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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4부: 광저우, 공산국가 1957-1958
제10장 거칠은 깨달음(벗겨진 아버지의 가면)
by온기철 James Ohn방금
4대 해충퇴치 운동 말미에 모기와 쥐에 대한 똑같이 비참한 두가지 운동이 있었다. 리유동무는 당서기와 협조하여 특별히 나의 정치교육반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발표 했다.
지금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과학, 수학, 중국어 공부 대신에 우리반 학생들은 상호비판과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우리는 과거에 이 아주 이상한 학습에 두번 참여 한 적이 있다. 이제는 매주 해야 했다.
이 학습은 한시간에서 세시간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소중한 공부시간을 빼앗아 가고 6월에 치루어야 하는 대학입학시험을 잘 볼수 없게 만든 다고 항의 했다.
이 항의는 거절 당 했다.
자아 비판과 상호비판을 같이 하는 학습은 학생 한 사람이 고백하는 역할과 심문하는 역할을 모두 해야 했다.
고백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자신의 용납할 수 없는 행동과 잘못된 생각을 말 한다. 나머지 다른 학생들은 심문하는 사람이 되어 고백하는 사람을 비평 한다. 좋은 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보이기 위해서 고백하는 사람은 자존감을 버리고 군중과 한편이 되어 자신을 비난 해야 했다. 그러면 이 연극의 주님이신 리우 동무로 부터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카프카에스크 드라마에는 이해해 주는 신부나 용서해 주는 신이 없었다. 리유 동무가 프로듀서, 감독 그리고 축제의 주인이었다. 자애로운 신부 처럼 용서해주거나 이해해주지 않고, 그녀는 반아이들이 마치 살인을 하려는 폭도 처럼 행동하게 기획하고 충동 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전통이 아직도 존재 한다면 - 그리고 우리가 돌을 가지 있었다면 - 그녀는 아마 우리를 고백자에게 돌을 던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번역자 주; 같은 날 불행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 나는 경우를 말 함. 집에서 쫒겨 나고, 직장을 잃고, 차가 고장나고, 가족이 죽는 일이 같은 날에 벌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무도 자가 비판과 서로의 비판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은 리유 동무의 우리를 분열 시켜 정복하려는 시도 였다. 우리를 장악하는 권위를 강화하려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이것은 친구와 동급생들 간의 불화를 심어 주었고 적개심을 품게 했다.
첫번 월요일 모임에는 아무도 자진해서 고백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거기 앉아서 숨을 구멍을 찾았다. 우리들의 “혁명정신” 의 결핍 - 리유동무가 “비겁한 브르조아 심리” 라고 이름 지어진 - 은 그녀가 우리 하나 하나에게 장황한 비난을 쏟아 놓게 했다. 그녀의 장황한 연설은 지난 9개월동안 그녀가 관찰 해 낸 모든 부족한 점과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앙심을 원 없이 쏟아 내는 장면 이었다.
나는 교만, 불복종, 자본주의적 삐뚤어진 태도, 재치 있게 비웃는 불경 등등 으로 내 몰렸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비판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라고 받아드렸다.
메이의 죄목은 프라토와 아리토틀을 거론 한점, 철학적인 두서없는 말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점, 헤겔의 변증법을 잘못 전한 점, 그리고 그중 가장 잘못한 것인 데, 마르크스 주의, 레닌 주의, 마오 주석의 사상을 “철학”의 범주 안에 넣은 점들이었다.
“철학이 아니면 마오주석의 사상은 어디에 속한 단 말입니까?” 라고 내 방친구 메이는 반박 했다.
“진리! 마오주석의 사상은 진리 다!” 리우 동무는 엄한 얼굴을 하고 받아 쳤다.
메이는 씩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어색한 미소와 몸짓은 그가 진짜 믿는 사람과 말다툼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임을 알아 차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이미 철학 토론에서 그의 지식과 논리적인 사고로 리우동무를 여러번 당황하게 했다. 그는 리우동무가 군대에서는 좋은 인민위원이었을 지 몰라도, 교육 기관에는 속하지 않는 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보스와 또 한번 대립 하는 큰실수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메이는 리유 동무의 근거없는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철학의 범위와 내용에 대한 리우의 공격에 미소로 대답한 것은 패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작전상 후퇴였다.
메이와 나는, 리우 동무가 모두를 맹렬히 비난했던 첫번 월요일 모임이 끝날 때, 그녀가 나와 메이에게 다음 주 모임에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선도 하라고 지명 했지만 우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메이가 먼저 하고 다음이 나였다.
다음 월요일, 메이는 마치 철학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 처럼, 보통 때의 심각함과 자로 잿듯한 태도의 연설로 오후 시간을 시작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 합니다.” 그는 음송 했다. 한마디 하고 좀 쉬어서 청중이 알아 들었는 지 살피며 말 했다. “아니, 나는 수치보다 더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죄지었다는 말로는 나의 잘못을 충분히 표현 할 수 없읍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반 전체를 둘러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을 후려 쳐야 합니다. 나는 너무나 죄송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리우동무와 여러분 하나 하나에게 용서 해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왜냐면 어제 저녁에 그런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그의 과장 되고 멜로드라마 같은 자신을 깍아 내리는 전제에 바짝 고개를 쳐들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메이는 도대체 무슨말을 하려고 저럴까?
그때 그는 폭탄을 떨어 트렸다.
“나는 리우 동무와 성교를 하는 꿈을 꾸었 씁니다.”
처음에 우리 모두는 무슨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아무도 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서도 아니 다른 곳 어디에서도 성은 생활 하는 데 나타나 본적이 없었다. 방송에도 없었고 영화에도 없었다. 성교육은 아예 없었다. 여학생과 남학생 사이의 교제는 없었다. 우리가 생물시간에 사람의 생식기를 배울 때, 해부학적 기관의 이름을 자궁경부에서 부터 부고환 까지 위워야 했지만, 삶과 행동으로 부터 완전히 동 떨어지고 도려낸 단순한 생식 생물학 이었다. 음해과 귀두 같은 단어를 외우는 것은 삼두근과 팡꿈치 뼈 올레크라논 프로세스를 외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남녀 사이에 육체적 접촉을 전혀 볼수가 없었다. 손잡는 일도 없었다. 여자의 몸은 정체모를 마오 국민복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성적 자극을 일으킬 만한 곡선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체격 외에는 남자의 몸과 구별되지 않았다. 우리는 십대 후반의 젊은 남자와 여자 였지만 우리는 성을 상상 해 본적이 없었다. 성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성에 대한 생각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조차도 몰랐다.
메이는 교실에 감도는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조용한 교실에서 그는 고백을 계속 했다. “나는 리우동무의 양 옆의 음순 가운데의 물이 줄줄흐르는 구멍을 꿈꾸었다.”
이제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공기돌이 옥으로 만든 접시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 처럼 분명히 들렸다: 구멍, 음순, 줄줄흐르는.
듣기만 해도 나를 어지럽게 했다. 리우동무는 폭발 했다, “음란한 연설 그만 해!” 그녀의 눈은 화로 불이 났고, 얼굴은 불쾌감으로 이그러 졌다. “제발 나의 자아 비판을 방해 하지 말 주십시요. 나는 당으로 부터의 모든명령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메이는 조용히 거절 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 동료들은 강철 같이 단단 하고, 나는—---”
“닥쳐, 너는 비열한 개야! 너는 짐승이야!” 리우동무는 반박하는 몸짓으로 메이를 향해서 오른 손으로 주먹질을 하며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그녀의 볼에 줄줄 흘러 내렸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교실 밖으로 나가고, 의자는 그녀의 뒤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에-, 이것으로 이번주 자아 비판과 상호 비판을 마칩니다.” 메이는 사실 그대로 말 했다. 일부는 메이가 품위의 경계를 벗어 났다고 생각 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우리가 교실을 나와 헤어질 때 그를 경악 스럽게 쳐다 보았다.
그의 용기는 한이 없었다. 그날 까지 속을 알 수 없고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여인 리우 동무가 우는 모습은 아무도 상상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우리의 이론가며 철학자인 메이가 이일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의 위대한 권위이며 화신인 리우 동무가 우슴꺼리가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울음을 터트려서 체면을 구겼기 때문에 교실을 뛰쳐 나갔다고 확신 했다. 우리는 그녀가 왜 울었는지 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노여움은 이해 할 수 있었 지만 눈물을 흘리다니? 안타 깝게도 우리 중 아무도 프로이드 심리학을 몰랐다.
사흘 후, 메이는 교장으로 부터 퇴학 통보를 서면으로 받았다. 그에게 홍콩으로 돌아 가던 가 아니면 통킨만 에 있는 하이난 섬의 지극히 원시적인 공동농장으로 들어 가던 가 양자 택일을 하라고 했다. 퇴학 통지서에 설명 하기로는 당이 이 공동농장을, 식민지주의와 자본주의의 독성 잔재를 씻어 내는 아주 깊은 사상 개혁을 위한 가장 좋은 곳으로 꼽고 있다고 했다.
메이는 주저하지 않고 농장을 선택 했다. 그는 헌신적인 마르크스 주의자 였고 마르크스 주의자는 마르크스 나라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영국 식민지에서 당할 만큼 당 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나라에서 살 겠다.”라고 그는 나에게 말 했다.
그 선언을 뒤로 하고 메이는 다음 주 월요일에 아주 좋은 기분으로 떠 났다. 그는 떠나면서 나에게 이제 부터 그는 거짓말 하고 꾸미고 뇌가 텅텅 빈 리우 동무 가 아닌 진짜 프롤레타리아트(하층 사회)와 같이 살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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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가 학교를 떠났지만, 리우동무는 그일이 있은 후 예전 갖지 않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 부치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제 없는 권위적인 태도로 우리에게 훈계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를 통제 함에 있어서 전에 처럼 집중하지 못 했다. 때로는 시무룩 하고 멍한것 처럼 보였다.
그녀의 변화는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기분이나 행동을 예측 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희생자에서 친밀한 관계, 설령 억압적인 친밀함이라도, 로 되어 버렸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르는 억압보다 예측 할 수 있는 억압을 선호 했다. 리우 동무의 예측 불가성은 우리들의 불안감을 높였다. 때때로 그녀는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폭발 했다. 어떤 때는 그녀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에 적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학생이 무엇을 물어 보았는 지를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녀 앞에서, 예전에 억압자로 알고 있었던 때보다 더 조심스럽고 신중 했다. 어떤 아이들은 그녀를 실제로 불쌍하게 생각 했다.
리우동무의 철권같은 인도 없이, 월요일 오후 자아 그리고 상호 비판은 형식적인 고백과 지루한 규탄의 웃기는 연극으로 전락 했다. 리우 동무는 우리의 뻔한 속임수를 간섭하지 않고 아무 관심 없이 쳐다 보았다.
다행이 우리가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괴로워 해야 할 날도 한달이 채 안남았다. 국립대학 입학 시험이 닥쳐 왔다. 입학시험이 끝나면 여름 동안 집에 갔다가 가을에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 중국으로 돌아 온다.
국립대학 입학 시험은 6월에 이틀 동안 치루어 진다. 시험과목은 중문학, 정치사상, 물리, 화학, 생물, 수학이었다. 나는 시험 동안 불안해 하지 않았다. 나는 수학과 과학을 아주 잘 보았다. 중문학과 정치사상은 쉬었다. 그러나 수필을 써야 하고 사실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기 때문에, 이 두과목에서 내가 잘 했는 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의 시련 후, 내가 선택한 두개의 가장 우수한 대학에 합격 할 자신에 넘쳤다.
나는 베이징 대학의 지리학과를 입학원서에 나의 첫번째 선택으로 적어 넣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기에 지질학자가 되면 여러 이국적인 곳을 가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두번째 선택은 베이징에서 3천 마일 떨어져 있는 위구르 자치 지역(중국 투르키스탄)의 서북 지질학 연구소 였다. 중앙아시아의 대초원과 산은 항상 내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베이징 지질학 연구소에 들어가지 못한 다면, 나는 웅장한 초원, 산과 빙하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람이 별로 많이 살지 않는 위그루 자치지역에 기쁘게 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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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후,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오늘날 까지 나는 합격자 발표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 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시험결과가 발표된 것은 안다. 그러나 어떻게 발표 되었는 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 다. 우리 아버지 시절 때와 같이 커다란 종이에 써서 게시판에 넣어 학교벽에 붙여 놓았는 지, 우편으로 우리 각자에게 통지를 했는지, 우리를 교실로 모이게 해서 이름과, 점수, 대학을 알려 주었는 지, 간부가 기숙사를 돌아 다니며 합격자 명단을 배부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이일의 영향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었고, 고통스럽고, 절망적 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을 것이다. 내 일기장 까지도 몇일 동안 비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경악과 당황함이었다.
나는 베이징 연구소와 서북지질학 연구소 모두 합격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나흘 후 나는 사유를 알아 보려고 리우동무에게 갔다. 내가 알리지 않고 그녀의 사무실에 나타나자, 그녀는 나의 방문을 기대 하고 있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메이 전 시대의 자신 있고 권위적인 리우 동무처럼 침착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표정이었다.
“왜 대학이 너에게 입학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 지 나에게 물어 보려고 왔지?” 그녀는 미소를 띄우며 말 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독을 품고 있었다. “음, 너는 대학생이 되기에는 정치적으로 맞지 않아.” 그녀는 고소함을 감추어 가며 말 했다.
나는 충격을 주거나 항의 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내가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내눈을 똑바로 쳐다 보면서, “우리는 너의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안다. 중국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 해라. 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중앙정부의 해외 중국인 업무에 관한 위원회의 고위 관리들과 이야기 했다.”라고 말 했다.
그러더니 내 심장을 흔드는 폭탄 선언을 했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중국으로 보내는 실 수를 했다. 그는 너를 이곳에 보내서 그가 중국에서 정치적으로 회생 할 수 있는 지를 시험 해 보려고 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리는 것 같았고 내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리우동무는 그것을 보았고 내가 하나도 놓지지 않게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보내서 아버지 대신에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그가 이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 다고 말하면 내가 괴로워 할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 만 우리는 그를 원치 않는 다!” 목을 튼 다음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반역자야, 그리고 그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감옥에 넣을 것이고 왕징웨이 친일 정부에서 일한 죄목으로 처벌 할 것이다.
이말을 꼭 그에게 전해라.” 그녀의 눈은 만족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토할 것 같았고 아픈 것 같았다. 여름 더운 날씨였으나 나는 식은 땀을 흘렸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 지 기억이 나지 않는 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 지도 기억 할 수가 없다. 돌아서서 방을 나와 기숙사 방으로 비틀비틀 들어갔다. 세상이 희미하고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거부는 나의 정신 상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틀동안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누구하고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우울증은 내 정신상태를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완벽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패로 인한 고통 에다가, 리우동무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멧세지로 나를 조각 조각 내어 내 절망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녀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내앞에 종말의 커튼이 내려지게 했다.
그녀는 우연히 아버지의 숨겨진 아젠다를 밝혀서 나의 아버지에 대한 나의 믿음을 파괴했다. 아버지가 정치교육을 시작 한 지난 3년동안에 이루어진 믿음 이었다. 나는 정상적이고 사랑스러운 아버지-아들 관계에 가까워 지는 라포어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믿음이 마치 꽃병이 땅에 떨어져 째지는 것 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우동무의 멧세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나의 희망을 더욱 효과적으로 무너뜨렸다. 왜냐하면 리우 동무는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왜 아버지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나를 지도하려고 했는 지를 내가 깨닫게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정치를 가르칠 때 항상 자기 자신을 생각 했다. 그는 나를 시험대에 올려 놓고 자신의 앞날을 저울질 했다.
그는 내가 중국으로 돌아가면 밝은 미래가 보장 될 것이라고 나를 유혹 했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정치 경력을 다시 시작하려는 야심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아무리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를 받아 주기를 갈망해도 그들로 부터 긍적적인 사인 없이 그가 중국으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그는 리우 동무가 말한 것 처럼 2차 대전 동안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다시 재판을 받고 투옥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 나를 보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리우 동무도 알아 차릴 수 있었 는 데.
그가 정치적 야심으로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내가 그의 계략에 말려 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와의 정치 토론에서 반복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반대 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그는 마오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칭찬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제스처에 어떻게 반응 하는 가를 알기 위해서 나를 그의 끄나풀 노릇, 또는 석탄 광부들에게 큰 재난을 미리 알리는 일(mineshaft canary)을 하게 하려고, 구슬르고 교묘하게 조종 했다.
다른 중국사람들의 부자관계와는 달리 그와 내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경계선에서 나를 개혁 학교로 안내 했던 간부가 “당신 가족은 좀 유별 나네요,” 라고 말 했을 때 그는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그도 우리 가족이 얼마나 유별 났는 지는 몰랐다.
중국 문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과 같다. 왕정 시대에는 아버지와 아들 중 하나가 중죄를 저지르면 둘 다 처벌을 받았다. 앞으로 다가올 문화혁명 때에도 아버지와 아들 중 하나가 반동분자라는 미명 아래 수백만명이 죽었다. 아버지가 고향에 있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배다른 누나들에게도 문화혁명동안에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한번도 만나지도 않은 아버지의 죄목 때문에 고문을 당했다.
해외 거주 중국인 담당 위원회가 나의 중국 귀국을 내가 조국에서 미래의 경력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중국의 정치적인 기류를 탐지 하기 위해서 라고 본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분명히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귀국을 그런 관점에서 볼 가능 성이 있다는 것을 알 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계략을 알아내기에는 너무 나약 했다.
리우동무의 몇마디 말은 내가 조국에서 경력을 쌓는 꿈의 종말을 의미 했다. 나는 거부 당 했다. 나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번역자이며 반동분자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국에서의 나의 미래를 포기하고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가는 데 동의 할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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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나는 어렴풋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위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런일이 나에게 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50년 대, 공산권에 대항하는 냉전이 뜨겁게 확산되고 있고 한국전쟁이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한 가운데, 서방연합국들은 중국, 그리고 중국과 관계 있는 사람 까지도 악마화 했다. 서양 미디어는 정규적으로 중국사람들을 교활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묘사 했다. 삭스 로머(Sax Rohmer)는 일찍히 악한인 “닥터 푸 만추”(1912-1913년)를 그의 소설에 등장 시켜 인종차별적인 중국인을 묘사 했는 데, 1950년 대에 미국에서 이것을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동시에 오스트랄리아 수상 로버트 고든 멘지스는 *“황화(Yellow Peril)”의 세계를 공개적으로 경고 했다.
(*번역자 주: 중국은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인공으로 쳐들어 오자,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 했다. 한국전쟁은 인공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과 중공의 전쟁으로 변 했다. 미군이 지휘하는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에게 패퇴 했다. 그리고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적화통일을 하겠다고 남쪽으로 진격할 기세를 보였다. 서방 측에서 휴전을 제의 했으나 중공은 거절 했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에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 하는 안을 제출하여 1951년2월1일 통과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닉슨과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할 때 까지 요즈음 말하는 경제제재(쌩숀)에 가까운 제재를 당하여 국제무대의 고아가 된다.
100여년 동안 서방에게 수모를 겪었던 중국인들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이겨 오랜만에 자존심을 되 찾았다. 전국이 축제 분위기 였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서방의 경제제재는 중국인들을 다시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게 한다.)
(*번역자 주: 황화 또는 황인종 공포는 18-19세기 유럽인(백인)들이 아시아 사람(황인종)은 무서운 괴물이어서 모두 없애지 않으면 이들이 백인을 몰살 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중국 식민지화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황화”를 앞세웠다.)
홍콩에 사는 중국 동조자들은 위험하고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서방 어떤 나라에도 입국할 수 있는 비자를 주지 않았다.
나는 동조자보다 더 나빴다. 자발적으로 중국으로 귀국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려고 했다가 실패 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보다 더 멸시 당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중국으로 가기전에 나에게 경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설득 하려 했고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였다. 학비조달을 끝음으로서, 그는 나의 귀국을 뻔한 결과로 만들었다.
지금, 중국이 내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려서 나는 나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장래 까지도 부정 당 했다. 어느 곳에서도 내가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고, 대학교육 없이는 취직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질 수 없고 경력을 쌓을 전망도 없었다.
나는 내 자존심을 삼켜 버리고 동정심 많은 고용주가 일 하게 해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사무직에 지원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 회사의 사무원이 되어서 받을 비웃음과 냉소를 상상 할 수 있었다. 종업원으로서,
나는 항상 놀림을 참아야 했을 것이다: “여기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한 멍청이 리가 있어요!”
홍콩이라는 작은 고립된 지역은 결국, 아무 제약 없는 사업 활동이 식민지 지배를 대신 할 것 이다.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나를 내 나머지 인생 동안 최선의 경우에 평범한 사람이고 최악의 경우에 비열한 실패자로 평가 할 것이다.
댓글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