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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5월 24일 토요정례법회 ○
" 원불교를 만나서 " 강연
주인부대 3단 청순한 카리스마 중앙님 :)
서현정 교우님의 멋진! 강연이 있었습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 서현정 교우님께서 ‘원불교를 만나서’를 강연해 주셨습니다.
잘 들으셨지요? 오셔서 고생이 많으신 것 같다. (^^)
들으면서 본인들도 생각이 많이 나셨는가?
내용이 충실하고 표현 언어가 섬세하다.
일기를 쭉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책도 많이 보신 것 같고, 마음씨와 강연 하는 태도와 준비 내용 등이
참으로 은혜가 되도록 하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PPT를 연향 교우가 만들었다고 정보를 들었는데 상당히 잘 만드셨다.
사진을 보면서 참 예쁘다,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구나, 여행이란게 사람을 참 기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기도 하는 사진, 법당 사진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싸이월드에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의 중요도, 관심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원불교 이야기가 별로 없는 사람은 아직 특신급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의 열반, 그것으로 인한 아픔들, 잦은 이사.
그러한 인연과 아버지, 가족에 대한 것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음이 보인다.
일기 속에서 죽음과 어둠을 표현하는 것이 어찌 현정교우 뿐이겠는가.
그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면, 생각나는 단어를 20개를 써 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내가 보육원 지도교사를 하게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생각나는 단어를 써보라고 하니 공통적인 단어가 “원망”이었다.
부모가 돌아가셨거나 버렸던가 혹은 있으면서 맡긴 아이들이 보육원 아이들인데,
이것을 어떻게 녹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아하,
이 사람들에게 사은의 은혜를, 인과의 원리를, 이 세상의 근원적 은혜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고
때로는 약자 보호의 측면에서 정신 육신 물질간에 지원이 많이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까 현정 교우가 수목원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불목 교당과 소남 훈련원은 상당히 좋다.
산 속에 조용히 집 한 채 있는 교당이다. 남쪽 바닷가에 산을 끼고 있다.
어릴 때 그런 걸 보면서 풀꽃, 자연, 나무, 바람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그 때의 좋은 추억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훈련원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곳이 그 곳 같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몇 백 그루나 있고, 나무집을 만들어서 거기서 중고 청소년들이 수련활동을 한다.
천연의 조건이다.
나는 전남 수련원에서 근무를 하였었다.
그 때 처음 개원하여 이것저것 물품 준비를 했었던 기억도 난다.
원불교를 만나서 핵심교리를 두 가지로 말하라 하면 인과와 불생불멸이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다.
남도 죽음도 없다는 것이며 왔다갔다할 뿐이다.
그런데 왜 그 와중에서 어떤 사람은 환경, 여건, 재물, 인물, 지혜가 좋은 것인가? 어떤 사람은 그 조건이 안 좋은가?
알고 보면 그것이 다 지은 것이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오백생을 닦으셨다.
그래서 전생에 가리왕에게 사지를 뜯겨도 인욕정진(忍辱精進)을 하셨다고 한다.
공자님은 기적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기적이 있는 분도 없다.
공자님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 들어보았는가.
가죽으로 된 주역책을 많이 보아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우리가 모르는 피와 땀. 노력이 있다.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 얼마나 글을 잘 쓰셨는지
추사 선생님이 반야심경 글씨를 쓴 것을 보면 매우 좋다. 그렇게 뛰어나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왜 그 부잣집에 태어나서 인물, 지혜, 부귀, 인연 등 모든 조건을 다 좋게 태어났는가.
현정 교우가 왜 아버지 인연이 짧은가,
그리고 왜 형편이 가난하였는가.
그래서 반대급부로 원망과 불만이 가슴 속에 많아지고, 돈에 대한 집착이 많아졌다.
여러분, 집안이 어려운 분들은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지기 전에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왜 전생에 짓지 않아서 이러한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을 불만하고 원망하면서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지면 오히려 더 가난으로 가게 된다.
현정교우가 원불교를 만나 다행스럽다 생각한다.
교무님을 믿지 않고 돈을 집착하여 거기에 쫓아가면 오히려 더 가난을 따라가게 된다.
오히려 부자로 살려거든 주는 자가 받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한량없는 은혜 속에 살면서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 은혜에 대해 모르는 무념으로써 돈을 향해 집착만 한다면 가난을 더 불러들이는 길이다.
그것은 결국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얻게 되기 쉽다.
그러면 교무님,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먼저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왜 돈이 없을까. 왜 나는 인연이 짧을까? 왜 나는 이러한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 안목을 보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풍성한 인덕과 복덕이 어디에서 왔는가.
과거 생으로부터 지었기 때문에 안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까 일기 내용을 보니, 혜수, 혜시와 계문을 점검해 보았더니
나는 계문을 어긴 줄 몰랐는데 공부를 해보니 내가 많이 어겼더라.
그리고 나는 받는 것이 당연한 줄을 알았더니 사실은 사은의 은혜요 오히려 나는 빚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 자신은 잘 산다고 했지만
업은 점점 무거워지고 빚이 점점 늘어나 가난을 만들고 그 업으로 인해 나와 주위환경이 어두워지는 길로 가면서도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인과와 영생에 대한 무지이다.
아까 양타원님에 대해서 나왔는데
남편이 군인 장교이셨다. 그런데 불과 한 해에 남편 죽고, 동생 죽고, 아들 죽고 다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재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손자도 없다.
이것이 업인 것이다.
인과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현재 나오는 모든 상황들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어떤 사람은 건강이 나빠서 이런 것들 다 인과의 문제다.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거나 권력을 많이 부렸거나 사기를 많이 쳤을 경우 이런 사람들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다면 그것을 이해해서 다르게 나가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니 계속 원망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를 다니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 두 가지는
생사가 없다, 영생을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그 사람의 인과가 들어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이뻐해 줘서 다녔겠지만 거기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영생과 인과이다.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과를 듣고 중학교 2학년 때 서원을 세우기도 한다.
성경책을 공부하는 것은 교회 사람들이고, 원불교 인이 교전을 읽는 것은 이상하게 보였다는 것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현정 교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젊은 세대들의 흐름을 보면 현정교우가 그것을 대체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많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먼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기질과 관심, 본인의 업에 의해서 더 이상 크게 활용되지 못하고
본인의 세계관과 집착 속에서 나름의 기쁨을 찾게 된다.
그런데 원불교를 다닌다는 것은 나의 국한을 툭 트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이 커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
아까 자아정체성을 고민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힘들면 여행을 하거나, 술을 먹든가, 수다로 풀든가 한다.
자아정체성을 해결할 때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교당. 교법에 있다. 대종사님 가르침에 있다.
나는 원불교를 다니면서 여러분 시절에 바로 자아정체성이 해결되어 버리더라,
“자아가 이것을 말하는 구나. 참 네가 누구냐, 네 본래가 누구이냐.”
직장에 들어가면서 교당도 끊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먹고 놀고 마시고 하는 것.
이런 것이 현정교우 문제만이 아니다.
대종사님 교법의 영육쌍전법이 들어가야 한다.
수도와 생활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영육쌍전법이 아니며, 그것이 하나인 것이다.
직장 속에서 마음공부인 것이다. 여기까지 공부하면 여러분 너무나 좋아하셔야 한다.
그리고 아까 표현을 정확하게 하신 것 같다.
작년 9월에 교당에 왔을 때의 코스가 그려지지 않은가.
예쁜 성양교우가 맞아주고, 사람들의 반가운 미소.
처음 왔을 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불공인지 모른다.
그리고 일찍 와서 앉아있는 것.
처음 사람이 왔을 때 그 자리가 휑하다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앉아있는 것이 대중에게 신뢰감을 준다.
그리고 아까 뉴스 이야기가 나왔지만.
우리 교당에서 만드는 뉴스가 만드는 사람도 힘들고, 거기에 드는 시간도, 돈도 많이 든다.
이것이 돈이나, 사람이나, 기술이나, 교무의 관심만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교당에서 미래 사회 교화의 방향성에 대해서 실험적으로 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시행착오 속에서 끝까지 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 친구도 영화 수업을 해 보니 그것이 더 들어왔다고 한다. 해 본 사람은 아나운서가 쉽게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용환 교우가 다음 달 뉴스에 영상에는 몇 분 나오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백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했다.
교당에 왔을 때, 나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그런 것이다.
간식. 여러분들이 내고 여러분들이 먹는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 서로 은혜가 되고,
시간과 에너지 투자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까 하는 것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노력인 것이다.
그러면 나도 노력해야 하고, 감사의 말, 마음, 눈빛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서로서로 은혜가 되는 것이다.
처음 교당에 와서 한발은 넣고 한발은 빼려고 했다가
‘한번 더 와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 단장, 중앙, 또는 단원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단장 중앙 교무만이 교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 있는 모두가 이미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당에 오니까 ‘아, 내가 여기 다닐만 하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본인이 빨리 안착하는 것은 서로 서로의 은혜가 아닌가.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tv에 나오는 사람,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 등이 큰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까 단장이 열심히 준비한 것, 성양교우가 기쁘게 맞아준 것, 이런 것이 큰일이요 소중한 복록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부담스러운 일정을 내 삶에 추가할 수는 없다”
이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딱 한 분 있다.
계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생각한 계문. 부담스러운 계문.
초반에 계문에 대해 드는 생각들이 있다.
부담스럽다, 나는 별로 어긴 것이 없다,
원래 그런 말 있을 만한 것 아니야?
현정 교우가 알고 보았더니 ‘순간순간 반성할 것이 참 많구나’ 하는 것들을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다.
법회 때 그것을 다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화요일에 조목조목 점검하게 한 것이다.
직장생활 한 사람은 내가 말한 것이 더 이해될 것이다.
우리의 계문 중에서 말 6개가 있다.
"악한 말, 과실을 말하는 말, 두 사람이 아울러, 한 입으로 두 말, 비단 같이 꾸미는 말, 망녕된 말"
직장생활 하여 보면 이 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 말들이 얼마나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가,
그리고 그 속에서 윗사람, 옆 사람들과의 관계, 하소연, 합력하는 문제. 소통의 문제.
이것을 학교 다닐 때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직장생활 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불공이며 법력이다.
결국 대종사님의 교법은 내 생활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내 맘대로 우습게 생각했음을 실제로 느끼게 된다.
현정 교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짜증이 줄었다. 그리고 막말을 적게 하더라. 돈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었다’
이것이 교법이 들어간 것이다.
9월에 들어와서 몇 달이 안되었는데도 그렇다.
세상을 보는 눈, 내 맘속에 마음의 탄력성. 이것이 많이 변화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가치로 잘 환산하지 못한다.
유형의 것은 가치로 환산하는데, 마음의 융통성, 달라진 언어 등 무형의 것은 가치로 환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심이 없고, 유형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그 가치를 우습게 생각한다.
아까 내용에 나왔다시피 수행품 4장. 다같이 읽어봅시다.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전문 입선 하는 것이 초학자에 있어서는 그 규칙생활에 혹 괴로운 감도 있고
혹 부자유한 생각도 있을 것이나,”
여기까지,
옛날 처음 훈련 날 때, 대학선방을 보면 제주도에 놀러간다 속아서 온다.
하지만 아침에 좌선시키고, 강연을 시킨다.
그러면 그 불만이 이틀, 삼일 째까지 가다가 오히려 나중에는 가기 싫어한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아까 헌배도 마찬가지다.
500배 할 생각이었는데 천 배까지 하니, 몸이 오히려 가벼워졌다. 미워하던 사람에 대한 생각도 녹아난다.
내일 강연하시는 분, 전타원님이라고 계신다.
그 분이 교무님이 사경을 하라고 하니 무척 미워했다고 한다.
눈도 침침하고, 손목도 아픈데 그런 걸 하라 하신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경하라 해서 미웠던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분의 마음의 문제 아닌가. 나는 그대로 있다.
대종사님의 본의를 알면 그렇게 될 것이다.
정당한 고통. 기질과 습관이 바뀌도록 어느 정도 맛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참으면
그 안에 무궁무진한 재미와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전문 입선하고 원불교 들어오면 여러분들 마음에
“교무님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라고? 그것 조화 맞추다 사람 죽겠어요”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것은 단계에 따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근본은 영과 육이 하나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다.
하나인데 현실 속에서 차별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맞추어 나갈 것인가.
그래서 내가 그것을 단계적으로 유념 잡아서 해결할 것인가 하는 공부심이면 좋은데
교당 왔더니 이것저것 공부시키는 것을 보고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사람 잡는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괴롭거나 부자유할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자유와 괴로운 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 상근기는 그렇다.
좌선을 시켜도 금방 좌선의 맛을 들여서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좌선만큼은 상극인 것 같다. 좌선을 한지 불과 2주도 되지 않았는데 진경에 든 것이다.
전생에 나는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하는 것이다.
초반에 대체적으로는 규칙 생활이나 교당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괜히 일이 더 쌓인 것 같고 몸이 더 아픈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있을 것 같으나.
뒤에 더 읽어봅시다.
“공부가 점점 익어가고 신심이 차차 단련될 때에는 이보다 더 편안하고 재미있는 생활이 없을 것이니,
그대들은 매일 과정을 지켜갈 때에 괴로운 생활을 하는가 편안한 생활을 하는가 그 마음을 대조하여 보라.
괴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직 진세의 업연이 남아있는 것이요, 편
안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점점 성불의 문이 열리는 것이니라.”
너무 좋지 아니한가.
괴로운 사람은 딱. 그 이유까지 말씀해 주셨다.
단련이 안되었거나 진세의 업연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당한 고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계속 단련을 하다 보면, 심신이 단련되고 공부가 익어가다 보면 달라진다.
그래서 점차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정당한 고를 수용하여 정당한 낙으로 인과의 이치에 의해서 오게 되는 것이다.
전에 내가 말씀드렸지만 곡선을 그려 살펴보면,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두 사람이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원불교를 만나고 나서 보는 세계관(世界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리고 행복관(幸福觀)도 달라졌다. 어떤 것이 행복인가 하는 생각.
쉽게 말해 일반인들은 유형의 행복. 물질락, 인간락이다.
그
러나 이 공부를 해보니 천상락이 있구나, 더 나아가니 극락이 있구나,
이것이 행복이라 말할 것도 없는 행복이구나.
원불교를 만나서 이 작은 관(觀) 하나가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다가 차이가 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원불교를 만나면 꺾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더 잘나가는 것 같다.
외국도 가고, 취직도 하고, 주말에 예쁜 여자도 만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신심이 특신급에 간 사람은 즉 신앙이나 생각과 사상이 다른 세상(욕심의 세계,속세)에 흐르지 않은 사람은
설사 뒤지다 할지라도 결국 ‘이것이다’ 하는 확신이 든다.
그러지 아니한 사람은 다른 욕심에 합류한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 관의 세계가 어떻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돈이 얼마 더 있는가, 집이 몇 평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의 문제이다.
행/불행 진/강급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원불교학과 다닐 때 1년간 유무념으로 잡은 것이 있다.
하루 생활이 즐거웠는가 안즐거웠는가 말이다.
수양을 통해 맑아지는 기쁨, 스승을 만나서 느껴지는 기쁨. 연구를 통해 밝아지는 느낌,
그리고 일과를 지켜가는 기쁨, 동지들과 함께하는 그런 느낌들,
마음의 낙이 있었을 때는 유념.
그런데 왠지 짜증나고 가라앉는 날은 무념으로 했다.
그래서 내가 해봤더니 잘한 것 같다.
마음이 살아있고 신심, 공심, 공부심이 살아있는 날은 묘하다
여러분 몸이 건강할 때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몸이 좋아지면 마음도 좋아지기도 한다.
내가 하루 법으로 생활해 갔을 때 스스로 느껴지는 한가함, 든든함. 그것은 참 다르지 않은가.
우리에게 감사, 은혜를 보는 눈이 생기는가.
원망이 생기는가, 짜증이 솟는가.
기쁨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괴로운가.
편안한가, 재미가 있는가, 재미가 하나도 없는가
기독교인은 찬송을 한다.
찬송이 정말 나오는가. 성가도 기쁘게 부르는가.
그것은 결국 성불의 문이 가까워지느냐 아니면 진세의 업연이 남아있는가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 공부하는 것에는 욕심 안 내는가, 나도 공부의 재미를 느껴보겠다.
그렇다면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직장에서 성공할 것이며 사람들이 다 좋아할 것이다.
내가 농구를 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많다.
농구는 참 다이나믹하다.
운동을 할 때 기분이 좋은 날은 묘하게 던지면 들어가 버린다.
야구선수가 어느 날은 홈런을 두, 세번 날리기도 한다.
그 사람은 일심한다는 생각도 없이 일심이 되어버린다.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진세의 업연이 녹아나면서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여러분 분명히 이 안에
‘아 염불한번 해 봤더니 마음이 좋구나, 헌배를 했더니 좋구나, 사경을 했더니 좋구나,
새벽 좌선을 나왔더니 좋구나, 교무님들 이런 맛에 하는 구나’ 하는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회의 경험이 아니라 한번 확장시켜 보자.
나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요일에 자는 것이 계문 어기는 것인가.
휴식이지 나태와 때 아닌 때 잠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까 본래심이라고 썼다. 본래 면목(面目)이라고도 한다.
헌배를 하였는데 700배, 800 1000배까지 하였더니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 이름이 떠오르면서
오히려 내가 그것으로 공부 했구나 감사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 면목이 드러난 것이다.
구름에 갇힌 마음이 구름이 걷히면서 오히려 내 마음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음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의 마음으로 자동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마음은 그럴 수 있다.
그 마음만 살아나버리면 용서가 되는 것이다.
의지가 아닌 수행을 통해서 하다 보면 자동으로 되게 되어있다.
저 사람은 본성부터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 앉은 어떤 분들도 매서운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인상이 펴진다. 그리고 마음씨가 좋아진다.
내가 냉정하다 라고 한 사람도 때로는 경계 따라, 그리고 습관 들어서 그런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지공무사(至公無私)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의 고향자리는 원만구족 지공무사이다.
아까 자아라는 것은 원만구족의 마음이다. 그것이 내 자아의 모습이며 실체다.
내 자아라는 것은 원만구족한 모습이며, 지공무사한 실체다.
내 자아는 원만하여 다 갖추어져 있다.
중생심만 녹아나면, 소아(小我)가 내가 아니라, 지극한 공심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지공(至公), 지선(至善)
선을 넘어선 것을 지선이라고 한다.
지공이란, 공이라 할 것도 없는 공이다.
이 공에는 나도 없다. 작은 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내 모습이다.
수목원도 마찬가지이다.
천지자연도 좋지만 수목원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법을 배울 수 있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 그래야 이 세상이 낙원세상이 되는 것 아닌가.
신분검사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신분검사서 들고 다니면서 점검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혜시가 많은가 혜수가 많은가.
나는 화요공부방에 간식이 넘쳐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않더라. 이
것은 우리의 인과신앙을 모르고 핑계를 댄 것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과 나무는 비슷하다.
둘 다 2~30년 투자해야 하지만 사실 사람이 효과가 더 크다.
농사를 짓되 작물을 심는 농사도 좋지만 사람의 농사, 인농(人農)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더 큰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불완전한 존재라 여기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더러 있다.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지만 땅은 그렇지 않다. 정성을 들인대로 거두는 것이 농사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싫어서 나무를 찾는다면 그것은 처처불상 신앙에 맞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금년에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암교당의 비전이다.
마음 속에 그런 욕심 혹시 없는가.
초기 교단 원불교에서 내노라 하는 교당이 되고,
여러분 자식이 안암교당에서 많은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생각.
그렇다면 누군가가 노력해야 한다.
교화대불공의 기치 아래 교당마다 비전을 세우라고 하셨고,
그것을 역량개발 교육팀 교무님들이 다 교육을 하셨다.
내가 이 교당이 정말 좋은 교당이 되고 우리 교당이 은혜롭게 되려면.
그래서 프라이드와 자신감을 가진 교당이 되려고 한다면
이 사회에도 대종사님 법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비전 교육에 같이 해 주신다면 본인도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며
기분 좋게 적극적으로 앞당겨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오오.. 감사합니다. 은전교우님~ 화이팅!
생생한 후기 감사해요~ ^^
은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