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경력 송공 묘표(經歷宋公墓表)
공은 휘가 무석(茂錫)이고 자는 희주(希周)이니 우암(尤菴) 문정(文正) 선생의 손자이다. 부친 휘 기태(基泰)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동지돈녕부사 정한(挺漢)의 따님이다. 5명의 형제 가운데 셋째이다. 공은 기운과 도량이 출중하여 시남(市南)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가 만나보고 인재로 여겨, 자신의 아들 이부랑 명윤(命胤)의 딸을 시집보냈다.
공은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 돈녕공이 공이 모친을 여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별도로 공을 위해 가산(家産)을 마련해주었는데, 친가로 돌아갈 때 하나도 가져가지 않으니 남들이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처음엔 과거공부에 매진하였는데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 시사가 크게 바뀌자 곧 그만두었고 이어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화를 당하자 향리에 은거하여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정국이 바뀌자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장악원ㆍ전생서ㆍ사복시의 주부, 조지서ㆍ전설서의 별제, 의금부 도사, 종묘서 영, 강화 경력(江華經歷)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용궁 현감(龍宮縣監), 영천 군수(永川郡守), 재령 군수(載寧郡守)를 지냈다.
엄명(嚴明)하고 간약(簡約)하게 고을을 다스려 부역을 줄이고 기근을 진휼하는 것이 성심(誠心)에서 나와 결코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용궁 현감으로 있을 적에 어사가 치적이 제일이라고 아뢰었고 공이 고을을 떠날 때 눈물을 흘리며 전송한 자도 있었다.
공은 애초에 늙은 어버이 때문에 마지못해 벼슬살이를 했으나 원래 공의 뜻이 아니었으니, 재령에서 파직되어 돌아와서는 다신 성시(城市)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숙종 무술년(戊戌年, 1718, 숙종 44) 2월 4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 공은 몸가짐이 삼가고 조심하여 음악과 여색을 가까지 하지 않았으며,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론이 준엄하고 올발라 남들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동추공(同樞公)을 섬길 적에는 지물(志物)의 봉양을 다하였으며, 또 이 마음을 확충하여 형제들과는 우애 있고 친척들과는 화목하게 지냈다. 연로하거나 곤궁한 사람을 보면 구제하기를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였으니 그 독실한 행의(行誼)가 이와 같았다.
공은 우암 선생에 대해 실로 죽을 때까지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선생이 화를 당한 이후로 한 번도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사람을 시켜 선생의 연보를 읽게 하였는데 정읍(井邑) 당시의 일에 이르자 탄식과 눈물이 함께 쏟아져 읽는 이가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였다.
동추공이 고을을 다스릴 적에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행장(行裝)을 씻은 듯이 텅 비우라고 경계하였는데, 공은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아 고을을 다스릴 때마다 반드시 이 맹세로써 선생의 묘에 고하였다. 언행 하나하나에 불안해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선조의 가르침에 어떠한가?” 하였으며, 자손들을 가르칠 때에도 몸을 삼가고 의리를 지키는 것을 법도로 삼게 하였다.
아!《시경》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리라. 공은 청주(淸州)의 화산(華山)에 터를 잡고 살았으니 이곳은 바로 선영(先塋)이자 우암 선생이 살라고 명한 곳이다.
공은 죽어서 이곳에 그대로 묻혔고 유 숙인(兪淑人)을 합장하였다. 숙인은 순수하고 단장하여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으니 공보다 14년 늦게 세상을 떠났다. 3남 3녀를 두었다. 화원(和源)은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문원(文源)과 진원(眞源)이 있다.
사인 이시성(李蓍聖), 김정택(金廷澤), 현감 어유성(魚有成)은 사위이다. 화원과 문원은 각각 태상(台相)과 규상(奎相) 1남을 두었다. 진원은 3남을 두었으니 기상(箕相) 그리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위 이시성의 아들은 광제(匡濟)와 보제(普濟)이다.
진원이 묘 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내게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나는 후생(後生)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니 어찌 공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듣건대 선생이 생전에 공을 충직하고 성실하며 순박하고 정직하다고 인정하였다.
아! 사람이 부형으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받는 것이 이미 어려운 일어거늘 하물며 선생과 같은 분에게 인정을 받았음에랴. 이것으로 공의 평생을 개괄할 수 있고 다시 개평(改評)할 것이 없으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새기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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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경력 송공 묘표 :
저자가 송무석(宋茂錫, 1652~1718)을 위해 쓴 묘표이다.
[주02] 갑인년 …… 바뀌자 :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의 일은 두 번째 예송(禮訟)으로 서인이 축출된 갑인환국을, 기사년( 己巳年, 1689, 숙종 15)의
일은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출되고 서인이 축출된 기사환국을, 갑술년(1694, 숙종 20)의 일은 인현왕후 민씨가 복
위되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을 각각 가리킨다.
[주03] 지물(志物)의 봉양 :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고, 좋은 의복이나 음식으로 어버이를 모시는 것을 뜻한다.
[주04] 정읍(井邑) 당시의 일 :
1689년(숙종 15) 6월 8일 송시열은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주05] 일찍 ……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 :
《시경》〈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
所生.]”라는 말이 나온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