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계략, 패망한 수군을 백의종군 후 재건한 이순신의 시간과의 싸움. 명량해전, 왜교성, 노량해전의 현장
李舜臣 제거하기 위한 離間策
1596년 12월, 너는 다시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절묘한 離間策(이간책)을 연출했다.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네가 파견한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너와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엉터리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너의 허위첩보에 속은 김응서는 이를 곧이곧대로 宣祖에게 복명했다. 이순신에겐 왕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니시가 판 함정이라 판단, 가토오에 대한 요격을 포기했다. 이에 宣祖는 어리석게도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기 때문이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너의 계교대로 2차 문초에서 고문으로 치명상을 입었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이미 宣祖는 영의정 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南人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宣祖의 속뜻을 받들어 西人의 영수 尹根壽(윤근수) 등은 이순신의 처형을 주장하지 않았더냐.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너, 고니시는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모략전을 탓할 생각은 없다. 전쟁에 나선 장수라면 敵을 속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 아니더냐. 실은 조선 조정에서도 『明조정이 가토오를 곧 일본 국왕에 책봉할 것』라는 허위첩보를 흘리고 있었다. 너와 가토오, 그리고 히데요시와 가토오가 반목케 하는 反間之計(반간지계)였다. 한심한 것은 너에게 逆이용당한 宣祖 조정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免罪符(면죄부)를 받은 건 아니었다. 너,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그것이 바로 天罰(천벌)인 까닭에 내가 여기서 主犯 히데요시의 하수인인 너를 더 이상 질책해야 무엇하겠는가.> 조선 水軍의 몰락
『소수의 수군 함대가 가덕도에만 진출해도 가토오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며 이순신을 모략했던 元均이 후임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후 원균의 생각은 달라졌다. 원균은 갑자기 水陸竝進論(수륙병진론)을 들먹이면서 조정과 도원수 權慄(권율)에게 安骨浦(안골포)의 敵을 육상에서 먼저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宣祖는 원균에게 敵의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원균은 6월18일 이후 안골포와 가덕도 해역 등에서 몇 차례 소규모 해전을 벌여 사소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함대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의 劣勢(열세)함대가 물길이 험한 낙동강 하구의 海路를 횡단하여 부산포를 직격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했다. 그러나 宣祖는 수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漆川梁(칠천량) 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머뭇거리는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재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리 도원수라지만,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겸 작전사령관인 통제사를 부하들 앞에서 매질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군사문화가 저급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7월14일, 원균은 이순신이 육성해 놓은 全함대 180여 척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일본 함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부산 앞바다의 물마루(水宗)까지 추격했지만, 거센 풍랑을 만나 일부 함선이 흩어졌던 것이었다. 원균 함대는 회항 중 식수를 구하러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일본의 복병에게 걸려들어 일시에 400여 명이 살해되고 식수도 얻지 못했다. 지친 원균 함대는 7월16일에 이르러 칠천량에 매복 중이던 일본 함대의 포위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元均은 도주하여 고성땅 秋元浦(추원포)에 상륙했으나 매복 중인 왜병의 칼을 받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 충청수사 崔湖(최호) 등 지휘부도 거의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만 1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敵前 도주했다. 국보 제304호 鎭南館
曳橋城(예교성)을 뒤로 하고 순천시농산물공판장이 소재한 월전 삼거리로 되돌아 나왔다. 순천까지 내려와서 여수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壬亂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중심기지 鎭南館(진남관)까지는 불과 30km다. 여수 시내 끝에서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곧 언덕배기 위로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이 보인다. 진남관은 선조 32년(1599) 삼도통제사 李時彦(이시언)이 건립한 客舍(객사)인데, 원래 그 자리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본영인 鎭海樓(진해루)가 있었다. 진남관은 1718년(숙종 44년) 이제면 수사가 재건했고, 그후 여러 번 중수되었다. 진남관은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의 규모인 데다 건축미가 뛰어나 1963년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다시 국보로 승격되었다. 석축 계단을 올라 前門인 望海樓(망해루)에 들어서면 진남관의 웅자가 펼쳐진다. 정면 15칸(53.6m), 측면 5칸(12m), 높이 40척, 넓이 240평, 기둥 68본으로 단층 팔작지붕이다. 통영의 洗兵館(세병관)보다 1.5배쯤 크다. 평면의 양측에서는 移住法(이주법: 건물 양측의 기둥인 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내부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架構(가구)의 짜임은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部材(부재)를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해 준다. 양측면에는 2개의 衝樑(충량: 측면보)을 걸어 구조적으로 안정된 기법을 구사했다 각 部材에 남아 있는 단청 문양도 우아하다. 진남관의 임란 유물전시관에 들러 직원 金淑씨에게 자료를 요청했다. 그녀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관계자료를 복사해 주고, 길 건너 언덕 위(여수시 고소동 620번지)에 있는 보물 제571호 좌수영대첩비와 보물 제1288호 墮淚碑(타루비)까지 동행하며 안내해 주었다. 대첩비는 李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2년(1620)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은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이 지었는데, 대첩비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로 높이 약 3m이다. 타루비는 李충무공 막하에서 복무했던 수졸들이 장군의 덕을 흠모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세운 비석이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 임진왜란 최후의 決戰 노량해전
필자 일행은 17번 국도를 통해 여수에서 北上,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리다가 河東IC 를 빠져나와 南海섬으로 가는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대교 중간에 이르러 하차했다. 남해대교 밑 협수로가 바로 임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露梁(노량)이다. 협수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포구 모두 「노량」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하동 쪽을 舊노량, 남해 쪽을 新노량이라고 구분한다. 순천 예교성에 四面 포위된 고니시는 철군 기한인 1598년 11월 중순이 다가오자 11월13일, 10여 척의 선발대를 부산 쪽으로 출발시켰으나 앞바다의 柚島(유도: 지금은 주변 해역이 매립되어 육지와 이어짐) 뒤에서 포진 중인 이순신 함대에게 격퇴당해 되돌아오고 말았다. 고니시는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 그 수법은 明의 西路軍 대장 劉綎(유정)에게 썼던 방법대로 명의 水路軍 대장 陳璘(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써서 퇴로를 열어주도록 간청하는 것이었다. 진린은 퇴로를 열어주는 代價를 요구했는데, 고니시는 그 알려지지 않은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요청을 一言之下에 거절했다. 궁지에 빠진 고니시는 진린의 묵인下에 빠른 배를 보내 泗川(사천)에 주둔 중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라면 침략군의 제4군 대장으로 사천의 선진성 전투에서 董一元(동일원)이 지휘하는 明의 中路軍을 대파한 맹장이었다. 이 사실은 곧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그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다. 시마즈의 구원군이 오면 앞뒤에서 협격을 받게 되므로 예교성에 포위된 고니시軍보다 시마즈軍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노량해협 근처로 이동시켰다. 진린도 고니시와의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이순신 함대를 따라 노량해전에 나섰다. 이순신 함대는 해협 우측인 남해 觀音浦(관음포) 위쪽에 포진하고, 진린 함대는 노량해협 좌측에 대기했다. 일본 함대는 사천의 시마즈, 昌善島(창선도)의 소오(宗義智), 그리고 부산에 주둔했던 데라자와(寺澤正成) 등이 연합한 500여 척의 대규모 세력이었다. 노량해전은 피아간에 500여 척의 大함대가 맞붙은 壬亂 최후의 결전이었다. 전투는 11월19일 새벽 2시경에 양측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양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朝-明 연합함대가 火攻(화공)을 펴면서 전황이 급전했다. 이 날 火攻은 겨울철에 부는 북서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風上(풍상)에 위치한 朝-明 연합함대가 風下에 위치한 일본 함대를 압도했다. 일본 함대는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도주했다. 그쪽으로 가면 바닷길이 뚫리는 것으로 오판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의 막다른 골목(灣)이었다. 여기서 임란 史上 가장 처절한 접근전이 전개되었다. 격전 중에 이순신이 왼쪽 가슴에 敵의 총탄을 맞았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名言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투는 11월19일 낮 12경에 끝났다. 朝-明 연합함대의 대승이었다. 예교성에 포위되었던 고니시는 전투가 한창일 때 묘도 서쪽 水路를 통과, 남해섬의 남쪽을 우회하여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임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좌의정 李德馨(이덕형)은 노량해전 직후에 현지를 돌아보고 일본 軍船 200여 척이 격침했고, 왜군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朝-明 연합함대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 휘하에선 副將級 10여 명, 진린 휘하에선 부장급 3명이 전사했다. 露梁 협수로의 처절한 夕陽
왜, 이순신은 고니시에게 退路(퇴로)를 열어주는 척하면서 그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원래, 戰場(전장)에 나선 장수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兵不厭詐: 병불염사). 또한 「궁한 쥐는 쫓지 말라(窮鼠勿迫: 궁서물박)」는 戰訓(전훈)도 있지 않은가. 이순신도 길을 열어달라는 고니시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철수하는 고니시軍의 꼬리를 때렸다면 오히려 그를 잡았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순신이 생리적으로 속임수를 싫어하는 儒將(유장)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든지, 戰後에 예상되는 숙청을 당하기보다는 깨끗한 이름만이라도 남기려고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등의 臆斷(억단)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이순신을 짙게 느낀다. 이순신은 왜군, 특히 고니시만은 기어이 잡으려 했던 같다. 그런 증오감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의 戰死 이후 더욱 응결되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후 그는 戰場의 장수로선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597년 10월14일 그의 일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 저녁에 사람이 天安으로부터 와서 집안의 편지를 전하는데,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하다. 겨우 겉봉을 뜯고 차남 열의 편지를 보니 겉에 「痛哭」(통곡)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한 줄 알겠다. (中略)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의 마땅함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느뇨!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이 안 보이네. (中略)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는다. 통곡, 통곡하노라> 관음포의 언덕배기 위에 있는 李충무공의 사당 李落祠(이낙사: 남해군 설천면)에 올라 셋째 아들의 부음을 듣고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았다』고 통곡한 인간 이순신을 다시 생각했다. 그는 모함을 당해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던 날의 일기(1597년 4월1일)에서조차 所懷(소회) 한 마디 기록하지 않을 만큼 喜怒哀樂(희로애락)의 표현을 냉엄하게 절제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평소 그렇게 굳세게 누르고 눌러오던 인간 원초적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지 않은가! 저녁 7시가 가까웠다. 한상일 기자는 다른 일로 이 날 저녁 8시 대구行 고속버스 막차를 타야 했다. 19번 국도로 북상하여 河東 노량에서 우회전하여 100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붉게 물든 석양의 노량 협수로가 필자에겐 사무치도록 처절했다. 진교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여 晉州까지 가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상일 기자와 헤어져 필자는 진주시 주약동 숙소 앞에서 개인택시에서 내렸다. 미터기에 표시된 택시요금은 17만7400원이었다. 8월26일 아침 西門을 통해 진주성에 올랐다. 진주성 內에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오는 10월 「李舜臣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진주박물관은 임란 당시에 사용되었던 銃筒(총통)을 구색대로 거의 다 소장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 두 개밖에 없는 대형 天字총통(明宗 때 제작) 한 개를 비롯해 地字총통·玄字총통·黃字총통을 한 개씩, 그리고 소형 勝字(승자)총통은 여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조선의 총통은 특히 일본 수군이 매우 두려워했던 重화기였다. 천자총통은 砲身(포신)의 길이가 130cm로서 鐵羽(철우)가 달린 길이 113cm의 大將軍箭(대장군전)을 발사했다. 地字총통은 포신의 길이 89.5cm로서 100.9cm의 將軍箭 1발 또는 새알탄(鳥卵彈) 20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