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연중 10주일 설교
마르 3:20-35. 2고린 4:13-5:1. 창세 3:8-15
단절과 아픔을 넘는 신앙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떠오르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을 하는 데 있어 ‘단절과 아픔’이라는 여러 상황과 마음을 묵상해 봅니다.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 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번잡함과 분주함. 그리고 오해와 비난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오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약한 이들에게는 부드러웠지만 자신의 욕망을 먼저 챙기는 이들에게는 단호하셨습니다. 그분의 언행이 싫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예수님을 음해합니다.
권력과 부의 상징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적대적인 율법학자는 물론이고 주님의 친척마저도 오해하고 예수님을 힘들게 합니다.
신앙을 하는 데 있어 가족이 더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묵상해 보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종교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온갖 혜택을 지적하면, 알량한 권력이랍시고 반사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입니다. 아울러 예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개척 과정에서 만난 사람, 들은 얘기, 경험한 일들, 교회 공간을 마련하러 다니는 중에 뼈저리게 느꼈던 소회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한다는 것은 곧게 뻗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도 그 과정에서 분명히 고통과 아픔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픔은 당사자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해결이 되는 법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성찰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귀한 신앙의 자세는 없습니다.
피정이나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내어 나를 바라보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통해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겪은 그 혼란스러움과 번잡함. 그리고 터무니없는 오해와 인신공격, 모욕은 그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상처로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고통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이 역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과 아픔으로 인해 내가 자유로워지고 평화를 누린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만약 내가 겪는 고통과 아픔의 근원에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느껴진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순명하는 마음으로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단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바로 성찬례가 그 핵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와 말씀 묵상, 기도를 배우며 나의 일을 늘 돌아보는 영성 생활이 늘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한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내 호흡 안에 하느님도 함께 호흡하며, 하느님이 내 중심에 살아 계신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 여기 내 안에 함께 계시는데도,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성령 모독입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살고 잘 되는 세상, 하느님이 없다고 믿고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세상임에도 우리는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거룩한 양심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는 이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생각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가 오늘 여기의 우리에게 하신 경고와 다름이 아니라는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오늘 들은 창세기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먹은 과일로 인해 하느님께 벌을 받습니다.
자세히 보면 먹지 말라 하신 과일을 먹어서 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며 핑계를 댔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다시 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죄를 다른 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린 오만함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감추려다 본성이 드러나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의 군상입니다.
다른 사람 안에 나아가 지구의 모든 생태계 안에 함께 계신 하느님의 숨결 즉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점으로 그들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숨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니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중한 죄는 곧 관계의 단절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 사람과의 단절, 환경과의 단절입니다.
하느님은 물론 다른 이들에게 나의 욕망을 투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울로는 진정한 단절은 사실 전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표현을 대비되는 구절로 계속 설명합니다.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 눈을 돌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자신을 늘 단련하여 눈앞에 보이는 욕망에 노예가 되지 말고 다른 이들 안에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며 참고 견디며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결단의 아픔입니다. 31절 이하는 부모와 형제의 정을 부정하는 것은 배은망덕이 아니라 더 넓은 시각, 더 넓은 마음을 품으라는 거룩한 교훈입니다.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자신만을 보는 삶에서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픔입니다. 공동체가 가진 필연적인 갈등의 아픔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만든 경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 성숙한 신앙은 아픔과 고통 가운에서도 함께 나누며 감사할 줄 아는 사려 깊은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가리켜 볼 수 있는 교회, 단절과 아픔을 넘어 신앙으로 활력을 얻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