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여전히 예수인가?' | ||||
포스트모던시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응전 | ||||
| ||||
요즘 시대의 사조를 표현하는 단어들에 붙는 공통된 접두어가 있다. 바로 "Post"란 단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자본주의(Post-capitalism),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등. 이 "Post"를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Post"는 내용과 형식에서 과거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한편 본질을 간직한 채로 단지 표현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든, 그 본래의 뜻들을 염두에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척 신경 쓰이는 말이 있다. 소위 "탈기독교문화"(Post-Christian culture)라는 단어이다. 현대문화는 더 이상 기독교를 중심에 두지도 않고, 미래의 대안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기독교 문화는 이제 사라져 가는 과거의 유물처럼 이해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론이 현대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원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 없는 "폭력적"인 주장이란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회 문화가 현대인들을 숨 막히게 한다고 비난한다. 교회의 언어와 행동양식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만끽되는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구원과 삶에 관하여 말할 때, 왜 아직도 예수를 말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다. 현대인의 문화 감각에 의하면, 예수만큼의 "성자"는 많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를 찾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간디, 체 게바라 등등 그들 나름대로 멋진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만이 구원의 빛이요 참다운 삶의 이정표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문화의 도전에 두 가지의 쉬운 응전이 있다. 하나는 대립하고 부정하는 방식이다. 혹자는 현대문화는 그 자체로 타락했기 때문에 조금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전통 신앙을 견고히 붙들고 오직 예수, 오직 교회만을 믿고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길에서는 현대문화와 대화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현대문화와 타협하고 긍정하는 방식이다. 이제 문화다원주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도,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든 문화 현상에는 그 나름대로의 종교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구원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돌려버린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응전은 예수에 대한 깊은 묵상을 방해하며,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게 한다. 현대문화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우리 삶과 유리된 교리적인 종교 숭배 대상으로 고정시킨다. 반대로 현대문화와의 친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인간 완성이라는 휴머니즘의 도구로 공중분해시키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여전히 예수가 우리 삶의 중심임을 확신하고 선언해야 하며, 그 예수를 삶의 현장에서 포용력 있게 "재현"(represent)해야 한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리(separation)나 동화(assimilation)가 아닌 "개혁(transformation)"의 길에서 찾아질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교리주의적인 틀에 예수를 가두어둘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 안에 담긴 "우상성"을 통찰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그 우상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진정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력 있는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현대문화 가운데 담긴 "악마성"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중심 문화가 빚어내는 참담한 인간성 파괴의 그림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모든 삶의 관계에서 연대성이 사라지고 파편화되어가는 비극을 통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인간을 살리는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 예수 안에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살아나며, 그 생명의 사람들로 형성하는 '공동체'를 이룩하는 비전과 실천 가운데 교회가 위치할 자리가 있다. 생명공동체!
아직도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의미 있는 것이라면, 예수의 생명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길에 기여하는 자리로 나서야 한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보다는 한 개인마다 친밀한 대화와 삶을 나누며, 그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구원자" 예수를 생동감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함께하는 삶이 빚어내는 공동체를 의미 있게 세워줄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시는 "주님" 예수를 전 삶의 영역에서 재현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말해야 하며 또한 말할 수 있다.
천진석 /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총무 *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http://www.cworldview.org/)에도 실린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