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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디모데후서 3장 10-12절
제목: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
지난 주 수요일에는 “이단에 대한 경계”에 대하여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통상적인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인격이고,
둘째는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즉 그들의 인격과 가르침을 통해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이단은 비교적 쉽게 분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대양사건(32명 변사사건), 영생교 산건(암매장),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행동이나 인격이 아주 건전한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쳐도 그것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6~9에서 주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이단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지시r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첫째 이단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합니다.
그들 중에 특별히 “영리주의 자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리주의 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한 부류는 금욕주의이고 또 한부류는 쾌락주의입니다.
'금욕주의'란 물질이나 육체는 모두 악하고 영혼만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에 이 더러운 육체를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영혼을 더욱 깨끗해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 반해 '쾌락주의'란 이 더러운 육체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선해지거나 거룩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육체는 그냥 내버려 두어도,
영혼은 거기에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쾌락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첫째,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합니다(6절).
둘째,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들을 배우는데 매우 열심입니다.
셋째, 그들은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움을 받은자 들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결국에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은 “경건에 살고자 하는 자”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을 세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그것은 '돈과 권력과 성적인 쾌락'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이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利己主義)가 마침내 인간성을 파괴(破壞)하고,
가정(家庭)을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사회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와 쾌락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고,
교회 안에는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로 점점 채워지고 있습니다.여러분! 참된 종교란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을 함께 겸비하는 것입니다.
형식이 있다고 해서 내용이 저절로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 가운데 경건의 모습만 있고, 진실(眞實)과 행위(行爲)가 없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가? 그 경건의 내용을 디모데에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1. 바울 사도의 경건의 내용 들(10절)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참된 교훈”을 말하는 자입니다.
'교훈'은 바울이 설교하고 가르친 복음의 진리를 의미합니다(행17:2,3).
*행17:2,3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교훈'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울의 교훈이 디모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믿음을 연단시켰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바울 자신의 말로 교훈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다음에 열거되는 여덟개의 항목마다 정관사가 그 앞에 붙어있으므로 혹자는 매 항목마다 소유격 '나의'를 붙여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독교의 메시지가 여러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처음 들어와서 막 뿌리를 내리려 하던 시절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이 된 시절입니다.
그 무렵 우리 민족은 모든 꿈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그래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는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강단에서 그러한 말씀을 전하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교회가 민족적 정신을 이끌어 나간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다가 해방과 더불어 6.25동란을 겪고 거기에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교회는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希望)적이고 소망(所望)적인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하나님나라 즉 천국에 대한 설교가 메시지의 주된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내세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 땅에서의 수고와 고생이 끝나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80년대 이후 나라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삶에 여유를 찾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메시지는 성도들의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내세를 말하면서 현실의 삶을 무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무시함으로 항상 비판받는 자리에는 그리스도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에 우리는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복음의 핵심은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이 아무리 희망과 소망을 강조해본들 그 또한 소용이 없습니다.바울은 소망을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도덕과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공적인 삶의 비결을 TV를 통해서 곧잘 말하곤 합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거기에다가 적당하게 성경구절을 한두 구절 섞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적인 학문이 곧 진리인양 말을 해도 곧잘 받아들이곤 합니다.그러나 여러분! 전하는 사람이 아무리 세상적인 지식으로 그럴듯하게 말해도 만약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전파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세상적인 지식으로 말하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지식위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토대위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였습니다.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이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선행되어 질 수는 없습니다. 2)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생활”이 뒷받침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로써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인 것을 가리킵니다(고전 4:17;9:23-27).
바울은 말씀과 신유의 권능의 사도였으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겸손한 행위를 디모데에게 보였습니다(행 14:8-18).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행실(行實)'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11절에서는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바울의 메시지는 언제나 바울 자신의 삶을 통해서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行實)'이란 주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순종적이며 헌신적으로 살아온 것을 디모데가 지켜 보았다고 말합니다.바울은 세상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신분이나 기타 모든 면에 있어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3:7절 이하에서 고백하기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그리고 계속해서 3:13절 이하에서 말하기를 “[13]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했습니다.그러니까 바울은 어찌하던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자 자신이 과거에 좋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만약 바울이 이러한 삶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 말씀은 설득력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니 그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위선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에 자신의 삶을 담았습니다.경건의 삶은 말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적인 사고에 따르면 경건은 곧 근엄(謹嚴)하고 무게있고 매사에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조심스러운 사람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경건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8을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고,
야고보서 3장10절에서 우리는 우리의 혀를 가지고서“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그러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단순히 말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3)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의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 의향의 뜻은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혀 드리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며 목표였습니다(행14:19~22).우리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왜 사십니까? 라고 물을 때,
"먹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취감을 위해서 산다"고 대답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을 돕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앞에서 열거했던 것들을 위해 줄기차게 인생을 산 사람들의 결론은
'허무(虛無)'입니다.
구약의 솔로몬은 앞에서 열거한 모든 것을 이룬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을 거의 마감할 시점에 이르러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였습니다.만약 솔로몬이라는 왕이 우리들이 추구해오고 있는 삶의 목적들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이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헛되다'는 고백은 누구보다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보지만 그 종착역은 '허무(虛無)'라는 이름의 역입니다.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 자신의 성취감을 위해서,
혹은 이웃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물론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가족을 위해 사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연히 이웃도 위하고, 가족도 위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선이 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부터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그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결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첫 번째 목적 내지는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되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삶의 최종목적지이십니까?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주님께 맞추어야 합니다.메테르 링크가 쓴 동화 '파랑새'라는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성탄절 전날 밤에 두 오누이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은 꿈속에서 광명의 여신이 인도하는대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섰습니다.그러나 밤새도록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 그들은 잠에서 깨어나서 자신들이 키우는 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새장안의 새가 그날따라 유난히도 파랗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의 파랑새가 멀리 있는 것이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어쩌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좇는 행복의 파랑새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4)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의지하였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롬 8:38,39).
*롬8:38,39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러한 바울의 믿음은 디모데의 믿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5)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오래참고, 인내” 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의 헬라어 '마크로뒤미아'는 사람들이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에 대해 '참는 것'을 의미하며(살전 5:14),
*살전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인내'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끝까지 계속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행 14:19-22).
*행14:19~22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6)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바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살전 3:12).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2.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와 고난을 받습니다(11~12절).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 박해를 받음과 고난 -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당한 핍박과 고난이었습니다(롬8:17,18;고후12:10;골 1:24).
*롬8:17,18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
여기에 언급된 장소들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한 장소들입니다.
(1) '안디옥'. 여기에 나오는 '안디옥'은 '수리아의 안디옥'이 아닌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말하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유대인의 핍박을 받아 추방되었습니다(행13:14-52).
(2) '이고니온'. 이곳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돌로 치려고 위협하여서 도피한 곳입니다(행 14:1-7).
(3) '루스드라'. 이곳은 디모데의 고향으로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행한 사역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1차전도 여행 때 이곳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으며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신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는 것을 막고 복음만을 전파했습니다.
그 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거의 죽게 한 후 성 밖에 내다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 다시 그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며 신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행 14:8-22).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10절의 맨 앞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서 디모데가 보고 알았다는 것은 앞절과 본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8가지 항목을 말합니다.
디모데가 보아왔던 바울의 복음 선포와 고난이 거짓 교사의 행위(8,9절)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는 '익숙히 알고 있다', '조사한다'(눅 1:3), '따르다'(to follow)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거짓 교사들과는 대조적으로 디모데가 바울의 모든 가르침을 잘알고 있었으며 그의 가르침에 깊이 동감하고 따랐음을 나타냅니다.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 본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확신합니다(시27:1-5;91편;125편;사43:2).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고백함으로 디모데가 환난과 핍박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12절).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가운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자'
(딤전 2:2;3:16;4:7,8;6:3-6;딛 2:12)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요15:4,5;갈2:20),
*요15:4,5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눅9:23;고후 1:5;빌 3:10).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2]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따라서 그 삶에는 당연히 핍박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세상을 대적(對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와 상관없이 단지 율법주의자로만 살아갔더라면 그 시대에 그가 핍박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온갖 부귀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했기에 그는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우리도 예수 밖에 있으면 핍박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적당하게 믿으면 고민할 이유도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가면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을 세상이 미워할리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핍박도 감당해야 합니다.
고난도 기꺼이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찬송가만 8.000여편을 쓴 화니 크로스비 여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시를 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생후 6주만에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한평생동안 그녀는 한 번도 마음에 서운한 생각을 가져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녀를 보면서 동정의 말을 건넸습니다."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많은 축복을 소나기처럼 내려 주시면서 당신의 눈을 보게 해 주시지 않으신 것이 정말 유감입니다."
그러나 크로스비 여사의 대답은 전연 뜻밖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한 가지 소원을 요청할 수 있게 허락을 하신다면 그것은 지금처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을 것입니다."놀라서 그 이유를 묻는 목사님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서 뵈올 우리 주님의 얼굴이 내가 보는 첫 얼굴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화니크로스비 여사는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도 세상을 사는 동안 능히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만약 저와 여러분이 진실로 경건하게 살고자 원한다면 그 어떤 고난이나 핍박도 기꺼이 맞이할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난은 피해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있을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 핍박을 능히 견디어내야 할 것입니다.여러분이 진실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핍박과 고난도 기꺼이 당하시길 바랍니다. 피하거나 도망하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게 고난과 핍박에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참된 교훈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직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만 두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도 기꺼이 당하는 여러분이 되시 길 바랍니다. 딛도서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딤전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로하고, 딤전4:7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하십니다.아무쪼록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경건의 모습과 경건의 능력을 함께 겸비하는 여러분이 되시 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