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글은 2009년 저의 블로그를 시초로 안동김씨 대종중 홈페이지 그리고 여러 곳으로 퍼 옮겨지기도 한 필자의 글입니다. 장마는 주춤했고 대비 속 마른장마 아니기를 바랍니다. 좋은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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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경호실이 2007, 7, 15일 펴낸 책, 청와대와 주변 역사. 문화유산에서 저희 안동김씨 가문을 장동김씨로 소개하면서 사진첨부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청와대 인근지역, 그러나 역사적 중요성에 의해서도 제일가는 지역인 것을 참작하여 대통령경호실에서 나서서 학습동아리 팀을 만들어 잊혀가는 청와대 주변의 역사,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아름다운 책으로 내놓았습니다.
저희 안동김씨 가문으로는 청와대 인근지역에 사셨던 서윤공 김번 집터, 청음 김상헌과 손자 김수항 집터, 선원 김상용 집터, 영안 부원군 김조순 살던 집 옥호정터, 그리고 그 큰아들 황산 김유근의 백련사 터, 창녕 위 김병주(金炳疇)의 손자 김석진 집터, 그리고 김흥근 별장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뺐었다는 석파정(삼계동 정자), 문곡 김수항의 후손들이 사셨다는 六靑軒, 정자인 청휘각(淸暉閣), 그리고 김옥균 집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 속에 소개된 분들과 청와대 인근지역이 아니라서 위책에 소개되지 않은 저희 가문의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조명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선 저의 직계인 5대조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께서 사시던 집인 백련사(白蓮社), 그리고 황산 할아버지의 生父이신 永安府院君 집터인 옥호정(玉壺亭)에 대해서 알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 그리고 위책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을 근거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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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壺亭
2011년, 4월 9일 답사하고 원경으로 싣는다. 동향인옥호정(중앙 붉은색 지붕)과 북악산록을 보며 1815년 이후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삼청동 133번지 도로변에 세워진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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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5년(1815년) 영안 부원군 김조순(1765~ 1832)의 집인 이곳을 조성한 연대로 볼수있다고 합니다(아래 기록된 각자 乙亥壁은 순조 15년을 가리킵니다).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33번지 일대 인 이곳을 옥호정도에서 보면 아름다운 산록에 둘러싸여있고 넓은 후원, 아름다운 정자각, 텃밭과 벌통, 울창한 松林, 초가지붕의 하인들이 살던 집으로 보이는 곳과 행랑채, 그리고 개와 지붕으로 그린 본체가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본체와 행랑채등은 넓은 집터에 비하면 의외로 작아 보이고 검소하게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인의 역사인식과는 달리 영안 부원군 께서는 검소하고 너그러웠으며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 의미의 낱말이 할아버지 본래의 모습까지 흐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도 휼륭 한분 이라고 하였고 조선왕조 실록등 모든 정직한 역사상 기록은 정조의 유언에 의해 순조대왕을 보필한 공적이 컷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세사가들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생략.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생략. 인용: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사실, 1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인 1804~1840년은(순조 4년~헌종 6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부정적인 시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두다 잘 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 입니다. 순조 대왕을 잘 보필한다고 한것이 오히려 순조임금님의 운신의폭을 좁혀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할아버지의 그 기초 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세도정치의 폐단이 나타나는것은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철종대왕때,1849~1863)입니다. 이를 1832년에 별세하신 할아버지께서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세도정치라는 부정적 의미의 낱말이 할아버지로부터 비롯 하였음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은 저부터 정직하고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맡은 바 책임과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다짐합니다.
한국금석문 종합 영상정보시스템의 김조순 신도비 해석문에 의하면 중년에 옥호에 작은 집을 짓고 때때로 쉬며 목욕하며 지냈다. ---공은 만년에는 더욱 세상일을 물리치고 삼청동 소무속헌에서 한가하게 소일하며 지냈다. 1832년(순조 32년) 4월기묘일 세상을 마치였다. 이모든 기록은 공께서 삼청동 133번지 옥호정에서 1815년(순조15년) 이후 일생을 사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둘째 아들이나 대를 이여가게 되는 취정 金元根과 함께 사셨을 것입니다. 큰 아들 김유근은 바로 이웃인 삼청동 25번지로 미리 백련사를 짓게하시고, 그리고 셋째이며 막내아들 하옥 김좌근은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교동으로 불렸던 종로구 경운동 66번지로 나가 살으셨던 것입니다.
이곳 삼청동의 옥호정(또는 옥호산방)에는 玉壺山房의 현액, 정자각으로 보이는 竹亭, 山半樓, 疊雲亭, 그리고 산기슭과 석벽에 惠生泉, 玉壺洞天, 乙亥壁, 山光如邃古 石氣可長年의 각자가 있고 뒷동산 정상에는 日觀石이라는 바위에 새긴 각자가 보입니다. 東向으로 지어진 옥호정 뒷산 정상에 있는 일관석 위에 서서 영안 부원군 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해맞이를 하시고 정국을 구상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관석을 새긴 각자는 대통령 경호실 학술 동아리 팀이 발견 지금도 옛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그곳에 유일하게 남아 당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귀양에서 풀려나신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 오셨다는 군요. 풍고집을 비롯하여 2007년 세상에 처음 밝혀지게 된 황산 김유근의 문집을 통해서 이곳 옥호정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옥호정도의 아름다운 그림은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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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蓮社
삼청동 25번지 일대인 이곳은 교육과정 평가원이 있었는데 2011, 4, 9 방문하니 군 병원로 바뀌었다. 출입을 통제하므로 도로변에서 원경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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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옥호정과 아주 가까운 곳인 삼청동 25번지 일대 인 현한국교육과정평가원(후 국군 서울지구 병원) 자리입니다. 부원군 할아버지의 큰아들이며 가장 촉망받는 아들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 1840) 할아버지는 그러나 종가댁의 대를 이어 가려는 부원군 할아버지의 큰 뜻에 따라 종백부인 저의 6대조 김용순(金龍淳 1754~ 1823)에게 입후 되었습니다. 큰 댁으로 양자를 보내시고 황산 할아버지의 집인 백련사를 있게 하셨습니다. 이어 추정 1815년에 근처에 옥호정(김조순 사시던 집)이 있었음은 두 부자 사이에 사랑이 기초되었을 것입니다.
백련사라는 집 이름은 북악산 기슭인 백련봉 아래라서 백련사라고 이름 지었다 합니다. 세칭 안동김씨 1차 세도정치 때 실세이며 1832년 4월 부원군 할아버지께서 별세 하시고부터 1837년 병환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기 직전까지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셨던 할아버지께선 그러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더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그 옛날 180년 전 백련사 자리 그곳은 지금은 나라의 교육방향을 제시하고 발전시키려는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국군 서울지구로 바뀜)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학문을 사랑하시는 황산 할아버지의 마음이 나라의 교육을 발전시키는 큰 자리로 된 것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그리고 선배이신 자하 신위 등, 文友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風流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곳은 빈객들이 많아 낮을 밤으로 이어 풍류가 넓고 멀리 전하였다고 합니다. 黃山門客이라는 말도 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네 분(자하, 황산, 추사, 이재)의 수많은 그림과 글씨들이 이때 쏟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그림은 황산이 그린 소림단학도로 황산이 그리고 화제는 자하, 이재가 쓴 것입니다.
더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18
이 아름다운文友들 사이의 우정은 완당전집은 물론 새로 연구되는 황산 유고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1835년으로 추정합니다. 추사 김정희로 부터 소개받은 성 유진길로 부터 그리스도교 진리를 깨닫게 되신 할아버지는(참고 : 박도원 저 2007, 순교자의 나라) 1837년부터 병을 얻어 이후 은퇴하시고 실어증까지 겹쳐 고생하십니다. 황산과 추사 이두분의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주는 유명한 묵소거사자찬은 이때(1837~1840) 탄생합니다.
중병으로 은퇴하신 할아버지께선 정치적인 아무 힘도 없고 밖에서는 기해박해가 몰아치기 시작하는 그 시기 유진길 로부터 1839, 5 병환 중 대세(代洗: 司祭를 대신하여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를 받으시고 그로부터 1년여 후 1840, 12월 17일 운명하십니다.
아들인 김병주(金炳㴤, 필자의 고조)의 서울 600년사에서도 삼청동의 백련봉 근처에서 살았다고 쓰여있어 대를 이어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고조를 가리켜 훈동대신 이라고 부르셔서 언제인가? 훈동으로 이사하신듯합니다. 끝으로 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리 정원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표석 백련사터를 소개하면서 이글을 마칩니다.
2011년 3월 9일, 언제인가? 군 병원으로 바뀌여 출입을 통제 당하였다. 친절한 군인 아저씨는 대신 사진을 찍어왔다.
첫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한 여름 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