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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심적인 여유를찾은 진일문은 난석들을 둘러보다가 기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 난석군(難石群)은 보아하니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일정한 진식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것 같았으나 안쪽으로 갈수록 그 크기와 모양이 비슷해지고 있었으며 후천팔괘(後天八卦)의 형태를 보이고 있기도 했다.
진일문은 비취암에서 도림의 진에 걸려 고생을 한 이후, 절정사태의 곁에서 머무는 동안 진법에 관한 서책들을 두루 탐독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진식에 대해 어느 정도는 눈이 떠진 상태였다.
이윽고 그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렇듯 황량하고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진이라니? 대체 이 계곡 안에 무엇이 있길래......."
진일문은 궁금증이 이는 반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일체 없었다.
진세를 돌파하는 일이야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흉사(兇事)라도 만난다면 어쩌겠는가?
그런 경험은 비취암에서 사건 한 번으로도 족했다.
"나와는 관계 없는 곳이니 빨리 이 곳을 떠나야겠다."
그러는 사이, 그는 점차 기력을 회복해갔다.
전신에 성한 곳이라곤 없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는 어느덧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금정홍 덕분이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쩔그렁!
그것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바위와 부딪치며 울려낸 소리였다.
한밤의 계곡에서 그 소리는 예상외로 컸다.
'이런 실수를!'
진일문은 얼른검을 집어들었다.
그 때였다.
"누가 감히 무당(武當)의 금지구역에 들어 왔느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한 가닥 외침이 들려왔다.
진일문은 그만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금지구역이라는 말로 인해 지난 날 비취암에서의 악몽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일단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오이다. 소생은 이 곳이 금지구역인 것을 몰랐습니다. 당장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응수하는 음성은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말을 들었을텐데도 이렇게 추궁해오는 것이었다.
"무량수불... 귀하는 누구길래 허락도 없이 이 불회곡(不回谷)에 침입한 것이오?"
졸지에 침입자가 되어버린 진일문은 입장을 밝히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흰빛이 번뜩하더니 두 명의 도사가 나타났다.
백의를 입은 그들은 나이가 사순에서 오순 사이로 보였다.
한 사람은 손에 불진을 들었고, 한 명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진일문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인데다 피묻은 검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자 대뜸 안색을 굳혔다.
"귀하는 뉘시오? 어서 정체를 밝히시오. 그리고 이 곳에 온 목적을 말하시오."
진일문은 내심탄식을 금치 못했다.
목적이 있어야 말을 할 게 아닌가?
더구나 그들의 기세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비추어 보건대 그들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소 무거워진 음성으로 답했다.
"소생은 길을 잃었을 뿐이외다. 단지 그 뿐입니다."
역시 도사들은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경계를 전혀 풀지 않은 채 되려 이렇게 종용해왔다.
"귀하는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시오. 본파로 함께 가 정당하게 사유를 밝혀주기 바라오."
진일문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생은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부디 이대로 가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자리를 뜨려 했다.
도사들이 신형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되오! 그냥 달아나는 것은 불가하오."
진일문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하오이다. 소생을 가게 해 주십시오."
검을 멘 도사는 약간 나이가 덜 들어 보였다.
그가 불진을 든 도사에게 말했다.
"광진사형, 더 들을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백도인물은 아닌 것 같고, 일단 상청궁(上淸宮)으로 압송해 갑시다."
그 말에 광진이라 불리운 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도우, 아까도 말했듯이 이 곳은 본파의 최대금지구역이오. 설사 그대가 잘못 알고 들어왔다 해도 그것은 본파의 규칙에 위배되는 일이니 일단 우리를 따라가서 본파의 장문인께 사정을 설명해야 될 것이오."
진일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사정을 해보아야 통할 것 같지 않구나. 할 수 없다. 우선은 어떻게든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하니.......'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선공을 가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상대는 두 사람이 아닌가?
"용서하시오! 소생은 두 분의 명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말과 동시에 번개같이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무당파라면 소위 검법으로써 천하를 주름잡은 명문대파다.
게다가 불회곡을 지키는 두 도사는 무당 내에서도 손가락 꼽히는 고수들이었다.
"무량수불!"
웅후한 도호성이 울린 순간, 진일문은 그만 눈앞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도 광진도장은 수중의 불진을 그저 한 번 슬쩍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기이하게도 무수한 불진의 그물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파파파팟--!
의복이 갈가리찢겨져 나가며 막강한 열력이 그를 엄습해왔다.
불진이 전신을 감아오자 그것은 마치 불의 태풍에라도 휘말린 듯한 기분이었다.
진일문의 몸은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난석림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무공을 하지 못하는 자였다니......."
광진도장의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그는 진일문의 행색이 워낙 험악해 보이는지라 당연히 사도의 마공을 쓰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무당파의 독문 비공인 선천태극강(先天太極 )을 불진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은 피를 뿌리며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무량수불... 빈도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검을 멘 도인이 곁에서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소제가 보기에도 그 자는 무공을 모르는 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형께서는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우리는 규칙대로 처리한 셈입니다."
광진도장은 안면을 일그러 뜨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의 말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빈도는 무고한 인물을 살상한 셈이 아닌가?"
"꼭 그렇게 볼 수 만은 않습니다. 그 자 쪽에서 먼저 공격해오지 않았습니까? 떳떳한 입장이라면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허허허......."
광진도장은 대답 대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아무튼 빨리 가서 장문사형께 보고를 해야겠네."
두 도사는 차례로 신형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직후.
스스스.......
그 곳에는 다시 한 가닥 회영이 안개처럼 나타났다.
"으음, 일이 공교롭게 되었구나. 하필이면 그 애송이 놈이 이 불회곡으로 떨어지다니......."
혈해만리추종 염천구였다.
그의 동공이 없는 회색 눈은 한 가닥의 곤혹스런 빛을 발하며 난석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석이 밀집되어 있어 진일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 염천구는 평생을 통해 중도에서 추적을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곳만은 들어갈 수가 없으니....... 놈의 생사를 확인해야 일을 끝냈다고 장담할 게 아닌가?"
꺼림찍한 표정을 짓는 그는 어느 덧 진일문과의 약속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끈질긴 추적과잔혹한 고문술 외에 신뢰라던가 도의 따위는 전혀 의식도 못하고 살아온 자, 그는 바로 그런 위인이었다.
염천구는 눈에서 기광을 발하며 난석림을 노려 보았다.
"만에 하나라도 놈이 저 곳에서 살아 나온다면 그 때는......."
그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삼호! 육호!"
검은 인영이 번뜩 하는가 싶더니 염천구의 앞에는 두 명의 귀왕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곳을 지켜라. 단, 무당의 도사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해라. 기한은 두 달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놈이
나오지 않으면 철수해도 좋다."
삼호, 육호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복명(伏命)."
염천구는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추적의 명인답게 그의 경공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삼호와 육호는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각각 난석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난석림의 입구는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흐흐흐... 그래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겠느냐? 내 아예 네 놈의 뼈를 마디마디 끊어놓고 말겠다."
음침한 음성에이어 괴음향이 들렸다.
우드득--!
그 끔찍한 소리는 바로 진일문의 사지가 꺾이면서 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는 신음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다.
그 뒤로 그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파팍! 팍!
무형의 진기가방향을 바꾸어 그의 전신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혈맥이 뒤틀리고 뼈마디까지도 어긋나 버렸다.
진일문.
광진도인의 불진에 맞고 난석진 안으로 떨어진 그는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
그러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한 동굴 앞에 누워 있었다.
내상은 어느 새 말끔히 나아 있었다.
하지만 수난이시작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동굴 안에는 한 괴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난데없이 진일문에게 고문을 가해왔다.
그는 계속해서 진일문더러 반도(返徒)가 보낸 첩자가 아니냐며 으르렁거렸다.
몇 번이고 부인했으나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빈도는 다 알고 있다. 네 놈은 틀림없이 현청이 보냈을 것이다."
마침내 진일문도 지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소. 그러니 설령 날 죽인들, 안되었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오."
"흐흐흐... 정녕 지독한 놈이로구나. 십이경락을 모두 끊어 놓고 전신의 관절을 전부 분질렀는데도 실토하지 않다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나 한 번 봐야겠구나."
진일문의 몸이붕 떠오르더니 강력한 흡인력에 의해 동굴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이건 또 무슨 변괴인가?'
진일문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듯 괴이한 현상은 난생 처음 겪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굴 안은 의외로 캄캄했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는 가운데 진일문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그의 귀로 다시 괴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법 강골이구나. 하긴 현청이 보낸 놈이니......."
진일문은 역시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에 대해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변명이 귀찮아져 버린 진일문은 암흑 속에 누운 채 혼자 중얼거렸다.
"으음, 늑대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왔다 싶었더니, 이번에는 내가 호굴로 뛰어든 모양이구나."
탁한 음성이 그의 말을 받았다.
"흐흐... 그 따위 약삭빠른 거짓말에 빈도가 넘어갈 줄 아느냐? 어림 없다.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진일문은 불현듯 노화가 치밀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가뜩이나 온 몸이 욱신거리는 데다가 그런 말까지 듣고 보니 그도 폭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신은 지금 제 정신이오? 모른다면 그만이지, 어찌 하여 나를 자꾸 핍박하는 거요?"
"뭐라고? 네 놈이 지금 날더러 미쳤다고 하는 거냐?"
위이잉--!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무형의 암경이 밀어닥쳐 진일문을 가격했다.
그의 몸이 속절없이 날아가 벽에 부딪치더니 다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우우.......'
그는 이제 운신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사지의 뼈들이 무참하게 부러진데다 또 이렇게 당하고 보니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 말은 잊지 않았다.
"후후... 미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소? 나는 현청이라는 작자는 고사하고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실토하라는 거요?"
부드득 하고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우같은 놈! 현청과 똑같은 놈이 천하에 또 있었구나. 잘 들어라. 네 놈들이 아무리 수를 써도 태극환허심법(太極幻虛心法)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
'점입가경이로군!'
진일문은 내심어이가 없었다.
그는 걸레조각처럼 널브러진 채 다소 참담한 심경이 되어 말했다.
"과연 그 태극환허심법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나 나는 관심이 없소. 바로 그것 때문에 나를 이 꼴로 만든 모양이오만, 그 점이라면 안심하시오. 당신이 가르쳐 준다해도 내 쪽에서 사양할 테니까."
잠시 동굴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괴인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너는 어찌 하여 이 곳에 들어왔느냐?"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소? 그 도사의 불진에 얻어맞아 여기로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괴인은 여전히의심의 떨치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 이렇다할 증거라도 있느냐?"
진일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없소. 그러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소? 부탁이니 나를 좀 내버려 두어 주시오. 아니면 아주 잠재워 주던지......."
실상 그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너무도 피곤했다.
기력이 탈진 상태에 이르자 혼절에 가깝도록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리라 작정하고는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진일문은 그야말로 긴긴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몸이 워낙 망가져 있기도 했지만 먹은 것조차 없다 보니 수마(睡魔)가 그를 붙잡고 도통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깐씩 눈이 슬며시 떠질 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해져 버린 그는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곤 했다.
진일문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는 입안에서 향긋한 내음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기력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어 있었다.
사위는 처음과마찬가지로 여전히 깜깜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직히 중얼거렸다.
"아마도 여기는 저승이리라. 이렇듯 안온한 어둠은......."
"히히히히... 그렇다. 네 놈은 저승에 왔다. 그러니 이제 바른대로 실토해라.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너를 지옥으로 보내겠다."
그것은 예의 괴인의 음성이었다.
진일문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현실감을 되찾았다.
'아! 저 자는.......'
그는 차분하게생각을 정돈했다.
'아무래도 저 자는 정말로 미쳐있는 것 같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사납게 굴더니만 지금은 꼭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나오고 있지 않은가? 어디 한 번 도전해 보자.'
진일문은 짐짓겁먹은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아이구, 소인은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어째서 지옥엘 간단 말입니까? 뭔가 잘못 아셨을 것입니다요, 저승사자님."
괴인의 반응인즉 그의 예상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헤헤헤... 본 저승사자는 네 놈의 과거를 다 알고 있으니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너는 현청이란 놈이 보냈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연극에 진일문은 진지하게 응해갔다.
그는 재빨리 엎드리더니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아이구, 사자님! 현청이 대체 무엇하는 곳입니까? 소인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우연히 이 곳에 왔다가 웬 도사에게 얻어맞고, 그것도 모자라 재수없이 미친 늙은이에게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가 저승으로 온 것 뿐입니다요."
그러자 동굴 안에는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괴인은 울화를 삭히느라 애쓰는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미친 늙은이라 지칭되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괴인이 저승사자로써의 품위를 다시 정비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는 사뭇 근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렸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여쭙겠습니까요? 그러면 지옥불로 떨어질 것이 뻔한즉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괴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안되었구나. 내 이를 참작하여 너를 이승으로 돌려보내겠다. 명부를 보니 아직 죽을 나이도 되지 않았구나. 자! 도로 이승으로 돌아가거라."
진일문은 감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시늉을 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저승사자 나으리."
다음 순간, 그는 온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주위는 이제 환해져 있었다.
정신이 든 진일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쪽 벽에서 푸른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는 유등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여전히 동굴 안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 안의 정경을 처음 대하는 셈이었다.
그 곳은 의외로 정갈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안 쪽에는 한 명의 괴도인(怪道人)이 앉아 있었다.
괴인을 도사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그가 도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낡을 대로 낡아 거의 삭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도사의 얼굴이었다.
불그레하니 윤기마저 감도는 동안(童顔)이었다.
턱 밑으로부터 내려와 무릎을 덮는 흰 수염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
진일문은 도사의 무릎을 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무릎 아래로는 그대로 백골이었다.
살이 썩어 문드러졌는지 허연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애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은 뜻밖에도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괴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내 조부님으로 둔갑하실 작정인가?'
진일문은 나름대로 저승사자 노릇을 하던 하던 때의 괴인을 연상해 보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 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이 도사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는 부러졌던 사지가 이미 말짱하게 맞추어져 있다는 데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또한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기력이 탈진한 진일문을 되살려낸 것도 이 괴도사였다.
당사자를 제외하면 이 동굴 안에 그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진일문은 곧 일어나 앉았다.
그는 이런 저런 상황들로 미루어 정중하게 답변을 했다.
"소생, 진일문이라고 합니다."
"너는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느냐?"
진일문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도사의 얼굴이갑자기 냉혹하게 변했다.
"이 놈! 거짓말을 하는구나."
도사는 흰 눈썹을 무섭게 곤두세우더니 한 손을 저었다.
그러자 대번에 막강한 암경이 밀려와 진일문을 몰아쳤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은 무력하게 석벽으로 부딪쳐갔다.
머리가 박살날위기에 봉착한 진일문이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심법은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공은 쓸 줄 모릅니다!"
그 순간, 아까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암경이 그를 떠받쳤다.
그것은 그가 막 석벽과 충돌하려는 찰나의 일이었다.
어쨌든 진일문은 간발의 차이로 다시 붕 떠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반면에 도사는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자애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째서 심법을 익혔으면서 무공을 사용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진일문은 변덕이 죽끓는 듯 하며 제멋대로인 이 도사에게 웬지 호감이 일었다.
누가 있어 자신에게 이런 말을 물어 오겠는가? 받아본 질문이라야 대개가 심문 뿐인 그였다.
"끝없이 유전(流轉)을 거듭해온 것이 제 인생인지라......."
도사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호오! 어린아이가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것은 물론 그만치 네가 많은 격변을 거쳤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진일문은 곧 비취암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 도사를 상대로 감추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 이르게 된 경위나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도사는 몹시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는 문득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진일문은 무형의 거대한 힘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이끌려갔다.
이윽고 진일문은 꼼짝없이 도사에게 손목을 잡히게 되었다.
그는 손목을 통해 한 가닥 지극히 음유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내부에서 곧바로 만만신공의 강맹한 기운이 일어나 이에 대항했다.
유(柔)와 강(剛)의 격돌은 곧 유의 승리로 끝났다.
만만신공의 기운은 썰물처럼 밀려나더니 금세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그 결과, 진일문은 전신의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오오! 아깝구나, 아까워."
도사는 그의 손을 놓더니 탄식해마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아깝다는 것인가?'
진일문은 궁금했으나 차마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오히려 도사가 질문을 던졌다.
"아이야, 네가 배웠다는 입법의 이름이 무엇이냐?"
"만만신공이라고 들었습니다."
"만만신공이라....... 대체로 불문의 무상심법은 웅후하면서 심오한 것이 장점이나 반면에 그 성취가 느리다는 단점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기이하게도 강맹함을 위주로 하면서 속성이다. 또한 십성의 경지에 이르면 한계에 이르게 되니 이래저래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문공부로 보기는 어렵구나."
진일문은 도사가 만만신공의 특징들을 정확히 짚어내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분의 무공에 대한 견해는 정말 대단하구나. 맥을 짚었을 뿐인데도 모든 것을 알아내다니. 이런 순간에는 조금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 같지 않군.'
이것이 그나마진일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도사의 참모습이었다.
그는 도사의 정체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이 날부터 진일문은 도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짧지 않은 도피 생활로 인해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던 그는 이 곳에서 한 동안 쉬어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한편.
도사는 하루 중 절반 이상을 앉아서 보냈는데, 대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그 시간을 제외하고 깨어 있을 때는 예외없이 횡설수설이었다.
가끔씩은 어이없게도 진일문을 광해(廣海)라고 부르며 더없이 다정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여전히심심치 않게 현청의 첩자 운운하며 무지막지한 공격을 해왔는데, 진일문은 죽도록 얻어터지면서도 도사의 정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미친 노인과의생활이란 실로 해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진일문에게 의외로 많은 점을 배울 수가 있었다.
"광해야, 이 사부가 최근에 창안한 것인데 한 번 보겠느냐? 사부는 이것을 태극십삼세(太極十三勢)라 부르기로 했다. 수권공부(手拳功夫)지만 그 위력은 본문의 태극혜검법(太極慧劍法)에 못지 않다. 허허실실을 바탕으로 펼치면 상대방은 어느 것이 실초이고 어느 것이 허초인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된다."
광해란 아마도도사의 애제자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사는 그를 이렇듯 광해로 착각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차마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밉던 곱던 정도 들었거니와 그랬다가는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사가 어떤 말을 하던 거의 따라주는 편이었다.
어쨌든 덕분에그는 도사가 펼쳐보이는 태극십삼세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심오하기 그지없는 무공이었다.
진일문은 그것을 열심히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물론 내공을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시전해 보지는 못했다.
그 밖에도 도사는 그에게 여러가지 무공들을 전수했다.
또한 그 때마다 그는 꼼짝없이 광해가 되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멍청한 놈! 소천성장법(小天星掌法)을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단 말이냐! 너 같은 밥통을 믿고 노도가 심혈을 기울였다니."
도사는 흥분하여 길길이 뛰었다.
"꼴도 보기 싫다! 눈앞에서 썩 꺼져라."
도사는 소매를휘둘렀다.
그 순간, 진일문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강맹한 기류에 휘말려 붕 떠오른 그는 급기야 석벽에 세차게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흘러 갔는지는 모른다.
진일문이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깨어보니 자신이 도사의 앞에 누워 있더라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언뜻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는 보았다.
이 미친 도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이윽고 도사는깡마른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야, 네 자질이 정녕 이 정도에 불과했단 말이냐?"
진일문은 웬지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사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어지는 것은 도사의 한탄이었다.
"이 사부가 전수했던 태극환허심법(太極幻虛心法)의 성취가 그처럼 보잘 것이 없으니 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태극환허심법......?'
진일문도 도사가 이를 말하는 것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찌 무당 비전의 심법을 알겠는가?
그로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순간적인 기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죽여주십시오,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의 출중한 무학을 존경하고 있사오나 태극환허심법의 구결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도사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정말이냐? 네가 정말 그 구결을 잊었단 말이냐?"
"제자, 우둔하여 그만......."
짜악!
눈 앞에서 불이 번쩍 했다.
도사가 느닷없이 진일문의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그것도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그는 뒤로 다섯 바퀴나 굴러가서야 몸을 멈출 수가 있었다.
간신히 신형을추스른 진일문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이런 순간에는 나도 참기 힘드는구려. 맞는 것에도 이력이 붙으면 좋으련만 그것만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심중의 말은 꺼내 놓지 않았다.
다만 일말의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도사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곧 진일문은 이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보답을 받을 수가 있었다.
도사가 그 날부터 그에게 태극환허심법의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극환허심법.
이는 무당파의조사인 장삼봉진인(張三峯眞人)도 만년에야 깨달은 도가의 정통공부였다.
태극의 도에서 근원한 것으로써 우선 심유하면서도 그 변화가 무궁무진한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는 여타의 심법이 따를 수 없는 특별한 묘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는 양심공(兩心功)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태극환허심법을 익히게 되면 양손으로 각각 다른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펼칠 수가 있었다.
어쩌면 이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심법이라 할 수 있었다.
불운을 운명, 그 자체로 수용해야 했던 진일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일대 도약의 전기(轉機)를 맞고 있었다.
그는 만만신공을 익혔으되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절정사태가 그에게 내공을 사용하는 구결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진일문에게 태극환허심공의 구결은 그야말로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그는 그 구결에 따라 만만신공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실로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동안 혈맥을 따라 제멋대로 불끈불끈 움직이던 기단이 비로소 그의 뜻대로 조종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일문은 처음으로 내공이란 것을 사용해 도사가 전수해 준 무공들을 펼쳐 보았고, 그 결과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 그가 매 초식을 시전할 때마다 예외없이 막강한 암경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갔다.
그는 번번이 칼을 휘두를 때와 똑같은 기이한 충격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도사는 그를 크게 꾸짖었다.
"틀렸다, 틀렸어! 본문의 무공은 절대 강(剛)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유(柔)를 근본으로 삼고 있거늘, 너는 어찌 하여 그렇게 엉터리 무공을 시전하는 것이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일문의 체내에는 현재 일갑자가 넘는 만만신공의 내력이 머물고 있었다.
그에 반해 배운지 얼마 안되는 태극환허공의 내력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펼치는 무공은 만만신공이 지닌 강맹함이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무공을시전할 수 있게 된 진일문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설마 하니 이 기묘한 인연으로 인해 오랜 여망이 달성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유자재로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 연마에 몰두했다.
그는 모래가 물을 흡수하듯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진전을 볼 수가 있었다.
한편.
도사는 진일문이 이처럼 열성을 보이자 몹시 좋아했다.
그는 일신에 지닌 무공들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것은 대부분이 무당의 진산무공이었는데 개중에는 그가 창안한 무공도 있었다.
이들 사제지간(?)은 이렇게 하여 많은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진일문은 한 가지 안타까운 면을 느꼈다.
그것은 도사의 정신이 갈수록 심하게 오락가락하여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태극십삼세라는 절기도 육초에서 그쳤으며, 그 외의 무당 절기들도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실제로 진일문의 총명이 과인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전수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진일문은 전력으로 배운 바에 비해 그다지 신뢰감은 가질 수가 없었다.
강호에 나가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줄지도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도사의 진정한 내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를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의혹은 가지지 않았으리라.
진일문은 정녕몰랐다.
이 도사의 무공 두어 가지만 배워도 무림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된다는 것을.
무당파는 소림(少林)과 더불어 수백 년 간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다.
이러한 무당의 역대 고도(高道) 중에서도 으뜸의 무공을 소유한 자가 있었으니.......
일대의 괴도(怪道)로 불리웠던 인물, 그가 바로 눈앞의 미치광이 도사라는 것을 진일문이 어찌 알겠는가?
도사는 점점 더 정신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판단 능력이 상실되어 진일문에게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그 동안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진일문은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바로 도사에게 배운 무공으로 대항해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으니, 실로 웃지 못할 희극이었다.
동굴 속에는 영지(靈芝=버섯의 일종)가 자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먹고 지냈다.
일종의 영초였으므로 하루에 한 개만 먹어도 허기가 지지 않았다.
진일문은 영지에 엄청난 신효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내력은 나날이 정진되어 갔다.
도사가 오랜 세월 이 곳에 갇혀 있었으면서 기력이 쇠하지 않고 내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영지의 효험 때문이었다.
진일문.
그는 동굴 속에 머무르는 동안 점차 무인으로써의 완성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내공의 발전과 무공 초식의 숙련도 그렇거니와 실전 경험(?)까지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거의매일 도사와 싸움 아닌 싸움을 벌여야 했다.
도사가 새삼 그를 반도인 현청의 제자라며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도사의 공세는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일문이 가히 생명을 내걸고 대항해야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진일문은 근자에 이르러 도사의 하반신이 불구라는 점을 놓고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덕분이었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내부에 만만신공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극환허신공의 내력이었다.
그는 두 가지의 상반된 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아직은 만만신공의 강맹함이 우세했으나 안정된 조화야 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으니 염려할 바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태극환허신공의 연마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사에게 배운 무공을 펼치는데는 역시 그 쪽이 훨씬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릇 물이 거꾸로 흐르는 법은 없다.
현재 도사의 입장을 들추어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설명하자면 그것은 그가 본의건, 아니건 진일문에게 모든 것을 양도했으며 그로 인해 산화해가고 있다는 의미다.
진일문이 이 곳에 온 지도 어언 한 달여, 이즈음에 도사의 정신이 종전보다 더욱 혼미해진 것은 다름 아닌 진일문 때문이었다.
도사는 사실 이십오륙 년이라는 세월을 혼자서 보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그는 내공이 정순해지는 등 나름의 살아가는 방편을 터득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진일문이라는 존재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의식 속에 뛰어들자 그는 심기가 흔들리고 말았다.
따라서 평정을 잃은 그에게는 오직 광기(狂氣)만이 남게 되었다.
하반신이 썩어가면서도 굳강하게 버텨왔던 그의 삶이 마침내 마감을 예고하고 있었다.
진일문이라는 젊은 기재가 자신의 뒤를 이어가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벌써 일주일째 도사는 명상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진일문은 내내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우연한 만남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각별한 인연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비록 그가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사도지례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진일문은 이미 그를 사부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미친 와중에서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심금에 닿아왔다.
진일문은 도사의 얼굴에 이따금 나타나는 검은 기운을 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그것은 영락없이 사신(死神)의 그림자였다.
진일문은 계속도사의 용태를 살피는 한편, 그에게서 배운 무공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웬지 그래야 도리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식이 연결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그 나름대로 연관을 시키며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그가 태극십삼세의 제 사초식인 수휘오현(手揮五絃)을 구사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은은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이지 않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고요가 있으니 상대가 움직이면 오히려 정(靜)으로 제압을 해야 한다.
그러나 멈출 때는 완전히 멈추되, 움직일 때는 놀란 토끼가 움츠렸다가 뛰듯이 전력으로 도약해야 한다."
진일문은 깜짝놀라 도사를 돌아다 보았다.
도사는 여전히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진일문은 뛰는가슴을 진정하고 도사의 말에 바짝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도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날 밤이었다.
도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을 비웠을 때 참다운 지혜가 생긴다. 사물에 집착하지 마라. 물 속의 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세인들은 물고기가 논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뜻이 있을지니....... 그러므로 물의 근원을 알고 고기가 헤엄치는 의미를 알았을 때 비로소 물이 되고 물고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진일문은 그 말에 감추어진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도사는 간간이 말을 했다.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앞서와 마찬가지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도사가 한 말들을 한 귀절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것은 무공과는 별개로 도사가 생을 마치면서 그 간에 깨달은 도의(道意)를 설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훗날에 가서야그는 이 때에 도사가 한 말이 얼마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그가 말하는 이치는 바로 태극환허심법의 극의(極義)였던 것이다.
도사는 대신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좌화(坐化) 했다.
그것은 진일문과 만난 지 한 달 하고도 이십여일이 지난 후였다.
진일문은 그 때까지도 도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도사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 친인의 죽음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로 인해 그는 못내 비감에 젖어 들었다.
'이 곳을 떠나자!'
진일문은 이런생각으로 자신을 달랬다.
아울러 그는 동굴 안이 넓고 정갈하여 도사의 무덤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하고는 자신이 직접 동굴을 폐쇄해 주기로 작정했다.
반석 위에 눕히기 위해 도사의 시신을 들어내려던 그는 깜짝 놀랐다.
도사의 하반신이 은빛의 긴 사슬로 묶여 있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비로소 도사가 이 곳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사슬은 천하의 보검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으로써 도사의 뼈를 관통한 채 석벽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어찌 이렇듯 잔인한 수법을!'
그는 도사를 대신하기라도 한듯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무엇인가 쏘아져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도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쓰여져 있는 깨알같은 글씨들이었다.
글씨는 너무도작아 예전의 진일문이었다면 발견할 수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물론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쉽게 해독을 할 수가 있었다.
글씨가 새겨져있는 돌바닥은 도사가 오랜 세월 동안 앉아 있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진일문은 도사가 그 자리에서 겪었음직한 고독과 비애를 연상하며 천천히 그것을 읽어보았다.
'오오! 이것은.......'
그는 경악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전수받지 못한 태극십삼세의 구결이었다.
'제 육초에서 머물러 늘상 아쉬웠거늘, 십삼초의 구결이 모두 적혀 있지 않은가?'
실상 그것은 도사가 어느 날 흥취가 솟아 올라 자신도 모르게 적어놓은 것이었다.
만일 진일문이 그의 시신을 안장시키려 하지 않았다면 그 구결들은 영원히 발견되지 못했으리라.
진일문은 구결을 모두 머리에 담아 두었다.
그런 연후, 그는 은삭과 연결되어 있는 도사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혔다.
그는 이어 도사를 향해 사도지례에 해당하는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그의 진심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첫 인사가 곧 하직 인사가 되는구나.'
진일문은 씁쓸하고도 허탈한 심경이 되어 새삼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은 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사가 앉아 있던 자리의 뒤편 벽, 그 곳에 무엇인가 복잡한 도해(圖解)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진일문은 그 도해를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은 난석진의 진도로구나.'
그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것은 난석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진도였다.
그는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이것은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염원을 그리신 것이리라. 으음.......'
진일문은 쓰린가슴을 부여안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가 막 바위를 옮겨 동굴 입구를 막으려 할 때였다.
그의 귀로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 곳에 사람이 들어오다니? 아직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진일문은 그 발걸음 소리가 매우 가벼운 것으로 미루어 그 임자되는 이의 무공이 고절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쯧! 누가 나타나던 내게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진일문은 바위뒤에 몸을 숨겼다.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즐감요
즐겁게 읽고 갑니다 *^^*
공부를 넘 록독허게 하는구먼...
천운을 만나 행운~~~~~~~~~~~~~`````````````````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십시
즐감하고 갑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엄청난 전화위복 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