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스톱을 치면서 느끼는 것은 고스톱에는 엄청난 깊이의 철학과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고스톱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스톱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고스톱 왜 좋은가에 대하여 10가지로 정리하여 보았다.
(1) 고스톱은 인정 넘치는 게임이다.
고스톱의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하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화기애애하지 않으면 그건 고스톱 판이 아니다. 우선 광값부터 얘기하자면 내가 치기 때문에 남이 그 좋은 광이나 쌍피를 가지고도 죽으니 미안해서 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인정이 넘치는 일인가! 남이 첫 번 먹고 쌀 때도 돈은 준다. 대개 사람들이 첫 번째 먹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먹는 것인데 그걸 먹고 쌌으니 '참 안됐다' 하고 위로하는 마음에서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싼 것을 먹어갈 때도 피 한 장씩을 준다. 기분 좋은 사람 축하해 주는 것이다. 양상한(兩上限)을 치면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도 팁을 준다(물론 잃은 사람은 기분이 언짢을 테지만...). 이렇듯 남의 애경사(?)에 위로와 축하를 해주면서까지 치는 고스톱은 참으로 인정이 넘치는 게임이다.
(2) 고스톱은 신사적인 게임이다.
낙장불입(落帳不入), 고스톱이 신사적인 게임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번 실수를 해서 화투장을 잘 못 냈을 때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스톱의 룰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는 페어플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이 화투 패를 잘 못 돌렸을 때 내는 벌칙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남의 패를 훔쳐보지 않는 것도 고스톱의 룰이다. 판이 끝날 때마다 돈을 치르는 것이라든가, 광값을 선불로 하는 것 등도 고스톱이 신사적인 게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스톱이 신사적인 게임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쇼당(相談)'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누구를 밀어주기가 어려우니 그만 쳤으면 좋겠다는 이 쇼당은 고스톱을 가장 고스톱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고스톱에는 엄청난 웃음이 있다.
필자는 하루저녁 고스톱을 치는 동안 웃는 웃음이 평소의 2주일 정도에 웃음의 양에 해당한다고 본다. 쌌을 때 웃고, 싼 것 가져올 때 웃고, 고해서 났을 때 웃고, 남 고해서 고박썼을 때 웃고.... 정말 고스톱을 치다보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는 웃음도 있다. 자신이 똥피를 가지고 있는데 남이 똥을 싸놨을 때 표정 관리상 밖으로 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그 기분은 거의 환상적이다. 게다가 죠카까지 얹어서 싸놨으면 그야말로 흥분 그 자체가 아닌가. 어떠한 오락이 이렇게 자주 웃음을 선사해 줄까. 고스톱은 엔돌핀이 팍팍 생기는 오락이다.
(4) 고스톱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야구는 9회말부터라는 말이 있다.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말이다. 고스톱도 그렇다. 고스톱은 화투 한 장 한 장에 희망이 있다. 혹시 남이 싸주지 않을까, 혹시 죠카가 뜨지 않을까. 홍단하려고 하는 데 누가 앞에서 까주지 않을까, 누가 싸놓은 것 내가 먹어오지 않을까, 이런저런 희망적인 생각이 계속된다. '이번 판엔 피박 썼어도 다음 판엔 쓰리고에 피박 씌워서 양상한(兩上限) 쳐야지.' 이런 기대감이 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피 2장 따다놓고 피박 쓸까 조바심하고 있는데 누가 죠카 한 장 얹어서 9를 싸놓았다. 그때 9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것도 없다. 그래서 끝까지 갖고 있던 광 한 장 내고 쳤는데 죠카가 뜨고, 이어서 9가 떴다. 한번에 피가 12개, 3점으로 끝이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고스톱을 치는 지도 모른다.
(5) 고스톱에는 지루함이 없다.
누구나 시간 보내는 데는 고스톱 만한 게 없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말이다. 한 판당 일정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점수만 나면 끝날 수도 있고, 고에 들어갈 수도 있다. 누가 빨리 점수를 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스톱 속에는 시간에 대한 관념이 속도감이라는 관념과 같이 들어 있다. 언제나 시간이란 벨트 위에 내가 놓여 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먼저 칠까?', '치는 사람 어디 갔나?' 하면서 재촉하는 지도 모른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맨 처음 몇시까지만 치자고 시간을 정해 놓지만 그 시간이 지켜지는 법은 거의 없다. 재미있으니까 더욱 치고 싶은 것이다.
(6) 고스톱에는 휴식이 있다.
대부분의 게임은 휴식이 없이 진행된다. 한번 참가하면 끝까지 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투로 하는 오락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고스톱에는 휴식이 있다. 다섯 명이 치다보면 3명이 치고 나머지 2명은 휴식이다. 그 때 화장실도 갔다 오고, 옆에 사람이랑 술 한 잔이라도 나누면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정 피곤하면 잠시 드러누워 허리를 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장실에 가서 샤워도 할 수 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미리 연막을 칠 수도 있다. - 친구가 상을 당해서 지금 초상집에 와 있다고 - 이 얼마나 여유로운 게임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연사(連死)제도를 두어 계속해서 죽을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고스톱의 풍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오죽하면 죽겠는가. 잘 안 들어와서 못 치겠다는데 억지로 치라 하니 그것은 너무 하는 것 같다. 안될 때는 숨 좀 고르면서 전열을 가다듬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본인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7) 고스톱은 고도의 두뇌 게임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다음에는 무엇을 낼까? 다른 사람 고 못하게 하려면 무엇을 내야 할까? 고스톱은 끊임없는 선택이다. 선택은 고민스럽기도 하지만 늘 선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때로는 잘된 선택에 웃고, 잘못된 선택에 가슴아파 한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고도의 심리전, 견제, 균형, 이런 것들이 시시각각 전개되는 것이 고스톱이다. 누구는 고스톱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운육기사(運六技四) 정도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운이 너무 많이 작용하면 재미가 없고, 기가 너무 작용하면 오락으로서의 재미가 떨어진다. 고도의 두뇌게임, 그것이 고스톱이다.
(8) 고스톱은 자연과의 호흡이다.
내가 잘 아는 화가(畵家) 한 분(*)과 고스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대화에서 나의 얘기는 고스톱에는 자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분은 궤변이라고 일축하셨다. 그러나 고스톱을 치다보면 화투장 하나하나에 단순화된 자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투에는 산과 나무, 꽃과 동물, 그리고 사람이 있다. 1에는 산과 학이 있고, 2에는 매화와 새, 3은 화려한 벚꽃, 4는 싸리와 새, 5는 난초, 6은 목단꽃과 나비, 7은 붉은 싸리와 멧돼지, 8은 둥근 민둥산과 새, 9는 국화, 10은 단풍과 사슴, 11은 오동나무, 12는 비. 단순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 붉은 띠와 파란 띠, 광, 이런 것들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11과 12를 뺀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이고, 거의 원색의 색깔로 인하여 치는 이의 마음을 밝게 해준다. 클로버와 하트, 다이아몬드 등 다분히 정형화된 도형으로 되어 있는 서양의 포카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9) 고스톱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누구는 고스톱을 흐름이라고 했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인생의 흐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시작하고 나서 한 시간동안 한 판도 먹지 못하던 사람이 중반을 넘기면서 선을 독식하는 경우도 있고, 잘나가던 사람이 고바가지를 쓰고 나서 힘을 못 펴고 그대로 사그라들고 마는 경우도 있다. 안되더라도 무리하지 않으면서 참고 치다보면 막판에 상한가를 연거푸 터뜨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잘나간다고 해서 끝까지 잘된다는 법도 없고, 안 된다고 해서 끝까지 안 되는 경우도 드물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이듯 고스톱도 오래 치다보면 인생의 이러한 면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뜻하지 않게 남이 도와주어서 나는 경우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으며, 예기치 않은 횡재도 있다. 사람이 자기의 앞날을 정확히 안다면 인생은 퍽 재미없을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살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하듯, 고스톱을 치는 많은 사람들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을 가지고 불나비처럼 고스톱 판에 뛰어드는 지도 모른다.
(10) 고스톱은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민화투와 육백이라는 것을 친 적이 있다. 민화투에서는 광(20점), 열 끝짜리, 오끝짜리, 피 이렇게 구분하였는데 그 많은 피는 열 장을 따와도 단 1점도 쳐주지 않았다. 한 때 유행했던 뽕은 화투짝 맞추기였을 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고스톱은 모든 화투에 가치를 부여한다. 열 끝짜리는 고스톱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열 끝짜리로 점수를 나면 배를 쳐준다. 민화투나 육백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피를 고스톱에서는 인정해 준다. 광은 광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광박, 오광), 5끝짜리는 장수로서 뿐만 아니라 홍단이나, 청단, 쿠사로서 인정을 해준다. 별볼일 없는 4껍데기를 가지고도 죠카까지 얹어서 싸놓은 한 무더기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따라서 고스톱을 치다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화투장마다의 값어치를 느낄 수 있다. 어느 하나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 결정적인 순간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고스톱은 더욱 흥미를 갖게 되는 지도 모른다.
* 화가 한 분 : 대전의 한국화가 가운데 지명도가 높은 분으로서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리시는 분이다. 평소 필자가 존경하는 분인데 고스톱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어서 때로 격론을 벌일 때가 있다.
첫댓글 탓시란 만화가 새로 나왔데요. 인생에 비유된다고 하던데... 신청한 책은 왜 안 나오나... 아 심심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