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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 ① 삼강←내성천 봉화(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봉화 내성천→ 삼강]
2021년 11월 18일(목) [별도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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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금씨(奉化琴氏)
* [금씨의 연원] ▶ 금씨(琴氏)는 위국(衛國)에 연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 때 공자(孔子)의 제자인 금뢰(琴牢)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응(琴應)이 기자(箕子)와 함께 동쪽의 조선에 와서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 자체가 실존 인물이 아니며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족보를 꾸민 것으로 보인다. 실제는 한반도 토착민으로 보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시조 금용식(琴容式)은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봉되고, 태사(太師)를 역임하였다. 금용식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금씨는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중시조, 즉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봉화금씨(奉化琴氏) 중시조(中始祖)
고려시대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
금의(琴儀, 1153~1230)는 계양(桂陽, 지금의 경기도 김포) 출신이며 초명은 금극의(琴克儀)이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이다. 1184년(고려 명종 14)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신종(神宗) 때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가 되었으며, 희종(熙宗) 때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 등을 지냈다.
1211년(강종 즉위년) 왕의 즉위에 대한 책명사의 접대에 공을 세우고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院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1215년(고종 2)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修國史),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220년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올랐다.
1230년(고종 17) 향년 78세로 졸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금의(琴儀)의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지었다. 비문 중에 ‘바둑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국기사(國棋史)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묘지가 장릉(章陵, 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禁標) 안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祥雲面) 하눌리(下訥里, 한누리)에 단소(壇所)를 만들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단소(壇所)는 실제의 묘가 아니라 선대 조상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 영렬공 단소가 있는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한누리)는 내성천의 지천인 구천의 상류에 있다. 봉화읍에서 915번 지방도로(예봉로)를 타고 남쪽으로 5km 거리에 있다. 상운면 하눌리(한누리)는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시대
금의(琴儀)는 고려 고종 때의 대학자(大學者)로 많은 문하생을 두었으며, 그리하여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 ‘금학사(琴學士)’로 등장한다. 다음은 《악장가사》에 실려 전하는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제1장) 전문(원문)이다.
元淳文(원슌문) 仁老詩(인노시) 公老四六(공노사륙)
李正言(니졍언) 陳翰林(딘한림) 雙韻走筆(솽운주필)
沖基對策(튱긔대책) 光鈞經義(광균경의) 良鏡詩賦(량경시부)
위 試場ㅅ景(시댱ㅅ경) 긔 엇더하니잇고
琴學士(금학사)의 玉笋門生(옥슌문생)
琴學士(금학사)의의 玉笋門生(옥슌문생)
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 —〈한림별곡(翰林別曲)〉(제1장)
[현대문 해석]
유원순(兪元淳)의 문장, 이인로(李仁老)의 시, 이공로(李公老)의 사륙변려문(四六騈麗文),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華)의 쌍운(雙韻)을 맞추어 써 내려간 글, 유충기(劉沖基)의 대책문(對策文), 민광균(閔光鈞)의 경서(經書) 해의(解義), 김양경(金良鏡)의 시(詩)와 부(賦), 아아 과거 시험장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참으로 굉장합니다.) 금의(琴儀)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아아, 나까지(나를 위시하여) 몇 분입니까?(참으로 많습니다.)
‘위 시장ㅅ경 긔 엇더하니잇고’는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들의 특출한 재능을 과시하는 의미가 강하게 담긴 표현이다. 즉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득의만면(得意滿面)한 과시의 반어적 표현이며 3, 3, 4조의 율조는 ‘정읍사’ 이후 향가 문학에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전통적 율격의 교량적 구실을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3세기 초(고려 고종) 한림원의 여러 유생들이 지었다고 전하는, 총 8장으로 되어 있는 최초의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이다. 후소절(後小節)에 나오는 금학사(琴學士)는 금의(琴儀)를 가리킨다. 당시 금의는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관)를 지내면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여, 최자(崔滋)를 비롯한 뛰어난 문하생들을 배출했다.
경기체가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경(景) 긔 엇더하니잇고’에서 유래되어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 또는 ‘경기체가(景幾體歌)’라고 불리게 되었다. 분절체(각 연은 2단 구성)이며, 3, 3, 4조의 3음보 율격을 지니고 있다. 내용상 양반문학이고, 작가의 감정을 직서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묘사적으로 나타내는 점에서 교술시(敎述詩)이다. 즉 주위의 사물의 이름을 열거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학사적 의의는 향가와 시조나 가사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형태이다. 고종 때 한림제유(翰林諸儒)가 지은 〈한림별곡(翰林別曲)〉이 경기체가 최초의 작품이고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을 거쳐 조선 시대에도 사대부들에 의해 계속 창작되었으나, 선조 이후에는 그 명맥이 끊어지지만 철종11년 1860년 민규의 <충효가>를 최후로 보기도 한다.
[좌] 열렬공(英烈公) 금의(琴儀)가 졸(卒)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22권 세가 22권고종17년(1230년) 1월 27일자 기록
[우] 〈한림별곡(翰林別曲)〉(제1장) 금학사(琴學士) 옥순문생(玉芛門生)이 보인다. 《고려사(高麗史)》71권 지(志) 25권 기록
고려시대, 금의(琴儀)의 후손
중시조 금의(琴儀)의 큰아들 금기(琴耆)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정6품), 둘째 아들 금규(琴揆)는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정6품), 넷째 아들 금휘(琴暉)는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종3품)에 올랐으며, 다섯째 아들 금희(琴禧)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국가의 조례, 의례 등을 맡아보던 합문의 관직)를 지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넷째아들 금휘(琴暉)는 대장군(大將軍 종3품)으로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우(崔瑀)가 폐위시킨 희종(熙宗)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고 노지정(盧之正)·김희제 등 뜻을 같이하는 무인들과 모의하다 누설돼 최우에 의해 죽었다.
금규(琴揆)의 7세손 금훈(琴薰)은 ‘삼별초(三別抄)의 난(亂)’ 때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반군에게 항복을 권하는 초유문(招諭文)을 가지고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추자도(楸子島)에 표박(漂迫)하다가 돌아와 정세를 알렸으며, 벼슬은 공부시랑(工部侍郞, 정4품 차관), 경상도안찰사(按察使)에 이르렀다. * ‘초유사(招諭使)’는 ‘전란 중에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직’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봉화금씨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금씨(琴氏)는 태조 이성계와 통혼하여, 가문의 도약을 위한 계기를 마련했으나, ‘왕자의 난’에 휘말려 곤경에 처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해 왔다. 금의(琴儀)의 후손 금인배가 태조의 넷째아들 회안대군 방간을 사위로 삼아 국혼(國婚)을 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밀고를 받은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패하여 귀양 가게 되자, 처족인 금씨도 곤경에 처한 것이다.
이후, 조선조에 봉화 금씨는 문과 급제자만 14명을 배출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금회(琴淮, 12세손)의 셋째 아들 금휘(琴諱)가 세조(世祖) 때 문무(文武) 양과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담양 군사(潭陽郡事) 금극해(琴克諧)의 아들 금유(琴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에 오르고 세종(世宗) 때 전라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청렴결백해서, 호남지역을 안찰(按察)할 때 탐학한 수령들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그의 아들 금이영(琴以詠)은 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인(舍人, 의정부의 정4품)을 지냈는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그에게 보내는 글에 "선생의 재주는 옛 사람도 비견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시문(詩文)에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금곤과 금숭 형제는 금숙(琴淑)의 아들로, 문종 때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봉화금씨 군위군종택(軍威公宗宅)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
○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 김포)․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 1937년판)까지 관향(貫鄕)을 봉성(鳳城)으로 칭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고감2리에는 군위공(軍威公) 금계(琴啓, 1439~1497) 종택이 있다. 군위공종택은 내성천 지류인 토일천 상류에 있다. 봉화읍에서 918번 지방도로(봉명로)를 타고 15km, 봉성(면)을 경유 명호(면)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군위공 금계는 탁행(卓行, 매우 뛰어난 행실)으로 천거되어, 군위현감(종6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부모의 병환이 있자 효정(孝井)에서 약을 달여 완치하였고, 친상을 당하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소금과 죽으로 살면서 슬퍼하자 세상에서 그를 효자라 칭하고, ‘효를 이야기하려면 금모를 본받으라’ 했다. 종택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봉화금씨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 1153~1230)가 이곳에 내려와 터전을 잡고 건축하여, 이후 그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수차례 증·개축을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종택은 영렬공 금의의 12대손으로 은진현감을 지낸 금회(琴淮)의 넷째 아들인 금계(琴啓)의 종가이다. 종가 입구에는 영렬공이 심었다는 괘화나무 세 그루가 있으며, 20m 정도 떨어진 곳에 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인 ‘효정(孝井)’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이 우물은 처음 집터를 잡은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원래는 가옥 내에 있어 뜰샘이라 불렀다 한다. 종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마산(斯馬山)은 고구려시대의 군명(郡名)인 '고사마(古斯馬)'의 지명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등 봉화금씨 발원지이자, 봉화의 산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종택(宗宅)은 산골마을의 깊숙한 곳에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봉화금씨 군위공종택은 튼 ㅁ자형 건물로 수차례 중수로 인해 건립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지금의 사랑채와 안채가 중건시의 평면구성과 구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19세기 후반 이후 건축유형을 보여주는 등 종택의 입지환경을 살펴볼 수 있다.
대유학자 퇴계(退溪)와 봉화금씨 집안
퇴계(退溪)의 맏며느리 봉화금씨
봉화 금씨 집안과 퇴계 이황과는 깊은 인연을 맺는다. 퇴계의 맏며느리가 봉화 금씨 집안의 딸이다. — 일화(逸話)가 있다.
퇴계(退溪)의 장남 이준(李寯)은 이웃 마을 외내[烏川]로 장가를 갔다. 상대는 예안훈도(禮安訓導)를 지낸 봉화 금씨 금재(琴梓)의 딸이었다. 금재는 외내에 살고 있던 광산 김씨 김효로(金孝盧)의 사위가 되어 처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금씨는 봉화·안동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 가문인데, 당시 퇴계의 집안 내력은 한미(寒微)하였으므로, 비록 퇴계가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낸 바 있지만, 금씨 집안의 완고한 노인들은 퇴계 집안과 혼사를 반대하여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혼인이 이루어졌다.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德)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금씨의 묘(墓)는 지금도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13) - ③ 퇴계묘소→ 퇴계종택 / 참조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 금씨는 내조의 덕(德)을 쌓고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한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씨 집안이었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씨네 집안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퇴계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모두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퇴계(退溪) 문하의 봉화금씨 제자들
금보(琴輔) 금응협(琴應夾) 금응훈(琴應壎) 금난수(琴蘭秀)
퇴계(退溪)의 제자 중에는 봉화 금씨(奉化琴氏)가 상당히 많다. 예컨대 안동 온혜리의 매헌(梅軒) 금보(琴輔, 1521-1586), 금재(琴梓)의 아들인 안동 외내[烏川]의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1526-1589),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1540-1616) 형제, 안동시 부포 귀단의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그들이다. 외내의 칠군자(七君子) 반열에 드는 일휴당(日休堂) 형제는 퇴계의 문인이다. 그리고 두 누이가 각각 온계(溫溪)와 퇴계(退溪)의 며느리인 것이다. 퇴계의 장남 이준의 아내이다.
매헌(梅軒) 금보(琴輔)
금보(琴輔, 1521∼1584년)는 호가 매헌(梅軒)이고, 첨정(僉正) 금원수(琴元壽)의 아들이다.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퇴계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특출한 필력을 지니고 있는 명필(名筆)이었다. 이숙량(李叔樑)·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선성삼필(宣城三筆, 퇴계 문하의 삼대 명필)’로 불리었다. 생전의 스승 퇴계도 “기고봉(奇高峰)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 수 없고, 금매헌(琴梅軒)이 아니면 글씨 쓸 사람이 없다.”고 극찬했다. 결국 금보는 스승 퇴계가 돌아간 뒤 퇴계의 비문(碑文)을 썼다. 온혜의 매헌 금보는 퇴계의 형 이잠(李潛)의 손녀사위[孫壻]가 되었다. * ‘선성삼필(宣城三筆)’에서 선성(宣城)은 안동 예안의 옛 이름이다. * ‘금매헌(琴梅軒)’은 매헌(梅軒) 금보(琴輔)이고, ‘기고봉(奇高峰)’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말한다.
퇴계의 제자 금응석(琴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가 「적선정(積善亭)」이라는 정자의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금응협(琴應夾) · 금응훈(琴應壎) 형제
퇴계의 사돈, 예안훈도 금재(琴梓)의 아들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1526년(중종 21)~1589(선조 22))은 퇴계의 사돈인 예안훈도(禮安訓導) 금재(琴梓)의 아들이다. 퇴계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참봉(參奉), 하양현감(河陽縣監),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을 이었다. 아우 응훈(應壎)과 향리 오천(烏川 : 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예안(禮安) 오천(烏川)의 낙천정사(洛川精舍)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일휴집(日休集)》이 있다.
금응협(琴應夾)은 후진 교육을 위해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烏川里)에 별당 일휴당(日休堂)을 지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에 처하여 후손들이 사는 경산시 대동에 옮겨 지었다.
금응훈(琴應壎, 1540(중종 35)~1616(광해군 9)은 금재(琴梓)의 아들이며 일휴당(日休堂)의 아우이다. 자는 훈지(壎之)이며. 호는 면진재(勉進齋)다. 퇴계(退溪)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金垓)의 안동 예안의병(禮安義兵)에서 도총사(都摠使)로 활동했다. 1594년 학행에 의하여 영의정 유성룡 등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영춘현감(永春縣監)․제천현감(堤川縣監) 등을 역임하고 1601년 의흥현감(義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과 조목(趙穆)의 요청에 따라 사직하고『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간행 실무자로 참여했다. 외직에서는 선정(善政)으로 이름이 높았고, 물러 나와서는 후진 교육에 힘썼다. 형 응협(應夾)과 주야로 궁리(窮理)에 정진하여 스승 퇴계가 그들이 공부하는 서재를 ‘면진(勉進)’이라 이름하여 손수 편액을 써 주어 격려했다고 한다. 형 응협(應夾)과 같이 오천(烏川)의 낙천정사(洛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宣城誌․陶山及門諸賢錄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금씨의 인물 가운데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많았다.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년~1604년)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동시 예안 부포 귀단의 금난수(琴蘭秀)는 첨지중추부사 금헌(琴憲)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1년(명종 16) 서른한 살 때 사마시에 합격한 이래 참봉, 직장(直長), 장례원사평을 벼슬을 지내다가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노모봉양을 이유로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1599년 봉화현감에 부임했을 때 마을의 향부로(鄕父老)들을 모셔 놓고 향약을 시행하여 ‘한 고을이 저절로 교화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성성재 종택(惺惺齋宗宅)은 안동의 예안의 부포에 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으로, 금난수(琴蘭秀)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字)는 문원(聞遠)으로 퇴계의 제자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과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12세에 청계(靑溪) 김진(金璡,1500~1580)에게 글을 배우고 그 후 퇴계 선생의 문화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5세 때 현 종택 아래에 있는 동계(東溪)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퇴계가 친필로 ‘惺齋’(성재)라는 현판을 내려주면서 면려(勉勵)하였고,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팔영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성성재 종택은 정침과 아래채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ㅁ"자 형이며, 사랑채는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사랑과 큰사랑이 있는데 큰사랑은 2통칸 방과 마루,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사랑은 1칸 반의 방과 반칸의 마루가 연접되어 있고, 전면에 퇴를 둘렸다.
금씨의 인물 가운데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많았다. 금난수(琴蘭秀, 1530년~1604년)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매부인 부포 귀단의 금난수(琴蘭秀)는 첨지중추부사 금헌(琴憲)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1년(명종 16) 서른한 살 때 사마시에 합격한 이래 참봉, 직장(直長), 장례원사평을 벼슬을 지내다가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노모봉양을 이유로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1599년 봉화현감에 부임했을 때 마을의 향부로(鄕父老)들을 모셔 놓고 향약을 시행하여 ‘한 고을이 저절로 교화가 일어났다’고 전한다.
35세에 당시 선성현(宣城縣, 당시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었던 낙동강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孤山亭)’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아들 금업(琴忄業)과 금개(琴愷)는 문과에 급제, 각각 창원부사(昌原府使)와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냈다. 후손 금시술(琴詩述, 1783-1851)도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는 등 급제자가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였다. 사후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고산정(孤山亭) ― 낙동강 가송협
안동 도산면 가송리 금난수(琴蘭秀)가 세운 정자
31번 국도 가송리 삼거리에서 농암종택 가는 길로 한참 내려가면 낙동강 ‘가송교’가 있다. 가송교에서 강을 건너면, 오른쪽으로 가사리마을 ‘퇴계 예던 길’ 제2코스(가사리마을—단천교)로 접어든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낙동강 강안을 따라 0.4km 올라가면, 강안의 (축융산) 절벽 아래 ‘고산정(孤山亭)’이 있다. 이곳 경치가 아름다운 가송리 낙동강 변을 가송협이라고 한다.
평소 금난수를 아낀 이황은 이 정자를 자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고산정은 정자에서의 풍광은 이곳은 떠나면서도 뒤돌아 보고 싶은 묘한 매력을 남길 정도로 뛰어나지만,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은 가슴 설레게 할 만큼이나 빼어나다.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 한 마리의 고고한 학(鶴)으로 내려 앉은 듯한 안동의 아름다운 정자 고산정(孤山亭)이다.
고산정(孤山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이황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가 세운 정자로 축융봉 절벽 아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데, 이곳이 바로 도산구곡 중 제8곡인 고산곡을 말한다. 금난수는 35세인 1564년(명종 19)에 이미 안동 예안면(禮安面) 부포리에 있는 현재의 성성재 종택(경북문화재자료 264) 아래쪽에 성성재(惺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산정은 그 후에 지은 정자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정자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碑)가 서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퇴계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 [2020 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11)-① 청량산→단천교) / (2020.08.17. 월요일 답사) 참조
고산정은 도산(陶山)에서 청량산(淸凉山)으로 가는 낙동강 강변에 있다. 평소 금난수를 아낀 퇴계 이황은 이 정자를 자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고산정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학이 서식하기도 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 성재를 아꼈던 퇴계는 이 정자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 한다. 이황이 청량산을 오고갈 때 여기에 자주 들려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다. 퇴계 이황의 시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은 이 정자에서 지었다. 퇴계는 시 〈서고산벽(書孤山壁)〉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퇴계집》 권2
日洞主人琴氏子 (일동주인금씨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隔水呼問今在否 (격수호간금재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聞 (경부휘수어불문)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愴望雲山獨坐久 (창망운산독좌구)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성재를 찾으러 온 퇴계는 강 건너 제자를 소리쳐 부른다. 그러나 밭 갈던 농부는 알아듣지 못한 듯 손을 내젓는다. 퇴계는 하는 수 없이 멀리 산을 건너다보며 제자 오기만을 기다린다. … 아주 나직하게 읊조린 시다. 그러나 그 여백에 고인 것은 유유자적한 은사의 여유와 탈속의 기품이다.
이 땅에 정자가 발달한 배경을 사계절 뚜렷한 아름다운 풍광과 그 자연을 사랑하는 민족성에서 찾는 건 정설이다. 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들과 강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강조된 구조물’이 바로 정자인 것이다.
만수재(晩修齋) 금업(琴忄業)
금업(琴忄業, 1557(명종 12)~1638(인조 7))은 안동 예안(禮安) 출생으로, 현감(縣監) 금난수(琴蘭秀)의 아들이며 * 월천 조목(趙穆)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1년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양사(兩司)를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창원부사(昌原府使)․승지(承旨)를 역임했고, 문집(文集)이 있다. * 월천 조목(趙穆)은 퇴계의 제자이다.
망월헌(望月軒) 금개(琴愷)
금개(琴愷) 1562(명종 17)~1629(인조 7))는 안동 예안(禮安) 출생으로. 현감(縣監)금난수(琴蘭秀)의 아들이다. 조목(趙穆)의 제자으로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1년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예조정랑(禮曹正郞)․금산군수(金山郡守)․여주목사(驪州牧使)를 역임했다. 저서에 『망월헌유집(望月軒遺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城誌
매촌(梅村) 금시술(琴詩述)
금시술(琴詩述, 1783(정조 7)~1851(철종 2))은 안동 예안(禮安) 출생으로. 현감 금난수(琴蘭秀)의 후손이다. 이야순(李野淳)의 문인으로. 1844년(헌종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851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저서에 『매촌집(梅村集)』이 있다. [참고] : 宣城誌․安東鄕土誌(宋志香)
구한말 의병장 금석주
구한말의 금석주(琴錫柱, 1857~1920)는 명성왕후시해사건 후 경상북도와 충청남·북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일명 종헌(鍾憲), 종응(鍾應), 석조(錫祚)를 쓰기도 했다. 1896년 경북 봉화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봉화, 예안, 영주, 순흥, 풍기, 안동 등의 의병진과 공동작전을 펴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유인석의 의병진의 소토장(召討將)으로 있으면서 1896년 6월 12일 낭천전투(狼川, 지금의 강원도 화천)에서 전사한 서상렬(徐相烈)이 이끈 의병진과 제휴하여, 7대의병진의 회맹(會盟)을 성립시켜 의병투쟁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최근 금석주의 ‘진중일기’가 발견되어 당시 의병활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 ‘건국포장’과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오늘날의 봉화 금씨
봉화 금씨는 단본(單本)으로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5,432명으로 조사되었다. 오늘날 봉화 금씨의 지명인사로는 관계의 금진호(전 상공부 장관), 학계의 금기창(의학박사, 충남대), 금장태(철학박사, 서울대), 법조계의 금용국·금병동(변호사), 금동우, 금태섭(전 검사, 20대 국회의원), 재계의 금춘수(한화그룹), 언론계의 금동수(전 KBS 부사장), 금창봉(중앙일보), 원로 서예가 금기풍, 의료계의 금동혁(고려병원), 금동일(신일병원 원장) 등이 있다. …♣ [내성천 / 운곡천 봉화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