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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우오사( 宇五邪)
사람의 인연이란 정녕 기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피를 보고자 싸움을 걸어오던 인물들이 지금은 일변하여 친인(親人)으로 둔갑해 버렸다.
하지만 그 대상인 진일문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유일한 위안이라면 서로 간에 있었던 불필요한 분쟁에서 해방되었다는 점뿐이었다.
아무튼 양측은약속이라도 한 듯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은 무엇보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벽아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다.
진일문은 일단동부 안을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혹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초조한 심정에서였다.
과연 흔적이 있기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취벽이 입고 있던 가죽옷의 한 조각이었다.
'질긴 가죽으로 된 옷도 이처럼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나올 수가 있는 것일까?
진일문은 미간을 좁혔다.
'이는 필시 누군가와 싸웠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상대의 무공을 당해 내지 못해 납치되었을 공산이 크다. 대체 어떤 자가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그의 시선은 동부의 석벽을 훑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석실 입구의 벽면에서 칼로 긁어 쓴 글씨를 발견해냈다.
창졸간에 쓴 듯 글은 매우 엉성했으며 깊이도 얕았다.
'맥고봉(脈高峯) 괴(怪)......!'
미처 다 쓰지도 못한 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진일문에게는 커다란 소득이었다.
왜냐하면 맥고봉은 이 동부에서 불과 오십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한 산봉우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바심이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여수리에게 이를 전해 주었다.
아울러 자중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주를 납치해간 자는 아마도 무림인일 것이오. 그러나 벽아, 아니 공주를 구한다 하여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것은 오히려 일을
복잡하고 번거롭게 만들 수도 있소. 내 속히 다녀올테니 당신들은 이 곳에서 기다려 주시오."
여수리가 불안한 얼굴로 진일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행여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이어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럼 여람(黎嵐), 여봉(黎峯) 형제분을 대동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능히 부마 전하의 한 팔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끙! 역시 의사전달이란 쉽지 않군.'
진일문은 혼자서 홀가분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면서도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럼 다녀오겠소."
뚱뚱한 괴인이여람, 홀쭉한 괴인이 여봉이었다.
진일문은 결국 이들 두 괴인을 양옆에 거느린 채 동굴을 나섰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고심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어이없게도 여람과 여봉은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경공술에는 백지였던 것이다.
'휴우! 이들과 함께 가다가는 어느 세월에 맥고봉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 바람에 진일문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왜 안그렇겠는가?
다시 동굴로 되돌아와 여수리로 하여금 두 괴인에게 맥고봉으로 가는 길을 일러 줄 수 있도록 위치를 설명한 다음에야 떠날 수 있었으니.......
맥고봉의 중턱.
그 곳에는 거대한 바위가 하늘을 등에 업으려는 듯 비스듬히 돌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다시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이 장승처럼 우뚝우뚝 서 있기도 했다.
실로 묘한 지형이다.
더욱이 이 곳으로 오르는 길은 험하기 짝이 없어 능숙한 사냥꾼도 웬만하면 오르기를 꺼리는 편이다.
그 바위의 그늘 사이에는 그다지 깊지 않은 천연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새벽의 여명이 움터오는 가운데 동굴 앞에는 지금 한 명의 괴인이 멍청히 서 있었다.
검은 색 무복에 머리칼은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다.
얼굴까지도 덥수룩하게 수염으로 뒤덮혀 있어 흡사 산적 같은 자였다.
체격도 힘깨나 쓰게 생겼다.
이른바 범의 어깨와 곰의 허리를 지녔으며 눈은 부리부리한 고리눈이었다.
흑의괴인은 이따금씩 동굴 안을 들여다보며 그 앞을 서성거렸다.
그럴 때마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휴우......."
괴인의 입에서난데없이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몹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우울한 빛을 띈 채 허공에 머물러 있는 그의 시선을 보아서도 알 수 있었다.
"꺄악!"
문득 동굴 안으로부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접한 괴인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이......."
다음 순간, 동굴에서 한 가닥 인영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처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확인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인영이딱 멈춰선 곳은 흑의괴인의 바로 코앞이었다. 그리고.......
짝짝짝---!
연타음이 울렸다.
괴인이 뺨을 십여 차례나 얻어맞고는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신음 한 마디도 없었으나 그의 뺨에는 어느 덧 시뻘건 손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누, 누이... 왜 그러시오......?"
괴인은 고리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면전에 서 있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당함 이외에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즉 따귀를 맞은데 대한 분노 따위는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이렇듯 그의 따귀를 시원스럽게 후려친 자는 여인이었다.
일신에 타는 듯한 홍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마구 풀어헤쳐져 반라나 다름없었다.
여인은 허연 살이 비어져 나와 있는 허리에 척하니 손을 올려놓더니 괴인을 향해 분성을 발했다.
"개자식! 네가 감히 나를 놀려? 뭐, 날 위해 미소년을 구해 왔다고? 이 요미미(妖美美)를 위해서라면 불지옥에라도 서슴없이 뛰어 들겠다고? 호호호...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괴인은 여전히멍청한 얼굴로 요미미란 이름의 여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당혹이 어려 있었다.
"누이,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정말로 이 탁불군(卓不君)은 누이를 위해서라면......."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닥쳐! 쓸모없는 병신 같으니."
탁불군의 몸이일순 휘청 했다.
아마도 병신이라는 말에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삽시에 모닥불이라도 끼얹은듯 검붉게 변했다.
요미미는 이십세 가량의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특히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이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옷이 반쯤 벗겨져 있다 보니 아찔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그녀는 경멸에찬 시선으로 비틀거리는 탁불군을 건네다 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조소였다.
"호호... 병신인 주제에 그래도 질투심은 남아 있어 가지고! 그래,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이거지?"
요미미의 독설은 끝이 없을 듯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탁불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여전히 단 한 마디도 응수하지 못했다.
그러던 한 순간, 그는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흐하하하하---!"
웃음소리는 맥고봉을 뒤흔들더니 멀리 울려 퍼졌다.
그것은 고통과 한, 치욕감 등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그런 광소성이었다.
이어 탁불군은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쌍장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꽝! 우르릉-- 꽝--!
굉음과 더불어놀랍게도 그의 장력이 닿는 곳은 바위건 흙이건 모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실로 막강한 장세였다.
요미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표독한 시선으로 탁불군의 발작을 지켜볼 뿐이었다.
"크하하하... 그렇다! 난 병신이다. 크하하하하... 이 탁불군은 병신이란 말이다. 다리가 병신인 것도 모자라 태감(환관을 말함. 즉 성불구라는 뜻임)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핫핫핫---!"
꽈꽝--!
전면의 있던 바위가 그의 주먹을 맞자 산산조각이 나 날아가 버렸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족히 수백 근은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일권에 형체를 잃고 바수어져 버린 것이었다.
탁불군의 머리칼은 고슴도치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눈은 불덩이로 화한 듯 무시무시한 광기를 뿜어냈다.
그러한 모습은 정녕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잠시 후.
탁불군은 쌍장을 내리더니 요미미를 향해 돌아섰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의 기세였다.
언제 성을 냈냐 싶게 벌써 그는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예의 떨리는 음성으로 요미미에게 물었다.
"누이, 내가... 무얼 어쨌단 말이오? 그 꼬마놈은 정말... 누이가 좋아하는... 그런 예쁜 소년이란 말이오."
그와는 반대로요미미의 태도는 초지일관이었다.
"이런 밥통 같으니라구! 다리와 고환만 썩은 줄 알았더니 네 놈은 눈깔까지도 썩었구나?"
슷--!
그녀의 신형이장내에서 훌쩍 사라졌다.
환상 같은 신법을 발휘하여 어느 새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금새 탁불군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자! 똑똑히 보라구. 이게 사내란 말이야?"
휙!
하나의 물체가탁불군에게 던져졌다.
그는 얼떨결에 그 물체를 받아 안았다.
"헉!"
그것을 내려다본 탁불군은 기겁을 하여 내던져 버렸다.
그 물체란 다른 아닌 사람이었다.
즉 사오장 밖으로 맥없이 나가떨어진 것은 바로 안남국의 공주인 여취벽이었다.
입고 있던 가죽옷은 함부로 찢겨져 나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뽀얗고 소담스런 처녀의 젖가슴이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듯 정상에 얹힌 돌기는 수줍은 연분홍빛이었다.
어쨌든 이를 본 탁불군의 반응은 실로 묘했다.
"아뿔싸! 내가 속았구나."
붉으락 푸르락하는 그의 표정은 여체를 눈앞에 두고도 호기심이니 탐욕이니 하는 말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한 동안 낙심천만인 듯 멀거니 여취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 서서히 광기가 뻗어 나왔다.
사랑하는 요미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렵사리 미소년을 구해다 바쳤건만 결과가 이 지경이자 울화가 치민 것이었다.
실상 요미미로부터 당하는 수모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헛수고를 한 분풀이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그였다.
"이... 이... 찢어 죽일 놈!"
급기야 탁불군의 머리칼과 수염이 모조리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것은 그가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는 증거였다.
탁불군은 눈에서 시퍼런 광망을 뿜으며 서서히 벽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암석으로 된 바닥에는 두 치 깊이의 족인(足印)이 선명하게 찍히고 있었다.
그는 벽아와 반장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손을 쳐들자 우드득 거리며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이제 그 손을 내리기만 하면 벽아는 피떡이 되고 만다.
더구나 벽아에게는 아무런 방어수단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방금 전, 내던져질 때의 충격으로 혼절을 한 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잉--!
마침내 탁불군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한 가닥 인영이 전광석화처럼 날아와 벽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그 인영은 탁불군의 무지막지한 일장을 그대로 맞받았다.
펑--!
폭음과 함께 흙먼지와 돌가루가 분분히 일어났다.
그 속에서 쿵쿵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대기의 소요가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갑자기 장내로뛰어들어 벽아를 구출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창졸지간에 탁불군의 위맹한 장력을 받아내느라 진기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기혈이 마구 들끓고 있었다.
반면에 탁불군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장을 받아낸 자라면 적어도 동년배는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상대는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 아닌가?
그것도 문약해보이는 서생풍의 인물인 것이다.
탁불군은 믿을수 없다는 듯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물었다.
"꼬, 꼬마 놈! 넌 누구냐?"
전황인즉 그는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진일문은 세 걸음이나 후퇴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날더러 꼬마라고?'
진일문은 내심실소하는 한편,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뭐라 말하려던 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맙소사! 지금 이 자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는얼마 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당산의 불회곡에서 막 마을로 내려왔을 때, 엉뚱한 사람으로 오인받아 지독한 곤욕을 치른 기억이었다.
그는 면전에 마주 서 있는 자를 보니 그런 불상사가 왜 일어났었는지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일문은 탁불군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나 덥수룩한 수염, 산발이 된 머리칼 등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보기에도 영락없이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연해진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광사 탁불군이란... 사람이오?"
"엉?"
탁불군은 기성을 발하더니 고리눈을 더욱 크게 떴다.
"애송이 놈, 네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푸훗!"
진일문은 대답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실상 그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늘상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우연한기회를 빌어 공교롭게도 그 내막을 알게 되자 웃음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이렇듯 판에 찍은 것처럼 닮아 있으니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덤빈 것도 무리는 아니군.'
광사 탁불군.
그는 본시 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멸시와 조소를 당하고 살아온 자다.
따라서 그는 진일문이 이렇게 나오자 대뜸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꼬마놈! 노부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위이잉--!
또 다시 그의 손바닥에서 위맹한 장력이 뻗어 나왔다.
진일문은 감히방심하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물러나며 태극십삼세의 수휘오현을 펼쳤다.
그것은 앞서 상대가 우둔한 것에 비해 매우 정묘한 공격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펑--!
두 가닥의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탁불군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장세가 부드럽고 유현한 진기에 의해 스르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 네 놈은 요술을 하는구나."
그는 단순한 위인이었다.
그리하여 늘상 자신을 놓고 내공과 장력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소위 애송이로 보이는 상대가 이를 태연히 받아낼 뿐더러 아예 자신의 장력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자 더 연구해 볼 것도 없이 요술을 부린다고 단정 지어 버렸다.
진일문은 탁불군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으음, 이 자는 험악한 생김새와는 달리 무척 순박하구나.'
비록 그로 인해 억울한 고초를 겪었으나 별다른 유감이 일지 않은 것도 연이어 부딪쳐온 이런 느낌 때문이었다.
'벽아를 이 곳에서 무사히 데려갈 수만 있다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과거지사야 잊으면 그만일 테고.......'
마침내 진일문은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소. 우리, 이쯤에서 화해하는 것이 어떻겠소?"
"화해라고......?"
탁불군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때,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다.
"호호호호... 불군 오라버니, 이제 보니 진짜 물건을 데리고 왔군요? 호호호... 전 그 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제가 원한다면 오라버니께선 그 아이를 양보해 주겠죠?"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장본인은 요미미였다.
그녀는 허리를묘하게 비틀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얼핏얼핏 팽팽하게 솟아오른 유방의 계곡이 보였다.
어디 그 뿐인가?
유난히 짧은 상의 덕에 허리의 살결은 물론 은밀히 숨어있어야 할 배꼽까지도 간간이 드러나고 있었다.
진일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런 차림새는 아무래도 역겨웠던 것이다.
탁불군의 표정은 그와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으래? 이 놈이 정말 누이의 마음에 든단 말이지?"
하지만 요미미는 무정하게도 감격한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탁불군에게는 그 이상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가에 은은히 염기를 띄우며 진일문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
"호호호... 소형제, 이리 와서 이 누나와 함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어 보지 않겠어? 호호... 누나가 하늘에 오르는 즐거움을 가르쳐 줄께."
진일문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응수했다.
"아쉽군.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이오."
"으응? 그게 뭔데?"
"거울이오. 당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비쳐볼 수 있도록."
"꺄악!"
요미미는 한 소리 괴성을 발했다.
그러더니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평소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늙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하필 진일문에게 그 점을 찔린 것이었다.
"죽여! 죽여 버려! 빨리 저 놈을 죽여 버리란 말이야--!"
요미미는 길길이 뛰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졸지에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정상적인 여인의 몰골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사이 옷이 완전히 풀어 헤쳐져 젖가슴이 덜렁거렸는데 그것은 육감적이라기보다는 몹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은 역시 탁불군의 호응이었다.
"알았다, 누이! 내 당장 이 녀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정말로 쌍장을 내뻗었다.
위이이잉--!
무시무시한 장력이 곧장 진일문에게 몰려갔다.
"엇!"
진일문은 이 급습에 아연실색했다.
광사 탁불군이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설마하니 미쳐 날뛰는 요녀의 말을 곧이 그대로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엉겁결에양손을 뻗어 채 끌어 올리지도 못한 진기로 대하처럼 밀려오는 장력을 막았다.
그러나 장력과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그는 심장이 터져나갈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꽝---!
폭음을 귓전으로 들으며 진일문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붕 떠올랐다.
그의 몸은 허공에서 호선을 그리며 수장을 날아 한 암석 위의 돌출된 부분에 부딪쳐 갔다.
만일 그대로 추락한다면 필경 머리가 으깨어져 죽고 말리라.
하나의 붉은 인영이 그를 향해 번뜩 날아간 것은 이 때였다.
그 인영은 막 암석에 부딪치려는 그를 가뿐하게 안아들더니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동굴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누, 누이--!"
탁불군이 소리쳐 불렀으나 홍영, 즉 요미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쩝! 도대체 누이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안 죽이면 꼭 나까지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납게 굴더니 왜 저렇게 금방 생각이 또 바뀌었을까?"
탁불군이 이처럼 미련스레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잔뜩 비아냥이 깃은 음성이 들려왔다.
"킥킥... 불군, 너 같은 멍청이는 아마 평생을 가도 그 사정을 알아낼 수 없을 걸? 하긴 그것을 안다면 어찌 미미가 너를 그렇게 싫어하겠느냐?"
광사 탁불군의안색이 싹 변했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만생(萬生)! 내 오늘 너의 그 주둥아리를 뭉게 버리겠다."
그러자 바위 뒤에서 한 난장이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그는 오색이 현란한 색동옷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가 반들반들하게 벗겨져 매우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인물이었다.
"크크크... 꿈 깨라. 너의 그 둔한 솜씨로 이 환종(幻宗) 어르신을 감히 어찌해 보겠다는 거냐?"
놀라운 현상은바로 그 순간에 벌어졌다.
색동옷의 난장이는 겨우 두어 걸음을 걸어오는 동안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게도 키가 육척이나 되는 거한이 되어 있었 다.
그것도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미염공으로써 점잖게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너... 너......!"
탁불군은 성이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에 반해 환종, 아니 환사(幻邪) 만생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이리 번뜩 저리 번뜩 신법을 구사해 위치를 멋대로 옮기고 있었다.
방위를 옮길 때마다 그는 계속 변모를 거듭 했다.
어떤 때는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으로, 또 어떤 때는 더없이 준수한 청년으로 변했는데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져 그가 무슨 수를 썼는지 전혀 눈치 챌 수가 없었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변장술이었다.
과연 천하에 누가 있어 이렇듯 보보를 옮길 때마다 변신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의 입담 역시도 뒤쳐지지 않았다.
"안되지, 안된다구. 네가 아무리 미미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열심히 시중을 들어도 박대는 결코 면치 못할 거야. 그리고 슬프게도 네 돌대가리로는 죽을 때까지 그 이유를 모를 거야. 아아! 가엾은 불군......."
말을 하는 동안에도 환사 만생은 네 차례나 모습이 변했다.
광사 탁불군의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아아악! 죽인다--!"
위이이잉--!
그의 투박한 쌍장은 실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무쌍한 장법을 구사해냈다.
어쨌거나 그는 장법의 조예만은 천하일품이었다.
삽시에 수십 개의 장영이 만생의 전신을 뒤덮었다.
하지만 만생의묘수는 바로 신법에 있었다.
"클클! 소용없다니까."
그는 찰나적으로 몸을 요리조리 비틀며 교묘하게 장권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탁불군이 볼 수 있는 것이라야 정신없이 어른거리는 색동옷이 고작이었다.
펑--! 퍼펑!
꽈르르릉--!
마침내 분기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른 탁불군은 그를 따라잡기를 포기하고 쌍장을 아무데나 마구 휘둘렀다.
그 바람에 주변의 암석들이 풍지박산나며 돌조각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실로 엄청난 장세였다.
그대로 가다가는 아마도 만생을 없에기 보다는 맥고봉이라는 산봉 자체가 괴멸될 것 같았다.
물론 그 때까지도 탁불군은 그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불군은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다.
꽝---!
또 하나의 암석이 박살나며 자욱한 돌가루를 뿌려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분진 속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솟구쳤다.
슉!
검빛이 은하처럼 뻗어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윽!"
멧돼지의 멱을따는 듯한 비명과 함께 탁불군은 갑자기 장승처럼 그 자리에 우뚝 굳어져 버렸다.
"으으......."
뒤미처 그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 덧 공포로 인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마에서는 땀마저 진득하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런 탁불군의시선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폭이 좁고 얇기가 흡사 종잇장을 연상케 하는 장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 이는 검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 검이 노리고 있는 곳은 바로 탁불군의 인후(咽喉)였다.
단 한 치라도 베어지면 곧바로 염라전으로 직행하게 되는 극히 위험한 부위인 것이다.
검(劍).
그것은 매우 특이했다.
검신이 유독 길고 얄핏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전율이 일게 했지만 그 형태 또한 유별났다.
마치 도(刀)와 같은 형상이면서 그 끝이 거의 송곳처럼 예리하고 뾰족했다.
더욱이 그것은지팡이 속에 갈무리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검을 쥐고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 속에 몸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키만 훌쩍하게 컸지, 너무도 깡말라 있어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 윗 부분을 점하고 있는 얼굴은 온통 검상(劍傷)이 얼기설기 그어져 있어 한 마디로 꿈에라도 볼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표정도 일체 없었다.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채 그저 싸늘한 기운만을 연신 흘려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종의 사기(邪氣)랄까? 용모와 더불어 그의 전신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웬지 피를 부르는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래서인지 검은 옷에 감싸인 그의 어깨 너머로는 흡사 죽음의 문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두... 두목(斗目), 거... 검을 치워 다오."
탁불군이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거렸다.
두목이라면 바로 환우오사 가운데 맹사(盲邪)의 이름이다.
아닌 게 아니라 흑의인은 눈이 있으되 눈동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직 흰자위만이 스산한 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광사 탁불군은천하의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이 맹인만은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가 너무도 차갑고 잔인한 냉혈인(冷血人)이었기 때문이다.
맹사 두목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불군, 너는 내 잠을 방해했다."
"나... 나는 네가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럼 네 옷을 그 대가로 받겠다. 나의 검 귀백(鬼魄)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냥 검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까."
"제발......."
탁불군은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그 사이, 맹사는 벌써 검을 지팡이에 꽂아 넣고는 그를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다시 드러누웠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아이구!"
탁불군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이 갈기갈기 베어져 흘러내리니 어쩌겠는가?
졸지에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망신살이 따로 없었다.
산도적 같은 위용을 과시하던 그가 너덜거리는 옷자락을 붙잡고 쩔쩔 매는 꼴이란 정녕 볼만했다.
"으헤헤헤... 아이구 배야! 으헥헥! 꼴 좋게 되었구나."
환사 만생은 어느 새 또 다른 모습이 된 채 배꼽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탁불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얄미운 그를 쳐죽이려면 필히 벌떡 일어서야 하거늘,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말못할 고충이 있었다.
덩치에 비해 완전 부조화인 그 물건(?)이 바로 죄였다.
최소한 어린아이의 그것보다도 빈약하니 차마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끙!"
탁불군은 앓는소리를 냈다.
만생이 그의 주위를 팔짝팔짝 뛰어 다니며 이죽거렸다.
"이 곰탱이 같은 놈아! 왜 그러고 앉아만 있느냐? 어디가 불편한 거냐, 아니면 남에게 보이지 못할 것이라도 있느냐? 헤헤헤... 어디 홀딱 벗은 김에 네 물건이나 구경 좀 하자."
탁불군의 얼굴이 제 형태를 잃을 정도로 마구 씰룩거렸다.
하지만 체념을 떠올렸는지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런데 이 때였다.
산등성이 아래로부터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한어가 아니었다.
느닷없는 한 줄기 시음(詩音)이 또한 그 소리를 덮어 버렸다.
"에헤라, 구름을 보면 그대의 옷이 생각나고 꽃을 보면 그대의 얼굴이 떠오른다네. 봄바람이 난간을 스치고 이슬방울은 영롱한데, 선녀 같이 아름다운 우리 님을 맥고봉에서 보지 못한다면... 어허이, 달빛 아래 요대에서 다시 만나리라......."
그것은 당대(唐代)의 대시인인 이백(李白)이 현종 앞에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노래, 즉 청평조삼장(淸平調三章) 중 제 일장에 해당되는 대목이었다.
군옥산이 맥고봉으로 슬쩍 뒤바뀐 것은 알만한 이라면 다 알리라. 어쨌든 낭랑한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반석 위로 한 인물이 솟아 올라왔다.
그는 마포자루와 같이 헐렁한 도포를 입었으며 머리에는 비뚤어진 방건을 쓰고 있었다.
손에는 또 낡아빠진 부채를 쥐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마치 영락한 선비와도 같은 행색이었다.
초라한 차림새와 마찬가지로 얼굴도 무척 마른 데다가 병색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 떨거지 같은 선비는 반석 위에 오르자마자 다 떨어진 부채를 훨훨 부치며 말문을 열었다.
"허어! 친구들이 벌써 와 있었군. 그러고 보니 내가 제일 늦은 건가? 아니, 탁형은 왜 그러고 엉거주춤 앉아 있소? 험, 변이라도 보고 계시는 중이었나?"
선비는 탁불군으로부터 대답 대신 앞서의 앓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빙긋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눈을 돌려 바위 그늘에 있는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의 미미소저께서는?"
만생이 큭큭거리며 대꾸했다.
"지금 한창 재미를 보고 계시는 중이지."
그 말에 선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런! 이 천하제일의 미남이자 풍류낭군인 서방님을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얌전히(?) 있던 탁불군이 갑자기 고함을 빽 질렀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그 더러운 주둥이로 미미를 모욕하다니, 내 너를 죽여 버릴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기사(機邪) 백불범(白不凡).
이것이 선비를일컫는 이름이다.
그는 장내에서 벌어진 일의 내막을 환히 알고 있는 듯 곧바로 정곡을 찔러 들어갔다.
"쯧쯧... 내 평소에도 늘상 말했지만 탁형은 그 성깔부터 좀 고쳐야 환란을 면하게 될 것이오. 결국 두대형(斗大兄)의 비위까지 건드려 놓아 이 지경이 되지 않았소?"
"너... 너... 죽인다!"
"허어, 탁형의 이름이 불군(不君)인즉 군자가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추태도 그만하면 되었소. 알다시피 내 이름은 불범(不凡), 곧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오? 우리 이런 식으로 서로의 품격 차이를 노출시키지 말도록 합시다."
기사 백불범은멀쩡한 안색이면서도 그 특유의 유창한 혓바닥으로 마음껏 탁불군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 때, 괴성과 더불어 반석 뒤로 두 명의 괴인이 튀어 올라왔다.
그들은 바로 여람, 여봉 형제였다.
그들 두 사람은 묘어로 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백불범에게 덤비려 했다.
사나운 기세로 미루어 아마도 이 곳에 이르기 전, 백불범과 모종의 마찰이라도 있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멀리 쓰러져 있는 여취벽을 발견하고는 또 다른 의미의 괴성을 발했다.
그들은 지체없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사감(私感) 따위는 미련없이 내던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충심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흡사 유령처럼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안되지, 당신들 같은 추물들이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를 탐하다니 안될 말이야."
백불범이었다.
이어 그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자 쇠털 같이 가늘고 미세한 우모침(牛毛針)이 경력에 실려 여씨형제에게 날아갔다.
그 우모침으로 말하자면 실로 무서운 암기였다.
일단은 피부를뚫고 침투하게 되는데, 그것은 혈관을 따라 돌다가 심장에 박혀 종내에는 목숨을 빼앗고 만다.
더구나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아 방비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여씨형제는 물론 막을 수 없었다.
다만 놀라운 것은 그들이 우모침을 고스란히 몸에 맞고도 변함없는 기세로 기사에게 달려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이쿠! 이거 야단났군."
기사 백불범은원래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내놓을 게 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이제까지 이름을 떨쳐온 것은 기묘한 암기류나 각종의 병기 따위를 제작하는 재주가 비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는 여람의 살찐 주먹과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여봉의 발길질을 이기지 못해 그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버렸다.
"캑!"
그 광경에 광사와 환사, 심지어는 잠을 자고 있던 맹사까지도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기사가 만든 우모침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맞고도 멀쩡한 두 괴인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남국 출신도아닌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여씨형제가 익힌 외문기공에는 어떤 암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쨌든 여씨형제는 비로소 여취벽 앞에 부복할 수 있었다.
"공주님!"
그러나 그들의말은 묘어였으므로 그 자리에 있는 환우사사( 宇四邪) 중 누구도 알아 듣지 못했다.
이 때, 여취벽을 안으려고 손을 내밀던 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알록달록한 빛이 번뜩 하더니 환사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의 혈도를 찍어 버린 것이다.
"헤헤헤... 괴물 같은 놈들, 어디서 굴러먹던... 억!"
환사는 눈앞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그도 기사와 마찬가지로 저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실상 여씨형제는 예의 외문기공으로 인해 전신의 혈도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러니 환사의 손가락 힘만으로 제압될 리 만무였다.
되려 여람의 주먹이 그를 날려 버렸다.
털썩!
"아이구, 이 환사 나으리가 오늘은 임자 만났구나."
바닥에 처박힌환사는 죽는 시늉을 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여람은 그런 환사를 향해 묘어로 뭐라 투덜거리며 다시금 여취벽을 안으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싸늘한 냉기가 그의 손목으로 떨어졌다.
쉬익!
어느새 맹사 두목이 다가와 지팡이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여람은 히죽 웃더니 맨 손으로 검을 잡아갔다. 맹사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날렸다.
"미쳤군!"
과연 그 쾌검일식은 여지없이 여람의 손목을 잘랐다.
하지만 맹사는 곧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 이런!"
검은 여람의 손목을 절단한 것이 아니라 실은 거기에 박혀 버렸다.
그리고는 어찌 된 셈인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찰나, 여람이 다른 한 손으로 맹사의 가슴을 내질렀다.
맹사는 여타의맹인들이 그러하듯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로 모든 것을 파악해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검을 놓지 않으면 자신의 가슴이 으스러진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그러나 검은 곧 그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생명의 가치를 상회하는지도 몰랐다.
흰자위밖에 없는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리 닫혔다.
'죽자! 이대로.......'
위이이잉--!
웅후한 음향이 맹사의 고막을 뒤흔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는 역시 소리만으로도 그것이 광사가 펼친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의 역발산기세장(力拔山氣世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꽈꽝---!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렸다.
"컥! 크악--!"
두 마디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맹사는 비로소 요지부동이던 검이 자유롭게 놓여나는 것을 느꼈다.
"탁제(卓弟)! 고맙다."
이런 인사는 그의 평생에 걸쳐 처음으로 해보는 말이었다.
대체로 냉혹비정하고 말수가 적었던 이 위인은 말을 해놓고는 그 자신이 오히려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 내가......?'
그로서는 타인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다는 것도, 또는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광사 탁불군의 역발산기세장은 한껏 그 위력을 과시했다.
가히 절대적이랄 수 있었던 여씨형제의 호신괴공도 그의 무지막지한 장세와 격돌하자 별무소용이었다.
왜냐하면 내상을 입히는 직접적 살상능력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해도 산봉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엄청난 진동만은 그들도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려 수장이나 날아가 처박히더니 그 충격으로 그만 혼절해 버렸다.
하지만 탁불군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도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맹사를 위기를보아넘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선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중인환시리에 완전히 정체를 드러내게 된 그 물건(?)은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와하하핫---!"
기사와 환사의폭소가 그로 하여금 땅 속으로라도 기어 들어가 버리고 싶을 정도의 수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웃지 못할 희극의 한 장면이었다.
맥고봉에 모여있는 이 기상천외한 다섯 괴인들.
그들을 일컬어강호에서는 환우오사( 宇五邪)라 부른다.
정파고 사파고 간에 골머리를 싸쥐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은모두 괴퍅한 성품과 더불어 일신에 각기 한 가지 이상의 특이한 절기들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만나기만하면 서로 다투고 헐뜯기에 바빴으나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정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아악!"
동굴로부터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나왔다.
환우사사는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비명은 바로 색사(色邪) 요미미의 음성이었던 것이다.
요미미는 음탕한 취미는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특히 얼굴이 반반한 남자만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동굴 안에서 한창 운우지락에 빠져 있어야 할 그녀였다.
그런데 이 느닷없는 비명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의 의문은금새 해소되었다.
동굴 안에서 한 청년이 무엇인가를 둘러메고 걸어 나왔던 것이다.
"아니......?"
앞을 볼 수 없는 맹사를 제외하고 광사, 환사, 기사 등이 하나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울러 그들의 눈은 요미미의 희한한 자세에 고정되었다.
색사 요미미.
이미 별호가 붙은 이상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차림새야 그렇다고 치자.
그녀는 놀랍게도 손과 발이 나무등걸에 묶인 채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결박당한 멧돼지와도 같았다.
이런 상태의 그녀를 척하니 어깨에 메고 있는 자는 바로 진일문이었다.
그는 요미미가 버둥거리자 서슴없이 그녀의 커다란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못된 짐승 같으니! 그렇게 자꾸 움직이면 먼저 너의 살찐 엉덩이부터 베어먹겠다."
그는 허리춤에서 손잡이가 취옥으로 된 단검 하나를 꺼내더니 요미미의 엉덩이에 슬쩍 갖다 댔다.
"악! 살려줘......."
요미미는 단검의 예기가 엉덩이에 느껴지자 질겁을 했다.
그의 위협이 거짓이리라는 기대는 눈곱만큼도 할 수가 없었다.
휙! 휘휙--!
옷자락이 어지럽게 휘날리며 순식간에 네 사람이 진일문을 포위했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환우사사였다.
실상 요미미를포함하여 그들 오인은 겉보기와는 달리 의리에 있어서는 형제 이상으로 똘똘 뭉쳐진 위인들이었다.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오면 그대들이 보는 앞에서 이 색녀의 다리 하나를 잘라낼 것이오."
거듭 되는 진일문의 위협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 말을 듣자 네 개의 인영은 올 때보다도 배는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광사가 분노를참지 못해 길길이 뛰었다.
"애송이 놈! 어서 누이를 풀어 줘라. 그렇지 않으면 내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진일문은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내게는 한 가지 특별한 취미가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는 들어 보시겠소?"
"무, 무슨 취미냐?"
역시 가장 다급한 광사가 물었다.
"그것은 바로 인육(人肉)을 먹는 일이오. 후후... 내 장담하오만 남자 경험이 풍부한 젊은 여인의 고기가 제일 맛있소. 어떻소? 오늘 이렇게 육질이 좋은 물건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소생과 함께 맛을 음미해 보겠소?"
"미, 미친 놈! 만일... 누이의 머리칼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네 놈의 친척은 물론 조상 팔대의 무덤까지 파헤쳐 그 시체들을 가루로 만들어 놓겠다."
진일문은 대소했다.
"하하하... 마음대로 하시오. 나조차 모르는 조상님의 무덤을 찾아 주겠다니 내가 오히려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소."
"으으......!"
광사의 얼굴이금새 시뻘게졌다.
그는 요미미를 목전에 두고도 구해내지 못하자 그야말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도 진일문의 손에 들려진 단검은 계속하여 그녀의 둔부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가느다란 목까지 쓰다듬어 가고 있었다. 여차하면 피가 튈 판국이었다.
이 때, 환사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재빨리 신형을 뒤로 빼냈다.
그의 목표는 바로 한 쪽에 쓰러져 있는 여취벽이었다.
그녀는 때마침의식이 돌아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색동옷을 입은 웬 괴인이 자신을 끌어안자 냅다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 광경에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오?"
"헤헤헤헤... 몰라서 묻느냐? 나는 네 놈이 이 계집애를 구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헤헤... 어떠냐? 이 계집애의 고운 얼굴을 망가뜨려 보이랴? 아니면 내장을 박박 긁어내는 장면은 어떠냐? 원한다면 어느 쪽이건 당장 해줄 수 있다."
진일문은 환사의 손이 여취벽의 얼굴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정인이 아니니 필요에 따라서는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만은 없지.'
그는 마음을 정한 듯 짐짓 차갑게 응수했다.
"과연 당신에게 그럴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소. 어디 그 소녀의 얼굴에 험집을 내 보시오. 그 때마다 나는 이 여인의 살점을 한웅큼씩 도려내어 씹어 먹겠소."
"아... 안돼......!"
듣고 있는 요미미로서는 가히 미칠 노릇이었다.
그녀는 심장이 바짝 오그라 붙은 나머지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환사는 사색이되어있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작은 눈을 또록또록 굴렸다.
"꼬마야, 애당초 네가 여기 온 목적이 무엇이었느냐? 흘흘... 우리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떠냐?"
진일문은 빙긋웃었다.
"하긴 나도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 자리에서 취미생활을 강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환사도 이빨을드러내 보이며 마주 웃었다.
"각설하고, 우리 서로 인질을 바꾸도록 하자."
진일문의 고개가 선뜻 끄덕여졌다.
"그럼 그 소녀를 먼저 무사히 이 곳에서 내려가도록 하시오. 그런 연후에 이 여인을 풀어 주겠소."
환사는 눈썹을불쑥 치켜올렸다.
"자고로 거래는 공평해야 하는 법, 동시에 풀어 주기로 하자."
"싫소!"
진일문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왜......?"
"그것은 결코 공평한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오."
"어째서 공평하지 않다는 거냐?"
"여러분은 다섯 명이나 되고 소생은 혼자 뿐이오. 인질을 풀어준 뒤 여러분이 약속을 어긴들 나로서는 대책이 없지 않소?"
"뭐라고?"
환사는 모욕감을 느낀 듯 얼굴을 붉혔다.
"네 놈이 지금 우리 환우오사를 뭘로 보는 거냐?"
예로부터 무림인들 중에는 정도를 벗어나 있을지언정 신의만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다.
환우오사가 바로 그런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제멋대로 사고하며 자유롭게 행동한다.
하지만 신의를 위해서라면 하시라도 목숨을 내놓을 수 있기도 했다.
진일문도 이 점 만큼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처음으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여하간 그 소녀를 풀어 주시오. 솔직히 본인은 그 소녀의 안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는 입장이오."
환사가 뭐라고발작을 일으키려 하자 곁에서 맹사가 나섰다.
"만생, 그 계집을 풀어 주게."
맹사는 은연 중 이들의 우두머리 역을 맡고 있는 터였다.
과연 그 한 마디에 환사는 고분고분하게 여취벽을 풀어 주었다.
여취벽은 급급히 흐트러진 옷을 여미더니 고개를 돌려 진일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진일문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씨형제가 기다리고 있으니 너는 먼저 내려가거라."
그것은 벽아라는 한 소년을 대할 때와 똑같은 투였다.
여취벽도 이를 알아 차렸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반짝 쳐들었다.
"저 혼자 어떻게 가란 말이예요? 필경 이 괴물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텐데. 벽아와 함께 가요."
여취벽은 어느덧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자 진일문은 잠시 난색을 지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더없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여소저, 나는 당신이 그런 신분인지는 몰랐었소. 이제까지의 내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한시바삐 동굴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소저를 모시러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그 말은 곧 진일문과 여취벽이라는 두 남녀의 인연에 확실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여취벽은 몸을 가늘게 떨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혹시라도... 저를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달게 받겠어요. 전... 전 당신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다만......."
진일문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알다시피 나는 강호를 떠도는 일개 야인에 불과하오. 일국의 공주이신 여소저께서는 우리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은 깨끗이 잊어야 하오. 어서 가시오. 뒷일은 내가 맡겠소."
여취벽의 아름다운 눈에서 마침내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진... 가가(哥哥)......."
진일문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호칭을 듣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슴 깊숙한 곳이 달콤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렇게 불리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또한 공주께서는 귀국으로 돌아가셔야 마땅할 것이오."
"진가가......."
여취벽의 부르는 음성은 탄식에 가까웠다.
안타까움이 깃든 눈물이 그녀의 볼을 따라 하염없이 흘려 내렸다.
필연으로 화해버린 이별이 여심을 아프게 할퀴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여취벽은진일문을 만난 이후로 하나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안남국으로 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자신을 내몰고 있지 않은가?
한순간, 여취벽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난... 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보란 듯이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진일문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대체 왜......?"
"혼자서는 못가요. 그리고 난 공주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다시 벽아가 되어 가가와 함께 동굴에서 살아갈 거예요."
진일문은 내심어이가 없었다.
간신히 구해 놓으니까 이 무슨 철딱서니 없는 짓이란 말인가?
그는 환우오사를 힐끗 바라본 뒤, 생떼를 쓰고 있는 여취벽을 조심스럽게 달랬다.
"어디서 누구와 살든 우선은 이 곳에서 나가야 하지 않겠소? 부탁이오, 어서 가시오. 여소저가 같이 있어 준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일은 없소.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오."
"그럼 저와 약속해 주세요. 꼭 동굴로 돌아 오신다고."
여취벽은 아예뭉개기로 작정을 한 듯 했다.
그러나 진일문으로 하여금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그녀의 얼굴에 어려있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여기 일을 수습한 뒤에 곧장 그 곳으로 가겠소."
여취벽은 금새만면에 희색을 떠올렸다.
"그 말... 틀림없는 거죠?"
"물론이오."
여취벽은 다짐까지 받아 내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두어 걸음 발길을 떼던 그녀가 갑자기 홱 돌아섰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반드시 나를 찾아와야 해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을 드릴 테니 잘 보관하세요."
획--!
여취벽이 던진물건이 면전으로 날아왔다.
그것을 받아든진일문의 얼굴에는 짙은 의혹의 빛이 드리워졌다.
받고 보니 물건이란 것은 하나의 열쇠였기 때문이었다.
'열쇠? 아무리 보아도 장식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를 여는 것이기에 이렇듯 쉽게 희사하는 건가?'
"약속을 위한 신물(信物)이에요. 알았죠?"
여취벽은 아쉬운 눈빛으로 진일문을 그윽히 응시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반석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진일문은 열쇠를 품속에 갈무리하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껏 감회가 깃든 눈으로.......
첫댓글 즐감요
잘보구 갑니다
빨리 연재 해주시니 넘 감사드립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솨 *^^*
가는곳마다 여난이니.. 좋은 건가 아님?...
ㅈㄷㄱ~~~~`````````````````````
늘 감사합니다.
잘 보고있슴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즐독
즐....독............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구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