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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1822년 2월 16일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대본 안드레아 레오나 토톨라
배경 기원전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
<2009 페사로 로시니 페스티벌 / 200분 / 한글자막>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로베르토 아바도 지휘 / 조르지오 보르베리오 코르세티 연출
폴리도로.....레스보스 섬의 왕.....알렉스 에스포지토(베이스)
젤미라........폴리도로의 딸.........케이트 알드리히(소프라노)
일로...........젤미라의 남편.........후안 디에고 플로레즈(테너)
엠마...........젤미라의 시녀.........마리안나 피촐라토(메조소프라노)
안테노레.....미틸레네의 영주......그레고리 쿤데(테너)
레우시포.....안테노레의 수하......미르코 팔라치(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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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로시니의 마지막 나폴리 오페라
트로이 전쟁을 그대로 살려낸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와 케이트 알드리히의 다즐링한 연기와 노래
기교적인 아리아, 합창과 관현악의 대규모 편성
페루출신의 매력적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조카 로베르토 아바도가 2009년 로시니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로시니 오페라 <젤미라> 실황이다. 로시니가 나폴리에서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로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레스보스 섬의 왕 폴리도로와 공주 젤미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드물게 상연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를 현대의 무대로 옮긴 연출로 무엇보다 본 오페라의 유일한 영상물로서 가치가 높다.
=== 프로덕션 노트 === <내지 해설 / 캐서린 쿠즈믹 헨젤 Kathleen Kuzmick Hansell / 김종윤 번역>
로시니의 오페라 젤미라의 기원과 그 음악에 대하여
1822년 2월 16일 나폴리에서 <젤미라>의 첫 공연이 있었다. 당시 서른 번째 생일(2월 29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로시니는 이탈리아 안팎으로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그의 작품들은 이미 유럽 전역에 알려져 많은 오페라 하우스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시니는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을 치른 9개의 작품중 마지막 작품인 <젤미라>를 쓰면서 분명히 국내외의 관객들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앞선 8개의 작품들처럼, <젤미라>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정식 명칭은 '드라마 페르 무지카(dramma per musica)'이다)에 속하는 작품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극장장인 도메니코 바르바야 (Domenico Barbaja)의 위촉으로 쓰여졌다. 1806년부터 산 카를로 극장을 맡았던 바르바야는 1815년에 로시니를 나폴리로 데려왔다. 그는 7년간 물심양면으로 로시니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로시니는 이러한 엄청난 지원에 힘입어 그 기간 동안 <오텔로 Otelle>(1816), <이집트의 모세 Mose in Egitto>(1818), <에르미오네 Ermione>(1819), <호수의 여인 La donnd del lago>(1819), <마호메트 2세 Maometto Ⅱ>(1820) 등의 양식적으로 발전된 작품들을 써냈다. 1821년 말, 더 큰 꿈을 꾸고 있던 바르바야는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Ka:rntnertotheater)의 매니지먼트를 맡게 된다. 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그는 산 카를로 극장에서 데리고 있던 뛰어난 가수들과 작곡을 도맡았던 로시니를 빈으로 데려갔고, 1822년 봄 시즌부터 정식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따라서 로시니의 마지막 나폴리 오페라였던 <젤미라>는 그의 빈에서의 생활과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작품이었던 셈이다.
초연을 위한 준비
<젤미라>를 작곡하는 동안 로시니는 현실적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이상적인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산 카를로 극장은 당시 이탈리아 극장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곳이었다. 이 극장은 최고 수준의 주연 가수들, 대편성 오케스트라(일류 악장이 이끄는 78명의 단원으로 구성)와 30명의 잘 훈련된 합창단이 전속되어 있었다. 다른 도시들의 경우, 주연 가수들은 전통적으로 시즌별 계약을 맺는 것이 보통이었고, 연주자들의 경우는 수석 단원들을 제외하면 극장 입장에서는 자부심보다는 창피함을 느낄 때가 더 많을 만큼 기량이 떨어졌으며, 쥐꼬리만한 돈을 받으며 그때그때 고용되던 합창단원들은 대부분 음악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젤미라>는 다른 로시니의 나폴리 오페라들 가운데 몇 작품처럼 엄청나게 기교적인 아리아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합창, 목관을 특히 강조한 색채감 있고 창의적인 관현악 편성, 진보된 화성과 리듬을 가지고 있다. 로시니가 이런 음악적 실험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산 카를로 극장의 좋은 음악적 환경 덕이 컸다.
<젤미라>의 초연 캐스팅은 1815년부터 계속 산 카를로에서 로시니와 함께했던 뛰어난 가수들로 구성되었다. 이 배우들은 로시니의 산 카를로 극장 시절 작품들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초연에서 젤미라를 맡았고 이후에 로시니의 첫 부인이 된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 1785-1845)은 1810년대의 최고의 가수 중 한 명이었고, 1822년에도 여전히 그녀는 산 카를로 극장 최대의 자산이었다고 한다. 산 카를로 극장에는 주역 테너가 두 명 있다는 점도 특이했는데 - 이 문제가 로시니 오페라를 다른 곳에서 공연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 그중 환상적인 기교를 자랑하며 3옥타브의 음역대를 넘나들었던 지오반니 다비드(Giovanni David, 1789-1851)가 영웅 일로 역을 맡았고,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안드레아 노차리(Andrea Nozzari, 1775-1832, <오텔로>의 초연 가수)가 최고 전성기의 시점에 악역 안테노레를 맡았다. 안테노레의 공모자인 레우치포는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던 미켈레 베네데티(Michele Benedetti)가 맡았으며, 보다 진지하고 어려운 베이스 역할인 젤미라의 아버지 폴리도로 역은 안토니오 암브로지(Antonio Ambrogi)가 맡았다. 아마도 산 카를로의 호화군단중 가장 자질이 떨어졌던 가수는 나폴리 출신의 콘트랄토 안나 마리아 체코니(Anna Maria Ceconni)였다. 이 때문에 이후 바르바야의 애인이 된 그녀는 오리지널 버전 이후의 <젤미라> 캐스팅에서는 엠마 역을 맡지 못했다.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가 쓴 <젤미라>의 대본은 1821년 10월 23일에 승인되었으며, 1822년 1월 3일과 9일 사이 지오르날레 델르 두에 시칠리에(Giornale delle Due Sicilie) 지는 당시 로시니가 "이미 <젤미라>의 작곡을 마쳤고, 다음달 초에 처음으로 음악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사를 냈다. 하지만 이 기사가 얼마나 믿을만한지는 의문이다. 로시니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까지 작곡을 미루는 습관으로 유명하다. 더군다나 초연 6주전에 음악을 다 써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빈에서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던 바르바야가 <젤미라>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의상 디자이너가 의상 스케치를 맡았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의상은 1822년 1월 29일, 그러니까 초연을 불과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야 최종검토를 받을 수 있었다. 일정에 더 쫓기고 있던 건 최종 연주 연습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총리허설이 초연 4일을 남겨두고 압축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직접 목격한 기자는 2월 15일자 'Journal des debats'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더 놀라운 것은 오페라의 준비 속도다. 1막만 연습했던 첫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불과 3일전이었다. 4일째에 두 번째 리허설이 있었고, 어제 2막의 첫 번째 리허설이 있었으나 반밖에 하지 못했다. 오늘 15일에 전체 오페라의 첫 리허설이 있었는데, 이 리허설은 거의 3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연주자들의 엄청난 열정 덕분에 리허설은 매우 순조로웠다. 사보 담당자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리허설은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진행되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폴리에서의 <젤미라>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스탕달(Stendhal)의 말을 빌리자면 2월 16일의 초연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고, 그 이후 산 카를로에서의 공연 반응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음악을 제외한 대본, 조명, 세트, 의상과 같은 나머지 요소들은 거의 비판적인 반응을 받았다. 예를 들어 지오르날레 델레 두에 시칠리에 지는 이렇게 기사를 냈다. "대체 왜 의상은 그리스 스타일이고 무대 세트는 이집트 고딕 스타일인가?"
역사적인 고증과 리얼리즘은 당시 영향력있던 나폴리 발레안무가 가에타노 지오자(Gaetano Gioja)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전통적인 성향이 강한 오페라의 영역에서는 아직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앞서 기자가 비판했듯이, 그러한 모순이 작품의 치밀한 계획과 일관성을 해치고 있었지만, 나폴리의 대중들은 개의치 않았다. 대중들은 "오페라를 단순히 콘서트처럼 여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가 간과했던 사실은 오페라에서 드라마의 역할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가 "로시니 오페라의 중심이 대사에서 음악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나폴리 이후의 <젤미라>에 대한 반응
1822년 4월 13일 빈에서의 <젤미라> 초연과 그 이후의 공연들은 성공적이었고, <젤미라>는 인기 오페라의 반열을 향해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 보였다. 콘트랄토의 엠마 역을 이탈리아 교육을 받은 빈 출신의 파니 에컬린(Fanny Eckerlin)이 맡고, 레오치포 역을 피오 보티첼리(Pio Botticelli)가 맡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빈 공연의 주연 캐스팅은 나폴리와 동일했다(콜브란-로시니, 다비드, 노차리, 암브로지). 기존에 엠마 역을 맡았던 가수보다 뛰어났던 에컬린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로시니는 2막 전반 부분에 추가될 새로운 곡을 작곡했으며, 이 곡의 가사는 로시니의 친구이자 추종자인 쥬세페 카르파니(Giuseppe Carpani)가 썼다. 합창과 레치타티브, 두 파트의 아리아로 이루어진 이 곡은 엠마 역의 중량감은 물론 다소 빈약했던 2막 전체의 구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만 제외하면, 빈에서의 프로덕션은 오리지널 버전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더 열광적이었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의 반응은 그 이후의 다른 공연장에서는 재현되지 않았다. <젤미라>는 대부분의 주요 유럽 극장에서 적어도 한번씩 무대에 올랐지만, 이탈리아나 다른 국가에서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흥행카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기대는 로시니가 이탈리아를 위해 쓴 마지막 오페라이자 <젤미라>의 차기작이었던 <세미라미데 Semiramide>가 나오고 나서야 채워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시니가 파리의 로열 이탈리아 극장(Theatre Royal Italien)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1826년 3월 14일부터 총 9번의 <젤미라> 공연을 선사했다. 이 프로덕션에서 그는 원작의 상당부분을 뜯어 고쳤고, 이러한 변화는 로시니의 두 명의 주연 가수인 지우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와 지안 바티스타 루비니(Gian Battista Rubini)에게 추가적인 기회를 부여했다. 로시니는 극장의 라인업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소프라노였던 파스타를 위해 2막의 마지막에 아리아 'Da tespero, o ciel clement'를 추가했다. 또한 파스타만큼이나 유명한 테너였던 루비니를 위해서 오페라 마지막 부분을 수정하여 새로운 곡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곡들은 모두 2009년 페사로 프로덕션에 포함되어 있다.
<젤미라>의 음악에 대하여
<젤미라>를 구성하고 있는 2개의 막은 길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2막은 엠마를 위해 추가된 장면을 포함하더라도 2시간의 길이를 자랑하는 장대한 1막의 반에도 못 미친다. 레치타티브는 현악의 반주를 동반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다. 특히 1막에서 레치타티브가 차지하는 부분은 전체 마디수의 15%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이 단순히 레치타티브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리아로도 이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건 더 일관성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로시니가 나폴리 시절에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하지만 <젤미라>의 각 곡들은 연속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명확히 구분되어 있고 독립되어 있다. 물론 로시니가 쓴 가장 긴 곡이자 1막의 거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피날레는 이러한 관습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피날레에서 로시니는 계획된 음조와 동기를 광대하게 사용해 여러 곡들을 직물처럼 잇는다. (19세기에 인쇄된 <젤미라>의 악보는 상업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피날레의 각 곡들이 "합창", "삼중창을 동반한 대합창", "삼중창", "오중창", "종결부"로 분리되어 출판되었다.) 다시 말해 그는 이 피날레가 하나의 거대한 곡처럼 들리길 의도한 것이다.
<젤미라>의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면 앞에서 열거했던 것과 같은 진보적인 특징들과 전통적인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적인 이중성을 충분히 받쳐주지 못한 기법상의 문제들이 <젤미라>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다가 초연 후 16년 만에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젤미라>를 통틀어서 전통적인 솔로 아리아는 단 한 곡도 없다. <젤미라>의 11곡(엠마를 위해 추가된 곡을 포함하면 12곡) 대부분이 중창 이상의 곡이다. 듀엣 2곡(1막 젤미라-일로, 2막 일로-폴리도로), 듀엣티노 1곡(1막 젤미라-엠마), 삼중창 1곡(1막 젤미라-엠마-폴로도로), 오중창 1곡(2막 일로를 제외한 나머지 배역들)은 물론 도입부와 1막의 그랜드 피날레도 그렇다. 나머지 곡들 중에서 1막에서 처음으로 무대가 바뀌는 무덤 씬에서 등장하는, 짧지만 살을 에는 듯한 폴리도로의 카바티나만이 유일한 솔로곡이다. 다른 곡들에서도 주연 가수의 독창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합창과 함께 부르게 되어 있고, 한 곡만 제외하고는 다른 캐릭터들이 가세한다. 합창과 함께하는 일로의 카바티나, 대제사장과 사제들이 합창으로 등장하는 안테노레의 아리아, 합창이 가세하는 엠마의 아리아, 합창과 함께 하는 폴리도로와 젤미라의 아리아가 모두 이에 해당한다. 남성 합창, 여성 합창, 혼성 합창 등 다양한 형식의 합창곡들도 거의 대부분의 앙상블 곡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도 불구하고, 로시니는 다양한 템포의 긴 카바티나를 통해 주연가수들이 멋진 솔로를 뽐낼만한 충분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앞에서 언급했던 4개의 장면에서 뿐만 아니라, 안테노레가 부르는 도입부, 이중창, 삼중창, 오중창, 콘체르탄테 형식의 중창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솔로곡이 작품을 지배했던 이전 세대의 오페라 세리아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합창과 앙상블의 "침입"을 별로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플로렌스 출신 평론가가 말했듯이, <젤미라>의 풍부하고 화려한 성악의 향연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재미를 줄 수 있었다. 반면 로맨틱한 멜로드라마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요소들이 응집력있는 드라마로서의 오페라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라고 여길 수 있겠다.
<젤미라>의 전체 모양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요소는 로시니의 스케일 큰 화성 구조에 있다. 이 요소는 매우 긴 1막의 음악적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1막의 중심 조성은 d단조와 D장조이다. 도입부와 피날레가 모두 d단조로 시작하여 전조를 통해 D장조로 바뀌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음이 바뀌는 구조는 파이지엘로(Oaisiello)와 같은 18세기 작곡가들이 사용하던 완전5도가 아니라 로시니보다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이 선호하던 3도 진행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곡부터 다섯 번째 곡인 젤미라와 일로의 이중창까지 곡의 조성은 D장조/d단조로 시작해 f#단조로, 거기서 A장조와 C장조를 지나 E♭장조에 다다른다. (E♭장조는 오랫동안 사랑의 이중창의 전형적 조성으로 쓰여 왔다.) 그 이후부터는 안테노레의 음모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로시니는 화성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을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와 반대로 조성이 방향을 달리하여 3도씩 내려간다. 1막의 마지막 3곡은 A장조에서 f단조/F장조로, 여기서 d단조/D장조로 돌아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마지막 피날레는 일반적인 곡의 3, 4배에 달할 만큼 길기 때문에 당연히 세부적인 조성 변화가 존재하며, 실제로 이 피날레에서 조성의 변화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낸다. 합창이 등장하는 첫 부분은 이 막의 기본 조성인 d단조/D장조로 시작해서, 중간 부분에서는 일로의 슬픔(Il figlio mio)과 젤미라의 절망(Oh della Libia)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d단조로 바뀌다가, 이후 빠르게 반음씩 변화를 한 후(G-A♭-B♭-B-C), F장조의 5중창(La sorpresa, lo stupore)을 거쳐 긴박감 넘치는 마지막 곡(Fiume dhe gli argini rompe)을 통해 다시 d단조/D장조로 돌아온다.
<젤미라>에서 로시니는 최대의 효가를 내기 위해 산 카를로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사용했다. 꽉 찬 편성(4대의 혼, 2대의 트럼펫, 3대의 트롬본, 팀파니, 심벌, 베이스 드럼, 일반적인 목관과 현악)의 관현악이 서곡 없이 작품을 시작한다. 대신 관현악이 악상을 제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입부의 합창곡(Oh sciagura!)으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그 이후에도 관현악은 계속 합창과 함께 오페라의 다이나믹한 부분들을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일로의 카바티나 장면, 1막 피날레, 오중창, 2막 피날레) 게다가 <젤미라>의 공연을 위해선 관악대까지 필요로 한다. 관악대의 소리는 처음에는 삼중창 장면 중 무대 밖에서 들려오지만 이어지는 일로의 카바티나 장면과 각 막의 피날레에서는 큰 소리로 연주된다. 로시니 시대의 몇몇 평론가들은 관현악의 볼륨감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때때로 율리시스가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취하게 될 때가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귀를 막아버리는 일 말이다." 하지만 몇몇 곡들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색채감을 섬세하게 이글어내는 로시니의 음악적 능력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특정 악기의 조합을 이용해 목관의 독주 선율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인 하프와 잉글리시 혼의 결합은 <젤미라>에서도 듀엣티노(Perche mi guardi e piangi) 곡에 등장한다. 또한 하프는 빈에서 엠마를 위해 추가된 장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줄거리 === <박응식 번역>
막이 오르기 전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 이미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소 복잡하다. 무대는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 긴 세월 동안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레스보스 섬을 통치해온 폴리도로 왕에겐 특별히 사랑하는 딸, 젤미라가 있다. 젤미라는 트로이의 왕자인 일로와 결혼했는데, 일로가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나자 이를 틈타 미틸레네의 영주 아조르가 섬을 침략한다. 아조르는 과거에 젤미라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폴리도로를 죽여 복수하고자 한다. 젤미라는 간신히 레스보스 선조 왕들의 무덤 중 지하실에 폴리도로를 숨긴다. 그런 후 그녀는 아조르를 찾아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척하며 케레스 신전에 아버지가 숨어있다고 거짓말한다. 젤미라의 말을 믿은 침략자는 신전을 불태울 것을 명하고 늙은 왕은 화재 속에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곧 아조르 그 자신도 안테노레의 계략에 의해 희생자가 된다. 레스보스와 미틸레네의 왕을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안테노레가 레오치포의 도움으로 아조르를 살해한 것이다. 오페라는 이 암살이 일어난 직후부터 시작된다.
1막
무대는 레스보스 섬의 성벽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바닷가 근처의 진영. 미텔레네의 병사들이 그들을 이끌던 지도자의 비극적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다. 레우치포는 아조르의 복수를 열망하는 척하며 살인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는지 재차 큰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병사들은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레우치포는 군대의 지지를 얻어 안테노레가 아조르의 후계자임을 선포하고 그와 함께 레스보스 왕위 찬탈의 음모를 꾸민다.
그들 계략의 유일한 걸림돌은 젤미라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다. 그래서 두 공모자는 아조르의 죽음과 그녀의 아버지 죽음 모두를 그녀의 책임으로 몰고 가기로 한다. 젤미라는 이제 살인과 존속살인의 이중 범죄 혐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심지어 그녀의 충실한 친구 엠마조차 젤미라가 무덤 아래 지하실로 인도해 살아 있는 폴리도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 그녀를 의심한다. 젤미라와 폴리도로는 행복한 재회의 포옹을 나눈 뒤, 어찌될지 모르는 앞날을 두려워하면서도 서로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사이 주피터 신전 앞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일로 왕자를 환호하고 있다. 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한다. 부부가 상봉하지만 젤미라는 남편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끔찍한 혐의들을 바로 말할 수 없어 몹시 괴로워한다. 이런 상황 덕분에 안테노레와 레우치포는 그들이 꾸민 젤미라의 범죄를 손쉽게 일로에게 알린다. 아들의 신변에 위험을 느낀 젤미라는 엠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왕궁의 알현실에서 백성들의 축복 속에 안테노레가 레스보스 왕의 자리에 오른다. 일로가 아들을 걱정스럽게 찾아다니다 쓰러진 사이, 레우치포는 그를 칼로 살해하려 한다. 젤미라가 몸을 던져 그를 막고 단검을 빼앗지만 레우치포는 교활하게 상황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바꿔 그녀가 단검을 쥐고 있는 동안 일로에게 그녀가 살해하려 했다며 조심하라 말한다. 이렇게 되어 레우치포는 일로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아조르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 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결백하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젤미라는 감옥으로 끌려간다.
2막
왕궁의 알현실. 레우치포가 젤미라의 옥중서신을 가로채 안테노레에게 전달한다. 편지에는 젤미라가 자신의 결백을 일로에게 설명하면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다. 그들은 편지의 내용을 통해 폴리도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레우치포는 젤미라를 미행하기 위해 그녀의 석방을 제안한다.
한편, 일로는 레스보스의 성벽 밖에서 자신의 불행한 결혼을 한탄하다가 우연히 폴리도로를 만나 젤미라를 해하기 위해 조작된 모함의 진실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은 따뜻한 포옹을 나눈 뒤, 폴리도로는 구조 작전이 실행될 때를 기다리며 무덤의 은신처로 돌아가고 일로는 아내를 찾기 위해 황급히 떠난다.
젤미라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자신의 결백을 확신한 남편의 개입 때문에 석방된 것으로 믿는다. 그녀는 안테노레와 레우치포가 몰래 엿듣고 있음을 모른 채, 이 상황을 엠마와 논의한다. 그래서 음모자들은 일로가 지금쯤 진실을 깨닫고 폴리도로를 구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란 걸 알아차린다. 이렇게 되자 두 악당은 젤미라에게 마지막 덫을 놓는다. 즉, 일로가 이미 폴리도로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처럼 꾸며 그녀가 무심코 아버지의 은신처를 밝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폴리도로를 찾아내어 붙잡는다. 불행한 젤미라는 용감하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며 대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엠마는 안테노레가 가능한 빨리 두 사람 모두 죽일 의도임을 깨닫자 급히 일로를 찾아가 구출 작전을 서두르라 재촉한다.
마지막 장면의 무대는 레스보스의 감옥 안이다. 젤미라는 자신과 아버지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한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안테노레와 레우치포가 그들이 계획한 범죄를 실행하기 위해 들어온다. 그런데 치열한 전쟁의 함성과 함께 성벽에 엄청난 공격이 가해지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안테노레가 폴리도로를 죽이려 하자 젤미라는 즉각 가슴에서 단도를 뽑아 아버지를 방어한다. 마침내 일로가 칼을 휘두르며 성벽이 무너진 틈을 통해 들어온다. 뒤이어 그의 병사들과 보좌관 에아치대, 레스보스의 국민들, 엠마와 젤미라의 어린 아들도 그를 따른다. 젤미라는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행복하게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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