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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4 - 숭정제 시절에 이자성의 난과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나라가 멸망하다!
가난한 농민이었던 주원장은 전염병과 영양 실조로 부모 형제가 굶어 죽은후에 홍건적에 들어가 두목
곽자흥의 사위가 되어 세력을 키운후진우량의 군대를 물리치고 1367년 장사성을 공격해 평강
을 함락했고 저장성 해안의 방국진도 제거한 후에 1368년 정월 응천부(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합니다.
“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으나 주원장은 내세울 장점이 없었다.” 사람들은 장사성
이나 진우량이 강남의 패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나... 주원장은 강남의 선비를 영입해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구호를 내걸고 원나라군대와 싸움을 피하면서 힘을 길렀습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한후 서달을 총사령관으로 20만 대군을 진격시켜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함락했고 1371년
에는 쓰촨성의 대하를, 1382년 1월 6일에 윈난성의 양왕을 쓰러뜨리고 1387년에 나하추를 정복해 요동을
차지하고 1388년 북쪽에 북원마저도 공격했으니 마침내 한족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입니다.
명나라 건국후 주원장은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사회경제 생산력을 회복하며 원나라가 남긴 불합리한 관행
들을 혁파, 부패 관료들을 벌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니 '홍무지치 (洪武之治)' 로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국력은 크게 성장했는데, 세금 및 노동력 징수와 방비를 위해 호적과
토지대장을 재편찬했고, 이갑제라는 향촌 제도를 설치해 백성들에게 효과적인 징세 및 노역을 부과합니다.
해외 오랑캐의 나라들 중, 중국에 우환이 될 국가가 있으면 토벌하지 않을수 없지만, 위협이 아니라면
자주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땅의 넓이는 장기적인 계책이 아니며, 백성의 노고는 역란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는데... 야만인들의 땅은 공급하기에 부족하고, 그 백성들은 명령에도
부족하며, 헛된 명성만 사모하고 나라에 해로움을 끼쳤으니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에 비웃음을 산다.
짐은 오랑캐 소국들로 산을 막고 바다를 건너, 그들을 한구석에 가두어 놓았다.
저 오랑캐들이 중국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짐은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서북의 호융은 세대에 걸친 중국의 환난이니,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나라의 요양성 평장 유익은 원나라를 배신하고 요동을 명나라에 귀부하니 명나라는 요동위를
창설해 관리했고, 1385년에는 몇 년 전에 고려군 이성계와 싸웠던 나하추가 명에 귀순
하면서 여진족들이 모두 명나라에 복속됐으니 영락제는 1409년 만주 북동부 일대를 관리
하기 위해 누르간도지휘사사를 세웠고, 1411년 산하에 184개의 위와 20여개의 소를 두었습니다.
명말 3대 의안이란 명나라 말기에 연달아 터진 3개의 의심스러운 사건으로, '명말삼안'
이라고도 부르니....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을 한데 부르는 말로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중국의 혼란을 극대화시켰으니 모두 제위 계승 분쟁이 원인으로
조정내 당파싸움이 한층 더 치열해졌고 명나라가 처참하게 몰락하는 씨앗을 제공합니다.
만력제가 48년간의 재위 끝에 사망하자 황태자 주상락이 태창제로 즉위했는데, 후금의 침략을 방어하던 요동 국경
병사들에게 100만냥의 은을 지급하고 명장 웅정필을 재기용하며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가 처해있던
곤경을 완화했으며 세금을 걷기위해 전국에 파견하던 광세사를 중지하고 동림당원들을 기용해 황권을 강화합니다.
한편 정귀비는 태창제에게 8명의 미인들을 후궁으로 바쳤는데, 태창제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는 바람에
병석에 누웠고 병필태감 최문승이 바친 약을 먹은 뒤 더욱 병세가 악화됐으며 홍려
사승 이가작이 신선의 술법으로 만든 붉은 단약을 먹고 다음날인 1620년 9월 1일 새벽 5시에 급사합니다.
100만에 불과한 여진족 이 어떻게 6천만에 달하는 중국을 정복해서 267년이나 다스렸는지 불가사의
한데.... 여진은 명에 형식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은 채,
1583년 건주좌위지휘사인 건주여진의 기오창가와 탁시가 명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목숨을 잃었고, 탁시의 아들이던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뼈깊은 원한을 품고선 전 여진족을 통일합니다.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절대 잊지 않았으니 1618년 칠대한을
반포하고 푸순을 공격해 점령하고 청하로 진격하자, 명나라는 정유재란때 명군 총사령관으로 5만 8천의
명군에 1만 1천5백 권율의 조선군을 합쳐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 도산성을 공격했던 경리 양호에게 진압을 명합니다.
1619년에 요동경략 양호가 대군을 이끌고 후금 군대를 공격했으나 되려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하고야 말았으니 명군은 전사자 4만 5천명,
2만 마리의 말과 노새를 잃고는 전력이 떨어진 명나라는 이제 공세에서 수세로 밀려납니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8기군 6만인데 비해 명군은 임진왜란 8년간 연인원 25만을 동원하는 바람에 재정은 파탄나고
국력이 피폐해져서 이제는 불과 8만 8천 밖에 동원하지 못하는지라... 조선군 강홍립 1만 3천의 지원으로
10만 정도의 군대를 중군은 심양 에 두고 4개 군을 편성해 1619년 4월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로 진격합니다.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하려고 했지만 적은 군대에 보병인지라 대실패이니.... 이에 후금의 누르하치는
기마대의 기동전으로 각개격파 전략을 세웠으니, 먼저 전공을 욕심내어 앞서서 진격해온 2만 5천
두송의 서로군 을 薩爾滸(사르후) 에서 격파하고 이어 북로군 마림의 2만을 상간하다 전투 에서 쳐부숩니다.
이여송의 아우 중로군 이여백은 놀라서 후퇴했으나 사정을 모르는 동로군 정유재란 서로군 대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을 공격했던 유정은 계속 진격해 선봉 1만이 오르카시 숲 에서 여진 암마일리군
3만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였, 고 뒤따르던 후군 1만도 연속적으로 기습당해서 패하니 아부달리 전투 입니다.
이때 조총부대 보병이 주력인 조선군은 후방에 있었으니 이는 자금이 부족해 출발이 늦은데다가
식량이 보급되지 못하니 굶주린채 행군 하느라 진군속도가 느렸기 때문인데...
명군과 김응하의 좌영이 앞장을 서고 중군과 우영이 뒤따르다가 여진군을 마주하자 후미의
중군과 우영은 언덕으로 후퇴했으나 좌영은 평지에서 여진군 기마대 를 맞이합니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여진군 이 조선군을 향해 진격해 김응하의 좌영이
기습당하니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 보면 5천에 달하는
조선군이 총 한방을 쏜후 재장전하는 중에 여진 기병이 진중으로 난입합니다.
여진 기병이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니 천보 뒤쪽 중영 병사들은 겁에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하는지라 좌영은 우군의 목전에서 괴멸 당합니다.
좌영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우영 병사들은 이동중에 역시 기습을 받아 흩어지니 좌우영 9천이
몰살당한후 포위된 중군은 장군들이 결사항전을 외쳐도 겁먹은 4천 병사들이
호응하지 않는지라 화약 상자를 모아 폭사 하려는 순간, 적군이 통역사를 찾으니 부원수
김경서가 나서서 출병을 변명한 후에 도원수 강홍립이 항복하니 富車(부차) 전투 입니다.
조총은 탄환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니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전투
에서 조총대를 3열로 편성해 1열 사격, 2열 총구 소제, 3열 총알과 화약 재장전 으로
연속 사격을 실시하여..... 일본 최정예 다케다군 기마대를 몰살 시키고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성룡이 신립장군에게 일본군 조총 대비책을 묻자 그는“쏜다고 다
맞는답니까?”퉁명스레 대꾸했는데... 조총 재장전 시간을 생각해 두만강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던 조선군 기마대가 돌격하면 1진은 피해를 입어도 2진이 돌파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17년전 오다 노부나가의 3단 전법으로 1열 발사후 총구소제, 2열 조준 사격, 3열
탄약 장전으로 이어지는 연속 사격을 실시했으니 조선군 기마대는 적 진지 까지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격파당하니, 전투의지를 상실해 겁에질린 조선군은 달아나 금강물에 몰살당했는데도 조선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조선군은 과거의 전투를 전혀 학습하지 않으니 연구하고 배우는데는 젬병이라?
하다못해 사서에는.... 적 기마대와 접전하면 들판이 아닌 산지나 계곡에 진지를 구축하고 뾰족
하게 깍은 말뚝을 세우며 장애물 도랑을 파야하고, 만부득이 평지에서 대전하면
말발굽을 찌르는 쇠붙이 장애물을 뿌리고 장창대를 준비해야 하며 3단 연속사격 해야 하거늘
당황해 한꺼번에 일제히 총을 쏘고 전원이 총구 소제와 재장전을 하는 혼란 중에 전멸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참패를 당한 명나라는 황망한 가운데 다핼스럽게도 명장 웅정필을
파견해 요동을 지켰으니 웅정필이 화포와 무기를 강화하고 요동
일대를 철통같이 수비하자 한동안 후금은 요동을 크게 침략하지 못합니다.
1620년 태창제가 급사하자 천계제 주유교가 16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지만 태창제가 황태자 시절
부터 총애하던 후궁 이선시가 건청궁을 장악하고 환관 위충현과 함께 천계제를 꼭두각시
삼고선 나라를 휘두르려 들었으니.... 이선시는 국사를 직접 처리할 의지를 보이며
수렴청정을 시도했는데, 신하들은 이선시가 건청궁에서 나가 인수전으로 이궁할 것을 요구해 쫒겨납니다.
천계제 주유교는 어린시절 어머니를 잃어서 자신을 키워준 유모 객씨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으니 객씨는 환관 위충현
과 한 패가 되어 나라를 본격적으로 말아먹어 버리는데.... 위충현은 가난한 비렁뱅이 출신으로 도박빚을
감당못하자 스스로 거세한뒤 환관으로 입궁한 인물로, 황제와 가까운 유모 객씨와 접근해서는 권력을 거머쥡니다.
천계제는 웅정필을 파면하고 원응태를 요동 책임자로 앉혔는데, 원응태는 관료로 유능했을지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부족했으니.... 웅정필이 요동에 틀어박혀 수비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후금을 공격하려
들었지만 그러나 1621년 심양이 함락되고 원응태가 목을 매 자살하자, 천계제는 다시 웅정필을 등용합니다.
1622년 광녕이 함락되자 손승종이 요동독사로 임명되어 요동을 틀어막은 덕에 다시 후금은 한동안 접근하지
못했지만 천계 5년 손승종이 해임되고 환관 고제가 요동으로 파견, 요서 방어선까지 모조리 포기하고
산해관 안쪽으로 후퇴한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리자... 원숭환이 이에 반발해 영원성을 더 엄중하게 지킵니다.
후금은 1625년 심양으로 천도했으며 1626년 누르하치 는 13만으로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인근에
도착해 6만 병력으로 2~3만명 원숭환의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명군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종기가 나서 몇 달 후에 죽으니 명나라는 한숨을 돌립니다.
1626년에 누르하치가 죽자 8남인 황태극이 태종이 되어 다음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인조의
조선을 굴복시키는데, 1627년(인조 5년) 2월 23일부터 4월 18일까지
(음력 : 1월 8일부터) 후금(청나라) 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으로 정묘호란이라고 부릅니다.
조선국왕은 정묘년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금국이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신의를 지켜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산천의 신명은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1616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이중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후금과의 외교 문서 교환을 끊어버렸는데.... 광해군은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군을
평안북도 철산군의 가도에 주류시켜 원조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인조는 “친명 배금” 을 표방했습니다.
천계제가 정치에 관심을 잃고 국사를 놓아버리니 환관 위충현은 세력을 모아 '엄당'을 조직했는데
1624년부터 조정을 장악하니 위충현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추종자들이 중앙과
지방을 전부 장악했으니 1627년 조카 위량경이 황제를 대신해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벌어지고 자신을 모시는 사당을 전국에 세우고 자기를 구천세라고 부르라고 명합니다.
천계 6년인 1626년 5월 30일 수도 베이징 남서쪽 공부(工部) 소속 왕공창의 화약고에 거대한 폭발사고가
일어나 2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니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황제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죄기조(罪己詔)를 반포하고 금 1만냥을 구호에 써야할 정도였는데 천계제는 같은 해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졌고, 1년 뒤 1627년 사망하니 뒤를 이은 천계제의 동생이 명나라 최후의 황제 숭정제 입니다.
숭정제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해 객씨 일가를 황궁 밖으로 쫓아내고 위충현마저 고향 펑양현으로 낙향시
켜버린 다음 금의위를 보내 체포하라 명하자 자살하니 그의 시체를 끌고와 효수했고 객씨 역시 완이국
에 붙들려와 몽둥이로 맞아죽었으며 위충현을 따르던 엄당 세력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는데
환관의 국정농단은 끝났으나 조정의 분쟁은 끝나지 않으니 염증을 느낀 숭정제는 다시 환관들을 재기용합니다.
숭정제 최대의 골칫거리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었는데.... 후금은 명장 원숭환에 번번히 가로막히자
아예 산해관을 우회해 만리장성을 넘어 바로 베이징을 공격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으니
1629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 군대가 베이징을 포위했고 원숭환이 군대를 끌고와 겨우 물리칩니다.
그러나 1630년 숭정제가 고질적인 의심병에다가 반간계가 더해진 탓에 원숭환을 죽여버리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니 자기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른 것으로.... 명 최후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구세주격인 원숭환이 황제로 부터 처형당하고난 이후 명나라는 청군에 패전을 거듭합니다.
청나라 아민이나 홍타이지는 조선과 모문룡 양측의 연대를 차단하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해 후환을 없앨 필요성이 있었는데, 슈르가치의 장남 아민(Amin) 과 홍 타이지의 갈등,
누르하치가 권력을 휘두른 반면 홍 타이지는 즉위초 4명의 대버일러의 대표자적 위상으로서 한이 되었습니다.
아민은 누르하치 사망후 희망하던 독립을 조선 정벌을 통해 추진하고자 했으니, 조선 정벌을 건의했는데 명군이
해도로 도주하자 조선을 치자고 주장했으니 아민은 정묘화약 이후 한양으로 진입해 독립을 꾀했으나
천연두의 유행과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을 약탈하고 평양에서 또다른 맹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그칩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 을 종용하니 조선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던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달리 조선에 대해 강경한 실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광해군 때의 방비와 외교정책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후금도 대기근에 시달려 조선과 전쟁을 벌이기에
무리였으나 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이 붕괴되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그 과정에서 길잡이들 까지 확보됨으로서 홍타이지는 전쟁을 실행에 옮길 여건이 된 것입니다.
대청전쟁을 책임진 명나라 병부상서 원숭환과 홍타이지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26년 휴전을
맺었으니, 원숭환은 방어태세 정비를 위해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홍타이지는 보위를 이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내부정비가 시급했는데 홍타이지
초반의 지배는 누르하치 처럼 절대권을 쥔게 아니라 4대 버일러들과 동업자 관계였습니다.
그리하여 원숭환은 합의금 명목으로 후금에 거금의 공물을 보내고, 홍타이지는 받고는 산해관 방면의 공세를
유보하는 대신 조선을 칠 여력이 생겼으며 원숭환도 이틈에 만리장성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이는 원숭환이 조선이라는 살을 내주고, 만리장성 방어선을 정비할 시간이라는 뼈를 취한 것입니다.
1627년 2월 23일(인조 5년 1월 8일), 초봄에 아민이 이끄는 후금군 3만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
를 갚는다' 는 명분을 걸고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심양을
출발해 조선을 침공했는데, 병력이 3만에 불과한 이유는 명나라 전선에 대부분을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 의주성을, 3월 2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으니.....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3만에 불과한 소규모의 후금군에게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군에게 장악된 것 입니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에서 싸웠으나, 소수의 병력에 불과한
후금군에게 패하면서 본진이 개성 까지 후퇴하니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후금을 향한 공세와 더불어 정봉수(鄭鳳壽)라는 무관이 의병을 모아
평안북도 철산군의 용골산성에서 후금군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고 평안북도
용천군의 김우, 이립(李立)도 의병을 모아 소위포에서 전투를 벌여 후금군에게 타격을 줍니다.
후금은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사신을 보내 조선에게 강화를 요청했고, 백성들에게도 후금군은 강화를 원하는데
너희 조정이 우리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선전하면서 조선 조정을 압박했는데, 조선 조정은
후금측의 강화 요청을 무시하다가 후금군이 고속으로 전진하여 황해도 평산까지 도달하자 강화협상에 응합니다.
겨우 10여일만에 후금군은 황해도까지 이르렀으니, 일단 후금은 2월 평산에서 멈추고 강화도에 있는 조선
조정과 사신이 왕래하였으며, 3월 25일(음력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 를 쓰지 말것을 요구했으며 후금군은 사신 유해와 강홍립 등을 보내 사정을 설명합니다.
후금 사신단의 일원으로 온 강홍립은 조정에 후금의 내부사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장기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 조정측에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인조와
조선 조정은 주전론을 펴는 언관들의 반론을 물리치고 후금과의 화의를 모색합니다.
여기에 후금 사신 유해는 명나라 항장출신으로, 협상이 결렬 위기를 맞았을 때, 제3자적 입장에서 조선측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개인서신을 인조에 보내 위기에 빠진 협상을 구해냈으며 이후 조선
이 은, 면 등으로 구성된 배상금을 낼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합니다.
협상이 이루어 졌을때, 조선에서 보낸 국서에 명나라 연호인 천계가 있었으니 총사령관 아이신기오로 아민이
발끈했고, 그의 뜻을 받든 유해가 조선에 요구한 기록이 여럿 있으니, 특히 유해는 "발끈 성을 냈다
(勃然生怒)" 라 표현했을 정도로 화를 냈는데, 조선은 답서를 보낼 때 연호를 생략하는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이에 양측은 화약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는 조약을 맺고 4월 18일(음력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합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화의에 따른 공물을 제공하는 한편, 종실인 원창군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자 후금군이 철수했는데 볼모로 후금측에 갔던 원창군은 몇년후 조선측에 무사히 귀환합니다.
정묘호란의 원인중 하나는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군 때문으로 모문룡은 가도에 진 (동강진)을
설치하고 청나라에 넘어간 요동의 해안지방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청나라는 이를
눈엣가시 처럼 여겼고 청나라의 조선 침략 이유의 하나도 이들 때문이었으니, 모문룡은 만명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요동 해안이나 배로 요하를 거슬러 올라가 만주의 내륙까지 공격했습니다.
수전에 약한 청나라군을 괴롭히던 모문룡군은 청나라의 대군이 몰려오자 가도로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후 조선과 청나라가 화의를 맺고 청나라군이 철수할 때, 청나라군이 석방한 조선인
포로들을 공격해 참수하고 "오랑캐의 대군에게 승리했다"며 명나라 조정에 허위보고 하기도 했습니다.
후금은 파죽지세로 10여일만에 황해도까지 진격했으나, 원래 장기전으로 끌 생각은 없었고 조선과의 관계가
정립되고 내부정비가 완료되면 다시 명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했기에 불만족스러워도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으니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해는 항장 출신이지만, 청나라에 충성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조선 사정을 상당히 봐주면서 협상했는데,
명나라에 귀순하여 모문룡 아래서 후금군과의 전투에 전사하는데, 유해가 간첩 수준으로 조선의 편의를
봐주면서 협상했기 때문에, 후금은 화의에 매우 불만을 품었고, 이런 불만은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됩니다.
후금은 모문룡을 견제하기 위해 압록강 이남에 10월까지 군대 일부를 주둔시켰으니 조선 영토에서
모든 부대를 철군하기로 한 화약 내용을 어긴 것이지만 후금군 주력은 그 와중에 내몽골을
원정햇는데, 사실 후금의 수도인 심양은 한반도에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까운 곳 입니다.
때문에 후금군 주력이 내몽골 유목 부족들을 정복하러 가면, 조선이나 모문룡이 빈집털이를 할수 있는 곳이지만
압록강 부근에 주둔한 후금군의 견제 때문에 조선과 모문룡은 움직일수 없었으니 결국 후금은
완벽히 내몽골을 석권했고 그렇게 불려진 만주족의 세력이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나타납니다.
1629년에 홍타이지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몽골로 우회해 베이징을 공략하니 원숭환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
으로 돌아와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숭정제의 고질적인 의심병과 홍타이지의 반간계 때문에 억울하게
능지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었으니 손자병법에서 말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인데... 명나라에 망조가 든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몽골을 공격해 링단 칸에게서 원나라의 옥새를 뺏어온후, 1636년 성경에서 칭제한
뒤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었으니.... 청나라는 1629년부터 1643년까지 6차례
원정을 벌여 직예성, 산동성 등 화북을 약탈하고 요녕성도 함락 직전으로 몰아갑니다.
청나라군은 1640년 진저우시와 1641년 송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는 영원성을 제외한 랴오둥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니 명군은 패퇴해 최후의 관문인 산해관에 틀어박힙니다.
전비가 부족한 명이 세금을 폭징하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1627년 섬서성 징성현에서 첫 민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 왕가윤 군대가 섬서- 산서에서 전투를 벌였고, 휘하 왕자용, 고영상,
이자성, 장헌충 등이 농민반란을 이어갔으니... 1636년에는 이자성이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합니다.
1636년 2월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칭제후 국호를 후금에서 청이라 고치고 사절단을 조선에 보내 홍타이지
의 존호례 즉 칭제건원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였고
삼사와 성균관에서는 사신의 참소를 요구하자 3월 초 도주하는 사절단은 인조의 선전교서를 탈취합니다.
청군은 만리장성을 뚫고 직예, 산동 등 화북 일대를 무려 5차례나 침략했으니, 직예와 산동, 요녕은
이미 기근과 전염병, 전란으로 황폐해져 청나라의 침략에 버틸 재간이 없었으니 결국 1642년
진저우가 함락되어 명군은 산해관까지 밀려났고, 이 이후부터는 청나라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후금의 태종은 이후 조선이 군신의 예를 다하지 않자... 1637년 1월 몽고군 8기를 포함해 10만 대군으로
병자호란 조선을 정벌하지만,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다음해 죽으니 조선의 군신들은 환호작약 합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8년간 25만을 파병해 천문학적 전비로 거덜난 조정이 세금을 폭징하니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을 하는 중에 여진족이 흥기했으며 여진족 토벌에 집중하자 농민
반란이 들불 처럼 일어나니.... 이자성은 군인이었지만 식량 보급이 끊기자 반란군에
합류하지만 토벌당해 죽게 되었을때 1636년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살아납니다.
1639년 이자성은 명군이 장헌충을 토벌하는새 어부지리로 하남성에 진출해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 인기를 얻어 1641년 뤄양을 점령해 주상순을 죽인 뒤 11월 시안까지
진출했는데, 이자성이 관중에서 총독 손전정의 군대를 궤멸시켜 버렸고 남쪽에서는
후난성에서 발호한 장헌충은 쓰촨성 까지 점령한뒤에 '대서국' 을 건국해 황제를 자칭합니다.
1642년 낙양에 이어 개봉 을 함락하고 틈왕에 오른후 1644년 시안(장안)을 함락한후1644년 1월 이자성은 시안
(장안) 에서 '대순' 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하고는 3월 다퉁시, 장자커우시, 거용관을 장악하고.... 17일에는
베이징에까지 다다랐으니 공성 끝에 3월 18일 이자성군이 베이징 외성을 점령했고 오삼계 5만 대군 도착
전인 1644년 4월 25일, 숭정제가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276년 만에 멸망합니다.
이자성군이 이렇게나 쉽게 베이징을 함락한 것은 명군이 청나라군의 침입에 대비해 병력을
산해관에 집중 했기 때문인데... 명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들어 농민반란과 몽고족의
침입으로 기울던 1592년 제 분수를 알고 임진왜란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대군을
주둔만 시키고 여진족을 통제 했더라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베이징을 차지한 이자성은 명나라 관리들을 학살하고 수도를 약탈하며 민심을 잃어버렸으며,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오삼계 부친을 죽이고 첩 진원원을 차지하자 오삼계는
이자성군에게 항복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청군에 항복후 군대를 돌려 이자성군과 대전하게 됩니다.
이렇듯 산해관에 주둔한 오삼계에 대응하는데 실패하니, 오삼계는 천군에게 산해관의 문을 여니 어린 순치제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던 도르곤이 산해관으로 입성하고는 청군 기마대는 이자성군의 배후를 쳐서
격파하고 베이징에 입성해 중국을 차지했으며 이자성 - 장헌충 반란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해 멸망합니다.
청군은 이자성군과 남경에 세워진 남명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도가 지나쳐 "목을 자를래 머리카락을
자를래?" 라며 "변발 호복" 을 강요하니 중국인들의 격력한 반발을 초래해
수백만을 살육하는 혼란을 거쳐 평정되는데.... 노신은 "유맹의 변천" 에서 "협의
기질" 이 있는 과감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중국인들이 오랑캐 앞에 굴종으로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중국학계는 정치적 이유로 명나라가 티베트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하는데... 명나라는 홍무 2년(1369년) 에
처음 토번에 조서를 보냈고, 파그모드루파 왕조의 승속을 책봉하여 벼슬을 하사했으며 1370년
서달이 정서 전투에서 코케테무르를 격파한 뒤, 타감행도지휘사사(朵甘行都指揮使司) 를,
1373년에는 오사장행도지휘사사(烏思藏行都指揮使司)를 설치했지만 조공 책봉 관계에 그쳤다고 봅니다.
조선은 대표적인 조공국이었으니 고려 시절인 1370년 명 태조가 금인과 고문을 보내고 공민왕을 국왕으로 인정한
것으로 외교 관계를 시작했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으나 홍무제는 이성계를 국왕으로 책봉도
해주지 않았고 표전을 문제삼아 2차례나 조선을 협박하니 조선에서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검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종을 1398년에 책봉했고, 1401년 태종도 책봉하며 관계가 좋아졌으며 1403년 영락제가
즉위하며 안정적으로 접어들었으니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다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자 만력제가 원군을 보내 구원하기도 했습니다.
홍무제 시절부터 왜구 문제는 명나라의 골치를 썩힌 문제였으니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로 갈라져 왜구
들을 통제할 여력이 없었으니 홍무제는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가네요시 친왕에 사람을 보내
화친하려 하였으나 제 코가 석자였던 일본 조정에 거부당했고 영락제 대에야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감합무역을 하는 등 제대로 된 교류가 시작됩니다.
명목상 막부가 무역을 관장했으나 실제로는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갈라먹는 형태였는데,
명나라는 감합무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했지만 대신 무역을 통해 해안 안정을
꾀했는데, 가정제 때 명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며 감합무역을 유지하기 어려워져 영파의
난이 터지며 중단되니...... 다시 일본 해적들이 들끓었고, 융경제 시절에야 사무역이 재개됩니다.
북쪽으로 쫒겨난 원나라는 북원을 세워 명나라를 어지럽혔으나, 곧 몰락하여 타타르,
오이라트 등의 민족으로 분화되어 '북로' 라고 불렸는데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 9진을 세우고 위소제와 만리장성을 이용해 방비를 탄탄히 했습니다.
그러나 정통제 때 오이라트가 남하해 토목의 변을 일으켰고 성화제 때는 허타오가 침략당했으며 가정제 시기 몽골
이 8일 동안 베이징 교외를 불태우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는데.... 그러다가 1571년 융경제 때 황제가 장거정의
반대를 꺾고 알탄 칸을 순의왕으로 봉하고 무역을 허가해주니 수십년간 명나라와 몽골 국경은 평화를 유지합니다.
명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으니 영락제는 베트남을 중국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햇지만 극심한
반발로 1427년에 포기하고 후 레 왕조가 들어섰지만, 명나라는 여전히 후 레 왕조의 국왕들을 책봉했고
안남국왕, 안남도통사 등의 칭호를 연달아 내렸으며 류큐 왕국, 시암, 참파, 자바 등이 차례로 조공을 바칩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수많은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말린디
까지 항해했으니 수많은 사신들이 정화 함대의 배를 타고 명나라를 방문했는데......
영락 17년 5번째 항해 때 17개 국가의 사절들이 정화와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와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유럽과는 무역을 할뿐 본격적인 관계를 트지 않았지만, 1517년 정덕제 때 포르투갈인들이 함선을 이끌고
광저우에 찾아왔으나 명나라 관리들이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고 4년 뒤인 152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포르투갈과 충돌해 둔문해전, 타마오 해전에서 명나라가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끊임없이 무역을 요구했고, 1553년에는 마카오에 화물을 건조시켜야 한다는 핑계로
상륙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거점화하려 시도했는데, 딱히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에
명나라는 눈감아주었으며 한편 네덜란드는 1601년 마카오를 찾아와 통상을 요구했고
1604년 푸젠성 펑후현을 5개월간 무력 점거하며 시위까지 벌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방당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