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다.
--- 『숫타니파타(經集)』 ---
부처님 당시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어떻게 불렀던 것일까? 그 호칭 속에는 부처님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업설자(業說者, karmavādin)!” 업을 설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업을, 다시 말해서 행위를, 강조하셨으면, “저 양반은 맨날 업만 말하는 사람이야”라는 소리를 들으셨을까?
하기는 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인도종교인 바라문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생각을 부처님께서는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지혜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우주자연의 본질, 즉 삼라만상의 본질을 브라만(梵, brahman)이라 하고 내 안에 있는 브라만을 아트만(我, ātman)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곧 브라만임을 깨닫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지혜라 하였다. 바라문교에서는 이러한 해탈과 지혜가 인생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곧 브라만임을, 내가 곧 아트만임을” 배우고 알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카스트제도에 의해서, 인간은 고귀한 사람들과 비천한 사람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고귀하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비천하다는 것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브라만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 스스로를 브라만이라 불렀다. 하늘에도 브라만이 있고, 땅에도 브라만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펴시는 환경이 이랬다. 그날도 부처님께서는 바라드바쟈라는 이름의 브라만을 만났다. 부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려는 순간, 브라만 바라드바쟈는 외쳤다. “거기 서 있거라. 이 초라한 놈아, 더 이상 오지 말고 거기 서 있거라. 이 비천한 놈아, 거기 서 있거라.”
그의 눈에는 걸식자의 모습을 한 부처님이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런 부처님을 집 안에 들이는 것은 ‘부정(不淨)타는’ 일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응대하셨던 것일까? “바라드바쟈여, 과연 누가 비천한 사람이며, 또 사람이 비천하게 되는 조건을 알고 있는가?”
이러한 역습에 주춤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제 입장이 역전되었다. 브라만 바라드바쟈는, 누가 ‘비천한 사람’인지를 알려달라고 청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苦口丁寧) 친절한 말씀을 해주시고 있다. “자기를 치켜세우고 남을 헐뜯으며 / 자만심으로 목이 뻣뻣해진 사람, / 이런 사람을 일컬어 ‘비천한 사람’이라 한다.”(석지현 옮김, 『숫타니파타』, 민족사, 40쪽)
이러한 일반적인 덕목들을 열거하신다. 그런 뒤에 널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명언을 토해 놓으신다. 앞의 일반적 덕목들을 총괄적으로 맺음하는 차원에서이다. “출신 성분에 의해서 사람이 천하게 되는 것도 아니요 / 또는 브라만의 혈통에서 태어났다 해서 / 브라만이 되는 것도 아니다 / 인간은 모두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 얼마든지 ‘천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 ‘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위의 책, 41쪽)
이 말씀은 인도의 고질적 신분제도인 카스트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종종 인용된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업설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지혜나 도(道)를 보고서 칭찬이나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눈에 보이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서 칭찬하거나 비난하리라는 것을. 정녕 지혜가 있고 도가 있다면, 그것이 행위로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