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경북 인구 11만도 안되는 작은 시에서 수필 신춘문예를 공모했다.
전국에서 128명이 응모해 400편에 이른 작품중에서 안희옥의 마디가 뽑혔다.
영주하면 그저 부석사만 떠오르는데 이런 거룩한 수필을 신춘문예 공모로 전국
수필가들에게 힘을 주다니-. 지방신문들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으로 영주로 여행해 보니 풍기 인삼, 첨단 베아링산업의 선두,선비문화
이몽룡유적지등이 눈길을 끈다.
<수필> 신춘문예 작품- 마디
글 안희옥
하늘 향해 뻗은 대나무의 기상이 옹골지다.
미끈한 몸매에 둥근 테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초록 옷을 입은 병사들의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 이따금 간들바람이 푸른 대숲을 훑고 지나간다. 무성한 댓잎 사이로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
굵은 대나무가 길을 가로막는다.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안에 가득 찬다. 매끄러운 줄기 사이, 마디가 껄끄럽다. 볼록한 부분은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단단하고 힘이 있다. 대나무는 기후가 나쁘거나 수분이 부족할 때 성장을 멈추고 힘을 모은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이 마디다. 성장판을 닫고 힘을 비축한 뒤 기회가 되면 다시 커간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아들 귀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여동생은 그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자,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할머니는 터를 잘 팔아 대를 잇게 해 주었다며 동생을 추켜세웠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때문인지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나무가 한창 클 때는 한 시간 동안 자라는 속도가 삼십년간 자라는 소나무 속도와 맞먹는다고 한다. 생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줄기 끝에만 생장점이 있는데, 대나무는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다. 그러나 줄기의 벽을 이루는 조직은 엄청나게 빨리 늘어나는 반면 내부성장은 느려서 속이 텅 비게 된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한 청년과의 결혼을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지만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잘 살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걱정은 기우였다. 동생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제부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상류층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곳 저 곳 모임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와 옷차림에 자매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으니 친정 식구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대나무 마디는 멈춤을 뜻한다. 중간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자라면 더 쑥쑥 큰다. 대나무만의 특징이다. 중간에 마디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난히 더디다. 그러나 그 마디들이 없다면 가늘기만 한 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 잠시 정지해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멈춤이 없다면 진정한 성장도 없다는 교훈을 대나무에게서 얻게 된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동생네의 행복이 암초에 부딪혔다. 기다리던 둘째 조카의 탄생을 가족 모두가 기뻐한 것도 잠시, 의료진의 불찰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넘쳐나던 웃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동생의 인생에 굵은 마디 하나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제부의 사업이 IMF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곳곳에 빚을 남겼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길가로 나앉은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월세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연명해 나갔다. 생활의 여유가 없다 보니 부부간 갈등도 심해 연일 큰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이도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는 휴식을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성장하듯, 사람에게도 쉼이 있어야 강하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드럼통은 최초, 표면에 아무런 굴곡 없이 매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은 충격이나 굴릴 때 쉽게 찌그러졌다. 누군가 대나무 마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럼통 옆구리에 마디를 넣었더니 강도가 네 배나 강해졌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지옥 같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질 무렵,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예쁜 딸이었다. 아이는 동생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딸이 태어나고부터 신기하게도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집안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왔다.
그것도 잠시, 잘 자라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뇌종양이란 큰 병에 걸렸다. 청천벽력이었다. 하늘을 원망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강단 있고 패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던 동생을 단단하게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아이를 위해 대나무처럼 마음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임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자 아이의 병도 조금씩 나아져 갔다. 시원스레 하늘로 솟구친 대나무 숲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죽순이 돋아나고 성장할 때까지 그 음습한 땅 속에서 수년 간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속이 빈 채 커 나가는 대나무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고의 세월이다.
대나무는 허허실실이다. 속이 빈 것이 허라면 밖이 단단한 것이 실이다. 내강외유다. 속은 허술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강하다. 속을 비워 내지 않으면 단단한 마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가르쳐준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순탄하게 잘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시련이 닥치곤 한다. 시련은 곧 마디다. 넘어지면 실패가 되고 말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승화가 된다. 시련은 크고 강하게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해 반성해본다.
마디를 가만히 만져 본다. 매끄러운 몸통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믿음직스럽게 자리 잡은 마디 사이로 봄기운이 가득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환하게 웃는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선소감]
가끔씩 대나무 숲에 설 때가 있습니다. 우듬지 사이로 지나가는 청아한 바람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번잡한 일들도 거기에선 고요해짐을 얻습니다.
대나무 씨는 뿌린 후 5년 동안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캄캄한 땅 밑에서 부지런히 뿌리내리기 작업을 합니다. 그런 후 마침내 새싹을 땅 위로 밀어 올립니다.
글을 시작한 뒤, 오랫동안 미로 속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도 있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이 어둠 끝에 빛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끝자락에 한 줄기 빛처럼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직은 모자란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하면서도, 까마득하게 걸어놓았던 소망 하나가 드디어 내 앞에서 환히 불을 밝히는 순간입니다. 행여 부족한 실력으로 급하게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내심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자 잠시 눈이 부셨습니다. 눈가가 조금 젖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땅 위로 올라온 나를 바라보며.
설익은 글을 곱게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멋진 기회를 주신 영주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합평회 때마다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준 <윤슬문학회> 문우님들께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늘 곁에서 힘을 실어주는 가족들, 특히 사랑하는 두 아들 진섭, 민섭이를 비롯해 저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합천 출생/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2012)/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2012)/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금상 (2017)/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2018)/ 동화집 「호미곶 돌문어」 공저 (2014)
<발췌 후기>
동천(동천)이 차다. 어둠 사이로 부는 냉한 바람 한줄기가 서낭고개를 넘어 안긴다.
잔뼈가 굵은 고향마을에 이른다.
조부모 기제사로 찾은 고향은 제법 가로등도 군데군데 달리고 깜박이는 등잔불이 아닌 전깃불이 밝혀
격세지감을 이룬다. 시야는 가리지만 눈감도도 훤하다. 곳곳이 정겹다. 아니 바람마저 훈훈하게 느껴지는 겨울밤이다.
얼굴도 보지못한 조부모님 기제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조상의 뿌리 이전에 현재 있는 형제들 소식과 안부, 실제 만나는 일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백여호가 넘는 고향마을에서 가장 입김이 세다는 분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와
-윤창호님 음주법이후에도 동네 청년이 단속에 걸려 개고생을 한다는 얘기며
- 연유를 알수 없는 복말터 묘지가 점점 작아진다는 걱정과 마을회관의 이야기
-춘천-대구간을 오가는 조카의 요즘 풍속도와 5년간 푼돈을 모아 장가계를 다녀온 선량한
다섯내외의 여행 후기등 직접 얼굴을 보며 인생 사는 이야기들이 줄레줄레 식전제사에 올라 화제였다.
자정 무렵 아주 천천히 고향을 떴다. 예전같으면 사랑방에서 자고 갈텐데 ㅎ
아들은 제사만 지내고 음주단속한다고 이내 자리를 뜨고 , 두내외가 결혼해도 아이다 들어서지 않은
막내 조카가 제사가 끝나도 웃목에 붙어 고독을 나눈다.
고향, 추억,회고,토속성,낭만,애상,자연 사색,철학 등이야말로 수필의 서정적인 정신이 아닐까?
인간 내부에서 샘솟는 자연발생적인 발로야말로 시든 소설이든 모든 것의 기본인 서정성이다.
대나무와 실제 가족 여동생의 삶을 비교해서 형상화시킨 마디-영서야 대나무속성을 크게 모르지만
지난번 담양에 가서 돌아보니 소쇄소쇄하고 부는 소쇄원 바람소리며 실제 껴안아보며 친한 대나무는
진정 수필의 좋은 사냥터가 분명했다.
새벽밥 해준 형수와 십년전에 찍은 사진
소설의 메밀꽃필 무렵을 보라. 자연과 짐숭(나귀)과 인생(허생전)등은 현실보다 회상적인 비유로 자연순수함과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성의 순수함등을 얼마나 신비하게 교감시켜 소설로 탄생했지 않은가!
김유정동백꽃,황순원의 소나기 모두 시골 향토적인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버무려 서정성의 기본이 되니 모두
감동이다. 인간 삶의 느낌들-. 그리고 누차 읊어대는 정(情) 문화, 이것이야말로 개성, 생명의 자체이다.
실제적인 사실 +감정의 미학적 안목의 재구성 으로 창작이 되는 것이다.
부랴부랴 인터넷앞에 앉는다.
내깐에 이 신춘문예 릴레이를 보기위해 나훈아 콘서트에 밤중부터 줄을 선 나래비처럼 뱀처럼 줄이서 있는 강원수필회원들께 죄송스러워 급히 열어본다. 4명-. ㅋ
인간의 홍건한 체온이 서려있어야 수필이 된다.
인간의 희노애락-. 어제 작품도 50대에 뇌경색 아줌마의 한발짝이라 와락 관심이 끌지 않았던가!
어제 먹은 제사음식 유난히 맛있었다. 종가집 다운 풍만한 조카며느리의 손맛이 생전의 어머니, 형수에 이어
전해온 것이 틀림없다. 돼지 목살로만 구운 쌈, 생선찜, 물김치, 씀바귀나물, 막장에서 금방 빼낸 굵디굵은 고추등에 탕국은 정신없이 먹어대고 딩구르다가 자정이 넘어 온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사실을 미적 정서로 다듬어 올리면 수필이 될까?
어떤 전문가는 주관적인 사실을 승화되고 세련된 방관자적 정서로 삶의 체험을 천착해 철학성을 가미하면 수필이 탄생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세련된 방관자적인 정서로 만드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닌 공통의 느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주관을 객관으로 승화하는 절차가 진정 신변잡기에서 벗어난 것이리라.
부실한 아내의 망각으로 지금쯤 두대의 핸드폰이 미아가 되어 고향에서 마구 울어대겠지
한참을 나무란 간밤, 그래도 마음은 불타는 청춘이다. 엎어주던 형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누구시지요 하며
잔주름을 움직이는 형수때문에 웃음이 나온 간밤, 치매의 아픔보다 까르르 웃는 웃음이 터진 고향이다. (끝)
1/6,德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