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밤
하노이의 11월은 가을이다.
나는 호텔로비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거리에는 오토바이가 물처럼 흐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은 아성처럼 허공을 떠다니다 사라졌다.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커다란 기둥엔 빨강색과 초록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로비 한켠엔 베트남 화가들의 그림이 무심하게 걸려있었다.
그곳에 걸린 그림들은 대체로 간결했으며 짙은 원색을 사용해서 그런지 색감이 화려했다.
제법 오래전에 걸렸을 것 같은 그림에서 나는 환하게 빛나는 해를 보았다.
빛이 살아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색깔은 분명 강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름 뜨거운 태양처럼 자지러지게
강렬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영원히 질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비오는 저녁 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 그들의 실생활이 담겨있는 풍경화는 보기에 편안해서 그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헐거워진 가을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서늘한 바람처럼 그림들은
그렇게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 듯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로 나섰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네온사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도심지답게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난 봄 남부 호치민에 갔을 때, 날치기를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마음에 준비를 충분히 하여야했다.
우중충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는 하루를 마무리하느라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아직은 초저녁인데도 이미 문을 닫은 상점들도 꽤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군데군데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옆에는 젊은 여자가 역시나 사과궤짝 만한 탁자 위에 음료수
따위를 놓고 쪼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네 목욕탕에서 쓰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그 여자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나는 그 여자 앞에 앉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그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발엔 먼지가 켜켜로 앉았고 손톱엔 시커먼 때가 끼어있었다.
나는 음료수를 한 잔을 시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가게 안에는 오토바이가 있고, 낮에 쌀국수를 삶아댔을 법한 조리대가 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래층의 전부였다.
그때 위층에서 올망졸망한 아이들 서넛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푸근한 어머니 같은 얼굴로 아이들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내게도 나를 따뜻이 품어주던 어머니가 있었지 않은가.
반찬냄새가 뒤범벅이던 어머니의 치마폭 속에 얼굴을 묻었던 시절이……
그 아이들도 평생 그 품을 그리워하며 살리라.
베트남 사람들은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래서 일까. 술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걸으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그 술집으로 쏠렸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나는 혼자라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그들 속으로 스며들지는 못했다.
뒷골목은 큰길가 쪽보다 건물이 더 낡아서 우리네 재개발 지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곳이 다 그렇게 낡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 개발되는 지역엔 도로도 넓을 뿐아니라 제법 커다란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분위기도 남부 호치민과는 꽤 많은 차이가 났다.
호치민은 날씨부터가 일 년 내내 여름의 날씨여서 전형적인 인도차이나의 느낌이 강한 반면,
북부 하노이는 왠지 모르게 중국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그건 아마도 거리상으로 중국과 가깝기도 하지만, 아마도 천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며, 하노이가 수도라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남부의 호치민이 훨씬 앞서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노이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쳤던 비가 다시 지척지척 내리기 시작했다.
재래시장에는 드문드문 관광 온 듯한 외국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그들 사이를 헤집으며 시장바닥을 헤매었다.
각종기념품과 생활용품으로 넘쳐나는 시장거리는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장 끝에 열대과일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나는 망고와 석류를 한 봉지 사들었다.
달콤한 과일 맛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러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재래시장 삼매경에서 빠져나왔다.
삶이 가장 치열한 곳,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 나는 그 속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즐겁고 행복했다.
숙소로 돌아와 낯선 곳에서의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낮에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요란하게 울려대던 오토바이소리를 통째로 삼켜 버린 밤,
고단했던 그러나 행복했던 하루의 여운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200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