation3)의 CPU에 기반한 PowerXCell을 가속기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로드러너로 기존의 프로그램을 이식(porting) 및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소스코드의 20~30%를 수정해야 하는 이 작업은 보통 수개월이 소요되며 1년을 넘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PowerXCell 후속 제품의 개발여부가 불확실해지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 및 기존 프로그램의 이식이 중단되었고 이는 시스템의 퇴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슈퍼컴퓨터가 퇴역하면 어떻게 될까? 시스템 운영의 관점에서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박물관의 전시물품이 되거나, 분해되어 사용되거나, 심지어는 휴게실의 소파가 되기도 한다.
<사진>가구로 변한 슈퍼컴퓨터: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는 퇴역한 슈퍼컴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다 휴게실의 소파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미국 국립 대기과학 연구소)
로드러너의 경우 폐기된 시스템은 메모리, 하드디스크, 나사 등 모든 구성부품의 상태를 파악하는 '부검' 절차를 한 달간 거친 후에 몇 개의 역사적인 부품을 제외하고 모두 파쇄될 예정이라고 한다.
조금 더 기발한 사례도 있다. 미국의 한 슈퍼컴센터에서는 퇴역하여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시스템 철거를 고민하고 있었다. 인수를 원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 제조사에 문의했더니 철거비용으로 3만 달러(약 3천2백만 원)를 요구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매사이트인 이베이(eBay)에 내놓은 결과는 대성공 - 치열한 경쟁을 거쳐 'Ardent Computer'사의 창업자인 Steve Blank씨에게 4만5천 달러(약 4천8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농장에 수집하고 있는 역사적인 물품의 하나로 구매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세계 최고 시스템으로 주목을 받고 등장한 시스템이 불과 수년 만에 고철로 전락하는 것이 애처롭기도 하지만 치열한 첨단기술이 경쟁하는 슈퍼컴의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