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의 종교 -2
페니키아들이 건설한 카르타고에서 1921년 미국 발굴단 손에 의해 놀라운 유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2만 여개에 달하는 작은 점토구이 용기들 안에는 숯처럼 까맣게 탄 어린이들의 유골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 유적에는 <예레미야서> 19장에 나오는‘죽음의 골짜기-토펫’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들은 바알의 산당들을 세우고 저희 자식들을 불에 살라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쳤는데, 이는 명령한 적도 말한 적도 내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오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이곳이 더 이상 토펫이나 벤 힌놈 골짜기가 아니라 살육의 골짜기라 불릴 것이다.
이 유적의 발굴로 페니키아인의 인신공양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훗날 고성능 검측기계들이 개발되면서, 정밀한 측정이 이루어지자 기존의 상식은 심각한 의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우선 유골들 중 상당수는 양이나 조류, 작은 동물들의 것들이었고, 사산한 태아들의 유골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물들의 유골은 유대인처럼 페니키아-카르타고인도 동물을 번제물로 바쳤다는 유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병사로 추정되는 유골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인신공양의식이 사실은 병이나 사고로 죽은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라는 반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인신공양설도 강력하지만 일부에서는 인구조절책으로 보기도 하고 몇몇 유력한 가문이 지배하는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에서는 각 집안이 동등한 희생을 치른다는 공유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인신공양 의식의 진위여부를 떠나 두 개는 확실해 보인다. 첫 번째로는 문화적 이질감이 그들의 종교과 의식을 실제보다 더 공포스럽게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정보 교류와 교통이 극도로 발전한 현대에서도 종교와 민족적 편견으로 인한 참사가 여전한데 고대에는 이런 현상이 더 심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포에니 세계의 적은 서구 문화의 양대 축을 이룬 헬레니즘-로마 세계와 일신교의 기초가 된 헤브라이즘 세계였다. 포에니 세계는 그들의 강력한 적이었고, 따라서 그 세계의 종교를 사교로 몰고 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포에니 세계는 자신들의 기록이 후세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종교에는 유대교의 신학은 물론이고, 이집트의 종교가 가진 정교한 체계도 없었으며, 그리스-로마 신화가 가진 풍성한 이야기 거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종교개혁은 비슷한 것도 전혀 없었다. 지겹도록 반복할 수밖에 없지만 기록이 남지 않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페니키아의 후계 국가인 카르타고가 멸망한 다음 정확하게 500년 후에, 그 땅에서 그리스도교 최고의 신학자 아우스구스티누스가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