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이건희 기증관'이 될 송현동 부지
경복궁을 보호하는 숲
외국 정부 소유의 토지
재벌이 개발하려던 부지
송현동 땅에 녹지 광장이 들어섰는데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비밀의 땅이 열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담장이 쳐진 곳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왕실과 세도가가, 친일파와 일제가, 해방 이후에는 미국 대사관이, 그리고 여러 재벌이
소유해 왔던 땅이기도 했다. 세간에 송현동 땅 혹은 송현동 부지로 알려진 그곳이다.
서울시는 광화문 인근 율곡로, 안국동에서 광화문 방향 도로 변에 있는 송현동 땅을 지난 7일부터 개방했다. 서울광장 면적 3배에 달하는, 그동안 담장 안 비밀의 공간이었던 3만7천117㎡ 규모의 부지를 녹지 광장으로 만들어 시민에게 선보인 것이다.
(2022. 10. 12) 서울 종로구 송현동 땅에 조성된 녹지 공원 '열린 송현'.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비밀의 땅 송현동 부지
송현동(松峴洞)은 경복궁 바로 옆 동네다. 경복궁 동쪽 담장 옆을 지나는 삼청로는 백악산에서 발원한 하천인 ‘삼청동천’을
복개한 길이다. 송현동 땅은 그 삼청동천 동쪽에 자리한 언덕이었다. 송현(松峴)이라는 이름처럼 소나무가 가득한 언덕이었다고 한다. 왕실 소유였던 이 일대는 경복궁을 보호하는 완충지대이기도 했다.
옛 지도에서 송현동 땅을 확인할 수 있다. 1780년경 제작된 지도 <한양전도>에는 경복궁 옆에 자리한 숲으로 표현되어 있고, 1864년에 제작된 <수선전도>에는 ‘송현’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송현동 땅은 왕실 소유였지만 조선 말기에 주인이 바뀌게 된다. 권문세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이 땅을 사들여 집을 세운 것. 왕실 소유 재산까지 소유할 수 있었던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인 윤덕영, 윤택영 형제가 소유했었다. 이후에는 조선식산은행의 소유로 넘어가 사택으로 쓰였다. 이때부터 송현동 부지는 ‘빼앗긴 땅’이 되었고 외국 정부 소유의 토지가 된다.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소유권이 돌아오지 않고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가 되어 1997년까지 쓰였기 때문이다.
한양전도에 송현동 땅이 경복궁 동쪽에 자리한 숲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수선전도에 '송현'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빨간 원이 송현, 파란 네모는 경복궁.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재벌이 눈독 들인 송현동 부지
이 땅을 삼성 측에서 미술관 자리로 눈여겨봤다. 오늘날 삼청동 등 북촌 일대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등 크고 작은 미술관이
많다. 그러니 율곡로 도로변 넓은 부지를 삼성미술관 자리로 낙점한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항간에는 외국에 미술관 설계까지 맡겼다는 설이 있었지만 IMF로 토지 매입 자체가 무산되었다.
그러다 2006년에 삼성생명이 이 땅을 인수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송현동 땅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 부지에 걸린 규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규제를 건축 설계 측면에서 보면, 고도제한 16m, 건폐율 60% 이하, 용적률 200% 미만이어야 한다.
또한 이 땅은 ‘문화재 보존 영향 검토대상’ 구역이다. 게다가 덕성여중고와 바로 붙어 있어 ‘교육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관계 기관 심의에 통과해야 한다.
이 외에도 송현동 땅은 ‘역사문화특화경관지구’이고 무엇보다 ‘대공방어협조구역’이다.
4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수도방위사령부와 건축을 협의해야 하는 것.
결국 삼성생명은 부지 매각을 택하게 되었고 2008년 대한항공이 이 땅을 매입하게 된다.
송현동 일대를 촬영한 2001년 항공사진. 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였던 건물이 보인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대한항공은 송현동 땅에다 ‘7성급 한옥호텔’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여러 규제 중에서도 ‘교육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이 발목을 잡는다. 호텔이 학교 환경에 저해 요소가 되기 때문에 건축 계획이 계속 반려되었고 서울시교육청에 제기한
소송에서도 최종 패소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한항공은 한옥호텔 건설을 위해 전방위 활동을 벌인다. 마침 '창조경제' 열풍이 불었고 주요 재벌이 모인 ‘민관합동창조경제추진단’을 통해 ‘한옥호텔’ 건설의 당위성을 홍보했다. 박근혜 정부의 관심 사업이었던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과 연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너 일가 리스크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업 자체가 사그라들었다.
결국 대한항공은 자금난으로 2020년 이 땅을 내놓는다.
하지만 온갖 규제 때문에 개발 불가능한 땅을 누가 나서서 살 수 있을까.
이에 서울시가 구매 의사와 함께 공원화 계획을 밝힌다. 양측은 가격 산정과 매각 방법에 어려움을 겪지만 합의점을 찾아간다. 결국 2021년 3월 LH가 송현동 부지를 대한항공으로부터 사들이는 방식을 택하고, LH는 이후에 이 땅을 서울시가 소유 중인 가락동의 (구)성동구치소 부지와 교환하기로 한다.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설 송현동 땅
한편 2021년 4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들은 고인이 생전에 모은 23,000점에 달하는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정부는 이 미술품들을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추진한다. 전국의 여러 지자체가 이건희 기증관 유치에
눈독 들였지만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의 송현동 부지로 결정되었다.
송현동 땅에 조성된 녹지 공원 '열린 송현' 전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열린 송현을 찾은 시민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송현동 땅에 공원을 만들기로 했던 서울시는 이 부지에 녹지 광장을 조성해 기증관 건립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2024년 12월까지 시민에게 개방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광장은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임시 개장인 것이다.
서울시는 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던 4m 높이 담장을 1.2m 돌담으로 낮춰 바깥에서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가운데에는 1만㎡ 넓이의 잔디 광장을 만들고, 광장 주변에 코스모스와 백일홍 등 야생화 군락지도 조성했다.
이제 안국동에서 광화문 방향 도로 오른쪽에 높은 담장 대신 너른 공원, '열린 송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열린 송현 정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열린 송현 정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열린 송현’에는 오전부터 시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서울 강북 시내에서는 보기 드문 너른 잔디밭과 야생화 사이를 걸으며 가을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만여 평 너른 녹지 공원이 된 송현동 부지에는 예전의 일본 식산은행 관사나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 흔적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항공사진으로 확인하면 2006년까지는 건물 형체를 볼 수 있다. 다만 수풀이 우거져 폐허가 된 듯한 모습이다.
이후에는 2016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건물 자리의 흔적만 볼 수 있다.
아마도 2006년과 2016년 사이에 헐린 모양이었다.
"도시 한 가운데에서 잔디밭과 야생화들을 볼 수 있어서 눈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여기에 이건희 기증관까지 들어선다니 무척 기대가 되네요."
이 땅을 놓고 그동안 오고 간 사연들은 야생화 밑으로 묻힌 것일까. 시민들은 현재 모습에 만족해 하고 미래 모습에 기대를
품는 듯 보였다. 땅 소유주는 서울시로 바뀌게 되었지만 그 땅에 미술관을 짓고 싶어 한 삼성 측의 바람은 아무튼 이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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