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미영
내 마음은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의 자취방 근처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빨래 건조대만 펼쳐놓지 않았어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 텐데…. 4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간 곳을 십여 분만에 돌아 나왔다. 원룸 건물 밖으로 마중을 나온 녀석은 “빨래를 널어놓았는데….” 라고 말끝을 흐린다. 방문을 열자 습기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언제 창문을 열어 보았는지 오래된 공기는 꼼짝없이 빨래에 달라붙는 중이다. 녀석이 집에 오면 나던 냄새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궁전 같은 집 주인 남자가 반지하에 사는 운전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 몰래 코를 막는 장면은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아들을 연상시켰다. ‘기생충’을 본 후로 어떻게 하면 아들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없앨 수 있을지 궁리했다. 향기 나는 섬유유연제를 써도, 식초로 헹궈도 퀴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옷 냄새가 아니라 체취가 되면 어쩌나 두렵기까지 했다. 수소문 끝에 제습기를 놓아주었다. 그 후로 녀석이 집에 올 때면 찰싹 달라붙어 킁킁거리는 인사는 하지 않는다. 신발 세 켤레를 나란히 벗어 둘 수 없는 공간이 우리를 맞이한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살림살이를 살핀다. 한걸음에 침대 위로 올라가 지난가을부터 비비적거린 이불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는다. 자는 동안 흐른 땀과 방안의 습기가 꼬질꼬질하게 배었다. 햇빛 구경을 못 한 탓에 눅눅하다. 꼬마 냉장고에 반찬 몇 가지와 얼려온 국과 찌개를 넣는다. 남편은 현관에서 벌을 서듯 굳어있다. 속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다 들린다. “완전 하꼬방이잖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그 방이 생각난다. 엄마의 하꼬방은 판잣집 의미와는 다르다. ‘좁다’에 방점이 찍히는 허름한 공간이다. 여든이 넘은, 치매로 나날이 옛일을 잃어가는 엄마는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같은 구간을 반복한다. 처음 살림을 난 방 이야기가 문제의 트랙이다. 숨만 쉴 수 있는 크기라 누워서 팔을 뻗으면 앞집 문에 닿을 지경이다. 춥고 더웠다보다 좁아서 언니를 낳고는 더는 움직일 틈이 없는 공간이다. 그 집을 벗어나 두 칸짜리 슬레이트집으로 이사 가던 날 방을 쓸고 닦느라 잠도 잊었다고 후렴구를 보탠다. 엄마의 하꼬방이 인생의 노래 중에 늘어지도록 자동재생 되는 까닭은 그 이후로 조금씩 너른 집으로 옮겨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싹을 틔운 육묘장이라 흐려지는 기억에도 자꾸자꾸 돋아난다. 언니는 궤짝 같은 그 집을 기억한다. 푹푹 찌는 날 걸레질로 바닥의 열기를 식힌 뒤 옆에 누우라던 젊은 엄마의 손짓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영아 이리 와.”하는 작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단다. 아들의 자취방을 다녀올 적마다 언니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신혼 초 전셋집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들인 방에 부모가 앉을 자리도 없다고 한숨을 쉰다. 그럴 때마다 아직 조카의 거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나는 입을 닫을 수밖에.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가격에 비해 괜찮다는 것밖에 모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잠자리라 그럴 것이다. 부모의 상상보다 못한 공간이라 그럴 것이다. “이리 와.” 불러줄 엄마도 없는 한 뼘 자취방에서 자신을 일으켜야 하는 청춘이라 애달프다. 멀찍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지켜봐야 하는 어미라 애가 끓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길고 멀다. 자취방에서 서성이는 엄마 마음을 다독이느라 자동차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우리 집 문 앞에 책 꾸러미가 먼저 와서 기다린다. 이불 보따리를 정리하자 맥이 풀린다.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아 책 포장을 뜯는다. 『이야기의 탄생』,『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젖혀두고 중국의 건축가 왕수가 쓴 『집을 짓다』를 고른다. 건축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한 에세이라 해서 신간 코너에서 클릭했다. 몇 장 넘기자 “집을 짓는 일은 작은 세계 하나를 만드는 일이다,”에 시선이 꽂힌다. 산과 나무를 헤아려 집을 짓고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성장했던 옛사람들을 끌고 온다. 잊고 싶은 아들의 방이 펼쳐진다. 자취방의 현실과 건축가의 이상이 내 앞에서 엇갈린다. 거기는 집이 아니구나. 학교에 가려고 잠을 자고 즉석 밥에 냉동된 반찬을 데워 속을 메우는 방이로구나. 빨래방에서는 빨래를 하고 찜질방에서는 찜질을 한다. 그런 방이 자취방이구나. 부모와 떨어져 자신이 밥을 해 먹는 곳이구나. 왕수가 말하는 집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이 깃들고 나무만큼 사람도 함께 성장하는 곳이 집이라는데 옆 건물에 막혀 하늘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작은 방에서 자기의 세계를 만들고 키울 수 있을까. 햇빛이 가득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될까. 두려움이 밀려온다. 아들에게 전화를 건다. 방 생각 집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무사히 도착했노라 는 말을 잊었다. “건조대를 놓으니 너무 비좁던데….” “상관없어, 내 방은 나은 편이야.” 상관없다니 다행이다. 나은 편이라니 고맙다. 자취방에 머무는 마음을 우리 집으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또 모르겠다. 방 걱정이 덜어지니 집 걱정이 다가오니 말이다. 육묘장이던 하꼬방처럼 자취방도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겠지. 다시 두 손을 꼭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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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마의 눈은 넓이로만 보일테지만 아들의 관점에서는 자유의 공간이고, 독립의 공간이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발역이지 않을까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해석이 명문입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림은 누구 작품입니까?
비좁다고 걱정하는 엄마와 상관없다는 아들의 공동작?
친구 협찬입니다~
그림속에서 오래 전 아들의 방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미영쌤!
그 아드님은 꿈을 잘 이루어 나가시겠지요^^
@이미영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항로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