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자리
이춘희 choonlee14@hanmail.net
소실봉 아래로 옮겨온 지 벌써 오년이 넘었다. 은퇴 후를 염두에 두고 산자락에 마련했는데 예정보다 일찍 들어 와 살게 되었다. 처음 이 아파트를 보러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의 도로 사정이 편치 않아 출퇴근이 걱정스러웠는데 몇 년 사이에 길이 잘 정비되었고 서울에서 살던 아파트의 가장 큰 문제였던 주차가 여기서는 수월해 미리 움직였다.
칼럼니스트 김서령은 그의 책 ≪이야기가 있는 집≫에서 ‘유리와 철근과 시멘트로 둘러싸인 집에 문을 닫고 살면 호흡과 기운이 막혀 옹졸해지고 메마른 공간을 견딜힘이 약해져버린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삼십여 년 아파트에서 살아온 나는 이즈음 자주 몸 구석구석이 삐걱거린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전보다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이루고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기듯이 살아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초조함에서 풀려났다. 산 아래 살게 되어 들며날며 자연스레 산을 건너 온 바람을 쐬고 나무를 스쳐온 햇볕을 자주 접하게 된 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야기가 있는 집≫은 몇 해 전 어느 수필가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그 중에서 ‘잔서완석루’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학생들에게 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그 책과 관련된 인물을 직접 만난 후 보고서를 만들어 나누어 읽도록 한다는 고등학교 국어선생이 지은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집을 지어줄 건축가와 무려 2년 동안이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교감을 나누었다. 집의 형태나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의논한 것이다. 그가 원했던 집은 ‘책의 집’이다. ‘책 읽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부하고 토론하는 집, 찾아오는 사람과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있는 툇마루가 있고 바람과 공기가 통하는 집, 베란다와 옥상에 의자를 놓고 책 읽고 차 마시고 공부할 수 있는 집’이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런 집을 지었다. ‘군더더기나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아 들어서는 사람이 누구라도 마음이 활짝 여리는 집, 눈으로 보기 좋은 집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 좋은 집’이다. ‘주인이 산책하듯 길을 따라 책들도 산책할 수 있는 책의 길이 있는 집’을 지었다. 시멘트로 지은 한옥 ‘잔서완석루’는 ‘낡은 책이 있는 거친 돌집’이란 뜻이다.
책을 읽는 동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그 소망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집을 지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 집이란 삶을 완성해 나가는 공간이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한번 그 집에 가보고 싶었다.
작가는 집이 곧 사람이라 했다. 인간이 깃들어 사는 집이 자신의 본성에 맞을 때 활기가 생기고 영감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 국토가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걱정한다.
그 책은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호주로 가서 십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에서 내가 장만했던 집은 뒷마당이 국립공원과 연결되어 있어 숲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원래 즉흥적이기는 하지만 앞마당에 서 있던 감나무 한 그루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아 두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 집으로 정했다. 그곳에서는 보기 드문 고국의 나무였던 것이다. 하도 많은 앵무새를 불러 모아 때때로 아름다운 새가 두려움을 주기도 했던 자두나무며 열매는 달리지도 않던 복숭아나무가 앞마당을 꽃동산으로 만들어 주던 집. 햇볕 좋았던 뒷마당에서는 빨래가 보송보송 말라갔고 아이는 건강했다. 남편이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회사는 건실했고 언니처럼 나를 챙겨주던 이웃이 있었고 가끔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 바비큐를 즐기기도 했다. 비록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등에 지기는 했지만 어쩌면 꿈에서 그렸을지도 모를 집에서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았다. 그러나 나는 늘 갇혀있는 것처럼 답답했고 툭하면 두통에 시달렸다. 남의 나라라는 토양이 나의 본성에 맞지 않았던 것일까. 귀양살이라도 하듯 마음은 그리운 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가 있었다. 물론 향수병이었을 것이다.
귀국 후 한동안 아파트가 그야말로 닭장 같아 쳐다보기도 싫었다. 정릉 산자락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보안이 허술했던 그 집에 도둑이 다녀간 후 무서워서 더는 살 수 없었다. 삼년 만에 아파트로 옮겼다. 흔히 아파트가 닫힌 공간이라고들 한다. 나는 닫힌 마음이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아파트에 사는 동안 벽이나 천장을 사이에 둔 이웃과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조금 둔한 편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에서 호흡과 기운이 막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편안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무나 보편적인 말이 되겠지만 집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삶의 질에 더 큰 영향을 주는 충전소 같은 영역이 아닐까. 당연히 어디에 무엇으로 지어진 어떤 형태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흙내가 있고 바람이 드나들고 화사한 햇살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 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다른 허공을 맴돌고 있다면 그곳이 집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산 아래 달랑 두 동이 있는 낡은 아파트지만 내 가족과 함께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소실봉 아래 이곳을 나는 ‘마음이 머무는 자리’, 집이라 부르고 싶다.
이춘희
<에세이21>로 등단. 산영수필문학회 직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