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산수정 산악회*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9) 전남 화순지역 문화유산 답사
김 한종 추천 0 조회 254 13.05.20 18:2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2012.04.28~

 

 

  

    우리문화유산답사 (3)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를 중심으로)

 

                                                      . 사진:     한 종

 

 

                                          (사진: 연천군 구석기 시대 주먹 도끼)

 

 

 

 

(9)전남 화순지역 문화유산 답사

 

전남 중앙에 자리잡은 화순지역은 순천, 고흥, 장흥, 보성, 나주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곳에는 벽송리, 도암면 운월리 등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군이 600여기에 이른다.

불교문화재는 국보 제 57호인 쌍봉사 철감 선사탑(雙峯寺 澈鑑 禪師塔), 보물 제 170호인 쌍봉사 철감 선사탑비와 사적 제 312호로 지정된 화순 운주사지 일원(和順 雲住寺 址 一圓)과 보물 제 796호인 운주사 9층 석탑, 보물 제 797호인 운주사 석조불감(雲住寺 石造佛龕), 보물 제 798호인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雲住寺 圓形 多層石塔)  석탑 12기와 석불 70여기를 여기에서 탐사하기로 한다.

  이 일대에는 유교문화재로도 화순읍의 화순 향교와 화순향교 대성전 (전남 유형문화재 제 63), 능주면에 능주향교(유형문화재 제 124), 연월리에 동복향교(유형문화재 제 125), 능주면 남정리에 전남 기념물 제 41호로 지정된 정암 조 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등이 있고 이외에도 여러가지 기념물이 산재해 있다.

여기서는 우선 운주사를 중심으로한 신비한 석탑과 석불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한다.

 

 

 

 

(1)운주사(사적 제 312): 1985.4.15 지정.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보리

 

운주사란 구름이 머무는 절이란 뜻으로 화순읍에서 서남쪽에 자리잡고, 천태산을 중심으로 보면 동으로 개천사가 있고 서로 운주사가 있다.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절터는 천불산 낮은 분지에 고려시대의 절터로 약 15 633평에 넓다란 터전이다. 1984년 최초의 발굴조사로 고려초의 청자 조각 2, 청자접시 조각 20여편, 금동 여래 입상이 출토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번영했던 사찰로 15세기 후반에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때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고려 중기의 삼감청자 편린도 100여편이 출토되었다.

운주사란 구름이 머무는곳이나 또한 운주사(運舟寺)로도 불리어 배를 움직인다는 뜻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도선이 천불 철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마지막으로 와불(臥佛)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지친 동자승이 새벽닭이 울었다고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운주사 일원에는 현재 돌부처 70여구와 석탑 18기가 남아있다. 조선조 초기 까지 만해도 천여구의 불상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처들에 흩어져 있는 70구의 돌부처들은 수십에서 10m이상의 거대한 돌부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생김새에 균형이 잡히지 않은 부처들은 고려시대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석탑들도 모양과 무늬의 표현이 다양하며 3~9층까지 층수도 다양하다. 모양도 둥근 원형탑을 비롯해 다양하고 표면에도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누운부처인 와불이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1592 (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훼손되어 내려오다가 1918년에 와서야 박 윤동, 김 여수 등 16여명의 시주로 중건, 건물로는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도 석불 213개와 석탑 30여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 석불 70기가 남아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에 의하면 1000여개의 석불과 석탑이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문화재로는 연화탑, 굴미륵 석불, 9층석탑, 석조불감, 원형 다층석탑, 부부와불이 있다. 특히 와불은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또다른 설은 국토의 지형을 배로 생각한 도선국사가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산이 적어 배가 기울어질 것을 우려하여, 1000불상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는 설이다.

 

 

 

 

 

a)운주사 9층 석탑: 보물 제 796

 

운주사의 일주문을 들어서자 사적지 제 312호에서 만나는 석탑으로 높이는 10.7m이다. 거대한 암반위에 건립되어 있고, 탑신부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하게 조각되어 장엄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받으며, 옥개석이 균형이 잡혀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세련미를 볼 수가 있다. 넓은 자연석을 놓아 아래층의 지대석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삼층 기단 받침을 다시 3단으로 새기고 그 위로 상층 기단겸 탑신을 올려 쌓아 9층으로 이어 졌다. 2층부 터 각층 탑신의 사면에는 능형(菱形)을 양각하여 십자형의 꽃무늬를 조각하고 옥개석 밑면에도 사선 문양을 양각하였다.

 상륜부는 옥개형 석재를 올려 놓았으나 보주는 없다.

운주사는 풍수지리상으로 배의 형국이라 하고 이 9층 석탑은 돛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해 진다.

 

 

 

b)석조불감(石造 佛龕): 보물 제 797

석조불감은 원형 다층석탑 남쪽 5 m 지점에 있고 그 앞으로 탑이 한기 놓여 있어 야외 불상의 주존불 역할을 하고 있다.

 불감은 팔작형의 지붕아래 있으며, 용마루, 치매가 모각되어 목조건축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감실 내부는 남북으로 통하고 하나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둘로 나누어 불상 2구를 안치하여 놓았다. 전면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고 좌우는 벽이고 중앙으로는 열려 있다.

남향으로 있는 불상은 결가부좌하고 오른손은 배에 얹어 있고, 도식적인 평행선으로 옷주름을 표현 하였다.

북향으로 앉아 있는 불상도 같으나 옷속에 감춘 두손을 가슴에 ?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형태이다. 이 둘의 좌상은 단순하고 경직된 불상 양식으로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석조 불감 안에 등을 맞덴 쌍배 불상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양 측면은 하나의 판석을 세워 놓았고 전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좌우는 벽이고 중앙으로는 열려 있다. 중앙 밑부분에는 여닫이 문의 구멍이 상단 좌우에 있다. 이곳에 문이 있었고 지붕위로는 용마루가 놓여져 있다.

불감의 평면은 방형으로 평평한 기단석위에 5개의 판석으로 맞춘 단상에 갑석이 있고 각면에 13개의 연잎이 앙련으로 음각되어 있다.

돌로 전각을 지어서 그속에 부처를 모시었고, 이는 노천법당의 중심지이다.

 

 

c)원형 다층석탑(일명 연화탑): 보물 제 798

 

탑의 건축이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원형의 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이 2단의 둥근 바닥석에 높게 10각의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새긴 돌을 쌓았다. 탑신과 옥개석에 이르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각층마다 몸돌 측면이 2줄로 선이 그려져 있다.

현재는 6층으로 남아 있으나 크기로 보아 위로 더 있었단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의 맨 윗돌이 평평하고 옆면이 둥굴고,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평평하고 윗면은 둥글어 상하의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d)와형 석조 여래불(臥形 石造 如來佛):전남 유형 문화재 제 273

 

운주사 계곡의 서편산 정상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누워있는 석불 2구를 와불로 부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와불이란 부처님의 열반상을 위미하는 것으로 모로 누워있는 모습이 정상으로 동남아 미얀마나,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래불이다.

좌상의 대불은 어깨의 폭에 비해 무릅의 폭이 너무커 인체의 균형을 잃고 있다. 옷주름은 수직선과 사선으로 처리되어 단순하게 보인다. 머리가 다리보다 더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이는 바위 아래쪽이 좁기 때문에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던 것으로 바위를 잘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좌상 옆으로는 조그만 바위가 떨어져 있는데 그것은 좌상의 윗머리 부분으로 생각된다. 두 불상을 자세히 보면 구별할수 있다. 그리고 와불로 가다보면 혼자서 외로히 서있는 불상이 있는데 이는 시위불(侍衛佛)로 와불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와불은 각각 12.7m 10.3m로 우리나라의 와불로는 최대의 석불이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미륵 세계가 도래하고, 미륵 부처님이 이땅에 와 중생을 구원한다는 것이며 이땅의 모든 불평등과 부조화가 사라진다.는 것이 미륵 신앙이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 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세우고, 이 와불을 마지막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새벽 닭이 울어서 중단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e)운주사 7층 석탑: 전남 유형 문화재 제 278

 

석조불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탑은 다른 석탑의 석괴형의 큰 방향의 지대석을 설치 한것과는 달리 아주 낮은 지대석 위에 탑신부를 구성 하였다.

커다란 네모의 지대석 상면에 높이 5 1 단 괴임을 놓고, 그 위로 탑신을 올렸다.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를 이루고 있는 내림마루가 예리하지 않고 둥굴게 이루어진 것은 백제시대 석탑에서 보는 기법으로 보인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선 높이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높이는 7.5m이다.

 

 

f)운주사 발형(鉢形) 다층석탑: 전남 유형 문화재 제 282.

 

현재 대웅전 뒷편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으로 탑의 상식을 초월한 특이한 탑이다.

1층과 3층의 부재는 주판알같이 둥글고, 2 층과 4층은 중심부에 1면을 만든 주판알 같은 모습이다.

현재는 석괴가 4석이나 고적도보에 기록에 의하면 7석의 괴석이 었지만 유실되어 지금처럼 남아있다.

하부로 부 터 방형과 원형, 원구형이 중첩된 평면이어서 조화가 이루어 졌다. 이곳 운주사 경내에서는 아주 색다른 형태의 석탑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특이한 석탑으로 높이가 4.15m 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g)마애여래 좌상(磨崖如來 坐像):전남 유형 문화재 제 275

 

마애불은 현재의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40 m 떨어져 있는 거대한 벼랑 바위에 새겨져 있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고 희미한 눈썹과 길다란 코는 양각이며, 귀 바퀴는 음각으로 조각되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음각선의 옷주름과 오른 소매의 사선의 옷주름이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좌대는 8개의 연꽃무늬가 복련으로 음각되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의 구분이 없이 무릅위쪽 까지만 음각선문으로 새겨졌다. 고려 시대의 제작된 것으로 운주사 석불가운데 유일한 마애불이며 공배와 조대를 포함한 높이가 5.16m로 큰 규모이다.

 

 

 

 

h)칠성바위

 

운주사에서 가장 특이한 와불과 함께 많은 사람이 찾는곳이 있으니 바로 칠성 바위다. 왼쪽 산등성이의 호떡모양의 7개의 바위가 흩어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북두칠성과 같은 배치를 하고 있다. 즉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내려다보는 식의 배치다. 칠성바위는 북두칠성과 비슷하게 배치된것으로 이런 사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찾을 수있다. 북두칠상 중에서 5번째 별이 가장밝게 빛나는데 이 칠성바위에서도 5번째 바위가 가장 크다. 밤하늘의 별에서 북두칠성의 6~7번의 별의 선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북극성을 찾게 된다. 이곳의 칠성바위에서도 6,7번 별을 이어가면서 따라가면 와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북극성의 별자리에 해당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도교가 융성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교가 칠성 신앙을 수용했다는 것으로 보여 당대의 천문관측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로 볼 수 있다.

1999 4 K.B.S 방송이 역사스페셜 프로에서 방연된 후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 운주사의 탑과 불상의 위치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표현 했다는 것으로, 그 후 운주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방문객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2) 기 대승(奇大升)과 월봉 서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9

 

기 대승은 조선 중기의 대 성리학자로 호는 고봉(高峯)으로 전남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 부친 밑에서 학문을 배워 11살에 서당에서 김 집(金 緝)문하에서 배웠다. 명종 4(1549) 생원, 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또 명종 13년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봉교를 역임하였다.  1563년에 이 량(李 樑)의 탄핵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 량이 실각하여 다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돌아왔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 퇴계선생과 함께 경연을 주도 하였고 조 광조와 이 언적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사림 정치에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황과 기 대승 사이에 인간 본성에 대한 토론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조선 성리학을 한단게 끌어 올리고 사상체계를 구축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봉(1527~1572)이 살았던 당시는 조선의 부흥기였다. 당시에 이 황과, 김 인후(金 仁厚), 송 순(宋順) 등의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활약으로 최고의 시절이었다.

그의 업적으로는 31살에 쓴 주자문록으로 주자의 성리학 원론은 700권의 저서에 담겨있는데 반헤 그는 그 핵심을 120권에 담았다.

그러나 고봉의 학문적 위업은 46세에 세상을 떠난터라 그의 제자가 없어 퇴계나 율곡이 후학들의 연구로 더욱 풍성해진 반면에 그의 사상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안타까운 현실이다.

 고 봉은 마지막 벼슬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니 오늘의 문교장관 자리에 해당 된다. 광산구 임곡동 일대에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지역으로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그의 생가는 너브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지만, 그의 묘원과 수양터인 귀전암, 그의 아들이 그가 죽은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 머물렀다는 칠송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그의 월봉서원이 서 있다.

그의 사 후 효종 5(1654)에 유림들의 상소로 임금이 편액을 내린 바 있으나 그후 소실되었고 구 한말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 현재의 자리에 1981년에 와서야 월봉서원을 복원하였다.

마을 입구에는 고봉 선생의 6대 손인 기 언복이 300여년의 역사와 학풍을 이어오면서 고봉 학슬원이 자리잡고 있는 성리학의 본산지가 되고 있다.

사단(四端)이란 인간의 본성 중에서 이성적 본성으로 1. 측은지심<불쌍함을 암>, 2.수오지심<부끄러움을  >, 3. 겸양지심<양보하는 마음>, 4.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말한다.

칠정(七情)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진 감성적 본성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희,,,,,,(, ,, , ,,)을 말한다.

운주사 답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함께 본 곳으로 여기에 함께 올린다.

 

 

                                           (사진: 월봉서원과 그의 묘소)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3.05.20 18:27

    첫댓글 원문보기를 크릭 하시면 1~10 (230P)을 함께 보실수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 13.05.21 01:16

    존경하는 선배님이 제일부러운건
    풍요로운시간을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을여행하는것........

    전 오랜동안 시간이 자유스럽지못해 여행을못하는것이
    제가슴에 항상남아있습니다,

    저역시 제대하면 존경하는 선배님같이 마음것 여행을
    다닐려고 단단히 마음먹고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경제적인것 또한 여행정보 모든걸 준비해야겠습니다.

    어떤책을보니까.

    선배님에게
    누군가 글을남긴것 같은 글이 떠오르내요.
    항상조용하시고 산에서도 철저하게 음식절제하는모습과
    어울리는......

    -" 존경받고 건강하려면" -
    말을적게하고 적게먹어라.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작성자 13.05.24 08:41

    감사합니다.
    아롱이님이 아름다운 글을 남기셨군요
    인생을 긴여행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 같이요
    사람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무늬가 다르니까?
    좋은 계획을 세우셔서 공직을 마치시고 제 2의 인생, 제3의 삶을 ....
    세상은 넓고, 가보아야 할곳이 너무 많은것 같아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