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와 옥천육씨
육영수(陸英修,1925~1974)는 충청북도 옥천 출생이다.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30년대 말 옥천에서 국민학교를 졸업, 194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옥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10월 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육영수가 박정희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였다. 육영수는 훗날 박정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한다.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서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예요. 얼굴보다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라고 했다.
본래 육영수는 박정희를 만나기 직전 혼담이 오고가던 남자가 있었다. 남자 쪽에서 "서울 명륜동에 기와집도 사놓고 식모도 데려다 놓았으니 식을 올리자"고 서둘렀다. 육영수는 그런 조건보다 박정희의 뒷모습에 반했다. 육영수는 실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 보다는 로맨틱한 결혼관을 가졌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데이트가 거듭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마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굳건한 태도와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박정희의 분위기가 육영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사랑이 무르익자, 육영수는 재봉틀을 돌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하도 이 노래를 자주 해서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 노래를 알 정도였다.
“검푸른 숲 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 설레어라 /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육영수는 남편을 '여보', '당신' 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드세요", "저 좀 보세요" 라고 부를 정도로 수줍어 하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박정희 앞에서는 마치 남 앞에 나서는 것처럼 옷맵시에 마음을 쓰고 절대 맨 발이 보이지 않도록 반드시 버선을 신을 정도였다. 또한 육영수는 박정희를 위해 따뜻한 물을 세수 대야에 받쳐들고 마루에 서 있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도 남편을 너무 어려워하는 것으로 느낄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 육영수는 때로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지는 박정희를 따뜻하게 감쌌다. 겉으로는 육영수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영수에 의존했다.
육영수는 경제적인 관념에서도 자신의 출신 가정을 따르지 않고 박정희의 수입에 맞는 생활을 했다. 가난한 사람살이 가운데서도 분식과 혼식을 일상화하고, 늘 가계부를 적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박정희가 1958년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전셋집을 전전했다. 당시 육군 장성들은 부하 사병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육영수 모두는 그런 특권을 남용하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은 서로 잘 맞는 반려자였다. 육영수는 모성애를 간직한 여인이었다. 반면 박정희는 육영수의 부친인 육종관에 버금가는 신념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영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육영수는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활동, 육영사업, 적십자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장(국립극장)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당시 나이 49세였다.
한편 옥천육씨(沃川陸氏)의 시조 육보(陸普)는 중국 당나라 사람이다.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신라 경순왕의 사위가 된다. 후에 관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옥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관성은 옥천의 옛 이름이다. 1세조는 4백80여 년이 지난 고려 충열왕 때의 육인단(陸仁端)이다.
육보는 신라가 망하자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에 은거한다. 그는 매일 산에 올라가 신라의 부흥을 기원하다 숨졌다. 육인단의 손자 육거원은 고려 말에 중랑장을 역임했으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들이 모두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맏아들 육려는 덕곡공파, 둘째 육항은 공주목사공파, 셋째 육비는 순찰사공파, 넷째 육수는 낭장공파로 갈라졌고, 막내인 육태귀는 후손이 끊겼다.
육려는 고려 말에 도순찰사로 왜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하자 충남 공주 덕리에 은거했다. 그의 손자 육명산은 대장군을 역임했으며 후대에서 석동계와 석정계로 나누어진다.
육항의 맏아들 육진의 후손에서는 부위를 지낸 육저와 제주목사 육한, 동래현감 육세영, 조선 정조 때 유학자 육상지 등이 있다. 육비의 아들 육애는 참판을 지냈으며, 육애의 아들 대에서 두 파로 갈라졌다.
낭장공파는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육한종과 선조 때 통정대부를 역임한 육붕이 있다. 숙종 때 학자 육홍은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는 옥천육씨 자손들의 텃밭이다. 조선 성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육한이 낙향하면서 제주도 조랑말을 가져와 길렀다. 그때부터 이 마을은 마장리(馬場里)라고 불린다. 육한의 후손인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은 이곳에서 옥천 갑부로 불렸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전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원흥리가 집성촌이다. 2000년 현재 20,173명이 있다.
( 정복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