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30분 출근 전철을 탔다. 전철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검은 머리들이 생경했다. 어느 외국인이 서울 전철역의 검은 머리 물결을 보고 섬찟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전철 안의
분위기는 어느 종교의 예식 보다도 엄숙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몇 외에는 모두 고개를
숙여 휴대폰에 집중해 있는 모습이 마치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 나도 앉지도 못하고 몸을 지탱할 공간이
생기자 휴대폰을 꺼내 성령의 교통 대신 메시지로 교통하기 시작했다.
대단히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호주 살다 한국에 와서 전철을 타면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첫
인상이 컬러로 된 세계에서 흑백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이것은 단순히 색깔의 문제가 아니다.
전철에서 가만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다 보면 왜 그렇게들 표정들이 심각한지 호주에서 흔히 백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헬렐레 낼렐레’ 하게 태평해 보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내 얼굴도 그런가 해서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해보려고 신경을 쓰게 된다.
아무리 ‘나라다운 나라’를 외치는 시대가 와도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기야 수 천년 동안 형성된 인상이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변 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변한 것은 점점 가물어 가는 대통령의 얼굴인 것 같다. 5,000년 동안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았던 민족이라서 요즘도 혹시라도 트럼프의 비위라도 상하게 할까 보아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가?
첫 날의 행선지는 서초동 법원이었다. 법원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법으로 먹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갈등과 불만을 다루는 법원이 정의가 강같이 흐르기를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관예우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중학 2학년 때이었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수표를 부도 낸 혐의로 구속이 되자 어른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를 찾아야 한다고 수근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그 질긴 인연들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서 정의를 메말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과 권력의 그림자가 짖게 들이어 있는 법원을 보면서 법이 조금만 더 정의롭고 조금만
더 상식에 가까웠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인혁당 피해자, 강기훈 등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오늘도 법원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법원을 규탄하는 갖가지 벽보들에서 오늘도 그 절실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 어려운 문제를 자문해주는 박응석 변호사를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정의와는 상관이
없이 승패만 남는 변호사의 세계에 대하여 들으면서 다시 한 번 발 딛고 살고 있는 현실의 냉엄함을 느끼게 되었다.
대화 중에 박 변호사가 “강수산나 검사와 연락하고
지내세요?”라고 물어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다. 이유는 박변호사는 나와
강 검사와의 사이의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웃고 나서 박변호사가 앱으로 검색을 해보더니 “지금 부장 검사로 승진 해서 남부지청에 있네요. 한 번 만나 보시지요?”해서 또 한 번 웃었다.
사건의 내역은 이렇다. 때로 바야흐로 2012년 10월 어느 날, 내가 시드니에서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을 상영 하고자 이를 사전에 총영사관에 알리자 때
마침 총영사관에 파견되어 있던 강수산나 검사(용산참사 수사 담당)가
나를 호주연방 경찰에 외교관을 협박했다고 신고를 했다. 나는 당연히 여론을 통해서 반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여론을 통하여 그 이후 몇 일 동안 치열하게 공방전을 펼쳤다.
애초에 내가 강 검사에게 “당신이 관련된 영화를
상영하니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친절하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 '고맙다'고 했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을 것을 오히려 법의 힘만 믿고 나를 신고 함으로서 사건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온라인에서 강수산나 이름을 검색하면 용산참사 수사 사건과 더불어 나와의
악연도 반드시 나온다. 즉 그녀는 법은 알아도 세상을 몰라서 싸움꾼인 나에 대한 대응을 잘못해서 결과적으로 영화의 흥행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도움이 될 일이 없었다.
이 싸움에서 강 검사는 강자였고 나는 약자였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강장의 승리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세상은 전혀 질서정연하지 않고 무질서와 혼동과 갈등과 투쟁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은 어느 편이냐 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법과
권력은 강자 편에 서지만 무릇 종교나 진리는 약자 편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약자 편에 서지 않은 종교는
집안에서 발생하는 오물을 처리하는 하수도일 뿐이다. 물론 집에는 하수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수도가 상수도 보다 크다면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종종 현실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