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남장사 혼해 선사
여인 품속서도 어김없었던 진흙 속 연꽃
6·25 전쟁 중이었다. 대찰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경남 함양읍의 조그만 사찰엔 일흔이 넘은 노승이 피난 와 있었다.
이 절엔 전라도에서 피난 온 20대 여인이
공양주(부엌살림을 맡은 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갑부의 딸로 해방 전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미모의 여인이었다.
좌익 엘리트로 동경제대를 나와 소학교 교감을 하던
그의 남편이 전쟁 중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시어머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숨어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노승은 법회 때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임을 이실직고했다.
일흔 넘긴 청정 독신승, 피신 온 여인과 마음 맞아
마을 내려와 2남1녀 두고도 예불· 좌선 당당한 정진
그 노승이 바로 금강산 장안사의 대강백(강사)이자
해방 전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훗날 우리나라 선의 본가가 된
해인총림의 초석을 놓은 혼해 선사였다.
청정 독신승이 드물던 시대에 청정하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고승이
남편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했으니
“망령 난 중”으로 손가락질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노승은 사찰에서 나와 함양읍에서 그 여인과 살면서도
해인사 조실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규율이 엄한 대찰에 머물다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속가에 나오면
곡차(술)를 들고, 곰방대에 담배를 무는 게 예삿일이었지만,
혼해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인과 2남1녀의 자식을 두고도 그는 새벽부터 예불을 하고,
경을 읽고, 좌선을 했다. 함양에서 그를 시봉한
김명호 거사(86)와 해인사 한주 송월 스님(80) 등이
그를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혼해는 이념다툼과 전쟁의 와중에 기구한 운명이 된 이 여인이,
사형당하거나 평생 옥살이로 삶을 마감할 옛 남편의 고난에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쌀 30가마를 들여
그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혼해의 노력으로 여인의 남편이 마침내 석방되자
혼해는 그 여인을 옛 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나 사상범 일제 재검거령이 내려져
남편은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갔고, 여인은 다시 함양에 왔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혼해는 16살에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
금강산에서 경전을 본 뒤 경북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내원암 등의 선방에서 정진한 선객이었다.
혼해는 젊은 시절부터 김천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시장 통의 번잡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때 혼해는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화두심을 놓지 않아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물에서 한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오고가도 추워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혼해의 파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를 아는 대찰에선
그를 다시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그가 상주 남장사에 머물 때 윗반에선 태백산 각화사 서암의
전 선원장 고우 스님이, 아랫반에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장 대원 스님과
구미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 등이 배웠다.
당대의 대강백이던 고봉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고우는 어느 날 혼해를 보고 짤따란 키에도 뭔지 모르게 당당하던
모습에 이끌려 야반도주해 남장사로 갔다.
고우가 방청소와 빨래까지 수발을 들며 가까이 지켜본
혼해는 오랜 세속 생활을 한 뒤였지만
절집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승려들보다 더 어김없는 승려였다.
특히 그의 강설은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다른 강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금강경〉을 배울 때 고우가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에서 걸식을 하시고,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면, “이 행동만으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마쳤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혼해는 끊임없는 물음으로 학인의 의문을 내면으로 돌렸다.
강사보다는 선사적 면모였다. 대원 스님도 그 시절 좌선을 하던 중
급작스런 혼해의 물음에 “하늘땅이 무너지는” 체험을 했음을 밝혔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속가에 처자식까지 둬
손가락질 받는 처지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노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우는 “그런데도 그가 처자식을 뒀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해
그분을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며
“지금 같았으면 그런 분별심은 놓고 그분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흙 속의 연꽃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혼해의 강설이 맴돌던 상주 남장사 일주문 밖 노음산을 지나
속세인 상주 시내로 접어드나 노음산의 그 하늘 그대로 아닌가.
2005. 12. 01.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