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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상)나라
상나라 시조인 契(설)의 모친은 簡狄(간적)이다. 有娀氏(유융씨)부족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다. 당초 간적 등 세 명이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린 것을 보게 되었다.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해 낳은 자식이 바로 설이다.
설은 堯(요)임금과 舜(순)임금 때 司徒(사도)를 지냈으며, 순은 설에게 商(상)을 봉하고 子
(자)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설 사후 아들 昭明(소명), 소명 사후 아들 相土(상토). 상토 사
후 아들 昌若(창약), 창약 사후 曹圉(조어), 조어 사후 아들 冥, 명 사후 아들 振, 진 사후
아들 微(미), 미 사후 아들 報丁, 보정 사후 報乙(보을), 보을 사후 아들 報丙, 보병 사후
아들 主壬(주임), 주임사후 아들 主癸(주계), 주계 사후 아들 天乙, 천을이 즉위했다. 그
가 은나라 시조 성왕(成湯)이다.
亳(박)에 도읍을 정했으니 이는 선왕 帝嚳(제곡)을 좇아 그의 옛땅에 도읍을 정한 결과다.
商(상) BC, 1600〜BC, 1046 위치: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국성 子(자)
| 대수 | 재위기간 | 왕명 | 휘 | 관계 | 수도 | 현재지명 |
| 제1대 | BC, 1600〜BC, 1589 | 成湯(성탕) | 履(리) | 주계의 아들 | 亳(박) | 河南省 商丘縣 |
| 제2대 | BC. 1588〜BC, 1587 | 外丙(외병) | 勝(승) | 성탕의 아들 | ||
| 제3대 | BC, 1586〜BC, 1583 | 仲壬(중임) | 庸(용) | 외병의 동생 | ||
| 제4대 | BC, 1582〜BC, 1571 | 太甲(태갑) | 至(지) | 성탕의 손자 | ||
| 섭정 | 伊尹(이윤) | 摯(지) | ||||
| 복위 | BC, 1582〜BC, 1571 | 太甲(태갑) | 至(지) | 성탕의 손자 | ||
| 제5대 | BC, 1570〜BC, 1542 | 沃丁(옥정) | 絢(현) | 태갑의 아들 | ||
| 제6대 | BC, 1541〜BC, 1517 | 太庚(태경) | 辨(변) | 옥정의 동생 | ||
| 제7대 | BC, 1516〜BC, 1500 | 小甲(소갑) | 高(고) | 태경의 아들 | ||
| 제8대 | BC, 1499〜BC, 1487 | 雍己(옹기) | 密(밀) | 태경의 동생 | ||
| 제9대 | BC, 1486〜BC, 1422 | 太戊(태무) | 伷(주) | 옹기의 동생 | ||
| 제10대 | BC, 1421〜BC, 1401 | 中丁(중정) | 莊(장) | 태무의 아들 | ||
| 제11대 | BC, 1400〜BC, 1386 | 外壬(외임) | 發(발) | 중정의 동생 | ||
| 제12대 | BC, 1385〜BC, 1377 | 河亶甲(하단갑) | 整(정) | 외임의 아들 | ||
| 제13대 | BC, 1376〜BC, 1358 | 祖乙(조을) | 勝(승) | 하단갑의 자 | ||
| 제14대 | BC, 1357〜BC, 1342 | 祖辛(조신) | 旦(단) | 조을의 아들 | ||
| 제15대 | BC, 1341〜BC, 1337 | 沃甲(옥갑) | 踰(유) | 조신의 동생 | ||
| 제16대 | BC, 1336〜BC, 1328 | 祖丁(조정) | 新(신) | 조신의 아들 | ||
| 제17대 | BC, 1327〜BC, 1322 | 南庚(남경) | 更(경) | 옥갑의 아들 | ||
| 제18대 | BC, 1321〜BC, 1315 | 陽甲(양갑) | 和(화) | 조정의 아들 | ||
| 제19대 | BC, 1314〜BC, 1287 | 盤庚(반경) | 旬(순) | 양갑의 동생 | ||
| 제20대 | BC, 1286〜BC, 1252 | 小辛(소신) | 頌(송) | 반경의 동생 | ||
| 제21대 | BC, 1251〜BC, 1251 | 小乙(소을) | 斂(렴) | 소신의 동생 | ||
| 제22대 | BC, 1250〜BC, 1192 | 武丁(무정) | 昭(소) | 소을의 아들 | ||
| 제23대 | BC, 1191〜BC, 1148 | 祖庚(조경) | 躍(약) | 무정의 아들 | ||
| 제24대 | BC, 1148〜BC, 1148 | 祖甲(조갑) | 載(재) | 조경의 동생 | ||
| 제25대 | BC, 1148〜BC, 1148 | 廩辛(늠신) | 先(선) | 조갑의 아들 | ||
| 제26대 | BC, 1148〜BC, 1148 | 庚丁(경정) | 囂(효) | 늠신의 동생 | ||
| 제27대 | BC, 1147〜BC, 1113 | 武乙(무을) | 瞿(구) | 경정의 아들 | ||
| 제28대 | BC, 1112〜BC, 1102 | 太丁(태정) | 打(타) | 무을의 아들 | ||
| 제29대 | BC, 1101〜BC, 1076 | 帝乙(제을) | 羨(선) | 태정의 아들 | ||
| 제30대 | BC, 1075〜BC, 1046 | 帝辛(제신) | 受(수) | 제을의 아들 |
제1대 성탕(BC, ?〜BC, 1589) 주계의 아들
폭군이었던 하나라의 桀王(설왕)을 무너뜨리고 商(상)나라를 건국했다는 군주로 성은 子
(자) 이름은 履(리)라 부르며, 부친은 主癸(주계)이다. 성탕이 사람을 시켜 폐물을 가지고
辛(신, 하남성)에 있는 伊尹(이윤)을 초빙하여 그를 하나라의 걸에게 천거했다. 그러나
걸이 쓰지 않아 이윤은 성탕에게 되돌아 왔다. 당시 하나라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펼치
며, 주색에 빠지자 성탕이 걸을 치는데 이윤이 성탕의 阿衡(아형)이 되어 걸을 토벌하고
그를 南巢(남소, 安徽省 안휘성)로 추방했다. 또한 갈국의 군주인 葛伯(갈백)이 포악무도
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않는 까닭에 그를 치면서 “그대가 천명
을 공손히 받들지 않으면 내가 큰 형벌로 처단할 것이고, 결코 사면하는 일이 없을 것이
다.” 그 후 천하를 도모한 이후로 성탕은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점을 부끄럽게 여겼다
고 한다. 그러자 걸의 중신이었으나 상나라에 귀순한 仲虺(중훼)는 성탕에게 “하나라는
덕을 잃어 진흙탕과 타오르는 숯불에 빠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성탕은 복색을 바
꿔 백색으로 숭상했다.
제2대 외병(BC, ?〜BC, 1587) 태정의 동생이다
탕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자 太丁(태정)은 즉위도 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래서 아버지
인 탕의 뒤를 이어 상나라의 2대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윤을 재상으로 삼았으며 수도
를 亳(박)으로 정했다. 외병제가 즉위 3년 만에 죽자 그의 동생 仲壬(중임)이 즉위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太丁(태정)이 아닌 大丁(대정)이었고, 심지어 정상적으
로 계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외병은 동생이 아닌 대정의 둘째 아들이었다.
또 卜丙(복병)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조카인 태경이 뒤를 이었다고 적여 있다. 이윤을
재상으로 삼았다. 왕위를 계승한 사람조차 태갑으로 갑골문에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중임(BC, ?〜BC, 1583) 외병의 동생이다.
상나라의 군주로 형인 외병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이윤을 재상으로 삼으며 亳(박)
를 수도로 삼았다. 즉위 4년만에 죽으니 조카인 태갑이 뒤를 이었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에 의하면 중임은 실존여부가 불분명한 왕이다. 갑골문에 의하면 제3대 군주는 중
임이 아닌 太甲(태갑)이었고, 아예 외병은 태갑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4대 태갑(BC, ?〜BC, 1571) 태정의 아들이자, 탕왕의 직계 장손이며 외병의 형이다.
아버지 태정이 할아버지 탕왕의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즉위하기 전에 죽어 숙부 외
병이 즉위했다. 하지만 3년 만에 외병이 죽었기에 동생인 중임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4
년 만에 죽어 탕왕 때의 공신이자 재상 이윤이 태정의 아들 태갑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허나 태갑은 왕이 된 후 3년이 지나도 왕도를 깨닫지 못하고 포악해졌으며, 시조 탕왕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자 재상 이윤은 태갑을 폐위하여 棟宮(동궁)으로 내쫓
고 3년 동안 섭정의 자격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에 태갑이 3년 동안 동궁에 머무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자 이윤이 다시 태갑을 맞이했다고 한다. 태갑이 나라를 잘 다스리
자 제후들이 상나라에 복종하고 백성들도 편안해 졌다고 한다. 이윤은 이를 기뻐하며,
그에게 ‘太甲訓(태갑훈)’ 지어 칭송하고 太宗(태종)이란 묘호를 올렸다고 한다, 갑골문에
는 아버지 태정이 탕왕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태갑도 왕위를 승계받았다고 기록되어 있
다. 심지어 사기에서는 전대왕인 중임은 갑골문에서는 이름조차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죽서기년에는 태갑 원년에 이윤이 태갑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7년 뒤에 동궁
에서 몰래 빠져나온 태갑이 찬탈자 이윤을 죽였다고 기록되었다.)
이윤 재위기간(BC, ?〜BC, ?)
본명은 尹摯(윤지), 유신국 출신의 선비이자 요리사였다. 어릴적 부모를 잃고 포인이라
는 요리사에게 길러지며 요리와 공부를 배웠다고 한다. 이미 관직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
름난 선비였으며, 탕왕의 초빙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신국의 왕이 이윤
을 내어주는 것을 거부했고 탕왕은 그를 등용하는데 실패했다. 이에 이윤을 꾀어내기 위
해 탕왕은 상나라에 비하면 매우 작은 나라인 유신국에게 혼인동맹을 제안했다. 유신국
의 왕은 탕왕의 제안에 감복하여 자신의 딸을 내어주며 이윤을 시종, 즉 전속 요리사로
딸려가게 했다. 이렇게 이윤은 탕왕과 본인이 원하는 데로 상나라에 입조했으며, 탕왕은
이에 파격적으로 곧바로 相(상)에 임명하게 된다. 이후 이윤은 하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한 전략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수차례 하나라에 파견되어 직접 정탐 활동을 벌였으며,
내부 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또한 상나라 뿐 아니라 하나라의 다른 속국들까지 상나라
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서 결전지의 지리를 미리 탐사하여 이를 전투에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걸왕을 무찌르
고 상나라를 패권국의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사방 70리에 불과했다
고하는 상나라로서는 매우 놀라운 일로 이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상나라의 집권 이후 외병, 중임 등의 탕왕의 후임 군주 들은 재상으로써 잘 모셨으나,
탕왕의 손자인 태갑 때에 이르러 태갑이 부덕한 행동을 보이자 궁궐 내에 별궁을 만들
어 태갑을 가두어 버리고, 3년간 국정을 섭정하게 된다. 이 때 태갑을 비판하여 한 말이
‘習與性成’(습여성성)이라는 사자성어로, 습관이 쌓이면 성품이 된다는 뜻이다. 이후 태갑
이 자신의 부덕을 사과하자 이윤이 권력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단 여기에도 이견이 있는
데〈죽서기년〉에서는 태갑이 어려 왕권이 약화되자 이윤이 찬탈하여 어린 왕을 폐위시킨
후 별궁에 가두고 자신이 7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성장한 태갑이 궁을 탈출하여 군사
를 일으켜 이윤을 죽이고, 왕권을 되찾았다고 되어 있다.
제5대 옥정(BC, ?〜BC, 1542) 태갑의 아들이며, 태경의 형이다.
卿士(경사)를 재상으로 삼았고 옥정 기간중 이윤이 죽었다고 한다. 그를 박에 장사 지내
고 구단이 이윤의 행적을 통해 후대인을 깨우치기 위해 옥정을 지었다. 옥정이 죽자 동
생 태경이 즉위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언급조차 나오지 않아 실재로 있었던 군주인
지 불확실한 면이 있다.
제6대 태경(BC, ?〜BC, ?) 옥정의 동생이다.
형인 옥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26년 동안 재위했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에 의
하면 삼촌인 애왕에 이어 제5대 왕이 되었다. 또한 죽서기년은 5년 동안 재위했다.
제7대 소갑(BC, ?〜BC, ?) 태경의 아들이다.
《사기》 은본기에는 태경의 아들로 나오는데 사기 삼대세표에는 태경의 동생으로 나온다.
두 군데 모두 이어서 “은나라의 도가 쇠약해져 제후들이 때로 오지 않았다.”는 말이 나
온다. 재위할 때 亳(박)을 도읍으로 삼았다. 죽은 뒤 동생 옹기가 자리를 이었다. 일찍이
사신을 옛 朝鮮國(조선국)에 보내 중원의 속국임을 확인했다.
제8대 옹기(BC ?〜BC, ?) 태경의 동생이다.
亳(박)을 수도로 삼았다. 12년간 통치하였고 옹기라는 시호가 주어졌으며 동생인 태무가
뒤를 이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옹기는 형인 大戊(대무)에 이은 상나라
의 8대 군주였고 조카인 중정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제9대 태무(BC, ?〜BC, 1422) 옹기의 동생이다.
태무제는 즉위 후 伊陟(이척)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 때 도성밖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
다. 아침에 대궐 뜰안에서 뽕나무와 닥나무 줄기가 동시에 자라더니 그날 저녂에는 기
둥만큼 자랐다. 이윤의 아들 이척이 말했다. “요괴는 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셔야 합니다.” 이에 왕 태무가 선왕의 덕치의 도를 따르니 이틀
만에 흉상의 뽕나무가 시들어 죽었으며 탕왕이 세운 덕치의 도가 부흥했다. 그를 중종
이라 칭송한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인 소갑에 이어 상나라의 7대 군
주가 되었고 大戊(대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인 옹기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제10대 중정(BC, ?〜BC, 1401)
아버지인 태무에 이어 군주가 되었다. 亳(박)을 수도로 삼았다가 즉위 첫 해에 隞(오)로
옮겼다. 즉위 6년째 藍夷(남이)의 공격을 받았다. 즉위한지 11년(어떤 사료에는 9년)만에
사망하였다. 중정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동생인 외임이 뒤를 이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인 옹기에 이어 상나라의 9대 군주가 되었고 三祖丁(삼조정)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동생인 卜壬(복임)이 뒤를 이었다.
제11대 외임(BC, ?〜BC, ?) 중정의 동생이다.
형인 중정에 이어 군주가 되었다. 隞(오)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기간에 상의 봉신인 邳
(비)와 侁(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재위 15년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하단갑이 이
었다. 은허에서 발굴뒨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10대 군주로 卜壬(복임)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戔錢(전전)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제12대 하단갑(BC, ?〜BC, ?) 외임의 아들
아버지인 외임에 이어 상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오를 수도로 삼았으나 즉위 첫 해에 相
(상)으로 옮겼다. 즉위 3년 째에 의랑 彭伯(팽백)이 외임 때부터 저항하던 邳(비)를 정복하
였다. 즉위 4년 째에 남이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즉위 5년 째에 侁人(신인)이 班方(반
방)을 차지하였으나 팽백과 위백에게 격퇴되었고 상에 사절을 보냈다. 즉위 9년 째에 사망
하였다. 시호는 하단갑이고 아들인 조을이 뒤를 이었다.
제13대 조을(BC, ?〜BC, ?) 하단갑의 아들이다.
且乙(차을)로도 불린다. 且(차)와 祖(조)는 本字(본자)가 같았다. 갑골문에서는 仲丁(중정)
의 아들로 나온다. 재위할 때 상나라가 더욱 흥성했다. 太平御覽(태평어람)에서는 사기를
인용하여 19년 동안 재위했다고 했다. 금본죽서기년에는 재위 중에 국도를 相(상)에서 耿
(경)으로 옮겼고, 나중에 다시 庇(비)로 천도했다고 한다.
제14대 조신(BC, ?〜BC, ?) 조을의 아들이다.
且辛(차신) 으로도 불린다. 도읍은 庇(비)에 두었다. 죽은 뒤 동생 옥갑이 자리를 이었다.
제15대 옥갑(BC, ?〜BC, ?) 조신의 동생이다.
형인 조신에 이어 즉위하였고 庇(비)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25년(죽서기년에는 20년)만
에 사망하였다. 옥갑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조카인 조정이 뒤를 이었다.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14대 군주였고 羌甲(강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16대 조정(BC, 〜BC, ) 옥갑의 조카
삼촌인 옥갑에 이어 군주가 되었다. 庇(비)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32년 만에 사망하였다.
조정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종형제인 남경이 되를 이었다.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15
대 군주이다.
제17대 남경(BC, 〜BC, ) 옥갑의 아들이며 조정의 종제다
삼촌인 조정에 이어 군주가 되었다. 庇(비)를 수도로 삼았다가 재위 3년에 奄(엄)으로 천
도하였다. 재위 29년에 사망하였다. 남경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사촌인 양갑이 뒤를 이었
다.
제18대 양갑(BC, 〜BC, ) 조정의 아들이며 반경의 형이다.
奄(엄)을 수도로 삼았다. 재위 3년에 丹山(단산)의 야만인의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보
냈다. 재위 17년(어떤 사료에는 7년)만에 사망하였다. 양갑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동생인
반경이 뒤를 이었다. 갑골문에 따르면 상나라의 17대 군주로 象甲(상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19대 반경(BC, 〜BC, ) 양갑의 동생이다.
조정의 아들이자 양갑의 동생이다. 양갑이 사망하자 제위를 물려받았다. 수도를 亳(박)에
서殷(은)으로 옮긴 왕으로 알려져 있다. 반경의 재위 시기 황하 북쪽의 도읍을 버리고 남
쪽으로 천도하여 했으나 탕왕 아래 이미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긴 상나라 백성들이 진절
머리가나 군주를 원망하고 옮기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반경은 천도하고 싶었는지 당
근과 채찍을 휘두르며 신하와 백성들을 설득했고, 기어코 은허로 천도하게 된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옮긴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는지, 이후 쇠락하던 상나라가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동생인 소신이 뒤를 이었다고 적혀있다.
제20대 소신(BC, 〜BC, ) 반경의 동생이다.
형인 반경의 뒤를 이어 20대 군주가 되었다. 殷(은)을 수도로 삼았다. 재위에 오른지 3년
만에 동생인 소을에게 양위하였다. 갑골문에 따르면 그는 상나라의 19대 군주이다.
제21대 소을(BC,〜BC, ) 소신의 동생이다.
형인 소신에 이어 상나라의 21대 군주가 되었다. 수도인 殷(은)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6
년에 아들 무정을 河(하)에 살도록 하고 甘盤(감반)에게 공부하게 하였다. 재위 10년 만
에 아들인 무정에게 양위하였다. 갑골문에 따르면 그는 상나라의 20대 군주이다.
제22대 무정(BC, ?〜BC, 1192) 소을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평민 및 천민들과 함께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같이 했기에 그들의 삶과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즉위 이후 傅說(부열), 스승 甘盤(감반) 등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이끌게 되었다. 그의 치세는 매우 안정되어 역사서에는 武丁中
興(무정중흥) 혹은 武丁盛世(무정성세)라고 한다. 무정은 方(방)족을 대규모로 정벌했는데
보통 병력이 3,000명에서 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많은 군사들은 그 유명한 무정
의 부인 부호가 지휘하여 정벌했다고 하며 방족의 포로들은 인신공양에 쓰였다고 한다.
무정이 죽자 왕위는 아들 조경이 계승하였다. 주로 이때 만들어진 갑골문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리고 갑골문을 해독해보니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7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제23대 조경(BC, 〜BC, ) 무정의 아들이다.
且庚(차경)으로도 쓴다. 殷(은)에 도읍을 정했고, 무정을 높여 고종이라 불렀다. 기원전
1191년을 재위한 첫 해로 추정하고 있다. 「금본죽서기년」에는 11년 동안 재위한 것으
로 나온다. 죽은 뒤 동생 조갑이 자리를 이었다.
제24대 조갑(BC, 〜BC, ) 조경의 동생이다.
且甲(차갑)또는 帝甲(제갑)으로 쓴다. 「사기」에서는 황음무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 시기
상나라는 거듭 쇠락했다. 『금본죽서기년』에서는 33년 동안 재위 했다고 나온다. 일찍이
西戎(서융)을 정벌했다. 재위한 초기에는 일반 백성들을 잘 돌봤지만 만년에 들어 가혹
한 형벌을 쓰면서 상나라의 쇠약을 초래했다.
제25대 늠신(BC, ?〜BC, ?) 조갑의 아들이다
묘호는 甲宗(갑종), 시호는 共王(공왕)이었다. 늠신이 사망하자 그 뒤를 동생인 경정이
왕위를 이었다.
제26대 경정(BC, ?〜BC, ?) 늠신의 동생이다.
갑골문에는 康丁(강정) 또는 康祖丁(강조정)으로 적여 있다. 전임 국왕 늠신의 동생이다.
수도는 殷(은)이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8년간 재위에 있었고 사후에 아들인 무을이 뒤를
이었다.
제27대 무을(BC, 〜BC, ) 경정의 아들이다.
亳(박)에서 朝歌(조가)로 천도했다. 무도하여 일찍이 偶人(우인)을 두고
천신이라 하면서 쌍륙 놀음을 했고, 가죽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우러러 놓고 활을 쏘
아 맞췄다고 말했다. 재위할 때 東夷(동이)가 점차 강해져서 조금씩 중토로 들어와 살았
고, 서부의 方國(방국)도 상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周王(주왕) 季曆(계력)이 일찍이 무을
을 조알하고 토지와 옥, 말을 얻었다. 河渭(하위)에서 사냥을 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
다. 4년 동안 재위했다.
제28대 태정(BC, 〜BC, ) 무을의 아들이다
제을, 비간 기자의 아버지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수도는 殷(은)또는 沬(매)였다. 재위 2
년에 주의 제후 계력이 燕京(연경)에서 융족을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재위 3년에 洹水
(원수)가 메말랐다. 재위 4년에 계력은 재차 융족을 공격해 余无(여무)에서 승리하였다.
재위 7년에 계력은 呼(호)에서 융족을 공격해 또다시 승리하였다. 7년 후에 계력은 융족
족을 翳徒(예도)에서 격퇴하고 세 명의 장수를 사로 잡았으며 태정에게 승리를 보고하였
다. 그러나 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던 태정은 계력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고 塞庫(새고)로 보냈다. 그 후 태정은 계력을 새고에 감금해 죽였
다. 箕子(기자), 比干(비간,) 帝乙제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제29대 제을(BC, 〜BC, ) 태정의 아들이다.
皇帝(황제) 헌원씨와 제요 도당씨의 후손이며, 태정의 아들이었다. 3대 현인이라 불리는
比干(비간)과 箕子(기자)는 형제였으며, 미자계는 맏아들이었다. 제을은 아버지 태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사기》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뒤 상왕조가 더욱 쇠락해졌다
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태정은 周族(주족)이 강해지는걸 우려해 그들의 제후 계력을
살해하여 주족과 갈등을 빚어 계력의 아들 희창이 상을 치려 하였고 〔태평어람〕에는
제을 2년에 주나라의 군사들이 상나라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을의 맏아들은
미자계였으나 그는 서자였기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동생인 제신이 왕위를 계승
하였다. 제신이 폭정으로 폐위되자 제신의 아들 무경이 상나라의 宗祀(종사)를 잇게 되
었으나 반란(삼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제30대 제신(BC, 〜BC, 1046) 제을의 둘째 아들이며 미자계의 동생이다.
왕호는 제신이었으며, 본명은 ‛子受(자수)혹은 ’子受德(자수덕)이었다. 주리육림으로 유
명하며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전하는 桀(걸)과 함께 걸주로 불리며 오랜 세월 폭군의
대명사로 통했다. 선대 왕인 제을의 작은 아들로 微子啓(미자계)가 서자라서 왕위를 이
어받을 수 없었기에 적자였던 제신이 왕위를 승계했다. 사람들은 제신을 두고 紂(주)라
고 불렀는데 《사기집해》에 따르면 주에 대해 도리를 잃고 선을 해치는 것이라고 뜻풀
이를 하고 있다. 제신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다. 일처리도 신속하
고 힘또한 출중해 맹수와 싸울 정도다. 주왕이 유소씨를 정벌하자 그 나라의 임금이
妲己(달기) 라는 미녀를 바쳤다. 제신은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증기고 특히 달기를 총
애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겨 鹿臺(녹대)를 돈으로 가득채우고 鋸橋(거교)를 곡물로 가득
했다. 沙丘(사구)에 있는 원림과 대를 크게 확장해 수집한 야수와 새들을 방사하고 못
에는 술을 가득 채우고 둘레에는 고기를 주렁주렁 숲처럼 매달아 밤을 세워가며 먹고
마시고 놀았다. 이에 백성이 원성이 높고 제후들의 배신이 잇다르자 형벌을 강화했다.
기름을 칠한 기둥아래 불을 피워놓고 기둥 위를 걷게 하는 炮烙之刑(포락지형)까지 만
들어냈다. 또한 西伯(서백)으로 있던 周 文王(주 문왕)과 九侯(구후)를 비롯해 鄂侯(악
후 등을 삼공으로 삼았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제로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구후가 악공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주왕을 죽이려 했
다가 음모가 들통나자 주왕은 구후와 악공을 붙잡아 구후는 젓갈로 담그는 사형에 처했
고, 악공은 육포로 만드는 사형에 처했다. 간신배 비중이 서백도 반란에 가담한 혐의가
있다고 고하자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희창의 신하 閎夭(굉요) 등이 미녀와 진
기한 보물, 준마 등을 바쳐 희창을 살렸다. 제신의 서형 미자가 여러번 간했지만 주왕이
듣지 않자 멀리 떠나버렸다. 주왕의 숙부 比干(비간)이 말하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가 있드라” 면서 가슴을 도려내고 심장을 보았다. 역시 숙부인 기자는 미친 척
하고 남의 종 노력을 했다. 그러자 주왕은 箕子(기자)를 잡아 가두었다. 주 무왕이 군사
를 이끌고 상나라의 도성 근교인 牧野(목야, 하남성 신향연 목야)에서 주를 쳤다. 주왕
은 성안으로 달아나 옷을 뒤집어 쓴 채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진했다. 주 무왕이 주왕의
목을 베어 태백기에 매달았다. 주왕의 애첩도 죽였다. 이로써 상나라는 멸망했다.
사료출처
司馬遷의 史記 夏本紀(사마천의 사기 하본기)와 曾先之의 십팔사략(증선지의 십팔사략)
상나라의 도읍지 변천
| 국왕 | 당시의 지명 | 현재의 지명 |
| 先商(선상)시대 | ||
| 契(설) | 亳(박) | 河南省 洛陽市 偃師市(하남성 낙양시 언사시) |
| 蕃(번) | 北京市(북경시) | |
| 昭明(소명) | 砥石(지석) | 北京市 石家莊 이남(북경시 석가장 이남) |
| 商(상) | 陝西省 商洛市 商州區(섬서성 상락시 상주구) | |
| 相土(상토) | 商丘(상구) | 河北省 중부(하북성 중부) |
| 泰山(태산)아래 | 河北省(하북성)과 山西省(산서성) 접경 | |
| 商丘(상구) | 河北省(하북성) 중부와 河南省(하남성) 북부 | |
| 王亥(왕해) | 殷(은) | 현재 불명 |
| 上甲微(상갑미) | 鄴(업) | 河北省 邯鄲市 臨漳縣(하북성 한단시 임장현) |
| 商侯(상후)= 殷侯(은후) | 商丘(상구) | 河北省 중부(하북성 중부) |
| 早商(조상)시대 | ||
| 太乙(태을), 湯(탕) | 亳(박) | 河南省 鄭州市 商丘縣(하남성 정주시 상구현) |
| 中丁(중정), 外壬(외임) | 隞(오) | 河南省 鄭州市 商城遺址(하남성 정주시 상성 |
| 河亶甲(하단갑) | 相(상) | 河南省 安陽市 內黃縣(하남성 안양시 내황현) |
| 祖乙(조을), 祖丁(조정) | 庇(비) | 山東省 運城縣(산동성 운성현) |
| 邢(형) | 河北省 邢台市(하북성 형태시) | |
| 南庚(남경), 盤庚(반경) | 奄(엄) | 山東省 曲阜市(산동성 곡부시) |
| 晩相(만상)시대 | ||
| 盤庚(반경) | 殷(은) | 河南省 安陽市 安陽縣(하남성 안양시 안양현) |
| 帝辛(제신) | 朝歌(조가) | 河南省 鶴壁市 朝歌(하남성 학벽시 조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