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이 영류왕이 살해당한 것이 왕권의 약화로 이어지는지는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6세기 초부터 고구려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 이면에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새롭게 득세한 평양지역 출신 신흥 귀족과 국내성에 잔존하고 있던 구 귀족의 대립구도가 근원이 됩니다. 특히 신흥 귀족 중에는 전공을 세우는 무장 출신의 귀족들이 많지요. 평양지역을 새롭게 개발하는 과정에서 관료 귀족이 신흥 귀족층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경우 국왕에 충성하는 측으로서 국왕의 힘에 근간해서 힘을 축적합니다. 즉 이들은 국내성 귀족들이 존재하는 한 국왕에 충성을 다해야 그 힘을 보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지요. 이와는 달리 토지에 근간한 기존 국내성 출신 귀족들은 국왕의 간섭이나 통제를 무진장 싫어합니다. 왜냐면 세금 내야되죠, 휘하 백성들을 국가의 일이랍시고 부역에 통참시켜야 하기도 할테고,,뭐 굳이 설명은 않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명왕의 사망 이후 왕의 외척이었던 귀족세력간에 왕위 계승권을 통한 권력 획득이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즉 국내성 출신의 구 귀족이나 혹은 신흥 귀족 중에서도 세습화되어 강한 세력을 갖춘 귀족들 간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죠.(단 여기서 구 귀족이라고 해도 반드시 같은 계열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평양 천도 이전부터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귀족집단 대결은 충분히 가정할 수 있거든요) 결국 이전투구 양상이 되어 왕권약화가 악순환되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원왕이 즉위 한 이후 이런 귀족세력들을 누를 수 있는 사전 작업을 하나하나 벌입니다.
주변국과의 정복전쟁을 깨작깨작 벌여서 전공을 세운 무장 세력들을 키워주는 한편 온달같은 비주류 세력의 등용을 통해 귀족세력들을 견제하죠. 물론 관료귀족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제 계산대로라면 연개소문의 증조부도 이 당시에 등용된 관료 귀족입니다. 즉 연씨 가문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평원왕 중기 내지 말기라는 것이죠.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어쨋거나 평원왕 때에 준비한 왕권 강화책이 영양왕이 즉위하면서 강화됩니다. 특히 수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무장세력이 크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조금 달라집니다. 아시다시피 영류왕은 영양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고건무라고 2차 고수 전쟁에서 평양에 침공한 내호아의 수나라 수군을 전멸시킨 명장이죠. 그런데 분명 이런 전공을 가지고도 영류왕은 무장세력과는 조금 별개의 정치행보를 보입니다. 저의 추측이긴 하지만 이 당시 영류왕은 즉위 당시 온건귀족, 즉 국내성 쪽의 구 귀족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영류왕은 자신의 출신 성분이 군부 측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온건정책을 고수합니다.
물론 영류왕이 필연적으로 그런 정책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수와 전쟁을 치른 뒤 고구려가 다시 반격을 가할 수도 있지만 양국은 지쳐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수에 복속되었던 동돌궐은 모든 전력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수에서 도망친 유랑민을 받아들여 수와 고구려를 위협하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영류왕이 이 당시 움직이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또한 630년 동돌궐이 당에 의해 멸망했을 당시 비록 동돌궐이라는 강대국을 멸망시킨 것에 겁을 집어먹고 공격할 엄두를 못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동정적인 시각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약 영류왕이 생각을 고쳐먹고 당시 정치적, 군사적으로 어느 정도 불안정했던 당왕실이 안정화 되기 이전에 영양왕이 그랬던 것처럼 국경지대에 대한 기동기습전을 행했다면 당이 주변제국을 멸망시킨 후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최소한 당과 동돌궐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당에 붙든 돌궐에 붙든 둘중 하나를 택해 멸망시키면서 그에 따른 전략적 이득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은 상황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전의 고구려의 유연했던 천하 경영시스템을 생각할 때 영류왕의 정책이야 말로 유연한 외교정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세력을 유지했던 것은 유럽에 새로운 강대국이 출현했을 때 그와 반대되는 세력과 손잡고 신흥 강대국을 견제하여 위협요소로 발전하는 것 자체를 근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영류왕의 정책은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인 셈입니다. 사실 영류왕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국가의 이득을 도모하기 보다 왕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었던 반전파 귀족들의 이익에 따른 입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데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도적인 전쟁 피하기라는 얘기 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 고구려가 또다시 당과 전쟁을 벌이기에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라구요. 하지만 이미 617년을 마지막으로 4차에 걸친 고수 전쟁이 막을 내린 후 15년 정도, 즉 고구려인에게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사실 직접적인 전투를 치른 2차 고당전쟁이 있었던 612년을 생각하면 거진 20년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던 그 상황에서 고구려가 전쟁을 치를 역량이나 의지가 부족했다는 것은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런 의도적인 전쟁 피하기는 영류왕 정권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 세력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국내성, 즉 땅에 기반한 전통귀족인 구 귀족층을 영류왕이 지원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입니다. 영류왕의 정책은 그가 2차 고수전쟁 당시 보여줬던 전략가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의구심이 가지요. 조금 억측이긴 합니다만 영양왕에게 아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는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아들이 아닌 동생이 즉위한 것은 장자계승관념이 자리잡았던 당시 고구려에서는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다른 왕위 계승자를 제쳐두고 영류왕이 즉위하려면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영류왕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가장 강한 온건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왜 세력이 강하냐면 수와의 대전을 치르면서 성장했을 군부귀족 세력을 억누르고서 영류왕을 즉위시킨 그들의 역량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양왕 재위 때는 국왕과 신흥 귀족이 연합하여 구 귀족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의 사후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는 시점에서 신흥 귀족은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이죠. 원래 관료귀족의 힘의 원천은 국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서설이 길었는데 결론적으로 영류왕 재위 시에는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연씨가문은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등단한 것이 연개소문의 증조부 때입니다. 즉 연개소문은 관료 귀족 계열이라는 의미지요. 중도에 연개소문의 할아버지는 관료귀족에서 무장 세력을 변신하긴 합니다만 둘다 신흥 귀족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영류왕은 즉위 초부터 아마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과의 외교관계에서 저자세인 정책은 일개 소국도 아닌 대국 고구려에서 주변 번속국을 통솔할 자격이 의심된다는측면에서 고구려의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영류왕이 가지는 왕의 정체성에 대해 한번이나마 의심을 하게 할 것은 뻔합니다. 즉 왕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권 탈취 후에 행보 역시도 연개소문이 왕을 무시하는 독재정책을 펼칠 수 없는 기제가 됩니다. 실제로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임무가 막리지에 올랐는데 만약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꼭두각시 취급을 했다면 왕의 세력이 강화될 만한 위의 사건을 좌시하지 않았을 테고 또한 그의 속내가 어찌되었든 보장왕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밑에 글에서도 밝히지만 적어도 연개소문은 정권 초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전제 독재정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과연 연개소문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명확치는 않습니다. 단순히 그가 살기 위해서 쿠데타를 벌인 것인가? 아니면 여론을 반영하여 벌인 혁명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에 연개소문이 아니더라도 온건파와 강경파 간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영류왕 정권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 태종 이세민이 침략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영류왕 정권은 영속될 수 있었지만 당태종은 침략의도를 분명히 보여왔고 영류왕은 이에 대응하는 정책을 분명히 취하지 않았습니다. 즉 강경파들의 발언권이 강해졌음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도 고구려 국내에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기존학계에서는 안시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논증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부분은 뻥입니다. 그리고,,연개소문이 애초에 온건파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에 당에서 도교니 법사니 들여온다는 사료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관해서는 김용만 선생님 책을 다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도교 유입 건에 관해서는 불교계나 중국측에서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에게 몰아가려는 서술이 보입니다. 즉 연도상으로 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인데 제가 글로 쓰려면 복잡하니 선생님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간에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가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았다고 서술하기도 하는 한편 심지어 한단고기에서는 연개소문이 김춘추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김춘추가 이를 거절했다고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의 설명들은 다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일단 분명한 것은 신라보다 백제가 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지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문제는 연개소문이 이 동맹에 대해서 100% 믿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랬지만 고구려가 북방으로 세력을 뻗으려고 하면 항상 남쪽의 백제가 틈을 노리거나 혹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즉 북방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남방의 안정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과의 전쟁을 대비해 남방의 고구려 병력을 북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남방 세력이 고구려에 집중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가 전쟁 중이고 고구려는 이들 중 어느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굳이 약한쪽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면 강자 측에서 약자를 칠 경우 힘이 남아 약자의 동맹국인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전략적 선제공격이라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신라의 멸망을 바라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644년 초에 연개소문이 신라의 성 2개를 점령하고 그걸로 땡입니다. 즉,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던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밑에 서술하겠지만 정치적 명분이 죽령 이북 회복이기 때문에 공격하는 시늉만 했던 겁니다. 왜 그러냐면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서 신라를 멸망시킬 경우 남쪽의 백제는 더 이상 정복대상이 없어집니다. 그럴 경우 백제가 고구려를 배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를 도와주는 척 만하고 실제로 별다른 도움은 주지 않습니다. 신라도 어느 정도 힘이 있기 때문에 백제 혼자만이라면 신라가 멸망하는 일 없이 백제에 대한 적절한 견제를 신라가 해줄 것은 분명한 것이고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신라와 동맹을 맺을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거니와 당대 고구려인의 정서상 빼앗긴 영토의 회복이라는 측면은 연개소문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에 더없는 조건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백제의 수군입니다. 비록 일시적이긴 했습니다만 2차 고당전쟁에서 수나라 수군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한 사실은 요동방어선에 집중하던 고구려에게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661년 2차 고당전쟁 당시에는 30만에 육박하는 대군으로 상륙전을 펼치기도 하죠. 뭐,,규모야 어찌되었든 연개소문은 당의 수군이 직접적으로 평양을 공격하는 사태에 어느 정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만약 당이 백제와 동맹을 맺는 상황이 벌어지면 보통 큰일이 아니죠. 신라가 백제에 막혀 당의 도움을 받기 힘든 위치에 있다면 백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의 소수 군대가 백제로 가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하면 고구려는 병력을 둘로 쪼개어야 하는 것은 물론 심하면 백제 수군이 당 수군과 연계해서 평양 인근이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으면 상황은 반대가 되지요.
즉 연개소문은 다음과 같은 치밀한 계산 하에 신라의 동맹 제의를 거절하고 백제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글은 제가 카페에 썼던 글이고 토론자 분들께서 참고하시라고 댓글을 달았던 것인데,,아무도 참고하지 않으시길래 제가 여기에 또 올립니다.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예전에 이런 토론은 3~4번은 넘게 나왔던 글입니다. 카페 게시판 위에 있는 글 검색기로 좀 찾아보시면 될 것을,,,)
그런데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멸망에 관한 글들을 보면 꼭 빠지지 않고 연개소문 정권의 독재성을 들고 나오곤 합니다. 그거 때문에 고구려가 망했다는 식으로 초점을 잡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글 볼때 마다 드는 생각이 '아니, 그 당시에 독재정권 아닌게 어딨어?' 였습니다. 사실 전제왕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서 왕의 독재정권이 아닌가요? 물론 연개소문은 왕은 아닙니다.
역대로 독재정권 한 사람 많았지만 멸망으로 결말지어진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국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때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런 혼란을 종결짓는다는 의미에서는 독재정권이 꼭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을 떠나서 과연 연개소문 정권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독재 정권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삼국사기나 신,구당서 계열의 사서를 보면 연개소문이 정권을 휘어잡고 왕조차 함부로 못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라고 할 수 있는 당의 일방적인 기록을 위주로 서술된 사료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는 100% 확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그 확신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맥 놓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구려의 기록이 없다면 제 3자가 쓴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참고를 해봐야 겠지요. 그것이 아니면 왜곡을 한 기록이 있더라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분명 윤색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2년 조에는 연개소문으로 추정되는 이리가수미가 왕을 포함, 이리거세사를 죽이고 동성인 도수류금류를 대신으로 내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대신은 대대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도수류금류는 후에 15만 대군을 지휘한 대로 고정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병도는 동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이리거세사와 도수류금류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동성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성이라는 표현은 같은 동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독재정권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정치적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얼굴마담 형식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얼굴마담에게 고구려 총 병력의 반이나 3분의1에 해당하는 15만에 달하는 병력의 지휘권을 주지는 않지요. 그것도 국가 비상시기에 말입니다. 15만 대군을 이끌 역량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얼굴마담을 시킨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이것은 고정의가 연개소문과는 다른, 일정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보장왕이 647년에 왕자 임무를 막리지에 임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왕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권을 휘둘렀다면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왕이 힘을 기를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함에도 왕자 임무는 막리지에 임명됩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권력 세습이 문제가 됩니다. 권력 세습은 독재 정권이 부패화 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는 순간까지의 정치제도를 보면 한가지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직의 세습성입니다.
모두루 묘지명(저는 이 묘의 주인이 모두루가 아닌 염모라고 생각합니다만,,,)을 보면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한 귀족가문의 권력 세습이 쭉 내려져 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적어도 이 묘지명이 나오는 장수왕 초기까지는 귀족 가문의 권력 세습성이 나타납니다. 이후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행하고 그에 따라 귀족가문의 전면적인 세력 개편이 이어지긴 했지만 안장왕 말기의 정치 혼란으로 원상복구됩니다. 결국 고구려 멸망까지 일정 가문의 권력세습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어느 시대나 나타나는 문벌 가문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고구려 말기의 각 귀족가문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면 단순히 권력의 세습이 아니라 관직의 세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삼국사기를 봐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관직인 동부대인의 직위에 오르려고 하자 각 귀족들이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기에 빌어가면서 까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관직의 세습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이것은 천남생 묘지명에서 누대로 막리지의 관등에 있었던 것을 감안 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자묘지명에서도 관직이 반드시 세습된 것은 아니지만 일정 이상의 관등과 직위를 세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연남생 3형제가 점차 권력을 세습해과는 과정은 고구려인에게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사 그 세습했던 측면이 독재정권의 강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독재정권의 경직성 때문에 고구려 지도층의 일부 분열의 여지를 줄 수는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미 연개소문 정권 이전부터 이런 불씨는 있었왔습니다. 굳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터질 수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국가 말기현상 같은 망조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어느 시대나 좌익이 있다면 우익이 있기 마련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를 겪은 사실도 있지요. 내분에 의해 나라 전체가 두동강이 날뻔한 적도 있습니다. 일부 지도층의 국가적 배신도 없는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멸망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강도가 약했을 뿐 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 700년 사직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시대에는 이를 헤쳐나갈 수 있었지만 668년에는 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던 것입니다. 좀 강도가 심했던 것이지 당시 고구려가 너무 오래되어 망쪼가 든다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나름대로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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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원인은 연남건의 쿠테타가 너무 빠른 탓!
이유야 여러가지로 복합적이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연남건의 쿠테타가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이거 때문에 고구려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죠. 단순히 권력욕 때문에 이런 쿠테타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보면 665년 10월 즈음에 벌어졌을 것으로 보이는(이건 제 추정입니다.) 연남건의 쿠테타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혁명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대치를 시켜보면 연남생=영류왕, 연남건=연개소문이라는 구도가 됩니다. 정치적 성향을 봐도 비슷한 면이 있죠.
연남생과 영류왕은 양 대전을 치른 후에 피폐된 고구려 경제를 우선적으로 살리는데 주력하기 위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면이 강합니다. 물론 이 이면에는 수나 당의 국력을 두려워하는 면도 없진 않겠죠. 특히 연남생의 경우 당나라 계필하력의 군대에 대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개소문과 연남건은 대외 강경파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연남건이 정권을 잡은 뒤의 시간이 길지 않아서 사료가 거의 남지 않았긴 하지만 당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강경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남생 정권의 성향을 봤을 때 그에 반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지만요.
이 두 시대 모두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해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기존의 정권 집권을 유지하려는 보수귀족세력과 전쟁이 없어진 뒤 공을 세우지 못하고 하위직에 머무르며 불만이쌓이는 소장파 장수들 간의 대립이 첨예한 시기입니다.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권력 욕심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혁명은 성공적으로 고구려 국론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지만 연남건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경제력 약화에 따른 국론 분열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킬 시점에 영류왕은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거의 만회한 시기였습니다. 시간도 2~30년 가량 흘러서 사실상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세대는 물러나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점차적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가던 시기입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졌으니 그 다음 남은 일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왕이라는 작자가 외국에 저자세로 나옵니다. 뭐 소국이면 백성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고구려는 대국입니다. 자존심 문제를 떠나서 대국이 그렇게 약하게 나오면 주변국들이 우습게 아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정계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이런 점을 모를리도 없고 백성들도 자존심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입니다.
거기에 적국인 당의 국력은 점차적으로 강력해지고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동을 강화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키니 거국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연남건의 쿠테타는 그러질 못합니다. 우선은 662년 2월에야 2차 고당 전쟁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경제를 회복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3번에 따른 전쟁을 그대로 몸으로 부딧혔기 때문에 수십년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졌지요. 대략 1세대의 인구가 초토화 된 상태에서 최소한 1세대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가지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전 수나라와의 대전에서는 그나마 직접적인 대전을 고수 2차 전쟁 밖에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덜하지만 당나라와는 그런 대전을 2번이나 겪었고 고당 2차 전쟁 이전에는 계속적인 국지전으로 국경지대의 긴장상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과연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먹고 살기도 바쁜데 당나라 때려부수자 하면 과연 얼마나 동조를 하겠습니까? 이 당시 연남생 정권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할 수 밖에 없던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뭐,,수나라와의 대전 이후에 세력이 성장했던 수성적인 성향의 전통 보수귀족계층이 이때에도 연남생의 배후가 되었겠지요. 이들의 바램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전쟁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국력이 피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한것은 고구려였기 때문에 연남생은 영류왕이 그랬던 것 처럼 상당히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가면서까지 당나라와 화친하려 했습니다. 태자를 663년의 봉선제사에 파견했던 것이 그것이죠.
때문에 연남건의 쿠테타는 일부 소장파 장수들이 연남생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이를 연남건에게 부축여서 벌어진 것입니다. 단순히 연남건의 권력욕 때문이라고 보기만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명분이라고 해야겠죠. 지방 군대의 지휘관들 말입니다. 아무리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지방에서 이를 따라주지 않는다면 헛수고일 뿐입니다.
결정적으로 영류왕은 쿠테타가 벌어진 뒤 바로 잡혀서 살해당했지만 연남생은 국내 순수중에 벌어졌기 때문에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남건의 실책 중하나가 바로 연남생을 평양성에서 죽이지 못하고 국내성으로 몸을 피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심점의 유무가 승패의 주요 관건이었던 셈입니다. 때문에 국내지역에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던 연남생에게 상당 세력이 동조했던 것이구요. 만약 연남생이 평양성에서 영류왕이 살해당했던 것 처럼 그 역시 죽임을 당했다면 고구려 국내에 내분이 일어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외부의 위험을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것도 쿠테타 실패의 이유가 됩니다. 연남생의 권력 장악으로 대당 화친정책을 펼치고 국력 소모가 심했던 당나라가 663년 8월에 전선 만들기를 중단할 정도로 전쟁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내에서 전쟁에 대한 위험을 642년 때 보다 훨씬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보통 국론을 모으는데 외부의 위협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남건의 쿠테타는 시기를 잘 타질 못했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독재정권이 붕괴된 뒤에 벌어진 권려 괴리가 문제라기 보다는 경제력 약화로 인한 국론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