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또 하나의 우리 땅, 녹둔도(鹿屯島)의
슬픔
청나라의 의정왕대신 공친왕 혁흔
당시 청나라의 의정왕대신 공친왕 혁흔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넘겼는데 이때 조선의 녹둔도가 함께 딸려가게 되었다
1860년 11월 베이징의 자금성. 당시 청나라의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은 제2차 아편전쟁의 종결을 위하여 온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사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침내 중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조약문건에 도장을 찍고야 말았다. 이 조약이 바로 베이징조약이다.
이 베이징조약으로 인하여 영국은 홍콩이 있는 주룽(九龍)반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몰수된 기독교 재산의 반환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재를 알선해줬다는 명분으로 우수리 강 이동(以東)의 땅, 연해주를
챙기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에게 연해주 일대를 이양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베이징조약과
전혀 무관한 나라의 땅이 얼떨결에 연해주와 함께 러시아로 편입돼버린 것이다.
그 땅은 바로 조선의 영토, 녹둔도(鹿屯島)였다.
녹둔도의 위치와 오늘날의 모습
녹둔도는 두만강의 한 지류인 녹둔강 안에 있던 섬으로 조선 초에 개척된 이래
400여 년 간 명실상부한 조선의 영토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 있을 때에 여진(女眞)과 싸운 무대로도
유명하다.
허나 오늘날 지도 속 녹둔도의 모습은 이름과는 달리 섬(島)이 아닌 뭍(陸)이다.
19세기 초 퇴적작용으로 인해 그 북쪽이 연해주 일대와 붙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와의 기존국경에 혼동이 일어났고 결국 베이징조약에 의하여 얼떨결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고 만
것이다.
이후 1889년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러시아에
항의하였으나 그만 국제사회의 냉엄한 힘의 논리에 의하여 묵살되고 말았다.
현재 녹둔도에는 러시아가 쌓은 제방과 함께 러시아의 군사기지가 있다.
북한에서는 녹둔도를 함경북도 선봉군 조산리라 쓰고
있다
녹둔도의 이러한 비극은 현대에
이르러 북한체제에 의하여 더욱 극명해지고 말았다.
지난 1990년 북한이 구소련과
경계를 설정할 때에 베이징조약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음에 따라 녹둔도 일대를 구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2004년 이후 북한과의 경계지역에 대한 경비강화를 까닭으로 녹둔도
남쪽에 제방을 쌓았으며 군사기지까지도 세워놓았다.
관련전문가들은 통일 이후 우리가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맺은 경계에의 조약과
관행들을 그대로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녹둔도가 타향살이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마땅히 우리의 당당한 영토이어야 할 녹둔도! 향후 통일
한국시대에도 녹둔도가 타향살이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 생겨서는 당연히 아니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남북은
이에 관한 긴밀한 협력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북한체제가 우리와 대화의 국면에 들어서게 되는 것으로 우리가 내미는
상생공영의 손길을 부여잡는 것을 뜻한다.
조상들이 물려준 삼천리의 금수강산. 이 보배로운 땅이 '상생공영의 통일'로 나아가는
협력으로써 지켜져 마침내 위대한 통일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게 되기를 기원해본다.
************************************************<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녹둔도(鹿屯島)는?
러시아 하산역에서 남쪽으로 2km쯤 가면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가 보인다. 가을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지는 녹둔도에 살던 우리 한든들은 68년전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이동되면서 버려진 땅이 되었다.
녹둔토성주변엔 사람이 살았던 흔적, 가마솥, 연자방아등이 땅에 그대로 방치되있는것을 보면 녹둔도의 시간은 1940년대
그대로 머물어 있다
녹둔도에 대한 설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볼수
있다.
사차마도라고 나오는 녹둔도는 4군6진 개척때 우리영토가 된 땅이다. 1432년 세종은 녹둔도에 길이 1246척, 높이 6척의 녹둔토성을 쌓아 녹둔도를
방비하게되었다.
세조 원년에 녹둔도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조,청,일의 대부분 지도는
녹둔도를 우리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녹둔도에는 사람이 거주하는것을 금하였지만 백성들이 녹둔도로 와
농사를 지을수 있었고 농사시기때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1587년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해 큰 피해를 입자 당시 책임자였던
이순신은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는데이듬해 이순신은 다시 반격에 나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다시
직위에 올랐다.
이후 녹둔도는 간도와 함께 무인지대가 되어 19세기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영조,정조시대이후에 녹둔도에는 모래,흙이 퇴적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녹둔도는
러시아 하산지방과 연결되었고 주민들이 살게되었다.
육지와 연결됐긴했지만 녹둔도는 조선의 땅이 분명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청을 압박해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게되면서 녹둔도마저 러시아영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는 녹둔도에 국경표석을 세웠는데 조선은 그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23년이 지난 1883년 고종때에 들어서야 우리 정부는 이것을
알았고 1885년 김광훈,신선욱을 보내 녹둔도주변지도를 작성하라했으며 1889년 고종이 직접
청나라에 ' 녹둔도 우리땅인데 왜 러시아땅이라고 인정했냐'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청은 무시했다.
1930년까지 한인이 거주했으나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모든
녹둔도인이 중앙아시아로 가게되었다
'지방지도'(地方地圖)의
'경흥지도'(慶興地圖·1872)에 나온 녹둔도(빨간 점선 안 왼쪽 아래)
녹둔도는 섬이었으나
두만강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하도의 한 부분이 막혀 육지화되었기 때문에 두만강 하류의 지형 변화와 토지 방치로 실제 위치와 크기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러시아의 하산을
기점으로 2001~2006년 4차례 답사 끝에 주춧돌, 가마솥, 토기 같은 집터와 경작의 흔적으로 한인들이 추방되기 전 취락의 위치를 확인했다.
북한의 조산에서
4㎞쯤 떨어진 곳에서 녹둔도 초기 토성지로 추정되는 장소도 찾았다. 토성지는 녹둔강이라고 부르는 구하도에 반월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4~6㎢
넓이의 지역으로 두만강 하구의 범람원 중심부에 있다. 녹둔도로 추정되는 하산 이하의 대부분 지역에 나타나는 촌락 지명들은 한인들의 거주지였음이
확인되고 있어 녹둔도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