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찾고 싶은 집/전화위복의 ‘인하순대국’
화가 도리어 복이 된 단골집이 있다.
서울 서초동 먹자골목의 순대 전문집인 ‘인하순대국’이 바로 그 집이다.
5년 전쯤의 어느 날이었다.
내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김장태 친구가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으로 나를 찾아왔다.
미리 약속을 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오후 다섯 시쯤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사무소에서 200여m 거리밖에 안 되는 전철 교대역에서 내려서 전화를 거는 거라고 했다.
만사 제쳐놓고 만날 수밖에 없었다.
코앞 거리에서 전화를 걸어왔고, 그 전화를 내가 받았으니, 업무 등의 괜한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집으로 갈까 저 집으로 갈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우리 둘의 마음이 맞아 떨어진 곳이 서초동 먹자골목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인하순대국’ 바로 그 집이었다.
우리 사무소 인근이긴 했지만, 내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집이었다.
이른 저녁시간이었는데도 군데군데 손님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 손님들 틈새에 끼어 술국 하나에 모듬순대 한 접시를 주문해서 술판으로 빠져들었다.
상 위에 빈 소주병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우리들 취기도 깊어갔다.
그리고 목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모처럼의 만남이어서 반가움에 커진 목소리이기도 했지만, 때론 사소한 견해차이로 다툼이 생겨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그런 다툼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우리들 목소리는 거의 고함수준으로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그 소란스러움을 나는 느꼈다.
그렇게 느꼈으면 그만 뒀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만 두지를 않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키워 다퉜다.
뭔가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그때였다.
“시끄럽소! 당신들한테 이제 술 안 팔아!”
그렇게 일갈하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일갈하는 그 음성의 분위기로 봐서 그 집 여주인인 듯했다.
이제는 다른 각도에서 기분이 나빠졌다.
망신당한 느낌이었다.
지금껏 그 숱한 음식점을 드나들었어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그렇게 망신을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여자로부터 당한 망신이었으니, 기분이 더 나빠지고 말았다.
“뭐가 시끄럽단 말이요? 술집이 다 그런 거지.”
그렇게 받아쳤다.
상대도 만만찮았다.
“여긴 술집이 아니란 말이오. 밥집이요, 밥집!”
그렇게 대꾸하는 그 여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담겨 있었다.
취기기 깊긴 했지만, 그 순간에 선택을 해야 했다.
더 다툴라치면, 기물을 부수거나 신체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겠다는 위험성을 나 스스로 감지했다.
그때까지 계속 함께 자리를 해온 김장태 친구의 성미도 만만하지 않아서,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이쯤에서 꼬랑지를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내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꼬랑지를 내려 상황을 마무리 하는 것도 그리 쉽지를 않았다.
겨우 이 말 한마디를 뱉고 그 집을 빠져 나왔다.
“여자 목소리가 우예 이리도 카랑카랑 하노. 젊은 아들처럼. 무서버서 더 앉아 있겠나 어디. 두 번 다서 이 집 안 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끝났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가 보일까봐 때론 그 앞길을 피해서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비겁한 우회였다.
결국은 내가 버티지를 못했다.
반년쯤 후에 그 집을 다시 찾았다.
일부러 찾았다.
“지난번에 시끄럽다고 쫓겨났던 사람입니다. 친구가 옆에 있어 폼 좀 잰다고 그랬는데, 미안합니다.”
그렇게 뒤늦은 사과를 했다.
“우리 경상도 사람들 다 그렇지요 뭐. 괜찮심더. 앞으로 잘 지내보입시더. 나도 마음에 참 마이 걸립디다. 좀 심한 거 아이가 싶어가꼬예.”
그때 그 여주인의 응대가 따뜻했다.
알고 봤더니 남편 되시는 분은 명문의 대전고등학교 출신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고학력의 소유자로, 내가 몸담고 있었던 검찰에 인맥이 수두룩해서, 한 다리만 건너면 이어질 인연이 이미 있었다.
또 그 여주인도 남편도 둘 모두 나보다는 두어 살 연상이기까지 했다.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단골이 된 ‘인하순대국’이다.
아내도 그 집을 종종 찾는다.
원래 냄새 난다고 순대국을 잘 안 먹는 아내인데도, 그 집 순대만큼은 맛있다면서 찾고는 한다.
“하이고, 우예 이리 곱노?”
아내를 볼 때마다 그 집 여주인의 반김이 참 따뜻하다.
엊그저께도 또 그랬다.
“하이고, 우예 이리 곱노?”
전과 똑 같은 반김이다.
근데 이 날은 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뗏잔디 오바 덮어쓰기 전에 마누라한테 잘 해야 것소.”
남편으로서 아내한테 잘하라는 덕담 같기는 한데, ‘뗏잔디 오바’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산에 가는 거요, 산에. 죽어서 산에 묻히면 뗏잔디가 덮어줄 거 아이요. 그게 뗏잔디 오바라는 거요. 알만 한 나일 텐데, 뭘 이리도 모르노.”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게 그렇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그렇게 어울려, 우린 또 한 층 더 두터운 정을 쌓았다.
그렇게 정을 쌓고 또 쌓는 우리들 인연이다.
가히 전화위복의 인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