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古今도 지금只今이고, 지금도 고금과 같은데, 세상의 풍속도 그대로다.
.내 나이 열일곱 살, 내 영혼을 전율케 했던 도스또예프스키의 전집 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소설중의 한 편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한 것은 1897년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전 사상과 전 예술, 전 종교를 집대성한 이 소설은 장대한 규모와 긴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욕과 음탕의 화신이며 어릿광대인 아버지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와 야성적인 정열의 화신으로 나오는 장남 드미뜨리, 무신론자이며 이지적인 인물인 이반, 그리고 신성의 세계와 미래 세대를 대표하는 알로샤와 이반의 이성적 자아의 왜곡된 복제인같은 스메르자코프가 제각기 다른 심리적 정신적 특성을 유감 없이 드러내며 소설은 전개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의 유형지 옴스크 감옥에서 퇴역육군 소위 일리인스키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훗날 무고로 밝혀져 풀려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소재를 얻은<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은 드미뜨리가 그의 애인 그루센카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 표도르와 첨예하게 맞서다가 아버지를 죽이면서 3000루불을 강탈한 죄로 법정에서는 것으로 전개됩니다. 그 소설 속에는 인간의 내면 속에 잠재한 모든 욕망들이 기록화처럼 한 부분도 빠뜨려지지 않은 채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검사 이폴리드 끼릴로비치와 변호사 페쮸쿠비치의 명 논고와 변론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법정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검사와 변호사 간의 불꽃 튀는 공방전이 벌어지는데...
검사는 드미뜨리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길고 유장한 논고를 시작합니다. 그는 그 당시 러시아의 문제를 세익스피어의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될까"와 푸시킨의 시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 왔으니까요"또는 고골리의 「죽은 넋」에서 썼던 러시아의 「삼두마차」의 비유에 내포된 자유주의 사상까지 말하고 한 집안의 아버지로서의 표도르 빠블로비치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경박한 광대로서 음탕한 기질만 남고 자기의 어린 자식들을 하인에게 맡겨 구석진 곳에서 기르게 했고, 아들에게 주어진 지참금 마져 다 써버린 뒤 누가 그 아이들을 데려가면 쾌재를 부르기도 하고 그 다음은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가 과연 아버지일 수 있으며, 아들들이 아버지라고 과연 생각했을까?"그러면서 검사는 표도르 빠블로비치의 이른 바 그 나름의 도덕적 철칙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그의 연인이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에게 들려진 표현이었던 '아프레 므와 르 델뤼지(aprs moi le dluge.) '내게 해만 없다면 홍수가 나도 상관없다.'라는 프랑스어 다시 풀어 말하면 "나만 무사하다면 세상이 다 타버려도 좋다" 그러한 심리 상태였던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검사는 드미뜨리가 알료샤와 헤어진 후 썼던 숙명적인 편지를 증거물로 내놓습니다. 바로 그 편지가 드미뜨리의 유죄를 증명하는 가장 중대하고 치명적인 증거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통해 부탁해 보고 아무도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면, 이반이 출발하는 대로 곧 아버지를 죽이고, 장미빛 리번으로 묶인 봉투를 베개 밑에서 빼내고 말겠다.'
검사는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살인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범행은 그 편지에 씌어진 내용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변론에 나선 페쮸코비치는 3 천 루불 이라는 돈도 없었다. 그리고 강탈행위도 없었으며 또 살인사건도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아버지를 죽여 버리겠다던 드미뜨리의 말을 변호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악을 쓰며 "죽여 버릴테다" 너희 놈들 다 죽여버리겠어! 라고 말했다고 해서 살인이 일어나느냐고. 그러면서 그는 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최근에 핀란드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만, 어느 하녀가 남몰래 아이를 낳아서 버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사를 받은 결과 지붕 밑 다락 한구석에서 그 여자가 쓰던 트렁크가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그 트렁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걸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서 여자가 죽인 갓난아이의 시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여자가 나중에 자백한 것이지만, 그 트렁크 속에서 예전에 그 여자가 낳자마자 이내 죽여 버린 갓난아이의 해골이 두 개나 발견되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 여자를 과연 그 아이들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여자가 그 아이들을 낳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 여자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어머니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그 여자를 감히 부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과연 우리들 중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이어서 그는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낳았다. 너는 아버지의 핏줄이다. 그러니까 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에 반론을 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낳을 적에 과연 나를 사랑했을까?'하고 청년은 또 다른 의혹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는 더욱 더 깊은 의혹 속으로 빠져들면서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나를 위해서였을까? 아버지는 그 순간에, 필시 술기운의 자극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에 사로잡힌 그 순간에, 나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내아인지, 계집아인지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해야 내게 음주벽을 유전시켜 주었을 뿐-이게 아버지가 나한테 베풀어 준 은혜의 전부가 아니냐....." 라고 드미뜨리를 변론하며「말러의 군도」에서 「프란츠」의 모놀로그를 인용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기만 했을 뿐,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난 왜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하는가?"
요즘 입양한 아이를 해쳐서 온 세상 사람들을 경악하게도 하고, 자기 친자식을 해쳐서 지탄을 받은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스런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조선 역사를 지탱했던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모는 과정이야 어쨌든 그래도 부모라고 불리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요? 오늘 이 시대는 기러기 아빠와, 세계 제 1, 2위를 다투는 높은 이혼율 속에서 아이를 서로 안 기르겠다고 양보(?) 하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어머니, 또는 아버지라는 이름 속에는 온 우주가 들어있는데, 오늘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이 시대 부모의 역할은 대체 어디까지이고 도대체 자식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문득 소설 속에서 둘째 아들인 이반이 자주 했던 말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연단은 진리와 상식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라는 말이 문득 가슴 시리게 다가옵니다.
2021년 2월 19일 금요일,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그가 유형생활을 했던 옴스크 요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