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병에 걸리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으로 시달립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고통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우리 대부분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면 질병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질병은 우리의 삶안에서 전혀 의미가 없습니까?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질병은 죄에 대한 벌이나 보속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사에 의해서 나아만이 치유된 것이(2열왕 5장)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의사나 치유자, 치유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질병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은예수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자들의 질문에서잘 나타납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요한 9,2) 질문은 그들이 여전히 죄 때문에 질병이 생겼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념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질병이 생겼다고 하는 제자들의 견해를 거부하셨습니다.(요한 9,1-7 참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란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베푸신 치유를 말합니다. 또
한, 병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삶을 이끌어감으로써 삶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과 창조성은 우리가 고통의 한복판에 있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희랍 사고에서 치유활동,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 그리고 땅을 일구는 행위는 서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치유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하여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된 여인(루카 8,43-48 참조)에게 말씀하실 때 선택한 단어는 의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sozo라는 영적ㆍ종교적인 용어입니다. 이는 모든 부분 곧, 신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으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죄는 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병은 단순히 운명일 수 있는데, 이는 병을 지니고 태어나거나, 질병의 요인을 지니고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유행병으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병이 우리를 온전함과 개성화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마음을 열고 편견을 갖지 않고 질병의 각 경우에 접근하며, 여러 가지 각도에서 질병의 원인과 그 의미를 탐구해야 합니다.
특히 심리적인 장애의 경우나 심리적인 부분을 동반하는 신체적인 장애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앞당겨서 그 의미를 아는 것은 병이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진실한 메시지를 가릴 수 있기 매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귓전에 흘려버린 채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께서 드러나게 활동하지 못하게 만든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난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나병환자를 오늘은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얼마나 행복했으면 그랬을까?’
나병 환자로 살아오면서 받았던 온갖 수모와 치욕과 소외, 멸시와 조롱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그는 자신의 입과 몸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의 신신당부도 잊은 채, 그렇게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예수라는 분이 자신을 고쳐주었음을 선포하는, 본의 아니게 복음 선포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정이야 조금 다르겠지만,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라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과 오늘의 나병 환자의 심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제 시선을 안으로 돌립니다.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넘쳤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지요? 나병 환자의 심정을 헤아리며 ‘복음을 살고 전하는’ 그런 배은망덕(?)한 우리들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나병환자와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분들의 손은 거의 없거나 뭉그러져 있고 발가락도 거의 없습니다. 코와 귀가 뭉그러진 분도 많습니다. 그렇게 신체의 일부가 뭉그러지고 없어지는 동안 그 육신의 통증과 인간적인 멸시를 견뎌내야 하는 마음의 아픔을 생각하면, 신체가 온전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많은 것을 반성하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철저하게 멸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천년 전 감염을 피하기 위해 이기적인 우리 인간이 세워 놓은 유대인들의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된 믿음으로 간구하는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예수님만이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 두 가지 모두의 참된 치유자심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멸시받고 천대받던 사람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위대한 일을 하는 증거자로 변모됨을 가르치십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육신적인 나병을 고쳐주신 것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통해 멸시받던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직도 세상에는 몹쓸 악성 질병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현대에는 마음의 상처와 병이 더 무서운 것이 되었습니다. 주원인이‘스트레스’에서 기인한 몹쓸 병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봉사적 돌봄과 간절한 기도를 통해 육신적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마음의 병까지 치유되는 기적도 베풀어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미래의 환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 나에게 힘이 남아 있을 때 병자를 간호하는 봉사의 시간을 가지라고 초대하십니다. 요즘 삶의 보람을 찾고, 참 행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나의 몸이 조금이라도 성할 때, 시간을 쪼개어 가까운 병원 원목실 혹은 요양원에 찾아가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하시길 권합니다. 봉사를 위한 특별한 기술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 기술이 없어도 좋습니다. 부족함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해 드릴 수도, 머리를 감겨 드릴 수도, 굳은 몸을 풀어 드릴 수도, 이야기를 들어 줄 수도, 좋은 책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선교지를 전해 드릴 수도, 휠체어를 밀어 드릴 수도, 심부름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보람과 기적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행위는 율법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파격적인 행위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시 나병은 중죄에 대한 엄벌이라고 생각했고, 나병환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큰 죄인들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은 불결하고 불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도의상 불결한 사람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회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나병환자와 접촉을 했다면, 그는 그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을 행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이 현실주의자였더라면 나병환자들을 동정하여 치유해 주시되 멀찍이 떨어져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시거나, 아니면 앞으로 복음 선포의 지속적 활동을 위해 접촉을 삼가셨을 것입니다. 사회적 관습이란, 어느한 사람이 이에 도전하여 바꾸기에는 거의 불가능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위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심으로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당대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 때문에 그분 자신은 당대 사회의 유력한 집단으로부터 도의적 나병환자로 취급되었지만 이를 두려워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문둥병자들처럼 사회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며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성격이나 정신적인 장애로 인하여, 육체적 부자유와 질병으로 인하여, 윤리 도덕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인하여 소외당하고 배척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의 기적적 치유나 궁극적으로 그들과의 화합과 일치를 바라지만, 그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용하지는 못합니다. 늘 기적을 청하지만, 그 기적을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불목과 분열을 다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오늘 복음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 해답인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조처를 취한다면 버림받은 자들을 구제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때때로 차별이나 소외를 당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때 느끼는 소외감이나 차별감의 결과로, 작게는 불쾌감에서 끝나지만 크게는 살인이나 자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의 수단화, 왕따문제, 학력 차별, 이익만을 따지는 모습 등 다양한 인간 소외의 모습들이 사회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진정한 치유를 통해 소외를 복원시켜주시고 화합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보여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레위기에서는 정결례 법에 관한 내용으로 나병환자들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리는 단순히 따로 떼어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자체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는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하게 공동체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으로, 더 아프고 슬픈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가장 버림받고, 말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나병 환자를 한순간에 고쳐주시고 사회로 복귀시켜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병의 치유를 넘어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소외를 복원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의 과정에서 나병 환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이 이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진정한 믿음의 고백과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청하는 완전한 내어 맡김을 통해 치유의 문이 열림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은총과 치유를 청하는 것이 단지 나의 발전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주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과 치유는‘우리 모두를 하나도 잃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로 초대하시려는’당신의 측은지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분은 손과 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손과 발을 필요로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매서운 바람이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이지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믿음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따뜻이 안아주십시오. 혹시라도 주위에 아프신 분이 생각나시면 꼭 한번 찾아볼 수 있는 한주 되십시오.
몸이 깨끗해야,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음도 영혼도 청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고 가까운 분과도 인격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쌍방이 결합하려면 둘 다 깨끗해야 합니다. 더러우면 인격적 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청결은 관계 맺기를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신앙생활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가는 과정이기에, 영적 청결은 신앙에 절대 필요한 요소입니다. 영적 더러움 곧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 장애입니다. 이를 제거해야만 하느님과 결합하는 데에 문제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를 비롯하여 대부분 종교들이 씻는 예식을 중시했고 때로는 까다로운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정결례 규정을 어기시면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나환자는 온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정결례 규정에 구애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자비의 행위가 율법을 ‘넘어선’ 것입니다. 율법이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 사례들을 규정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행위는 율법을 넘어 완성한 것입니다. 이를 망각하고 율사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았습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이번에는 예수께서 나병 치유와 관련한 규정을 준수하십니다. 사제만이 병의 치유를 인정할 수 있다는 규정, 나환자가 치유되어 건강한 삶을 살려면 사제로부터 치유사실을 확인받고 감사의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셨습니다. 비참한 처지를 극복하려는 나환자의 희망과 집념 및 예수님께 대한 신뢰, 정결례 규정을 넘어서시는 예수님의 자비행위를 가능케 한 것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행동이나 자세보다 더 중요하고 앞서는 것은 마음입니다.
우선, 가엾은 마음으로 환자를 보시고 ‘뼛속까지 저미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갖가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하느님은 그때 가엾은 마음을 품으십니다. 말하자면 고통에서 구하시기 전에 우리와 더불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십니다. 먼저 우리와 십자가 고통을 함께 지심으로써 고통의 부담을 덜어 주십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진지한 노력과 당신께 대한 신뢰심을 보시고 주님은 우리에게도 ‘너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가엾은 마음과 물리적 접근, 신체적 접촉 등을 통하여 고통 겪는 우리를 지탱해주시며 위로하시고 마침내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과 신체적 접근이 저주받은 병, 최악의 절망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 결과 나환자는 몸과 육신은 물론이고 마음과 영혼까지도 치유 받았습니다. 가엾은 마음과 자비로운 행동으로 인해 불치병이 치유되어, 환자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넘어갔습니다. “스승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스킨십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스킨십은 상대방에게 오해나 불쾌감을 줄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어사전에 스킨십(skinship)을 찾아보니 스킨십은 껴안거나 접촉 기타 신체 접촉 행위로 인해 두 사람 특히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관계와 애정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즉,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드러나는 애정표현이 스킨십이 가진 본래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보여주신 스킨십이야말로 스킨십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 찾아온 나병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시면서 고쳐주십니다.
나병이라고 하면, 지금은 치료법이 개발되어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려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엔 어떠했겠습니까! 당시 나병환자들은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마을 밖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게 되면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있음을 큰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하고 나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자,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며 깨끗하게 고쳐주십니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시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사람을 낫게 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백인대장의 하인의 경우엔 그저 한 말씀으로 그 하인을 낫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는 분이 굳이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나병환자에게는 치료가 되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이 다 나아 다시 공동체에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상한 마음과 배려가 가득한 손입니다. 단순히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고독까지도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의 볼을 부비고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하듯이 그 사람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던 나병환자에게 하느님의 스킨십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스킨십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의로 인해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미는 손길을 통해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 에게 두 가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고, 두 번째는 우리 마음의 나병입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나병환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할 때 이처럼 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의지와 노력으로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겸손되이 기도해야 하며, ‘주님, 이거 들어주세요.’라고 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이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의 나병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이 처럼 우리 마음의 나병이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방해... 어떠한 것들 입니까? 판단, 이기심, 시기, 질투, 미움, 다툼... 참 많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에게는 어떠한 마음의 나병이 있나요?
이러한 마음의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바로 마음의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하며,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 그 유익을 위해 내가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타인에게 슬픔을 주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또한 타인의 단점을 바라보지 말고, 장점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며, 타인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나서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공동체에 방해를 놓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윤활유가 되는 존재,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께 청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밀한 독서 ( Lectio )
오늘 말씀은 갈릴래아 전교여행의 전형적인 예로, ‘더러운 영’ 에 대한 승리 ( 마르 1,23 )와 비교되는 나병 치유사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거니와 나병은 남 보기에 불결하고 전염이 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고립당해 천형이라 일컬어지던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일까요 ?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40절 ) ‘하고자 하시면’ 이라는 청원은 예수님의 권능보다 그분의 자비에 의지하여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뜻만 있으시다면 죽은 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을 치유하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확신이자 신뢰입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에서 나오는 청원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들어 허락된 보중을 받습니다.( 41절 )
성경은 모든 악성 피부질환을 나병이라 통칭합니다.( 레위 14장 ) 제1독서에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가오면 피해 가도록 “부정한 사람이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회적 · 종교적으로 소외된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부정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저주받은 그의 처지를 받아들여 주십니다. 이는 곧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부정한 사람이 아닌 ‘나’ 라는 존재 자체로 설 수 있도록 먼저 그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간청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1ㄴ절 )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 는 나병 환자의 신뢰는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으로 답을 받은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병이 없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 정화된 사람으로 사회와 종교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 곧 ‘죽음에서 부활한 것’ 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한테 하신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 44절 )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은 모세율법이 규정하는 율법을 준수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후 後 문맥에 이어지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해의 기반을 놓습니다.( 2,1 – 3.6; 7,9 – 13; 12,29 – 40 참조 ) 두 번째는 ‘정화’ 입니다. 정화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사제의 공증을 받아 그는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돌려보내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44ㄱ절 ) 하고 굳이 함구령을 내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유다인들은 나병 고치는 것이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에 버금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2열왕 5,7 참조 ) 그러므로 나병의 치유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함께 메시아 시대의 은혜로 헤아려집니다.( 마태 10,8; 11,5; 루카 7,22 참조 )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분명하지만, 당신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신원이 밝혀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마르 14,61 – 62; 15,2.39 참조 )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가서 예수님의 권능과 말씀을 알리는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1,45ㄱ )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디에 있든지 드러나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45ㄴ절 )
묵상 ( Meditatio )
사람들은 부정不淨과 정淨의 기준을 인간의 외적인 조건에 둡니다. 보이는 곳의 질환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내적 질환은 누가 부정하다고 진단하며, 이제는 치유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
자기 자신의 내적 상처는 곪아 터져도 ‘괜찮다. 괜찮다.’ 하고 덮어놓은 채, 이웃의 작은 상처에 골몰하여 ‘불결하다느니, 전염성이 있다느니’ 하며 부정과 정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외적 상처의 고통으로 인해 내 이웃의 영혼이 정화되어 가고 있을 때, 깨끗하다고 자만하는 제 영혼은 불치의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주님,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 40절 참조 )
기도 ( Oratio )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시편 16,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