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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다는 게 뭔지 몰랐다. 병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문화운동 하던 시절에 민문연 의장 김정환 시인이 나를 보고 “건강 그 자체”라며 감탄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비결이 뭐냐 묻기에 어린 시절 대자연의 품에서 자라난 까닭이라 답했다. 그런 내가 재작년에 죽는 줄 알았다. 괴질을 앓았다. 처음엔 발목에 좁쌀만하고 딱딱한 것들이 잡히더니 수포처럼 불어나 터졌다. 피가 섞인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냥 피부병이겠거니 싶어 병원에 갔다. 병원에 다니면 호전되어야 하는데 점점 더 번지기만 했다. 다리를 타고 올라와 배와 팔로 번졌다. 의사가 비싼 약을 써보라고 해서 그리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의사에게 어찌 병원에 다닐수록 더 하냐고 투덜댔더니 “요즘 잘 낫지 않는 피부병이 많아요” 한다. 의사가 내 앞에서 두꺼운 의학서적을 꺼내놓고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갸웃하기에 다른 병원으로 갔다. 용하다는 피부과 병원을 물어 찾아다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의사마다 진단하는 병명이 제각각이었다. 통증이 심했다. 바늘로 몸을 콕콕 찔러대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부 때문에 고생하시는 장인이 방법을 가르쳐줬다. 얼음 녹인 찬물을 뒤집어쓰면 잠들 수 있다고 해서 그리 했더니 잠시 통증이 가셔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통증 때문에 깨어났다. 장인은 베트남 참전용사다. 고엽제를 밀가루처럼 손으로 뿌렸단다. 모기가 달라붙지 않는다며 몸에 뿌리고 장난도 쳤단다 조카의 아토피 피부 때문에 고생하는 누님이 병원을 소개해줬다. 피부병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라 했다. 분당과 수원 사이인 용인에 있는 병원인데 버스 종점에서도 더 들어가는 외진 곳에 있었다. 오래 전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세운 곳이라 했다. 의사에게 병명이 뭐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어쨌든 여기서 하자는 대로만 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한다. 의사는 처방전과 함께 ‘반드시 엄수할 것’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 술, 담배, 커피, 청량음료를 금할 것. 밀가루 음식을 금할 것. 일체의 육식을 금할 것. 조미료를 금할 것. 현미와 유기농 채소를 먹을 것. 규칙적인 생활을 할 것(일찍 자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할 것). 방안의 공기를 자주 환기시킬 것 등. 산업문명 이전의 원초적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같았다. 그것을 엄수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그 사이 괴질은 얼굴로까지 번졌다.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억울했다. 본격적인 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인데…. 점쟁이가 대기만성형이라고 했는데…. 이 무슨 개죽음인가? 그러자 의심나는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1 87년 겨울, 운동권 시절 나는 세 가지 일을 하러 울산에 갔다. 공개적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연을 준비해야 했고, 비공개적으로는 운동권 조직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일을 도모해야 했고, 짬을 내 온산공단을 취재해야 했다. 어느 대학교지에 ‘온산병’에 관한 르포를 써주기로 했다. 심야열차를 타고 도착한 울산역에 약국을 운영하는 학교 선배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선배가 숙식과 안내를 책임지기로 했다. 밥을 먹으러 처음 들어간 곳이 역 앞에 즐비한 붕장어 철판구이 집이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이후 선배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이기에 미안한 마음 없이 붕장어구이 집만 찾아다녔다.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실 때도 그리로 갔다. 마지막 날 선배가 차로 온산공단을 안내해 주었다. 해안선을 따라 바위 절경이 울뚝불뚝 솟아 있고 언덕 아래로 모래사장이 펼쳐 있었다. 공장이 없다면 관광지가 되었을 풍경이다. 공장들은 해변을 따라 마을과 배나무 과수원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배 밭 사이로 흐르는 수로를 보니 끔찍했다. 한 컵 떠먹으면 곧 죽을 것 같은 새까만 물이 곧장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까맣게 염색된 백사장에는 어떤 생명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선배가 어린 시절 해수욕을 하러 온 곳이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모래를 동글동글하게 뭉쳐놓는 게들로 덮여있었고 조개가 지천이었단다. 마을을 방문했다. 어느 집 마당에서 모인 아주머니들에게 다가갔다. 엊그제 수업을 받던 초등학생들이 공장 연기에 질식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이야길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사흘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저 공장이라며 마을 앞에 우뚝 선 공장 굴뚝을 가리켰다.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유난히 하얀 연기였다. 온산의 공장들은 미나미따, 이따이 이따이 병을 만든 일본의 공장들을 옮겨온 것이란다. 이따이 이따이는 ‘아파요 아파요’란 뜻이다. 아주머니가 갈고리처럼 오그라든 손을 보여줬다. 까맣게 변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부러 펴려고 해도 펴지지 않는다며 손가락을 꺾어 보였다. 너무 아파서 진통제 없이는 못산다며 두툼한 약봉지를 보여줬다. 마을 사람들은 공장이 들어서고 지금까지 20여 년간 이곳에서 나는 것들을 먹었단다. 집 앞 언덕을 내려가면 바다다. 된장찌개를 불에 얹어놓고 내려가 게와 조개를 주워와 넣었단다. 구멍이 뚫리고 오그라든 미역을 중금속 때문에 그리된 것인 줄도 모르고 여태껏 먹었단다. 무식해서 그거 먹으면 안 되는 줄 몰랐단다. “먹으면 안 된다고 얘기나 해주던지…”하소연한다. 공장들 사이에 낀 온산면 8천명의 주민들이 그렇게 살아 왔다.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골목 입구를 보며 험한 욕을 한다. 입구에서 지켜보던 남자 둘이 슬그머니 피한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이장이 신고를 한단다. 며칠 전에도 운동권 사람들이 잡혀갔다고 했다. 마을을 떠날 때 형사가 멀리서 따라올 뿐 가까이 오지는 않는다. 선배의 차를 보고 우리를 신문사 기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로 갔다. 낚시 어망처럼 생긴 둥그런 정치망이 반쯤 물속에 잠겨 즐비하다. 저게 붕장어 잡는 그물이란다. 붕장어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단다. 어디 먼 바다에서 잡느냐 물어보니 선배가 "글쎄…“한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가 바다를 가리킨다. 가까운 곳에 떠 있는 배 한 척을 가리키며 저게 붕장어 잡는 배라고 한다. 포구 공터에 말리느라 널어놓은 미역이 보인다. 벌레 먹은 것처럼 여기저기 빨간 구멍이 뚫려 있다. 붕장어 집에서 먹었던 미역 냉채에도 이런 구멍이 있었다. 나오며 선배가 말했다. “앞으로 아무 거나 먹으면 안 되겠구나.” 나오는 길에 있는 방어진 포구의 수산시장을 그냥 지나쳐 왔다. 들어갈 때 그곳에서 회를 먹자고 했다. 그때 내 몸에 축적된 오염물질이 지금 괴질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절절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2 시화지구에 살았었다. 안산에 살다가 전세 값도 오르고 보름 안에 아파트를 비어줘야 하는 사정이라 급히 찾다보니 시화로 가게 되었다. 아파트를 보러 갔을 때 마침 창밖으로 해넘이가 보이고 있었다. 주변 환경도 좋고 바닷바람도 맑아 숨이 시원했다. 시화지구에서도 공단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야 안전하겠지 싶었다. 나는 밤샘을 한다. 담배 피우러 베란다로 나와 창을 여니 냄새가 났다. 공단을 지날 때 은근히 나는 냄새다. 안산에 살 때도 이 냄새를 몇 번 맡아본 적이 있다. 상록수역과 산본역 사이에 있는 반월역, 공단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 먼 곳까지 이런 냄새가 몇 번 왔었다. '여기까지 냄새가 오는구나.' 불쾌했지만 담배를 피우고 얼른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하루는 냄새날 때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여보쇼? 거긴 냄새 안 나요?” 항의했다. 파출소는 공단 근처에 있었다. 신고한 지 30분 만에 냄새가 사라졌다. 파출소에선 냄새의 원인을 잘 아는 모양이다. 바람이 많고 창을 열어놓는 여름에는 냄새가 덜하다. 겨울에는 거의 매일 밤 지독한 냄새가 났다. 서울 나갔다가 밤늦게 오이도역에 내리면 항상 그 냄새를 맡아야 했다. 우리 집에선 공단보다 소래포구가 가깝다. 일주일에 두어 번 개를 데리고 그곳을 다녀왔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회를 싸게 먹는 방법을 알게 됐다. 도매상에서 사와서 집에서 회를 떠먹었다. 한겨울에는 소라와 키조개를 회로 떠먹었다. 조개회는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다. 만원어치만 사면 실컷 먹었다. 월곶 포구에는 망둥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썰물 때면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망둥어 매운탕 맛도 별미다. 시화호에 구경 갔었다. 물빛이 아니었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새까만 오염수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 물을 서해로 쏟아버렸다. 멀리 있는 섬 갯벌의 조개들까지 폐사했다고 했다. 우리가 이사 온 것은 그 직후다. 그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그리 따지면 먹을 수 있는 게 없잖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시화호에서 방류된 오염물질이 서해에 사는 생선과 조개 속에 축적되어 내 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썩은 시화호에서 고기를 잡아 내다판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오염에 강한 우럭과 망둥이가 잡힌다고 했다. 내가 먹은 우럭 중에 시화호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3 대학 다닐 때 잠시 반 지하 자취방에 산 적이 있다. 아침마다 창밖에서 차 한대가 부릉부릉 공회전을 했다. 깜빡 잊고 창문을 닫지 않고 잠든 날은 매캐한 매연을 고스란히 폐 안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일본 환경운동단체에서 만든 밀가루에 관한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밀을 배에 선적할 때 방부제를 엄청나게 뿌려댔다. 분무기가 스프링클러처럼 돌아갔다. 창고로 옮길 때 다시 방부제를 뿌렸다. 방부제는 인체에 매우 치명적인 것이라 했다. 오이, 토마토, 참외에는 4일마다 한 번씩 살충제를 뿌린다. 집에서 농사를 지어 잘 알고 있다. 모든 농산물에 농약을 지독하게 뿌린다. 진딧물이 보이는 걸 그냥 두면 3일 만에 새까맣게 퍼져버린다. 진딧물의 천적이 멸종되어, 자연 생태가 파괴되어 그렇다. 아내는 솜씨가 서툴러 과일 껍질을 두툼하게 깎는다. 뭐라 타박하면 농약 때문에 이래야 좋다고 둘러대는 걸 내가 뺏어들고 얇게, 솜씨 좋게 깎았다. 과일은 주로 내가 깎았다. 육류를 키우는 사료에는 항생물질과 성장촉진물질이 잔뜩 들어있단다. 진열대에 놓인 과자는 1년씩이 지나도 멀쩡하다. 인간이 죽어 땅에 묻어도 쉬 썩지 않는단다. 방부제를 하도 먹어 그렇단다. 젠장, 그 모든 걸 잘 알면서 왜 그리 많이 먹었던가? 4 최후의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자 나름대로 치유법을 생각했다. 시화에 살 때 우리 개가 나와 비슷한 피부병에 걸렸다. 병원에 다니고 식물성 특수사료를 먹여도 낫지 않아 시골농장으로 보냈다. 그랬더니 6개월 만에 깨끗이 나아서 돌아왔다. 개들은 황토에서 뒹굴며 놀았다. 황토를 구해다 물에 풀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혹시나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그런 중에 어머님이 청국장을 만들어 오셨다. 누군가 지독한 피부병에 걸렸는데 생청국장을 먹고 낳았다고 했다. 하루 세 끼 밥 대신 생청국장을 상추에 싸 먹었다. 신기한 일이다. 이튿날부터 진물이 말라붙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청국장 때문인지, 충분히 앓을 만큼 앓아서 자연치유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내 몸은 환경지표다. 시험 삼아 라면을 끓여 먹으면 즉각 반응이 온다. 옆구리가 간질간질하다. 육식을 해도 그렇다. 식당에서 함부로 밥을 먹지 못한다. 밀가루나 육류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우리밀 라면은 괜찮다. 지리산에서 사료를 먹이지 않고 방목으로 키우는 흑염소는 아무 이상 없었다. 순수 자연이 아닌 것에는 즉각 반응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동사무소에서 건강 검진하는 의사에게 얘기 했더니, 자기는 세브란스 병원 의사라며 세브란스 알레르기 클리닉에 와 보라고 추천한다. 등판을 바둑판처럼 나눠놓고 60여가지 알레르기 물질로 실험해서 원인을 찾아내 치료한단다. 의사에게 말했다. “그냥 이대로 무공해만 먹고 살래요.” 장인이 세브란스 클리닉에 다녔다. 실험하느라 고생만 했다 한다. 장인의 몸도 환경지표다. 특히 조미료에 즉각 반응한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 조미료 쓰는지 여부를 꼭 확인한다.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몸이 가렵다며 팔소매를 걷었더니 두드러기가 우툴두툴 일어나고 있었다. 주인이 놀라 주방에 대고 성화다. 주방에선 특별히 조미료를 안 썼다고 항변한다. 알아보니 이미 담가놓았던 깍두기가 원인이었다. 근처에 다섯 평짜리 텃밭을 구했다. 채소는 그곳에 나는 것만 먹고도 남아 나눠준다. 농약을 뿌리지 않은 고구마, 감자를 많이 먹는다. 과일은 항상 아내더러 깎으라 하고 수입산은 피한다. 온산공단의 공장들이 여천공단으로 옮겨갔다. 지역 언론과 정치인들이 전남의 희망이라고 선동했다. 주민들도 장사가 잘 되고 일자리가 생긴다고 환영했다. 여천공단이 생긴 후 광양만은 조개 무덤으로 변했다. 주민들에게 여천병이란 게 생겨났다. 증세는 온산병과 똑같다. 내가 앓았던 괴질의 병명은 시화병이다. 시화에 살 때 시작된 증세다. 피부과 병원에서 나와 같은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피부병이 나면 좀체 낫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병에는 ‘시화병’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런데도 미욱한 인간들은 제2의 시화호를 만들고 있다. 지역언론과 정치인들은 전북발전의 희망이라고 선동한다. 최신 공기정화기를 갖춰놓고 오염을 피해 살 수 있고 비싼 것들만 먹을 수 있는 이들에겐 큰 돈 벌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민들에겐 희망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만금병이 생겨날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을 긁어댈 것이고, 엄마는 밤새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 애태울 것이다. 아토피란 게 예전에는 이리 흔치 않았다. 피부병은 하룻밤 자고 나면 낫는 병이었다. 어린 시절 무논에 나가면 우렁이가 있었다. 수로에서 미꾸라지를 잡느라 뜰채를 치켜들면 무섭게 생긴 철병이가 함께 올라와 놀라곤 했었다. 아끼바리보다 두 배 소출이 많다는 통일벼를 심고부터 농약을 뿌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개발한 통일벼는 병충해에 약했다. 그 후 논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었다. 생명이 죽어버린 논에서 나는 것을 인간은 부지런히 먹고 있다. 자연은 대상이 아니다. 그 속에 우리가 있다. 자연과 몸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자연을 살리는 일은 우리를 살리는 일이다. |
첫댓글 심각하게 공감이가는 글이네요...우리 주위에 아토피안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시죠? 그들이 고생하는걸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눈물이 난답니다 ㅠㅠ 우리모두 자연을 살리는데 노력해야 우리가 건강하게 살수있습니다
얼마전 새만금에 갔다가 한 학생의 온팔이 시뻘겋게 화상을 당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팔 뿐 아니라 다리로 그랬는데 3도 화상환자 같아보였는데 아토피더군요.. 그 아이 셔츠, 바지에도 피가 베여 나오고요,, 무엇을 위한 광기적 개발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