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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을 걷다 - 무주 부남면
진안고원길은 그동안 진안군내 길에 집중해 왔으나 앞으로 무진장고원길로 확장해 나갈 계획으로 있다. 원래 진안고원이 무주·진안·장수 세 군에 걸쳐진 전북 동부권역을 일컫는 이름이니만큼 무진장고원길로 다시 태어나도 잘못이랄 것은 없겠다. 특히 우리군은 섬진강과 금강 두 큰 강의 발원지역으로 ‘수태극’으로도 불리는 지역이다. 따라서 두 강의 유역을 걸으며 강물의 흐름에 따른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모습에서 무진장 세 지역의 동질성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5월 9일부터 무주군 금강유역을 걷기 시작한 프로젝트를 따라 두 번째 걷기에 참여했다.
출발 : 부남면 대차리 서면마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 마을 앞 강변에 정크아트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크아트’란 폐품으로 만든 조각미술을 말하는데, 쓰레기로 버려질 것들을 재활용하여 가공한 작품이다. 정크아트 작업을 하는 목적은 자원의 과다한 소비와 폐기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한다. 마을 앞 강에 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 대안의 강변길을 걷는 것이 오늘의 여정. 모두 스물한 명이 출발한다.
세월교, 물같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가는 다리
이 다리는 징검다리였거나 물높이가 높아지면 잠기는 잠수교였던 곳이다. 그보다 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니던 곳이었을 터. ‘세월교’라 부른다는데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건너면서 물을 내려다보면 아직까지는 참 맑다. 바닥의 돌들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강폭도 넓어져있고 수량도 풍부하고 깊다. 최상류 용담호에서 직선거리로는 불과 12킬로미터 남짓이지만, 구절양장으로 흐르는 가운데 이골 물 저골 물이 합해지고 논밭에 물을 대면서 중상류 하천의 모습을 띤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삶도 더 풍요로워 보인다. 대차리 전체가 다 그렇지만 서면마을도 강 따라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논밭과 함께 1백여 호가 훨씬 넘는 큰 마을이다.
이제부터 강변 산책길
강을 건너면 바로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금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거슬러 걷는 숲길이 시작된다. 빌로도처럼 화려한 검은 색의 물잠자리 떼가 일행을 맞는 듯 후르르르 날아올랐다가 숲에 내려앉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흙과 자갈과 풀이 어우러진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대차리 체련공원
무주읍을 지나 내려온 남대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어귀, 대차리 입구에는 난데없는 토목공사가 꽤 크게 벌어지고 있다. 원래 사과밭이던 곳을 파뒤집어 체련공원으로 만드는 공사라 한다. 얼른 보기에도 이곳을 이용할 주민은 거의 없을 듯한데.
용포교에서
통영대전간 고속도로를 싣고 공중에 높이 떠있는 다리도 용포교, 37번 국도(무주와 금산을 잇는다고 ‘무금로’)가 지나가는 꽤 긴 다리도 용포교. 그러나 걷는 이들의 주된 관심은 역시 오래된 옛 다리 ‘용포교’다. 한자로 다리이름을 썼으되 꽤 오래된 옛 사람의 글씨인 것이 역력하고 다른 쪽에는 ‘단기4272년 6월 준공’이라 썼다. 서기 1939년 즉 일제강점기에 지은 다리인데 나중에 그 자리를 쪼아내고 다시 새겼다. 건설 당초에는 일본의 연호인 ‘쇼오와(昭和) 14년’이라 썼던 것을 해방 후에 고친 것으로 추측. 오래된 다리도 그 나름으로 훌륭한 문화재다.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도깨비놀음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추동마을을 거쳐 흘러드는 삼유천이 있어 이곳의 강폭은 대차리 쪽 하류보다 훨씬 더 넓다. 강 가운데 여러 무더기의 사구(砂丘)와 초지가 얼룩얼룩 흩어져 있어 자연하천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꿩들과 물새들이 저 초지와 사구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제가끔의 후손 퍼뜨리기에 활용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 평화를 깨뜨리는 딱총소리가 마치 중국인들 폭죽 터뜨리듯 들린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강 가운데 사구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일으키는 소음이었다. 이 강을 두고 많은 레저스포츠가 발달(?)해 있다. 래프팅이 주된 종목이고 모래밭을 달리는 사륜오토바이, 서바이벌 게임 등이 시류를 타고 성업 중이다. 도시민들의 사치스러운 취미생활에 농촌은 희생적으로 장소 제공만 해야 할는지. 딱총소리와 오토바이들의 굉음에 물새들이 번식은커녕 찾아오지도 않는다면 그 후의 사막화와 불모화의 피해는 도시민 농촌인을 가리지 않는 재앙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강변 마을 모정
걷는 패의 모든 이가 이웃 사랑으로 뭉친 사람들이다. 그 중 한 분이 닭강정을 한 상자나 가져와 한 시간 여 걸은 피로를 씻고 다소 출출해진 뱃속을 달랜다. 이곳 모정은 내요대마을의 모정인 셈인데 커다란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것을 빼고는 모정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최근에 좀 큰돈을 들여 다시 지은 듯한데, 천장에 육각형 장식이 달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일행 중 최낙일 선생이 “모정에 앉은 채 줄 하나 잡아당기면 천장의 육각형 판이 내려와 식탁이 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라고, 다분히 경제학 교수다운 아이디어를 낸다.
잠두마을을 바라보며 임도로 올라서다
다시 걷기 시작, 외요대마을 아래 강변길을 걸어 잠두교 앞에서 마을이 건너다보이는 임도로 들어선다. 잠두마을은 금강이 크게 휘돌아 흐르며 거의 섬처럼 생긴 마을이다. 생긴 모습에서 ‘누에머리’라 불린 듯한 물가 동네다. 여기도 래프팅 관광으로 먹고 사는 모양. 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민가들로 보아, 가구수도 꽤 많아 보인다. 이곳 물가에도 옛 나루터였을 곳에 낮은 잠두교가 걸려있다. 자동차로 다니는 것이 더 일상적이 된 시절답게 37번 국도가 달리는 큰 잠두교가 따로 있어 옛 다리는 명맥만 유지할 뿐. 해발 350미터급의 산을 타고 물길 따라 걷는 임도를 들어섰다. 왼쪽으로 금강, 오른쪽으로 바위 산. 숲길이 너무나 좋다. 잠깐만 오르면 ‘사진찍기 좋은 녹색관광명소’라 써붙인 전망 좋은 곳이 나타난다. 잠두마을이 건너다보인다. 바위를 깨내어 임도를 개설한 것이 다소 아까운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지만, 개발과 물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절도 있었으니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앞으로 더 이상 훼손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일행이 모두 모여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사륜오토바이의 흙먼지를 뚫고
임도를 걷는 길은 온갖 자연의 소리와 빛깔로 이루어져 있어 ‘낭만’, ‘산소’, ‘녹색’, ‘적막’ 등의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정의 가운데쯤을 지나자 난데없는 기계의 굉음에 휩싸인다. 십여 명의 청년들이 사륜구동 오토바이를 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주행코스는 우리 일행이 걷는 길과도 묘하게 일치하여 임도가 끝난 뒤 강변 모래사장으로 내려갔을 때까지도 따라다녔다. 비켜주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걷는 수밖에 없었다. 강변은 이미 래프팅과 오프로드 드라이빙과 서바이벌 게임의 장소로 어지럽게 ‘개발’되어 있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개발의 첫째 이유로 드는 것이 행정의 관례인데, 몇몇 레저업체의 경제는 활성화될지언정 지역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 같지는 않았다. 반면에, 더러워진 모래밭은 이미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만신창이다. 폐타이어들이 무더기무더기 쌓여있고, 래프팅 보트와 도구, 복장 등을 쌓아둔 곳은 너저분하여 폐허 같게도 보인다. 싸구려로 지은 가건물들은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굴암삼거리, 누에머리가 끝나는 곳
흙먼지와 엔진소음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굴암삼거리까지 단숨에 주파. 가당천이 흘러와 금강에 합류하는 어귀에도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머리 위 높은 곳을 지나고 있고, 물가에 한 체련장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전에 와보았을 때도 텅 비어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금강 벼루길(예향천리마실길의 무주판이 금강벼루길이라는 이름인 듯)을 조성할 때 수십억 원의 예산이 쓰였다는데 그 자금으로 지은 체련공원인 듯. 하지만 농촌지역의 체련공원이 거의 다 그렇듯, 이곳도 이용하는 주민은 거의 없어 우리 일행의 독차지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기로 한다.
김영탁 목사 부부와 최낙일 교수 등은 진보적 사상가들답게 왜 농촌지역에 이런 인공의 시설물들이 자꾸만 들어서는지에 대해 분개하며 토론했고, 그래도 점심은 맛있었다.
굴암리,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곳
굴암리는 아랫굴암과 윗굴암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예정은 두 마을을 모두 들러 답사하는 것이었으나 강변 찻길에 주욱 심어진 벚나무 그늘이 하도 좋아 마을을 들르는 여정을 건너뛰고 그냥 가로수 그늘길을 걷기로 바꾼다. 이 길은 강을 왼쪽으로 가까이 내려다보며 걷는 길이어서 실제로 래프팅을 하는 보트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오른 쪽 산 위에는 펜션들이 줄줄이 처마를 잇고 있을 정도로 관광이 생업이 되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행과 떨어져 잠시 윗굴암마을을 들르는 외도를 해본다. 스피커를 사방으로 설치한 높은 탑이 서 있다. 시골마을답다. 이 마을도 허물어진 집은 하나도 없고 모두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진안만큼 이농현상이 심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포도, 감 등 과수 농사가 특징이다. 비교적 안정되어 살고 있는 여유로움이 넘쳐나는 마을이다. 상류지역은 가파르고 비좁아 삶이 팍팍한 것일까?
‘나는 자연인이다’ - 용등폭포와 조항마을
굴암리를 벗어나 다시 임도를 들어서다. 강변길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기로 한 것. 고개 하나를 넘으면 오늘 일정의 마지막 율소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이 산길에서 의외의 명소를 만났다. 다소 가파른 산길을 들어서자마자 개울 속 돌들을 건져내어 쌓았을 돌탑 더미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누가 쌓았을까? 길옆 실개천은 거의 물이 마른 건천이다. 결정적으로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올라간 자리에 ‘짧은 다리’가 놓였고, 좌우로 눈에 확 띄는 별천지가 나타난다. 어느 TV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본 적이 있다고 일행 중 몇 사람이 반가워한다. 왼쪽, 길 아래로는 맑고 시원한 소리를 내는 짧은 폭포가 있고, 그 아래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호박소[潭]가 있다. 용등폭포라 부른다는데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이 폭포 이름을 정병귀 국장은 어떻게 알았을까? 폭포로 내려가 보니, ‘짧은 다리’를 천장으로 작은 방 하나가 ‘붙어’있는 것이 마치 동굴 천장에 벌집 붙어있는 형국이다. 묘하게 소박하고 적당히 촌티나는 개인적 휴식처임을 알겠다. 그 외에도 폭포 주변 바위틈에 지은 정자나 물레방아, 작은 다리 등이 한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의 손에 의한 오랜 작업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허. 이렇게 깊은 산 속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가꾸어 온 무릉도원이라니. 과연 미디어의 관심을 끌 만한 곳이다. 일행 모두가 신기해하며 신을 벗고 물 속에 발을 담근다. 그러나 너무 널리 알리지는 않는 것이 혼자 사는 송금자(가명)씨의 ‘남편까지 다 내버리고 들어온’ 개인적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길이겠다.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이것저것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아쉬움 남기고 다음 일정을 재촉.
산속 분지, 조항마을
이 산길 위 또 하나의 명소는 조항산 중턱에 자리잡은 신비의 분지마을이다.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가자 느닷없이 펑 뚫린 평지가 나타난다. 십여 호 되어 보이는 민가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고 그나마 동네중심부로 보이는 곳에도 서너 호가 몰려 있을 뿐 한적하게 서로의 ‘평화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동네다. 그런 곳인데도 전기는 들어오고 이동통신사의 중계탑도 서 있다. 이 산속에도 논농사는 있어서 이제 곧 모를 심을 작정으로 물을 대어놓은 논이 몇 다랑이나 눈에 띄었다. 신비롭다.
북향한 산비탈을 거슬러 오르면 이런 분지가 있는 줄을 알고 팍팍한 삶을 선택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을 옛사람들의 생각에 동화되어 보려고 애쓰지만, 가당찮다. 그들의 생각에 감히 도시출신 얼치기 자연인이 범접하지 못할 철학이 있었던 것이라고 치부하고 접을 수밖에.
동네를 벗어나려는 내리막길(율소마을로 이어지는)에, 심상찮은 낙락장송 몇 그루 선 곳에,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단(壇)이 있어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당산제 등 공동체 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으리라. 일행 중 한 사람을 올라서게 하여 사진을 찍었다.
밤송이(율소)마을
급한 내리막길을 한 달음에 내려가면 마지막에 만나는 곳이 율소마을이다. 전통테마마을 사업을 한 듯, 체험관이 동네 어귀에 서 있다. 농촌체험관광이 활발하지는 않은 듯 문은 잠겨 있다. 이 동네도 세대수가 많은 큰 동네다. ‘밤곳’이라는 옛 이름이 ‘율소’로 바뀌었을 정도라면 밤이 특산이었을까.
마을 모정이 시원해 보이지만 오늘 일정의 종점인 율소마을 체련공원이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남지 않은 지점이어서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한다.
율소 체련공원은 왜 그 자리에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모를 시설들 중의 하나다. 딱딱한 시멘트 위에 초록 페인트를 칠한, 테니스 코트 한 면과 배구 코트 한 면으로 이루어진 운동장. 그리고 턱없이 넓은 주차장과 해가림 모정으로 구성되었다. 그런가하면 강변길에 연해 달아낸 목재 데크 역시 존재이유를 알 수 없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의 논 몇 다랑이를 부치는 농꾼들이 굳이 한적한 이 장소에 와서 배구와 테니스로 체력을 단련할까?
비단강을 보전하라
강 건너 정보통신수련원을 건너다보며 대티마을을 통과하여 귀로에 올랐다. 부남면은 전체가 금강변의 비옥한 농토와 수려한 경관을 젖줄 삼고 살아왔을 것이다. 관광으로 부수입을 올리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래프팅 산업도 끌어들이고 수련원 건설도 허가하고… 했겠다. 하지만 자연의 모래밭과 농토를 파헤쳐 인공시설을 짓는 일을 쉽게 안다면 얼마 오래 가지 못 할 것은 자명하다. 비단강[錦江]이 그 이름 같이 비단처럼 아름답게 후손대대로 물려지게 할 일이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최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