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결의형제(結義兄弟)
진일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여취벽에 대한 일말의 감정 표현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가 떠나자 심적인 부담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환사의 뾰족한외침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꼬마야! 이젠 약속을 지켜라."
음성에 짜증이배인 것으로 미루어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취벽과여씨 형제가 멀리 벗어났으리라고 생각될 즈음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일순 그의 수중에 있던 단검이 번뜩하고 허공을 갈랐다.
"앗......!"
환우사사가 일제히 경악성을 발했다.
다음 순간, 그들의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바뀌었다.
진일문이 단검으로 벤 것은 요미미의 엉덩이 살이 아니라 그녀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줄이었다.
요미미는 손발이 자유스러워지자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환우사사 뒤로 숨어 버렸다.
휘휙--!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와 함께 환우사사가 흉흉한 기세로 진일문을 포위했다.
"이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광사의 거친 욕설에 이어 환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음은 각오했으리라 믿는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 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론이오. 네 분이 한꺼번에 손을 쓰셔도 무방하오. 후후후... 내 기꺼이 여러분을 모시리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네 개의 인영은 흠칫 하더니 모두 뒤로 물러났다.
몰려올 때도 그랬지만 그들의 동작은 물러날 때도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중 맹사가 먼저 음산한 음성을 흘렸다.
"누가 한꺼번에 상대한다고 했느냐?"
그러자 환사와광사도 지지 않고 한 마디씩 덧붙였다.
"감히! 네 놈은 끝까지 우리들을 모독할 작정이냐?"
"퉷! 재수 없는 꼬마놈, 너 같이 솜털도 안 벗겨진 애송이를 상대하는 데는 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들의 흥분한기색에 진일문은 내심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으음, 이들은 저마다 괴이한 성정을 지니긴 했어도 하나같이 강직한 면이 있구나. 겉으로는 군자를 사칭하면서도 숫자로 위협하는 작자들이 허다하거늘.......'
그는 현재도 그렇거니와 이제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은근히 환우오사란 위인들에게 호감이 일었다.
비록 사(邪)자를 달고 있는 마도의 인물들이기는 했으나 그들에게는 오히려 황룡사가보와 같은 명가의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며 솔직한 면들이 엿보였다.
진일문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좋소. 그럼 어느 분이 먼저 가르침을 주시겠소?"
"이 어른이 네 못된 버릇을 고쳐 주겠다."
색동옷의 인영이 그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환사였다.
진일문은 오색의 무늬가 덮쳐들자 즉시 칠금신법을 펼쳤다.
덕분에 허공을치게 된 환사는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럴 수가!"
평생토록 경신술에서만은 천하제일을 자부하던 그였다.
실제로 그는 역체환용술(易體幻容術)이라는 변장술과 더불어 특유의 경신술로 천하를 휩쓴 바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헛손질을 하게 되고 보니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나머지 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어지럽게 얽혀 돌아갔다.
진일문.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명이 났다.
왜냐하면 호적수를 만나니 비로소 칠금신법의 숨은 묘를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환사는초수를 거듭할수록 더욱 당혹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칠성환영비(七星幻影飛)라면 수초 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낙관적인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진일문의 변화무쌍한 신법은 경신술의 대가인 환사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고 갔다.
아닌 게 아니라 환사는 진일문의 종적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진일문의 움직임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환사의 이마에서는 절로 땀이 솟았다.
자칫하면 천하제일의 명성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하하하...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상대가 전권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환사는 눈썹을불쑥 치켜올렸다.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거늘......."
말하다 말고 그는 제 풀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대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물건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맙소사! 이런 불상사가......."
급급히 고개를숙이던 환사는 얼굴을 귀밑까지 붉혔다.
왜 안그렇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허리띠가 뽑혀 나갔으니 더 이상은 오기도 부릴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졌다!'
환사는 마침내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부르짖어야 했다.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 기사가 낡은 부채를 흔들며 나섰다.
"노부는 백불범이라고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진일문은 기사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불초는 진일문이라고 합니다."
"험, 본시 노부는 학자인지라 몸을 날리거나 손발 휘두르는 재간 따위는 매우 싫어한다. 따라서 나는 이 자리에 서서 자네에게 부채를 딱 세 번만 흔들겠다. 그 동안 자네가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진 것으로 하지."
기사의 제안에진일문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대체 이 자는 얼마나 믿는 바가 크길래......?'
하지만 그런 의문이란 진일문이 강호 견식이 풍부했더라면 도저히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암기 방면에서의 천하제일인을 눈앞에 두고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좋소."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 내심을 짐작한 듯 껄껄 웃었다.
"허허허... 조심하게나. 내 자네에게 유성호접(流星蝴蝶) 세 마리를 날려 보내겠다."
그 말에 환사와 광사 등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기사가유성호접이라는 암기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것의 무서움 역시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이 유성호접을, 그것도 한꺼번에 세 마리나 사용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무명의 청년이 아닌가?
이는 뒤집어 말하면 파격적인 예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윽고 기사의낡은 부채가 세 번 접혔다 펼쳐졌다.
촤라락! 촤!
그러자 선풍에의해 세 마리의 노란 나비가 허공으로 그림처럼 날아올랐다.
그것은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여유를 느끼게 하는 풍경이었다.
진일문으로서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천하 사대암기(四大暗器)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는 다만 단검을 단단히 잡은 채 나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팔랑팔랑.......
나비들은 마치살아 있는 것인양 잠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진일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그 나비들의 정묘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쐐애액--!
한 마리의 나비가 그를 향해 쏘아져 온 것은 그 때였다.
천천히 날아다닐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서운 속도였다.
"웃!"
진일문은 놀라는 한편, 반사적으로 수중의 단검을 후려쳤다.
나비는 그의 일검에 의해 정확히 양단되었다.
"아이쿠! 일 났군."
지켜보고 있었던 광사가 탄식처럼 부르짖었다. 묘한 의미가 담긴 그 소리에 진일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고 있구나!'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
두 조각으로 갈라진 나비가 믿을 수 없게도 수십 개로 분리되더니 처음보다 수 배나 빠른 속도로 폭사해왔다.
"이럴 수가!"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동시에 그는 재빨리 칠금신법을 전개하여 몸을 뒤로 빼냈다.
파파파팍!
금속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가 서 있던 자리의 암석이 무수한 파편들을 튕겨냈다.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은 참변을 면치 못했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것은전초전에 불과 했다.
나머지 두 마리의 나비가 양 방향에서 그를 향해 무섭게 쏘아져온 것이다.
진일문은 먼저의 경험이 있는지라 다시 단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비를 아예 파괴해 버리고자 일장을 내쳤다.
"아이쿠!"
광사가 이번에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발했다.
진일문은 멈칫했다.
광사의 기색에서 아까보다 더 불길한 조짐을 엿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소천성장력은 한 마리의 나비를 부수고 있었다.
펑--!
나비는 그대로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헉!"
진일문은 아연실색했다.
나비는 단순히 부서진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폭발을 해버렸기 때문었다.
무수한 나비의파편들이 그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인간의 신법으로는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의 눈부신 기지가 발휘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언제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어느 새 쌍장을 각기 다른 수법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즉, 한 손으로는 만만신공의 공력을 이용해 절정삼식의 기수식이자 수비식인 천수여래(千手如來)를 전개했다.
그러자 홍광이 번쩍 일더니 장영이 수십 개로 불어나 붉은 장막을 쳤다.
이와 동시에 그의 다른 한 손은 태극십삼세 중 금룡포운(擒龍捕雲)이라는 일종의 금나수를 전개해갔다.
어림잡아도 수백 개에 달하는 파편이 전신을 뒤덮어오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 찰나지간에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콰콰쾅--!
마침내 지축이흔들리고 고막을 찢기우는 폭음이 울렸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기사의 득의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어떤가? 유성호접의 놀이가 마음에 드는가?"
그러나 그는 이내 웃음을 뚝 멈추고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그의 놀라움은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진일문이 예상을 뒤엎고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만 해도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진일문의 왼손, 거기에는 마지막 한 마리의 유성호접이 쥐어져 있지 않은가?
충격을 견디지못한 듯 기사의 신형이 휘청 했다.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로써 싸움은명백한 그의 패배였다.
원래 유성호접은 강호의 사대암기로 이름을 떨치기까지 기사 백불범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지보였다.
그것은 그 하나 하나마다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도 보았듯어떤 것은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으며, 또 어떤 것은 상대의 장력이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기도 하는 등
상상치도 못할 괴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유성호접은 공통적으로 가벼운 미풍에도 비산(飛散)하게 되어 있어 발출이 곧 죽음의 신호였다.
그러므로 기사라는 일세의 명인(名人)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이 유성호접이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그 명인이 지금 진일문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내가 졌네, 소형제."
그는 환사와는달리 깨끗히 시인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의 얼굴에 나타난 참담함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진일문은 묵묵히 손에 있던 호접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호접을 받아든기사는 이미 그것이 이미 못쓰게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겉보기에 멀쩡할 뿐, 막강한 내공의 힘으로 인해 기관장치가 가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의 낭랑한 음성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할퀴었다.
"이제 어느 분께서 소생에게 가르침을 주시겠소?"
기사가 물러난자리에 맹사가 와 섰다.
"노부가 소영웅을 감당해 보겠네."
이 정도면 연령의 차이상 깎듯한 공대였다.
아울러 이는 맹사의 전 생애를 통틀어도 불과 몇 번 되지 않는 경우에 속하는 현상이었다.
어느 덧 진일문은 이 맥고봉에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전혀 비중이 다른 인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진일문에게는 큰 애로가 있었다.
'다르다! 이 자의 기도는.......'
그는 맹사가 앞에 서자 은연 중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상대가 비록 눈이 멀긴 했어도 환우오사 중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일문은 스스로 바짝 긴장을 조인 후, 예의 단검을 허리춤에서 뽑아 가슴 앞에 곧추세웠다.
"그럼 하교를 받겠소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한 가닥 섬광이 번쩍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실로 가공할 빠르기였다.
맹사가 어느새 지팡이 검을 뽑아 벌써 수삼 검을 전개한 것이었다.
'과연!'
진일문은 내심찬탄해마지 않았다.
실상 그는 그 때까지 맹사의 검을 보지도 못했다.
너무도 신쾌무비하여 눈으로 확인하기는 커녕 피하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례를 깨고 칠금신법을 연달아 다섯 차례나 전개했다.
하지만 끝내 요혈을 노리고 덤벼드는 검세를 떨쳐내지는 못했다.
검극이 스칠 때마다 뼈를 쑤시는 듯한 냉기가 전해져왔다.
슈슈슉---!
진일문은 그야말로 눈알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맹사의 공격은 그에게 숨쉴 겨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맹사의 검법은오직 공격일변도로써 맹인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오히려 역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즉 본능에 의존한 독창적인 경지를 창출해냈다.
과거에도 맹사는 무림일절에 속하는 일자무영검류(一字無影劍流)의 일인자였다.
게다가 눈을 잃은 이후로는 그 쾌검식류를 나름의 독특한 절학으로 발전시켜 놓은 것이다.
이른바 무초괴검(無招怪劍)!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룩해낸 기검술로써 전 무림을 다 뒤져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검학이었다.
그의 검술에는문자 그대로 일정한 초식이 없었다.
아울러 초식이 없으니 당연히 허점도 없었다.
맹사는 눈 대신 귀를 비롯한 육신의 다른 기능들을 빌어 상대를 파악하고 공격한다.
따라서 그는 초식을 시전하기 보다는 감각들의 명령을 쫓아 가장 빠르고 신랄한 공격을 가한다.
어느 덧 싸움은 사십여 초를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 맹사는 진일문의 옷을 수십 조각이나 베어 냈다.
그러나 정작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의 불가사의한 신법 때문에 연신 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맹사의사정은 진일문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답답한 심경과는 달리 진일문은 지금껏 방어에만 주력했을 뿐, 단 한 번도 반격을 시도해보지 못했다.
'가히 일방적인 전세로군!'
진일문은 내심자조를 금치 못했다.
더욱 씁쓸한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그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진일문은 한 가지 결심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모험이다! 그 외에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는 신법을 구사하는 와중에도 맹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 자에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소리다. 그렇다면.......'
진일문은 문득신형을 우뚝 멈추었다.
츳!
섬뜩한 음향과함께 그는 옆구리에 극렬한 통증을 느꼈다.
맹사의 검이 그 곳을 깊게 긋고 지나간 것이었다.
'이 때다!'
진일문은 기다렸다는 듯 신형을 뒤로 슬쩍 빼며 스스로 호흡을 중단시켰다.
물론 그 이상의 움직임도 일체 취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만 같은 통증 때문이었다.
절로 신음이 나올 상황에서 그는 이렇듯 절대적인 정적을 이끌어낸 것이다.
반면에 맹사는검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상대의 부상을 알아 차렸다.
단지 그 뿐이었다.
미처 기뻐할 사이도 없이 상대의 기척을 놓쳐버린 것이다.
동공이 없는 맹사의 눈이 일시지간 심한 출렁임을 보였다.
'죽었단 말인가?'
공격목표를 잃은 그는 일단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소지한 기능 중 청각 외에 다른 기능을 동원했다.
'냄새를......!'
하지만 그의 후각보다는 진일문의 일장이 빨랐다.
펑--!
"크윽!"
폭음과 함께 맹사는 오른쪽 어깨를 얻어맞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소천성장력의 위력에는 그도 별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은 옆구리에서 선혈을 쏟아내되 우뚝 서 있고, 한 사람은 무기를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렇다면 승부는?
그것은 맹사의입을 통해 가름되었다.
"멋진 고육지계(苦肉之計)였다, 소영웅."
"고맙소이다."
진일문은 그를향해 간단한 목례를 해 보였다.
이 때, 광사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찢어진 헝겊조각으로 간신히 하반신만을 가린 채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꼬마야! 이번에는 이 어르신의 장력을 받아 봐라."
우드득--!
관절 부딪는 소리와 더불어 광사의 팔이 한 자나 늘어났다.
그러자 맹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그를 만류했다.
"탁제, 자네는 싸울 자격이 없네."
광사가 안면을씰룩이며 볼멘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내가 자격이 없단 말이오?"
맹사는 검을 회수하고는 탄식처럼 말했다.
"자네가 우리 중 제일 먼저 저 청년과 격돌하지 않았었나? 후후... 그리고 요술(?)에 당한 것도 역시 자네였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자네는 이미 한 번 패한 셈이네. 그것은 요누이도 마찬가지, 우리는 오늘 모두 저 청년에게 패했다."
광사의 우직함이 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절대 승복할 수 없소! 이 꼬마놈은 그 따위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한 결코 내 공력을 받아낼 수가 없소."
그가 입에서 침을 튕겨내며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도 없지 않았다.
진일문이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소생 역시 그 때의 승부는 인정할 수가 없소. 귀하의 장력을 한 번 감당해 보겠소이다."
진일문이 떠올린 것은 진기를 채 운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광사의 장력에 맞고 혼절했던 기억이었다.
그로 인해 동굴 안으로 끌려들어가 색사 요미미의 제물이 될 뻔 했지 않은가?
요미미가 올라타려 했을 때는 정신이 들어 되려 그녀를 제압했지만 솔직히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광사라는 위인은 모자란 만큼 정공법 외에는 다른 수법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승복을 할 리가 없었고, 이 점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기이한 호승지심을 갖게 만들고 있었다.
곁에서 환사가 진일문을 향해 이죽거렸다.
"쯧! 고지식한 면만 따진다면 자네도 불군에게 뒤지지 않겠군. 어디 멍청한 작자들끼리 한 번 잘해 보게나."
진일문이 그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찰나, 광사 탁불군이 산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을 발했다.
흡사 바윗덩이를 연상시키는 광사의 주먹이 뻗어 나왔다.
쿠쿠쿠쿠.......
경풍소리 또한웅후하기 그지없었다.
광사 탁불군.
실상 무공의 깊이로 이르자면 환우오사 중 그가 가장 우위에 있다고 봐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적으로 불구였으므로 혼원일기공이라는 순양기공을 익혀 내공이 우선 정순했다.
게다가 청년시절에 육합경(六合經)이라는 현문의 비급을 얻은 그는 이후로 장법과 권법에 있어 남다른 진경을 누렸다.
다만 워낙 단순한 인간형이다 보니 그 정묘함에서 부족할 뿐이었다.
꽈르르릉--!
광사는 바야흐로 육합풍뢰권(六合風雷拳)을 펼쳤다.
그것은 역발산기세장과 더불어 그가 자랑하는 독문의 절기였다.
과연 돌가루와흙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방원 오륙 장이 온통 권세에 휘말려 무시무시한 돌풍을 일으켰다.
한편.
진일문은 그 때까지도 내력이 충만한 상태였다.
체내에 두 가지의 내공이 잠재해 있으므로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았다.
'강(剛)으로써 강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이유제강(以柔制剛) 쪽이 내게 훨씬 유리할 것이다.'
선택을 마친 그는 즉시 태극환허공을 끌어 올려 태극십삼세의 귀원건곤(歸元乾坤)을 전개했다.
꽈꽝---!
천번지복의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그 직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우뚝 서 있었다.
이윽고 승부가 가려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억......!"
광사가 괴성을발하며 피를 울컥 토해냈다.
아울러 그는 더 이상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에 반해 진일문은 약간 비틀거렸을 뿐, 그대로 신형을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도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도 역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으음....... 정녕 어려운 싸움이었다.'
어쨌든 그에게승리를 안겨준 것은 태극십삼세의 심유하면서도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는 광사의 극강권공을 이길 만한 무학은 그것 이외에 천하에 다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진일문은 현고자는 물론, 무당파 조사인 장삼봉진인의 영전에 새삼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상세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내부에는 잔잔한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그가 상념에서벗어나 현실감을 되찾은 것은 바로 요미미와 눈길이 딱 마주친 순간이었다.
"흡!"
요미미는 비명을 삼키느라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그녀는 진일문에 대해 거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의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는 하마터면 엉덩이를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진일문의 무위(武威)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사사가 모조리 꺾였으니 전의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난... 나는... 싸우지 않겠어요."
요미미는 그의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녀는 환우오사 중에서 가장 젊었다.
현재 이십오 세로써 천성적으로 피가 뜨거웠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내를 농락해 왔으나 임자를 만나 호되게 당하더니 이렇듯 풀이 죽어 버렸다.
"좋소."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인 후, 사사를 둘러보았다.
"그럼, 소생은 이만 가 보겠소이다."
그는 볼일을 마친 사람이 의례 그러하듯 말을 마치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맹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멈추시오."
맹사는 진일문이 뭐라 응대하기도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노부가 소협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그의 말투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 바람에 진일문은 흡사 이끌리기라도 하듯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소생에게 무슨 부탁......."
진일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랍게도 맹사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가 영문을 몰라 멍청해져 있는 사이, 이 괴이막측한 변괴(?)는 나머지 사사에게도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급기야 사사까지도 하나 둘씩 차례로 무릎을 꺾은 것이다.
"여러분!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오?"
진일문은 당혹한 나머지 얼른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맹사의 진중한 음성이 그를 꼼짝도 못하게 옭아맸다.
"오사가 주공(主公)께 인사 드리오이다."
맹사는 쏟아놓은 말을 스스로 입증이라도 하듯 이마를 땅바닥에 갖다붙였다.
진일문은 뻣뻣하게 굳은 채 반문했다.
"주공이라니? 그게 지금 소생더러 한 말씀이오?"
맹사의 태도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받아 주시오, 주공. 거절하면 우리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 자리에서 자결을 할 수밖에 없소이다."
환우오사 중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맹사라면 절대 허언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일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진일문은 맹사가 이런 말을 고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어떤 격전을 치루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뜻밖의 사태를 무작정 접수할 수만은 없었다.
진일문은 맹사를 정시하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소생을 어찌 보고 이러시는 줄은 모르겠으나 저는 단지 부평초처럼 떠도는 일개 낭객일뿐이외다. 이런 호의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겠소이다. 어서 일어서십시오."
그 말에 맹사는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 하더니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갔다.
"차라리 죽으리라! 하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니......."
"엇!"
진일문은 경악성을 지르며 전력을 다해 일장을 떨쳐냈다.
펑--!
무형의 경력이막 바위와 부딪치려던 맹사의 몸을 뒤로 날려 버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팡이 검을 뽑더니 자신의 목을 그어가고 있었다.
진일문은 등줄기에서 땀이 솟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수... 수락하면 될 게 아니오?"
섬뜩하기 그지없는 설득(?)이 실효를 거두자 맹사는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의 목줄기가 한 치 가량 베어지고 난 후의 일이었다.
덕분에 맹사는피를 뿜으며 모로 쓰러졌다.
그 와중에서도 대소를 터뜨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핫핫핫... 으핫핫핫핫......!"
맹사 두목, 그는 생애 어느 때보다 기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그 웃음소리에 가슴이 마구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오오! 내게 어찌 이런 복연이.......'
진일문의 혼백이 뛰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환우오사가 그의 앞에 일제히 엎드리고 있었다.
날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구름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뿌연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폭중동.
아무도 없는 텅 빈 동부가 허전한 느낌을 선사했다.
기다리겠다던 여취벽이 왜 아무런 전언도 없이 떠나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그녀가 남기고 간 빈 자리를 확인하자 진일문은 몹시도 쓸쓸해지고 말았다.
애초 그녀가 떠나기를 바랬던 쪽은 오히려 진일문이었다.
부마 자리 역시도 깨끗이 사양할 참이었다.
그러나 심중에담겨 있던 여취벽, 아니 벽아에 대한 끈끈한 애착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일문의 손에는 지금 웅담(熊膽)이 들려져 있었다.
벽아에게 주려던 것을 그 당시에 깜빡 잊고 전해주지 못한 것이었다.
환우오사.
그들이 진일문을 따라 이 동부에 와 있었다.
'하나를 잃었으나 다섯을 얻었으니.......'
진일문은 실상그들로 인해 상심한 가운데서도 크게 위안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점에 대해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색사 요미미와광사 탁불군이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더니 잠시 후에는 먹음직한 음식을 장만해왔다.
짧은 기간 동안 평소의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삼사도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진일문에 대해 공경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일문도 이제는 태도를 결정한 상태였다.
'이들 환우오사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겸양만이 미덕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이끌어줄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를 포함한 여섯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다.
비록 동부 안에서의 조촐한 식사였으나 공동의 운명체가 된 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하고 푸근한 자리였다.
이윽고 식사를마친 후, 맹사가 차분한 음성으로 진일문에게 자신들의 내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요약해보면 이러하다.
환우오사는 본래 상호간에 유대가 일체 없던 사이였다.
그들이 현재와같이 어울리게 된 시기는 바로 개개인이 가슴속에 피맺힌 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말하자면 동병상련의 아픔이 서로 뭉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맹사 두목.
그는 광동성 출신으로 상인(商人)이었다.
교역선을 타고 사해를 누비며 상업을 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청년기에 그는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 우연을 빌어 뜻하지 않았던 수확을 얻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무공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두목은 일자도류(一字刀流)라는 도법의 달인이 되어서 중원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그는 남다른 자질을 십분 활용해 도법을 검법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일명 일자무영검법(一字無影劍法).
그의 독문 절학은 이렇게 하여 이 세상에 탄생했다.
그러자 그에게는 당연히 그것을 인증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다.
당시 두목의 나이 이십구 세, 충분히 호승심에 이끌릴 만한 나이였다.
강호에서 검학으로 고명한 문파라면 예나 지금이나 사대검파(四大劍派)와 이대검가(二大劍家)를 손꼽는다.
그 중에서 두목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대검가였다.
황룡사가보와 소위 만검장(萬劍莊)이라고도 불리우는 산동의 악가검문(岳家劍門), 그는 이 두 곳에 단신으로 찾아가 당당히 도전장을 내기에 이르렀다.
실상 이 두 가문으로 이르자면 무림의 사대세가에도 속하는 명가였다.
따라서 두목은 이들과 맞서기 전에 훗날 어떤 대가가 돌아올 것인가를 먼저 계산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가진 바 호승심만이 배경의 전부였던 이 젊은 기재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당시 사가보의 소보주였던 사운악(査雲嶽)과 만검장의 소검왕(少劍王) 악군보가 두목의 도전에 응했고, 그 일전의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두목은 일자무영검 아래 장래가 촉망되는 두 검수들은 패배시키고 나자 더욱 더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그는 그 다음 목표를 사대검파로 정하고는 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대검파란 곧무당, 청성, 공동, 화산 등의 네 거대문파를 이름이다.
두목이 요구한 것은 바로 그들 문파 장문인들과의 대결이었다. 장소는 구화산(九華山)의 연화봉.......
사대검파가 여기에 응할 리 없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감히 무명의 인물이 지고무상한 장문인과의 일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정해진장소에 단지 문하의 제자들을 한 사람씩 파견했다.
그것도 두목과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탐사하고 돌아오라는 뜻에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목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무시당한 분풀이로 각 문파 제자들의 오른팔을 잘라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빠지고 말았다.
문하의 제자들이 졸지에 한 쪽 팔을 잃고 돌아왔으니 사대검파인들 가만히 있을 리 만무였다.
그들은 두목을잡아들이기 위해 수많은 제자들을 풀었는데, 이 일이 또한 화근이 되었다.
추적을 당하게 되자 두목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들 사대검파의 제자들을 살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목은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일자무영검이 천하제일이라는 신념만은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마침내 두목은사파이가(四派二家)에 목숨을 내건 최후의 통첩을 전달했다.
그 내용인즉 예의 구화산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자는, 어쩌면 지극히 광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당시 두목으로서는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설사 구화산에 뼈를 묻더라도 자신의 검법만은 필히 인정받아야 했던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구화산의 일전.
불행하게도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토록 절실했던 한 개인의 염원은 그 당사자가 구화산 아래의 객점에서 몽혼약을 탄 술을 마시고 사로잡히는 데에서 끝을 맺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때, 두 청년이 면전에서 비웃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그에게 패한 적이 있었던 만검장의 소검왕 악군보와 황룡사가보의 사운악이었다.
그 두 청년에 의해 두목은 비참하게도 두 눈을 잃었으며 얼굴에 무수한 검상을 입게 되었다.
천애의 절벽 아래로 던져진 것도 역시 그들에 의해서였다.
그나마 천행이랄까?
절벽 중간에 돌출된 소나무에 걸려 두목은 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이후로 두목은흑암의 세계에 갇힌 채 오직 검법의 연마에만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상 일자무영검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검학이 필요했다.
복수를 위한.......
그러는 동안 장장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종내 그는 무초괴검이라는 새로운 검법을 창안해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현실감을 가지게 된 그는 참담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악군보와 사운악이 아니라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만검장과 사가보라는 것을.........
그들은 각각 만검장주와 사가보주가 되어 있었다.
한과 증오심은그로 하여금 침묵하는 자가 되기를 종용했다.
복수의 날을 노리고 떠돌면서도 그가 차갑고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 그는 손속만은 지독하리만큼 잔인했다.
이런 식으로 천하를 횡행하던 중 그는 자신의 신세와 흡사한 네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의기를 투합했다.
그 때부터 무림에는 환우오사라는 오인의 마두가 생겼다.
광사 탁불군.
과거 그는 한 표국의 표사였다.
그런데 위인이어리석다 보니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 바람에 온 가족이 몰살되는 참화를 당했다.
탁불군은 몽매에도 그 원한을 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를 모해한 자는 그 이전까지 흠모해마지 않던 인물이었다.
표국계의 거물인 사해제룡(四海帝龍).
훗날 탁불군은육합경을 익혀 복수를 꾀했으나 사해제룡의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사해제룡은 수하에 구름같이 많은 고수들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환사 만생.
그는 당금 황궁의 금의위 비장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만생은 영문도 모르는 채 파직을 당했다.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더욱 엄청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무참하게 간살(姦殺)을 당했으며 집안은 온통 쑥밭이 되어 있었다.
흉수는 의외로쉽게 알아낼 수가 있었다.
죽은 아내의 손에 하나의 금단추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 금단추의 주인은 만생이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금의위의 고관(高官)인 포국령(甫國嶺)이라는 자였다.
만생은 그가 진즉부터 아내의 미색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파렴치한 작자는 상관이라는 구실로 아내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라고 요구해온 적도 있었다.
그러니 상황은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포국령은 만생의 아내를 범하고 그 일이 외부로 누설될까봐 죽인 것이다.
분노한 만생은그 즉시 포국령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얻어맞고 쫓겨나야 했다.
포국령은 아예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고도 포국령은 계속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만생으로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에 올랐다.
금의위 대사령(大司嶺)이 된 것이었다.
이래저래 충격을 받은 만생은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하여 천하를 떠돌며 기회를 엿보던 그는 한 기인을 만나 변장술과 칠성환영비라는 절세의 경신술을 배웠다.
만생은 이를 이용하여 자금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는 결국 포국령을 죽이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는 천하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기사 백불범.
사천(四川)의 한 철기공방(鐵器工房)에서 착실하게 가업을 이어오던 자다.
그는 타고난 두뇌와 손재주로 온갖 기이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병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그 소문이 알려지자 사천의 명가인 당가보(唐家堡)에서도 그의 공방에 암기제작을 의뢰해 왔다.
사천당가의 암기는 천하제일이다.
당가가 사대세가에 속하게 된 것도 독술(毒術)과 더불어 바로 이 암기술 덕분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당가의 암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가의 암기에서 결함을 발견하게 된 백불범은 아무 뜻도 없이 당가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당가보의 고수들이 그의 공방을 기습한 것은 바로 그 날 밤의 일이었다.
그의 아내와 세살박이 어린 아들, 공방의 하인 등 식솔 이십여명이 그 하룻밤 사이에 몰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불범만은 지하실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후로 그에게는 복수가 곧 삶의 목적이 되었다.
백불범은 천리밖으로 달아나 새로운 암기 제작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유성호접, 이 희대의 암기는 그야말로 복수를 향한 집념의 산물이었다.
그는 이 유성호접으로 당가의 인물이라면 만나는 족족 살해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암기술도 자연히 발전을 보게 되어 천하인들은 이제 그의 암기술을 당가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백불범에게는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당가보를 완전히 괴멸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가보의 엄청난 세력은 이런 그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베개 삼아 쫓기는 처지가 된 데에는 바로 그러한 내력이 있었다.
색사 요미미.
그녀는 항주의이름난 기녀(妓女)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런 만큼 그녀는 어릴 적부터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인해 뭇 사내들의 탐욕어린 시선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 속에서도 그녀는 십육 세가 될 때까지는 순결을 지킬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모친의 지극한 배려 덕분이었다.
실상 요미미를탐하는 무리들은 황금을 내밀거나 협박을 하는 등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이들 모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 때마다 모친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내 비극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복면을 한 다섯 명의 괴한들이 두 모녀가 사는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먼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모친을 윤간하고는 그것도 부족하여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요미미는 그 다음 차례였다.
그녀도 끔찍하게 짓밟혔다.
그러나 그녀는 다섯 명의 무지막지한 유린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끝내 정신을 잃지 않고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냈다.
그들은 바로 강남오공자(江南五公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대부호와 고관의 자제들로써 소위 명문 출신이면서도 함께 몰려다니며 풍류와 엽색을 일삼는 무뢰배들이었다.
요미미는 만신창이가 되어 항주를 떠났다.
그 후로는 늘상 복수만이 그녀의 머릿 속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강남오공자의 배후였다.
그리하여 요미미는 어느 때부터인가 미색을 무기로 무림인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몸을 제공하는 대신 한 가지씩의 무공을 배워 나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흑백도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의 치마폭 아래에서 영명을 망쳤으며, 심지어는 희생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어쨌든 요미미는 그 덕에 오공자를 찾아가 죽일 수가 있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마침내 한을 푼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녀의 목숨도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느덧 무림에서 지탄받는 악녀가 되어 있었다.
요미미를 처단하겠다는 자들은 그녀의 행방을 따라 끈질기게 마수를 뻗어왔다.
여산에서는 이십여 명의 인물에게 포위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기도 했었다.
그 때에 그녀를 구해준 인물이 바로 광사 탁불군이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늘상 함께 붙어 다니다가 뒤에 맹사를 만났다.
얘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다 듣고 난 진일문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내 운명이 세상에서 가장 기구하다고 여겼거늘, 이제 보니 이들도 나와 다를 바가 없구나.'
환우오사.
그들은 현재까지도 천하에 발붙일 곳이라곤 없는 자들로써 한 가지 묵계가 있었다.
그것은 누구든 심신(心身)을 모두 꺾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에게 의탁하여 따르자는 것이었다.
진일문이 바로그 주인공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슴에 납덩이라도 얹힌 기분이었다.
'이들의 주군이 된다는 것은 곧 천하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적이란 천하무림 전부가 아닌가? 과연 내가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이 때, 맹사의 침중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주공께서는 비복들이 지닌 혈채가 부담스럽다면 버리셔도 좋소이다. 언제든......."
"그건 무슨 뜻이오?"
"우리들은 이제 지쳤소. 피보라로 점철된 낭객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지 오래외다."
진일문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염세관(厭世觀)에 웬지 가슴이 뜨끔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분명 과거의 그는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아니었다.
진일문은잠시 환우오사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모두 그의 눈빛을 받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그는 맹사와 공감하고 있는 그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진일문은 문득쓰린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지금 이들은 어느 정도 자포자기 상태이다. 사실 이대로 살생을 계속 저지르며 함부로 살다가는 어느 이름 모를 황산(荒山)에서 들개들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대해서도 다시 정리해 보았다.
'나 역시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천하 어느 곳에도 나를 반기는 자는 없다. 오히려 죽이려 드는 자들만이 있을 뿐....... 혈궁이
그렇고 사가보도, 심지어는 무당의 도사들도 나를 보면 가만 두려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진일문의눈이 번쩍 이채를 발했다.
'혹시 맹사가 지금 나를 떠보려고......?'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후후...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들과 입장은 비슷하되 사고방식은 닮지 않았다. 나는 결코 불운에 나를 맡기지도 않을 것이며, 아울러 이들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진일문은 마침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소이다."
그는 동공이 없는 맹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맹사, 나는 당신의 길잡이가 되어주지는 못하오. 그러나 눈이 되어 줄 작정이오. 당신은 아마도 나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이오."
"오오! 주공......."
맹사는 감격에찬 부르짖음을 발했다.
그는 진일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그가 듣고자 기대했던 말이기도 했다.
"주공--!"
나머지 사사도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맹사가 그들은 대표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시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소이다. 주공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인물이오."
진일문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담은 채 잔잔한 음성으로 답했다.
"과찬이오. 소생은 그저 미미한 존재일 뿐이외다. 그리고 솔직히 여러분들과는 형제의 의를 나누고 싶소이다. 각기 나름의 인생을 살아왔거늘, 주종이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이오?"
"으음......."
맹사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발했다.
잠시 후.
진일문을 포함한 그들 여섯 사람은 향을 피우는 대신 흙으로 단(壇)을 쌓고 형제가 되는 의식을 치루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숙연하기 그지없었다.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진일문이 맏이, 그리고 둘째는 맹사, 셋째는 환사, 네째가 기사, 다섯째는 광사, 색사 요미미가 막내였다. 마침내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가 된 것이다.
의식을 마치자진일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비록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죽을 때는 반드시 함께 죽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대형(大兄)으로써 아우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내야겠소. 아니, 이것은 명령이오."
"하교하십시오, 대형."
오사는 일제히무릎을 꿇었다.
"첫째, 우리 중 누구도 앞으로는 필요 이상의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오. 둘째, 의로운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되오. 사실 나는 정(正)이든 사(邪)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있소.지금까지야 어떻게 살아왔던 이 시각부터 모두 달라져야 하오. 만일 아우들이 이 두 가지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나는 형제의 의를 끊어버릴 작정이오."
그의 음성에는담담하나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맹사를 비롯한 오사는 이의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대형의 말씀, 각골 명심하겠소이다."
"고맙소."
진일문은 만족한듯 빙그레 웃었다.
그는 특별히 요미미에게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누이는 실상 외모만큼 마음도 아름다운 분이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 누이가 그러한 본성을 되찾기를 희망하오. 그래서 언젠가는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정한 가연(佳緣)을 맺게 되기를 바라오."
말인즉 행실을단정히 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요미미의 폐부를 관통하는 진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대가(大哥)......."
요미미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을 붉히면서도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담았다.
그녀는 실로 오랫만에 자신의 삶에서 한 가닥 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색사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무수히 음탕한 행각을 벌여온 그녀였다.
그러나 이 순간의 그녀는 흡사 비에 젖은 배꽃인양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산해내고 있었다.
진일문은 환우오사의 이런 반응을 지켜보며 내심 읊조렸다.
'이들은 과거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숱한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제 달라질 것이다. 그러한 과거를 딛고 일어나 새롭게 출범하게 될 테니까. 앞으로 강호에는 오사라는 이름 대신 오의(五義)나 오협(五俠)으로 불리우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는 가슴에서혈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자신도 앞날을 내다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중시하는 것은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건 그것에 도전하는 의지였다.
운명을 뒤바꾸려는 사내, 그의 호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채 만장(萬丈)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첫댓글 즐감요!
포청천의 칠협 오의가 생각납니다 ㅎㅎ 잘 보고 있습니다
ㅎㅎ 정말 잘읽고 갑니다
감사
운명을 도전하고 바꾼다 ************
늘 감사합니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점점 재밌어지네요.
감사합니다
감..........사................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에.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독 하구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드디어 협력자들이 모여 들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