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426
제7권 영웅낙화
제52장 한중왕 유비
8) 한중 철수
장로가 통치하던 시절 한중은 비교적 안정된 질서 하에서 인민들은 생활이 윤택했다. 삼보와 남양에서 유민들이 밀려들어와 호구 수가 십만 명을 넘었다. 조조는 비록 한중 땅은 유비에게 내어주지만 백성들까지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찍이 조조가 장로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 화흡이 한중의 백성들을 관중으로 다 철수시키자고 건의한 바가 있었다. 적절한 시기를 보아 군대와 함께 백성들을 다 빼어내면 한중을 수비하느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과 현에 관리를 배치하고 관리하느라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화흡의 주장이었다. 조조는 한중을 유비에게 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화흡의 건의를 듣지 않고 하후연과 그 밖에 많은 장수들과 관리들을 한중에 주둔케 했었다. 결국 조조는 헛심만 잔뜩 쓰고 난 후 백성들을 다 이주시키고 한중을 포기했다.
조조는 마침내 한중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서쪽 방면의 방어선은 진령산맥으로 후퇴시켰다. 이 지역에서의 전략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했다. 장합에게 가절을 주어 관중 방어선의 전 병력을 감독하게 하고 그 지휘소를 진창(陳倉)에 두게 했다. 진창은 양평관에서 관중 평원으로 나오는 인후에 해당하는 지점에 위치했다.
또 조조는 장차 한중의 수비군을 철수시키게 되면 유비가 북쪽으로 무도(武都)의 저(氐) 족들을 끌어들여 관중을 압박할까 걱정이 되었다. 조조가 옹주자사 장기에게 자문을 구했다. 장기는 유비가 한중을 취하러 나온 초기부터 조홍과 함께 진군하면서 군량과 병력을 지원하는 일에 종사했다. 조홍이 하변에서 오란과 뇌동을 격파할 때 장기의 자문과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장기가 나름대로의 계책을 제시했다.
“저족의 부락들에 사자를 보내 저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하십시오. 북쪽으로 나가 골짜기로 빠져나갈 것을 권하면서 먼저 도착하는 무리들에게는 후한 포상과 지원을 약속하십시오. 이리하면 서로 경쟁이 붙어 자발적으로 이전을 할 것입니다. 먼저 온자는 그만큼 많은 혜택을 받을 것이고 출발이 늦은 자들은 그것을 보고 반드시 분발할 것입니다.”
조조가 장기의 계책에 따랐다. 자신은 곧바로 한중에서 여러 군대들을 이끌고 관중으로 나오면서 장기에게는 별도로 영을 내려 무도(武都) 군에 가서 저(氐) 족 오만여 부락을 옮겨 부풍(扶風) 군과 천수(天水) 군의 경계에 가 살게 했다.
장기는 이민족들을 상대로 꼼수를 쓰는 일에 능했던 것 같다. 일찍이 조조가 서량의 백성들을 옮겨 하북(河北)의 민호를 보충하려 하자 농서(隴西),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백성들이 놀라 서로 선동을 주고받으며 크게 동요했다. 여기저기서 소란이 연이어 일어나 량주 전체가 불안해졌다. 장기는 문제가 된 세 개군 출신으로 장수나 관리가 된 사람들 모두에게 휴가를 주고 고향에 돌아가 집과 주거지를 수리하고 물레방아를 만들게 했다. 동향 출신의 장수나 관리들이 고향에 돌아와 항구적으로 정착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이지역의 민심이 바로 안정되었다.
조조가 관중으로 물러났을 때 무위(武威) 군을 점거하고 있던 지역 군벌 안준(顏俊)이 사자를 보내왔다. 안준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을 조조에게 보내 인질을 삼게 하겠으니 군사적 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하서 회랑에는 안준 이외에도 장액(張掖)의 화란(和鸞), 주천(酒泉)의 황화(黃華), 서평(西平)의 국연(麹演) 등이 다 각자 군을 점거하고 조정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면서 서로 공격을 일삼았다. 조조가 안준의 제안에 대해 장기에게 묻자 장기가 말했다.
“안준 등이 지금은 겉으로는 국가의 위세를 빌리고자 하지만 안으로는 오만하고 거칠어서 계획이 정해지고 세력이 족해지면 후에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시급한 일은 촉을 평정하는 것이니 우선은 저들을 존속시켜 서로 싸우게 하십시오. 오직 변장자(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처럼 앉아서 기다리다가 저들이 죽어나자빠진 후에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과연 조조가 한중에서 철군한지 일 년여 만에 화란이 안준을 죽이자 무위 사람 왕비(王祕)가 또 다시 화란을 죽였다. 이 틈을 노려 조정에서는 량주를 폐지하고 삼보(三輔)에서 서역(西域)까지 다 장기가 다스리고 있는 옹주(雍州)에 소속시켰다.
조조가 장안에서 동쪽으로 돌아갈 때 자신을 대신할 유부장사(留府長史)를 선발해 장안(長安)에 주둔하면서 수비를 총괄하게 해야 했다. 인사담당자들이 여러 사람을 선발해 추천했으나 조조가 보기에는 다 부적합했다. 이윽고 조조가 영을 내려 말했다.
“천리마를 풀어놓고 타지 않고 있으면서 어찌 황급히 다시 찾는 것인가?”
조조는 두습을 유부장사에 임명해 관중에 주둔하게 했다.
두습은 천하대란이 일어났을 때 사마지, 왕찬 등과 함께 형주로 피난했었다. 두습은 형주의 유표가 대업을 이룰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 장사군에서 몸을 피했다. 건안 연간 초에 조조가 천자를 허도로 영접하자 두습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므로 조조가 그를 서악(西鄂) 현장에 임명했다. 서악현은 남쪽으로 형주의 유표와 경계를 접한 곳이었다. 유표의 군대가 수시로 침입했으므로 그 당시 현장과 관리들은 백성들을 모두 거두어 들여 서악 현성을 지켰으므로 백성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들판은 황량해지고 백성들은 곤핍해졌으며 창고는 텅 비었다. 두습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얻어야만 단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곧바로 영을 내려 노약자들은 성밖으로 내보내 각자 흩어져 농사를 짓게 하고 강한 장정들만 남아 성을 수비하게 했다. 서악현의 관리와 백성들이 다 기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주에서 보기 만 명의 병력을 보내 성을 공격했는데 성중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포함해 방어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오십 여 명에 불과했다. 두습은 곧바로 이들을 불러 모아 출정에 앞서 함께 서약을 맺는 의식을 거행하고자 했다. 두습은 맹세하기 전에 먼저 친척이 밖에 살고 있어 제 힘으로 보호하고 싶다는 자는 성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의식에 참여한 오십여 명의 사람들은 다 땅에 엎드려 절하며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서했다.
두습은 손수 화살과 돌을 잡고 병사들과 힘을 합쳤다. 오십 여명의 관리와 백성들이 두습의 태도에 감격해 다 그의 명령대로 따랐다. 일제히 적진을 향해 돌격해 수백 급의 수급을 참했으나 곧 두습의 병력 삼십여 명이 죽고 나머지 열여덟 명은 다 창에 찔려 부상을 당했다. 적은 손쉽게 서악성을 빼앗아 입성할 수 있었지만, 두습은 끝까지 부상당한 관리와 백성들을 지휘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오십 여 명이 모두 다 죽거나 다쳤지만 배반한 자는 없었다. 두습은 흩어진 백성을 수습해 마피(摩陂)에 있는 군영으로 옮겼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사모해 따르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했다.
이때 두습의 용기를 칭찬하는 일화가 있다. 건안6년(201년) 유표가 서악현을 공격했을 때 서악 현장 두습이 현의 남녀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성을 수비했다. 그때 남양(南陽) 군의 공조(功曹) 백효장(柏孝長)이 성중에 있었다. 그는 적병이 공격하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 떨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서로 공격하기를 반나절이 지나자 점차 감히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날이 밝자 방안에 서서 소리를 들었다. 이튿날 집을 나와 소식을 물었다. 사오일이 지나자 그제야 다시 성벽의 난간을 잡고 머리를 내밀 수 있게 되었다. 백효장이 두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기도 연습이 가능합디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표를 올려 천거했으므로 두습은 의랑에 임명된 채 종요의 군사 일에 참여했다. 순욱(荀彧)이 다시 두습을 천거하자 조조는 그를 승상군좨주(丞相軍祭酒)로 삼았다.
두습은 조조의 신임을 깊게 받았다. 위나라가 처음 건국되자 두습은 왕찬(王粲), 화흡(和洽)과 함께 시중(侍中)으로 임용되었다. 왕찬은 박학다식했으므로 조조가 놀러 다닐 때 항상 함께 출입하며 수레에 동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존경을 받는 점에서는 화흡과 두습에 미치지 못했다. 두습이 한번은 조조를 독대했는데 한밤중이 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왕찬의 성격이 조급하고 경쟁적이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흡에게 물었다.
“조공께서 두습과 무엇에 대해 의논했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화흡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천하의 일을 어찌 홀로 다 할 수가 있습니까? 경은 낮에 시중을 들었으면서도 이처럼 답답해하시는 것은 이 일까지도 겸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후 두습은 영승상장사(領丞相長史)가 되어 조조를 따라 장로를 토벌하러 한중에 이른 후 조조가 회군할 때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어 남아서 한중의 군사 일을 감독했다. 이 시절 두습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보다듬고 소통할 기회를 열어놓았으므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낙양과 업성으로 옮겨간 자가 팔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후연이 유비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장합, 곽회 등과 합심해 군을 잘 수습했다. 조조는 두습이 한중을 잘 다스렸듯이 관중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