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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신]
#1. 지하철 곡성역/ 밤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도시의 어느 곳, ‘축 지하철9호선 곡성역 개통’ 이라 쓰여진 너덜대는 플랭카드. 미로 같은 환승 통로. 아무도 없는 지하 공간. 건조한 기계음만이 을씨년스럽다. 여고생 하나가 텅 빈 플랫폼 안에서 통화중.
여고
응, 어디까지 왔어? 삼십분 넘게 기다렸어.
백까지 셀 동안 코빼기 안보이면 나 그냥 가버린다.
화난 얼굴로 전화 끊는 여학생.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하나-아..두-울..세에엣-..네에엣-’ 갑자기 머뭇-어딘가 고정되는 여학생의 시선. 자리에서 일어나 선로 가까이 걸음을 옮겨가면, 플랫폼 끄트머리 노란선, 가지런히 놓여있는 분홍색 구두. 갸우뚱-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텅 빈 플랫폼. 하지만 어디선가 여학생을 지켜보는 제3의 시선. 여학생 다시 물끄러미 분홍신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분홍신 집어 들고, 천장 위 형광등에 비춰본다. 불빛 머금은 분홍신의 묘한 매력에 넋을 잃은 듯..멍한 얼굴. 순간, 똑딱이 버튼 달린 자신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가지런히 놓아둔 분홍신에 발을 넣어본다. 묘한 느낌.. 후~우..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당 못할 벅찬 한숨. 순간, 등 뒤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시선. 여학생의 어깨를 낚아채는 손. 깜짝 놀라 돌아보면, 서있는 친구.
여고
깜짝이야. 떨어질뻔 했잖아!
여학생의 말은 아랑곳 않은채 분홍신에 멍하니 시선주는 친구.
여고
내가 방금 줏은거야. 여기 있길래..
친구
(계속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벗어.
여고
...?
친구
이거..내가 먼저 봤어. 내가 가질래.
여고
(어이없다) 여기서 삼십분 동안 너 기다렸어.
갑자기 콱-여학생을 밀치는 친구. 여학생 넘어지면, 신겨진 분홍신 강제로 벗겨내는 친구.
여고
야! 뭐하는거야?
친구
(반대편 플랫폼 가리키며) 저 건너편에서 너 보구 있었어. 너 놀래 킬려구.
여고
거짓말.
친구
너 방금 넷까지 셋어. 아냐?
여고
(머뭇-) 그렇다고 내가 먼저 주운걸 이렇게 뺏어가는게... 야아~!
분홍신 품에 안은 채 휙 돌아서 가버리는 친구. 어이없는 얼굴로 씩씩대는 여고생.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제3의 시선.
#2. 지하철 환승통로/ 밤
지하도를 울리는 또각또각-구두소리. 분홍신 신고 지하도를 걸어오는 친구. 이어폰 귀에 낀 채 흥얼대는 콧노래, 가벼운 스텝.. 춤을 추는 듯한 걸음걸이. 잠시 걸음 멈추고 분홍신에 시선. 희열에 찬 미소. 어느새 묶은 머리는 풀어서 화사하게 다듬어져 있고 얼굴도 화장한 듯 생기에 차있다. 엠피쓰리 꺼내 음악 고르며 걸음을 옮길 때, 여학생의 구두소리에 덧붙여져 등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구두소리.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친구. 아무도 없는 공허한 안. 친구..? 대수롭지 않은 얼굴. 다시 걸음 옮길 때, 또다시 들려오는 등 뒤의 구두소리. 돌아보면, 이번에도 아무도 없다.
친구
(괜한 두려움)..최영미.. 너 맞지? 니가 장난치는 거지?
이때, 또다시 반대편 등 뒤에서 구두소리 들려오고, 돌아보면, 마치 자신을 따라온 듯 지하도 끝에서부터 자신의 등 뒤까지 찍혀있는 빨간색 핏자국 속, 사방에서 들려오는 또각또각-구두소리. 두려움속 천천히 뒷걸음질치는 친구.
CUT TO
미로같은 지하 통로. 무엇엔가 쫓기듯 미친듯이 도망치는 친구. 뒤쫓듯 이어지는 구두소리. 친구, 막다른 코너에 몰려 겁에 질려 있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도망치려한다. 순간, 뒤뚱거리며 제대로 걷지 못하고 넘어지는 친구. 자신의 다리를 서서히 쳐다보면 발목 아래가 잘려서 없다. 아픔과 공포에 질려 소리도 내지 못하는 친구. 이 때 짓누르듯 다가오는 또각-또각- 구두소리. 고개를 드는 친구. 피를 흘리며 눈앞에 놓여 있는 분홍신. 마치 피를 먹는 듯 흡수해서 사라지는 핏자국. 친구, 겁에 질려 바닥을 기며 도망치다 뒤돌아보는데, 뭔가가 덥석 어깨를 잡는 듯. 숨이 턱 멎는 친구. 덜덜 떨며 천천히 돌아보면, 바로 코앞에 끔찍한 형상의 눈동자. 악~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단발마의 파장.
촤르르-,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 아주 옛날 스크린 화면속, 분홍신 신은 채 춤추고 있는 한 여자의 다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춤추는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 타이틀 떠오른다.
“분홍신”
#3. 이층집 전경/ 노을
조용한 지방도시 끝자락, 산을 업고 들어선 이층 양옥.
#4. 이층집 주방-거실/ 저녁
30대 초반의 여자, 선재가 다소 서툰 솜씨지만 정성껏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 거실에서는 6살 딸 태수가 30대 후반의 남편 앞에서 발레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무척 서툴지만 기뻐하며 박수 쳐주는 남편.
CUT TO
남편, 막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 울린다. 잠시 망설이다가 선재 눈치 보며 핸드폰 들고 밖으로 나간다.
선재
(밥 내려놓으며 거실에다) 태수야.. 그만 밥 먹자.
반응 없이 서툰 발레 연습에 몰두해 있는 태수. 선재, 태수에게 화를 내려다말고 식탁에 주저앉는다. 긴 한숨. 국그릇에 수저를 담그고 외출하는 남편의 뒷모습 보며 쓴 미소 짓는다.
#5. 이층집 욕실/ 밤
뿌연 스팀 연기로 가득한 샤워부스 안. 보일 듯 말 듯 한 선재의 실루엣. 그녀의 어깨 뒤에 마치 낙인처럼 찍혀있는 흉터가 얼핏 보인다.
#6. 이층 거실/ 밤
이층 거실 한쪽에 진열된 형형색색 화려한 수 십 켤레 구두들. 가운 차림의 선재, 쇼핑백에서 새로 산 파란힐 꺼내 신어본다. 전신 거울에 만족스럽게 비춰보다가 문득 멈추고 가만히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을 만진다. 그리곤 거울에 몸을 기대는데 작게 새어나오는 한숨. 언뜻 짙은 쓸쓸함이 스친다..
#7. 이층집 안방-거실/ 밤
선재, 방문을 열어 보면, 침대 위에 남편과 태수, 잠들어 있다. 동화책 흩어져있고 선재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디졸브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잠든 선재.
디졸브
#8. 이층집 몽타쥬/ 아침
구두 진열장에 파란힐 얹혀있고 현관 신발장에서 평범한 까만 단화를 꺼내는 선재. 분주한 아침. 식사를 차려내고, 설거지하고, 자기 옷을 입고, 태수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기고, 머리카락을 줍고, 이것저것 태수의 지참물을 챙기고, 태수의 신발을 찾는데 안 보이는 듯. 태수, 시무룩해 있고 선재, 신발장을 찾아보다가 딴 걸 내주지만 태수 울상이고 남편은 신문만 보고 있고..
#9. 유치원 버스정류장 앞/ 아침
아이들과 엄마들로 북적대는 유치원 스쿨버스 정류장 앞. 길 건너에는 남편이 차에 앉아있다. 깔끔한 교복 같은 정장 차림의 선재, 빨간 백 들고 차창 안에 앉은 태수 향해 손 흔드는데 태수, 여전히 시무룩. 버스 떠나고 휴-힘겨운 한 숨 쉬는 선재.
#10. 남편의 자동차/ 아침
달리는 자동차. 카메라, 바깥에서 관찰하듯 보면, 말없이 앞만 보고 출근하는 선재와 남편. 잠시후 소리 들린다.
선재(E)
이따 태수 학원 좀 데려다 줘..두시.
남편(E)
......
선재
낮에 중요한 수술 있는데.. 오늘 수술 안 하면 그 환자 ...
남편
(무뚝뚝하게 말 끊으며) 됐어. 그만해.
선재
(말문 막히고, 다시 애원하듯) 오늘 딱 하루만 안돼? 응?
남편
(말없이 운전하다가 앞만 보며) 거기 태수 구두 있더라. 갖다 줘.
(선재의 빨간 가방 흘깃 쳐다보고) 빨간 색 좋아하긴 이르지 않니? 안 어울려.
자존심 상하는 선재. 남편을 보는 원망스런 시선위로 오버랩되며 째깍째깍 지나고 있는 시계, 2시를 가리키면
#11. 거리. 몽타쥬/ 낮
인도를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 태수의 빨간구두 들고 뛰어오는 선재. 사거리 건널목 앞 신호등에 걸음 멈추면, 도로 반대편에 도착한 스쿨버스 안에서 내리는 유치원생들 사이 태수가 보인다. 휴-안도의 한숨. 태수야..부르려다가 슬쩍 몸을 숨기는 선재. 엄마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태수. 흩어지는 아이들 따라 횡단보도 건너면, 그 모습 대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태수 뒤를 따르는 선재. 태수, 점점 걸음을 재촉하고, 순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면, 선재, 태수 따라 모퉁이를 도는데, 끼익-선재 앞에 급정거하는 자동차. 선재, 휴- 툭툭 털고 일어나 주위를 보면, 보이지 않는 태수의 모습.
#12. 발레 학원/ 낮
발레학원으로 뛰어 들어와 태수를 찾는 선재.
#13. 동네 몽타쥬/ 낮
놀이터와 골목을 다급히 헤매며 태수 찾는 선재. 화면위로 들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
(E)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딱 하나. 당신 돈. 경찰에 신고할테면 해. 대신 당신 딸은 죽어.
#14. 파출소 앞/ 오후
파출소에서 뛰어 나오는 선재.
#15. 이층집 앞 골목/ 오후
급하게 뛰어가는 선재.
#16. 이층집/ 오후
열리는 현관문, 다급히 들어오는 선재. 문득, 낯선 하이힐 하나. 이층계단을 오르려하는 데, 무슨 소리에 멈칫-. 계단을 올라 천천히 다가가면, 이층 거실에서 선 채 정사를 나누고 있는 남편과 젊은 여자. 쿵- 진열장으로 여자를 밀어붙이는 남편. 후두둑-쏟아져 내리는 구두. 젊은 여자의 발에 신겨진 선재의 파란색 하이힐. 충격 받은 선재, 부들부들 떨며 입을 가릴 때,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면, 계단 아래 서서 선재를 올려다보고 있는 태수.
#17. 놀이터/ 저녁
빨간 구두를 신고 그네를 타고 있는 태수. 넋이 빠진 듯 앉아있는 선재.
태수
(그네 타다가) 엄마. 배고파. 집에 가자.
선재
어? ...어... (일어서며) 태수, 오늘 엄마랑 잘까? 태수방에서.
태수
응? 왜?
선재
그냥... 태수랑 자고 싶어서. 동화책 읽어줄께. 우리태수 ...무서운 꿈 안 꾸게...
태수
동화책은 아빠가 읽어주는 게 더 재밌는데...
무표정한 선재 얼굴.
#18. 이층집 안방/ 밤
잠들어 있는 남편. 남편의 얼굴위로 떨어지는 가습기 포말. 무표정하게 보고 있는 선재.
#19. 이층 거실/ 밤
뿌연 성에가 끼어있는 테라스 창문. 파란힐 한 짝 들고 만지작거리며 주먹 쥔 손으로 투명한 틈을 만드는 선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밖. 후-입김을 불어 투명한 틈을 다시 뿌옇게 메우는 선재.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서.
화이트 아웃
#20. 곡성역 앞 주거형 오피스텔/ 오후
작은 숲이 있고, 지하철이 지나고 있는 동네의 주거형 오피스텔 건물 앞. 나란히 손을 잡은 채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는 선재와 태수. 낯설고 막연한 얼굴. 등 뒤로 쏟아지는 희미한 역광.
#21. 오피스텔 복도- 안/ 오후
음산한 분위기의 미로같이 긴 복도. 부동산업자와 그 뒤를 따르는 선재와 태수.
#21-1. 오피스텔 거실/ 오후
딸깍-불이 켜지는 실내, 부동산 업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는 선재와 태수. 거실과 주방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한 개의 방이 있는 백색 톤의 집안. 불안하게 껌벅거리는 형광등. 선재, 방문을 열어보는데 그 안에서 불쑥 나오는 꼽추노파. 늙어서 깊은 주름이 가득하고 이가 빠진 꼽추라 기괴하다. 깜짝 놀라는 선재.
부동산
에이~. 할망구. 거, 빈집에 들어오지 말라니까 말을 안들어. 확~ 지하실에서도 쫓아내버릴거야.
스윽 선재를 보고 총총히 사라지는 꼽추노파.
부동산
건물 지하에 얹혀사는 노인네예요. 나쁜사람은 아닌데 좀 맛이 갔어.
선재
다른 덴 없나요?
업자
여기선 그 돈 갖고 이만한 집 힘들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다세대 반지하는 괜찮은 게 있는데.. 거긴 크지. 방도 두 개고...
선재, 태수를 본다. 텅 빈 집안 한가운데.. 기이잉-- 소음을 내며 꺼져가는 형광등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태수. 공허함.. 순간, 팟-나가버리는 형광등.
태수(E)
우리 전에 살던 동네로 다시 가면 안돼?
#22. 동 선재의 오피스텔-태수방/ 밤
태수방에서 침대를 정리하고, 전신거울을 걸레로 깨끗하게 닦고 거울 앞으로 이동식 발레 바를 갖다 놓는 선재.
#22-1. 선재의 오피스텔/ 밤
보조등이 켜진 실내. 새 벽지와 장판. 하지만 아직 짐정리가 끝나지 않은 어수선한 거실. 그곳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유리 박스들,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의자위에 올라가 천장의 형광등을 끼우고 있는 선재 모양이 아슬아슬하다. 낑낑대는 선재, 하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 형광등. 쿵쿵-거실 안을 울리는 둔탁한 소음. 태수의 방을 향해 소리치는 선재.
선재
한태수! 방에서 연습하면 안된다 그랬다아. 아래층 아줌마 엄마도 무서워.
앙증맞은 발레복에 토슈즈 신고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태수.
태수
아직이야?
아귀가 맞는 형광등.
선재
스위치..
쪼르르 걸어가 스위치 켜는 태수. 동시에 팡-터지는 형광등. 짧은 비명, 자신의 눈을 양손으로 가리는 선재.
#23. 미희의 안과/ 낮
화면 가득 빨갛게 충혈된 누군가의 눈동자. 딸깍-켜지는 라이트. 밝은 빛을 받은 붉은 동공이 급속히 팽창한다.
미희(E)
희한한 게 들어있네.
라이트를 딸깍거리며 선재의 눈을 진료중인 의사. 선재의 후배, 미희.
미희
언니가 좋아하는 거. 태수. 돈. 우아한 구두 뭐 그런 게 들었어. 이혼한 남편은 역시나 없구.
선재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
미희
상처는 별거 아닌데... (심각하게) 언니 벌써 늙나보다. 노안끼가 있네.
선재
?? 무슨소리야? 아무리.. 말도 안돼. ***를 잘 못 본거겠지.
미희
그렇겠지? 에휴- 이게 다 그자식 때문이야. 암튼 능력 있는 여자들은 나처럼 혼자 살아야 돼.
선재, 갑자기 무표정한 시선.
선재
김미희.
미희
..응?
선재
태수 아빠야. 그 자식 아니구.
미희
(머뭇)
선재
그리구 다시는 그 자식 얘기 내 앞에서 하지 마.
미희
(썰렁. 말을 돌리며) 개업이 언제랬지?
선재
오늘부터 공사 시작해. 인테리어 끝나려면 삼주 쯤..?
그래서 말인데.. 저기...
미희
응?
선재
......
미희
돈 필요해? 위자료 별로 못 챙겼구나. 암튼 언닌 그 자존심 땜에 안돼. 이혼하고 혼자 애 키우는 여자가 돈 없어봐라. 서럽다 그거.
무참해지는 선재.
#24. 선재 병원 앞/ 낮
현대식 빌딩숲에 기생하고 있는 조금은 오래된 건물.
#24-1. 선재 병원 계단/ 낮
나선형 계단을 올라오는 선재. 한쪽 눈에 쓴 안대가 자꾸 신경 쓰인다.
#24-2. 선재 병원 출입문-안/ 낮
열린 문 밖으로 흥얼대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의아한 얼굴로 안을 보는 선재. 텅 빈 공간 한가운데, 콧노래를 부르며 서있는 한남자의 뒷모습. 한쪽 구석, 침대를 겸하는 붉은색 소파, 간이식 책상,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가 놓여있고, 불 켜진 휴대용 버너 위에서 주전자가 끓고 있다. 시선 느끼고 뒤돌아보는 남자, 인철. 안대 쓴 선재의 눈을 잠시 응시한다.
인철
늦으셨네요. 많이 기다렸는데. 조인철이에요. 내 이름. 의사선생님은 이름이..
대답 않고, 의아한 얼굴로 소파와 트렁크를 바라보는 선재.
인철
방금 이사 왔어요. 공사 끝날 때까진 여기서 지낼 건데.. 괜찮죠?
선재, 내키지 않는 얼굴. 뭐라고 말하려는데, 삑-물이 끓는 주전자. 얼른 다가가 불을 끄는 인철.
인철
커피 마셔요?
CUT TO
선재, 창문에 기댄 채 샘플사진이 들어있는 포트폴리오 보고 있고, 인철, 여전히 텅 빈 건물 안을 어슬렁대고 있다.
선재
직접 다 하신건가요?
인철
..?
선재
(포트폴리오 들어 보이면)
인철
(끄덕)
선재
(만족한 얼굴로 다시 몇 장 넘겨보다가) 오래 걸릴까요?
인철
촉이 오면 보름, 안 그럼 나도 장담 못해요.
선재
..촉?
인철
(제스쳐 취하며) 필링~
선재
(괜히 부담스런 시선) 시간이 급해서.. (말 멈추고) 가능한 빨리..
인철
(가로채며) 붓 하나 쥐어주고 당장 그림 그려내라는 거, (씨-익) 무책임하죠? 걱정 말아요. 필 꽂히면 바로 시작할거니까. 그리고, 예산이 적던데. 아! 탓하는 건 아니고 그럴수록 고민 많이 해야죠.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선재.
#25. 선재 병원 근처 지하철역 플랫폼/ 밤
플랫폼 의자에 앉아 발목을 주무르고 있는, 고집스럽지만 외로워 보이는 선재. 통화를 한다.
선재
아니요. 특별히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데.. (사이) 그냥 다른 사람 보내줄래요? ..그럼 빨리 부탁드릴게요.
#26. 지하철 안/ 밤
한산한 지하철 안. 차량 연결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선재. 무언가 발견한 듯 이쪽을 본다. 덜컹거리며 연결문 열리고 카메라 아래로 내려가면, 연결통로에 놓여 있는 분홍색 구두. 선재, 분홍신에 물끄러미 시선 주는데, 앞차와의 간격을 위해 잠시 정차한다는 기관사의 메시지속 멈추는 지하철 안. 어두워지면, 선재, 주위를 한번 의식하고, 천천히 다가온다. 이 때 선재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낮은 시선. 선재, 분홍신을 집으려 허리를 숙여 손을 뻗는데 낮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시선과 함께 화면 앞으로 튀어나온 손이 선재의 발목을 확 움켜쥔다. 악-선재의 비명소리. 지하철에 불이 켜지고 움직이는 지하철. 보면, 동전바구니 내밀며 적선을 강요하는 다리 없는 앵벌이. 사람들 선재를 쳐다보고.. 얼른 옆 칸으로 도망치듯 이동하는 선재.
#27. 선재 거실/ 밤
천장의 형광등은 꺼져있고, 거실 한쪽 벽에는 형광등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샤워를 마친 선재. 가운을 입고 화장대 의자에 앉아 안약을 넣고 있다. 껌뻑껌뻑-흐르는 눈물.
선재
..노안?
갑자기, 무언가 찾는 듯 가방을 뒤지는 선재, 잘 빠져나오지 않는 듯 거꾸로 뒤집어 물건들을 쏟아낸다. 툭-가방 안에서 떨어지는 분홍신. 묘하게 분홍신에 끌리는 표정.. 자신의 발 앞에 가지런히 분홍신 놓고 발을 넣어본다. 만족스런 미소.. 또각-또각-걸음 걸어 전신거울 앞에 서는 선재, 가운을 내리자 슬립에 분홍신 신은 고혹적 자태. 순간,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된 듯 후~우 가벼운 신음. 가만히 포즈 취하며 춤을 추듯 걸어보는 선재.. 좀 더 과감히 빙글 돌더니 춤을 추기 시작하는 선재. 분홍신을 신은 선재의 다리. 그런데, 거울을 보면, 거울 속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카메라, 올라가며 그 얼굴을 보려할 때,
태수(E)
또 구두 산거야?
홀린듯 분홍신을 보고 있는 태수. 거칠게 숨을 쉬는 선재. 어느새 거울 속 반영은 선재로 돌아와 있다.
태수
(다가와 분홍신을 만지며) 엄마. 나두 신어봐두 돼?
느닷없이 태수를 밀치는 선재. 뒤로 넘어지는 태수.
선재
(분홍신 벗어 진열장에 올려놓으며) 안돼. 너는 이거 신기에는 너무 어려. 발목이라도 삐면 다신 춤 못 춰. 가서 얼른 자.
태수의 방으로 태수를 데리고 들어가는 선재. 화가 나 뾰루퉁한 태수. 카메라, 진열된 분홍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음산함...
#28. 발레 교습소/ 다음 날 오전
익숙한 클래식이 흐르는 발레학원 연습실. 앙증맞은 발레복 입고 춤추는 아이들 속에 태수. 기계적 동작을 반복하는 아이들과 달리, 자꾸 혼자만 틀리고 있다. 그런 태수를 보며 키득거리던 아이들 중 하나가 태수의 발을 휙-걸어 넘어뜨린다. 대놓고 웃는 아이들. 울상이 되는 태수.
밖에서 그 모습 지켜보는 선재, 걱정스러운 시선만..
#29. 선재 병원/ 낮
놀란 얼굴로 어딘가 응시하고 있는 선재. 시멘트 벽 가득 그려진 푸른 하늘이 열려진 커튼 같은 마그리트 그림. 바닥엔 하얀 초크로 평면도가 그려져 있다. 인철, 컵라면, 삼각김밥, 음료수들을 봉지에 담아 들고 들어온다.
인철
안이 너무 썰렁해서요. 날씨도 춥구.. 밤새 할일도 없구.
선재
(벽화 가리키며) 뭐죠?
인철
맘에 들어요?
선재
(끄덕)
인철
(컵라면을 꺼내 끓고 있던 물을 부으며) 그럼 계속 일해두 될까요..?
선재
..?
인철
나랑은 일 못한다구 전화 했다던데..
대답 않고 다시 시멘트 벽화를 구경하는 선재.
선재
(인철보며) 촉이 왔나요?
삼각 김밥을 먹으며 끄덕거리는 인철.
선재
(바닥의 평면도를 가리키며) 이건 뭐죠?
인철, 생각났다는 듯 사진기를 챙겨 다짜고짜 선재의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히는게 싫은 선재, 짜증을 낸다.
선재
지금 뭐하는거에요? 찍지 말아요.
인철
(멈추고) 인테리어라는게, 쓰는 사람 편하라고 하는 거지 그럴듯해 보이라고 하는게 아니거든요. 그럴려면 공간 활용이 생명인데, 공간 안에 사람이 서있으면 작업이 더 쉬워져요. 게다가 그쪽이 쓸 거잖아요. 거긴 진료실. 그 옆엔 원장님 집무실. 자, 하나만 더 찍읍시다.
벽화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선재의 모습. 아직도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응한다. 찰칵-. 찍히는 인철의 폴라로이드 카메라.
CUT TO
컵라면을 먹는 인철. 멀뚱히 창가에 서서 찍힌 사진을 보고 있는 선재.
인철
식사는 하셨을테고 이리 와서 이거나 마셔요. 근데, 왼손으로 밥 먹어요? 오른손으로 밥 먹어요?
선재
??
인철
무슨 손 쓰는지 알고 있어야 물건들을 배치하죠.
선재
..왼손이요.
인철
..사는데 불편하셨겠네. 공사할 때 신경쓸께요. 왼손잡이용으로.
선재
(슬쩍 미소 짓는다) 식사... 라면으로 되겠어요?
인철
사먹는 밥이란게 영 신물이 나서... 가끔은 이런게 더 나을 때도 있어요.
선재, 문득,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인철을 본다.
선재
이런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지만.. (쇼파와 물건들을 흘긋 보고) 집이 없는건 아니죠? 물론 가족도..
인철
(도리도리) 집은 있고.. 부인은 있었어요.
선재
..?
인철
이혼했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구. (혼잣말 하듯) 나야 뭐. 이렇게 살아도 아쉬울 거 없으니까..
선재, 더 이상 묻지 않고 음료수 한 모금 마시는데,
인철
(대뜸) 밥 한끼 해달라면 남편이 싫어할까요?
선재
(켁-목이 메이고)
인철
다른 뜻 없어요. 집에서 해준 밥이 그리워서 그런 거지.
조금 당황하는 선재, 핸드폰 폴더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선재
가봐야겠어요. 딸하고 약속이 있어서.
선재, 일어나 핸드백 챙겨 나가려는데,
인철
잠깐만요.
선재, 멈추면, 성큼 다가와 소매로 선재 구두를 문지른다.
인철
구두에 먼지 묻은 거 보기 좋지 않아서요.
당황하는 선재. 싫지 않은 느낌.
#30. 선재 거실/ 낮
호기심 가득한 태수의 얼굴, 진열장에 놓인 분홍신을 보고 있다. 까치발 올려 분홍신 꺼내 신어보는 태수. 커다란 분홍신 질질 끌며 한 두 걸음 걷다가 후-우. 자신도 감당 못할 한숨이 터지고, 다시 또 한 걸음 옮기려 할 때, 갑자기 멍하니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 태수. 하얀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 짙은 마스카라, 길게 자라 치솟은 머리카락. 갸우뚱-자신의 맨 얼굴을 손으로 만지는 태수. 발밑을 내려다보는 태수. 자신의 발에 꼭 맞춰져 있는 분홍신.
#31. 극장 분장실/ 밤/ 과거
분장실. 비단 상자를 풀고 있는 여자의 손. 그 안에서 드러나는 분홍신. 신발을 신는 여자의 다리.
#31-1. 극장 무대 위/ 밤/ 과거
무대 위. 한줄기 핀조명 아래 분홍신 신고 춤추는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 홀린듯 바라보는 한 남자. 간혹 카메라를 들어서 춤추는 여자의 모습을 찍는다. 그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는 서늘한 눈빛의 또 다른 여자.
#32. 구둣가게 앞/ 오후
동화적 분위기의 단층건물. 구두가 진열된 쇼윈도 앞 선재와 태수.
태수
나는 저거. 저기 저 빨간색. 엄마는?
선재
..그 옆에 초록색.
태수
너무 작지 않을까?
선재
어차피 신지도 않을 건데 뭐.
태수
(의아한) 신지도 않을 걸 왜 자꾸 사는 건데?
선재
어른들도 심심할 땐 장난감 필요해. 너 인형 사는 거랑 다른 거 없어.
태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갸우뚱-하다가.
태수
심심하면 아빠랑 다시 놀면 되잖아.
선재
(머뭇-태수 보다가) 아빠랑 노는 거. 재미없잖아.
태수
그래서 같이 안사는 거야?
선재
한태수. 아빠 얘긴 그만 하자-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태수의 표정. 선재, 더 이상 말 않고 구두에만 시선주면..
#33. 선재 거실/ 밤
진열장에 새로 산 구두들. 그 옆에 분홍신. 천천히 다가가면.. 언뜻 움직이는 분홍신. 마치 살아서 숨 쉬는 듯 빛을 머금었다가 뿜어낸다.
#34. 선재 병원/ 저녁
저녁, 돌아가는 인부들. 간이식 책상에 마주앉은 선재와 인철. 인철, 종이에 그려진 평면도 보며 이것저것 설명중인데, 선재, 인철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인철
이쪽은 보라색이 좋겠어요. 안과니까 눈이 편해야 하니까... 연보라로. 아-그리고 간판디자인도 내가 한번 해봤는데..
하며 무언가 찾다가 선재를 보면, 선재, 여전히 인철의 얼굴만 보고 있다. 인철, 머쓱-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면,
선재
확실히 그쪽 얼굴이 잘 보이네요. 눈 상태가 좋아졌거든요.
인철, 실없다는 미소. 간판 디자인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하려는데..
선재
오늘 집에 와서 밥 먹을래요?
인철
(머뭇-선재보면)
선재
초대하는 거에요.
인철
남편이 허락한건가?
선재
딸만 혼자 있어요. 나두 이혼했거든요.
바라보는 인철.
#35. 선재의 집/ 저녁
고개를 들고 어딘가 바라보는 의아한 얼굴의 태수. 뻘쭘하게 서있는 인철과 선재. 인철은 반찬거리를 잔뜩 들고 있다.
#36. 선재 주방/ 밤
많이 신경 쓴 식탁. 식사중인 선재와 인철, 그리고 태수. 선재, 인철의 눈치 보며 조금 긴장. 태수, 그런 선재 보며 의아한 시선.
인철
숙제검사 받아요?
선재
..?
인철
긴장할거 없다구요. 좋아요.
선재
(가벼운 미소)
선재, 슬쩍 반찬하나 인철에게 밀어주면, 인철, 젓가락을 갖다대는데, 탁-인철의 젓가락을 가로막는 태수. 선재, 당황.. 인철, 태연함, 다른 반찬에 젓가락 대는데, 또다시 젓가락 가로막는 태수.
선재
(많이 당황, 조용히 다그치듯) 한태수..너 왜 이래?
반찬하나 집어 태수앞에 놓아주는 인철, 여유로운 미소. 그러자 태수, 지지 않겠다는 듯 다른 반찬 집어 인철 앞에 놓아준다. 씨익 웃는 인철. 선재, 그런 태수와 인철을 흘깃 살피는데,
태수
아까 낮에 아빠 왔었어.
선재, 컥- 목이 메이고 인철, 물컵 들어 건네지만 외면하고
선재
(태수향해) 니 방으로 들어가.
태수
엄마...
선재
빨리. 엄마 말 못들었어?
태수
싫어. 엄만 아빠 얘기만 나오면 맨날 화내.
선재
(당황) 거짓말 하니까 그러잖아.
태수
거짓말 아니야. 진짜 아빠 왔었어.
선재
(조금 흥분) 한태수! (진정하고 타이르듯) 아빠 멀리 떠난 거 너두 알잖아. 그런데 여길 어떻게 올수 있어? 우리 여기 사는 거 아빠는 모르는데.. 엄마 싫어. 태수 거짓말 하는거.
태수
나두 싫어. 엄마가 이 아저씨랑 노는 거. 아빠도 싫어할 거야. 나, 이 아저씨 싫어. 아빠랑 다시 놀아, 엄마아....
선재, 엄청 당황.. 묵묵히 듣고만 있는 인철.
#37. 선재 거실/ 밤
놓여있는 찻잔. 난감한 얼굴로 앉아있는 선재. 인철, 구두를 구경하고 있다.
인철
멋지네요. 모셔만 두긴 아까운데?
선재
미안해요.
인철
태수가 아빠랑 친했나봐요. 많이 보고 싶은 모양인데...
선재
......
이가 하나 빠진 듯 한짝만 놓여있는 파란색 하이힐을 집는 인철.
인철
한 짝은.. 잃어버린건가?
선재
......
인철, 다른 구두 집어 드는데.. 분홍신.
인철
나 만나는 삼일동안 똑같은 구두만 신고 나온 거 알아요?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선재
...정말..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애요?
갑자기 쾅.쾅.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재, 걸어가 현관문을 열다 흠칫 놀란다. 문 앞에 헝클어진 긴 머리칼의 여자가 맥없이 고개를 떨군채 서 있다. 천천히 얼굴을 들면 눈물 자국으로 번진 마스카라가 기괴하다. 남편의 정부, 정아.
정아
(취한듯, 넋이 나간듯) ...성준씨...
갑자기 인철을 밀치고 들이닥치는 정아. 미친 사람처럼 집안을 헤집고 다닌다.
정아
성준씨! 성준씨! ...어딨어?
선재
(냉정을 찾으려는 듯 인철에게) ...별일 아니니까 그만 가세요.
하지만, 가지 않는 인철. 이 때, 태수의 방문을 열어젖히려는 정아. 달려와 정아의 팔목을 낚아채며 태수의 방문 앞을 가로막고 서는 선재.
선재
지금 뭐하는 짓이야. 미쳤어?
갑자기 호되게 선재의 뺨을 치는 정아. 당황스런 선재.
정아
(선재의 멱살을 잡고) 성준씨 어딨어. (발악하듯) 어딨어. 어딨냐구!
정아, 거세게 선재를 옥죈다. 인철, 달려와 떼어 놓는다.
인철
무슨 짓이야! (정아를 부축하며) 그만가요. 취한 것 같은데.
정아
(인철과 선재를 번갈아보고 알겠다는 듯) 재밌네! 당신도 뭘 느끼긴 하는 거였어?
인철
이 여자가.. 그만 돌아가요.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정아
성준씨가 너랑 살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인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정부를 밀다시피 현관 밖으로 내 쫒는다.
정아
(최후 통첩하듯) 숨겨도 소용없어. 넌 버려진 거고 니걸 내가 뺏은 거야!
현관문을 닫는 인철, 돌아서다 빼꼼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태수와 눈길이 마주친다. 곧 방문을 닫아버리는 태수. 힘들게 서있는 선재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인철. 선재, 인철의 손을 조심히 밀어내며,
선재
(주체할 수 없는 감정 애써 누르며) ...그냥 가세요.
인철
...잘 먹었어요, 따뜻한 밥. 진짜 오랜만에...
현관문을 나서는 인철. 문틈 사이로 홀로 남은 선재 보이다가 머뭇거리듯 닫히는 현관문.
#38. 선재 거실/ 밤
구두 진열장 앞 선재. 한 짝만 있는 파란 하이힐을 보고 있다. 우르르- 구두 모조리 꺼내 놓고 내려보다가 술, 벌컥- 한 모금. 그리고 또 한 모금-. 다시 구두 진열하기 시작하는 선재.
#39. 선재 욕실/ 밤
세수를 하고 있는 선재. 순간, 투두둑- 욕실 천장을 뛰어가는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뭉툭한 애기 발자국 형상, 빠르게 찍혔다 사라진다. 선재, 천장을 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고 갑자기 태수의 목소리를 흉내내듯,
선재
엄마, 엄마... 싫어. 이 아저씨랑 노는 거. 아빠랑 다시 놀아, 엄마...
#40. 오피스텔 복도/ 밤
깊고 텅 빈 복도에 서 있는 선재. 두리번거리며 혼란스러워 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의 옹아리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선재, 멈칫-소리를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41. 오피스텔 옥상/ 밤
아이가 오르기엔 조금 높아 보이는 옥상 난간 위에 맨발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태수의 뒷모습. 놀라움으로 다가가는 선재.
선재
(본능적으로) 태수야!
천천히 뒤돌아 선재 보는 태수. 하얀 얼굴에 립스틱을 칠한 태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양이 소리 같은 갓난아이의 옹아리 소리.
선재
(놀라서).. 태수야...
선재,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태수,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태수의 손끝을 따라가는 카메라. 지하철역 위, 희미한 신기루 같은 환영. 핀조명 아래 춤추고 있는 분홍신의 여자.선재, 뭐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빼 밖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보통 지하철역.
태수
우리 저기 가볼까?
선재
...뭐?
태수
같이 가자. 저기...
선재
한태수..
걱정스러운 눈으로 태수 보는 선재. 차가운 겨울바람. 훅-훅-뿜어지는 태수의 입김. 선재가 태수의 다리를 잡는 순간, 휘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태수의 다리가 칼에 잘린듯 어긋나 있다. 선재의 손에 두 다리만 남고 추락하는 태수.
#41-1. 숲속/ 밤/ 과거
다음 순간, 숲속에 서 있는 선재. 손에는 태수의 다리가...
#42. 선재 거실/ 밤
악-번쩍 눈을 뜨는 선재. 거실 쇼파에서 잠이 깨는 선재. 열어 놓은 문틈으로 커튼 휘날리고.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 누르며 인상을 찡그리고. 휴-기분 나쁜 한숨.
#43. 태수 방/ 밤
태수 자고 있는 걸 보고 다가와 태수 곁에 앉아 이불을 여며주는 선재. 카메라, 천천히 선재의 모습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어두운 침대 밑. 선재가 일어서 나가자 드러나는 분홍신.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44. 선재 거실/ 다음날 아침
이가 하나 빠진 듯 분홍신 보이지 않는 진열장. 태수, 자신의 방문을 막고 서있다.
선재
한태수 너 정말 왜 이래. 그래 어제 야단친거 엄마가 미안해. 이제 됐지? 그러니까 빨리 줘. 엄마 많이 늦었단 말야.
태수
(고개를 가로저으면)
선재
(단호히) 그거 엄마꺼잖아!
태수
(단정짓듯) 그 분홍신..엄마꺼 아니야!
선재
(머뭇-찔린다) 자꾸 이러면 엄마 진짜 화낸다.
태수, 미동도 하지 않으면, 힘겨운 한숨- 포기한 듯 다른 구두 꺼내 신는 선재.
선재
학원 안가?
#45. 발레 교습소/ 낮
부러운 시선으로 어딘가 보는 아이들. 보면, 너무도 춤 잘추는 태수의 모습. 밖에서 그 모습 지켜보는 선재, 의아함..언제 저렇게 춤을 잘췄지? 하는 표정.
#46. 태수 방/ 낮
태수의 방으로 들어가는 선재, 여기저기 방안을 뒤지다 침대 아래 살짝 보이는 구두코를 발견한다. 괜히 주위 의식하며 분홍신 들고 방을 나서는 선재.
#47. 선재 병원/ 오후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안. 인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는 인철. 시선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선재가 서있다. 자연스럽고 화려한 옷차림. 분홍신을 신고 있다. 의외라는 미소를 짓는 인철. 물끄러미 보다가.
인철
촉..받은건가?
CUT TO
간이식 테이블에 마주앉은 선재와 인철. 인철, 이것저것 설명중이다.
인철
생각보다 공사가 빨라질 것 같긴해요. (씨-익) 확실히 감이 왔거든요.
보면, 선재, 인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선재
(대뜸) 내가 밥 사라고 하면, 이혼한 부인이 싫어할까요?
인철
..?
선재
(분홍신 잠깐 보고) 이거 신은 모습, 궁금하다고 했잖아요.
인철
나 때문에..신었어요? 진짜로?
살짝 웃는 선재. 의외라는 얼굴의 인철.
#48. 인철의 차 안/ 오후
한적한 교외의 도로를 달리는 인철의 차.
선재(S.O)
음식은 좋은데.. 답답했어요 조금.
실망스런 표정 짓는 인철. 선재..?
인철
오바 좀 했지. 의욕이 앞섰으니까. 처음 맡은 공사가 그집이었거든요.
선재, 괜히 미안하고,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선재
그럼 제일 맘에 드는 덴 어디에요? 인철씨가 한 것 중에 제일 맘에 드는 집.
인철
(피식) 실망 할텐데..
선재
그래두 궁금해요.
인철
그럼 같이 가볼래요?
차를 돌리는 인철.
#49. 인철의 집 앞/ 저녁
한적한 교외에 있는 작업장 같은 집. 들어서는 인철의 차.
#50. 인철의 집 안/ 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있는 텅 빈 공간. 인철, 어수선한 바닥을 발로 툭툭 치우고 있다.
인철
앉아요. 맘에 드는 곳으루. 신발은 굳이 벗을 필요 없구..
인철의 목소리가 안을 울린다.
선재
아직 공사 중인가요?
피식-녹이슨 창문을 힘들게 여는 인철. 차가운 겨울바람이 선재의 얼굴을 덮친다. 코트깃을 움츠리는 선재.
CUT TO
분홍신 신은 채 시멘트 벽화를 구경하는 선재. 한 여자의 그림이 스케치 되어있다.
선재
누구에요? (피식-) 나는 아니죠?
인철
전에 나랑 살던 여자요. 이혼한 내 전부인..
끄덕끄덕, 더 이상 말 않고 바라보는 선재. 넓은 공간 한가운데 분홍신 신은 채 서있는 선재. 묘한 분위기.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는 인철.
인철
내가 오늘 이 말을 했었나..?
선재
...?
인철
잘 어울려요 그 구두. 아무한테나 어울리는 거 진짜 아닌데.
선재
(미소를 머금으면)
인철
근데 왜 낯설지가 않죠? 분명 어디서 본적 있는데..
선재
(머뭇-분홍신 내려다보는데)
인철
자고 갈래요?
선재
(멈칫 보면)
인철
너무 빠른가? 아-딸이 혼자 있었지. (핸드폰 폴더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바래다줄게요.
선재, 미동 않은 채 인철을 바라본다.
인철
화났어요? 내가 너무 멋대로..
선재
......
인철
정말로 화난건가?
여전히 미동 없는 선재. 가벼운 움직임을 보이는 분홍신 신고 있는 선재의 다리.
CUT TO
키스를 나누는 선재와 인철. 편하게 선재를 눕히자 선재, 첫경험을 하는 소녀같은 표정. 디테일한 인철의 손이 그녀의 배에, 어깨에 닿을 때 마다, 훅-입에서 뿜어지는 가벼운 입김. 기대와 설레임, 부끄러움...
선재
저 그림...자꾸 날 쳐다보는 것 같애.
인철, 위치를 바꿔 선재를 안고 자신이 누우면, 겉옷이 벗겨진 선재의 어깨 뒤에 보이는 낙인같은 문양. 사랑에 몰두하는 선재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
카메라, 선재가 신고 있는 분홍신으로 다가가면.. 분홍신의 선들이 춤추듯 흔들거리면서 어떤 거대한 두 개의 추상적인 느낌의 형상이 되더니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서로 엉켜 싸우는 듯, 춤추는 듯 용틀임하다가 이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버린다. 마치 사랑을 끝낸 암컷이 숫컷을 잡아 먹듯이.. 카메라 빠지면 선재의 발에서 떨어지는 분홍신.
CUT TO
아직도 열려있는 창문. 상반신 드러낸 채 멍하니 누워있는 인철. 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벽에 스케치된 여자를 보고 있는 선재.
인철
지워줄까?
선재
(도리도리)
인철
왜 이혼했어? 역시.. 그 여자?
선재, 굳어진 얼굴. 열려진 창문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위로 스치는 차가운 바람.
인철
하긴... 한마디로 설명하긴 힘들지. 두사람만의 문제니까. 궁금해졌어. 당신이란 사람. 그래서 물어본거야.
선재
......
인철
좀 놀랬거든. 내가 생각한 당신이랑 많이 달라서.
선재
전남편... 나란 여자한텐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자기 딸의 엄마..자기의 아내.
인철
......
선재
나란 여자한테 관심 가져 주는 거. 나는 그러길 바래요. 그리구.. 반말하지 마요.
또각또각- 나가는 선재. 바라보는 인철.
인철
바래다 줄께요.
걸어가며 고개를 젓는 선재.
#51.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 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선재. 10층-8층-7층-6-5-4-3-2-1. 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타려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쑥 나오는 꼽추노파. 깜짝 놀라는 선재. 그런데, 꼽추노파, 선재가 신은 분홍신 보고 겁에 질려서 신음을 토하며 도망치듯 사라진다. 당황한 선재, 분홍신 한 번 내려다본다.
#52. 선재 집/ 밤
씩씩대며 서있는 태수. 선재, 무표정한 얼굴로 현관 앞에 서있다.
선재
도대체 엄마가 뭘 잘못한건데?
태수
그거 신지 말랬어.
선재
엄마꺼잖아.
태수
아니야. 이제부턴 내꺼야.
다가와 억지로 분홍신 벗겨내려는 태수. 선재, 그런 태수를 본능적으로 밀쳐버린다.
선재
손대지 마!
선재, 상기된 얼굴. 분홍신 벗어들고 들어가려 하는데, 태수, 휙-분홍신 낚아채버리면,
선재
한태수!
선재, 무서운 얼굴로 태수의 어깨를 잡더니 신발을 뺏으려 잡아당긴다. 하지만, 의외로 태수가 뺏기지 않으려 끌어안는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중심을 잃고 거실에 나뒹군다. 이때, 열리는 현관문. 미희가 비싼 인형을 안고 들어온다. 씩씩대는 선재와 태수를 보다가,
미희
조용히 싸워. 옆집에서 신고 들어와. 태수 선물.
선재의 주의가 소홀해진 틈에 분홍신을 낚아채 도망치듯 방안으로 들어가는 태수.
CUT TO
미희, 구두 진열장을 보고 있다.
미희
여전하네, 취미는..
선재
무슨 일이야. 늦은시간인데.
미희
못 올 데 왔어? 낮에 시간을 뺄 수 가 있니? 무지하게 바쁜데.
쭈욱-거실 한번 둘러보는 미희.
미희
좁다..? 안 불편해?
선재
(기분 상한다) 살 부비고 사는데 아무문제 없어.
두 식구 사는데 더 클 필요 없는거구.
미희
(돈봉투를 식탁위에 내려놓으며) 자존심도 세울데서 세워. 나한테까지 그러냐? 그나저나 그자식..(헙!) 아니..태수 아빤 한번 들른거야?
선재
..아니.
미희
여기 사는지 알고는 있구?
대답 않는 선재.
미희
근데 뭐야?
선재
..뭐가?
미희
태수가 품고 있던거. 아까 그거 때문에 싸운 거 아니었어? 아주 독특하든데, 어디꺼야?
선재
..지하철.
미희
지하철? 지하상가?
선재
줏었어 사실은. 주인이 없는 것 같길래..
뜬금없다는 미소를 짓는 미희.
미희
차 한 잔 안줘?
선재
기다려. 씻구 올게.
욕실로 들어가는 선재. 미희, 태수의 방을 바라본다.
#53. 태수 방/ 밤
분홍신 품에 안은 채 경계하는 얼굴의 태수. 미희, 인형선물을 태수에게 내민다.
미희
이모가 한번만 신어보면 안될까? 정말 딱 한번만인데..
태수
(도리도리)
미희, 만원짜리 몇 장 꺼내 태수에게 내민다. 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태수, 미희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태수의 어깨를 잡아채는 미희의 손.
미희
(차가운) 너 왜 이모 말 안 들어?
태수
(머뭇-)
미희
한번만 신을 거야. 정말로 딱 한번!
미희, 태수 손목을 꽉 쥐면 태수, 고통스러워 입이 떡 벌어지는데 미희가 분홍신을 움켜 쥐면서 손을 풀면, 태수의 손목에 흉터처럼 손도장이 찍혀있다.
#54. 도심 거리/ 밤
인도를 걸어오는 미희의 발. 분홍신을 신고 있다. 평소와 다른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 쇼핑백을 잔뜩 들고, 거리를 울리는 음악소리에 춤을 추는 듯한 몸짓, 통화중이다.
미희
그래서 미안하다구. 뺏긴 뭘 뺏어. 그냥 잠깐 빌린 거지. 상처? 에이~ 무슨 상처씩이나. 그거 금방 없어져.알았어. 돌려주께. 내일 저녁때 집으로 오세요. 손 번쩍 들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근데 언니.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은 거 있지. 이 신발 신으니까 막 젊어지는 것 같애. 춤도 막 저절로 될 거 같구.
전화하는 중에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남자들의 시선을 느끼고 기분 좋은 미희. 전화 끊고 멈추는 미희. 동시에 멈추는 흥겨운 음악.
신부드레스 쇼윈도 앞. 드레스를 홀린 듯 바라보고 서 있는 미희. 또각또각- 들려오는 구두소리. 고개 돌리면 어느새 밤안개가 자욱하고 인적은 끊겨있는 거리. 구두소리 사방에서 들려오고.. 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 두려운 미희, 슬슬 뒷걸음치는데 갑자기 얼굴옆에서 나오는 낯선 손. 몸이 마비된 듯이 움직이지 못하는 미희.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미희의 짙은 화장을 문지르나 싶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푹 찔러 눈알을 후벼 파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밀쳐져 쇼윈도 창을 깨고 처박히는 미희. 깨진 유리창 잔해가 마치 단두대처럼 내려꽂히며 한쪽 다리가 잘리는 미희. 뿜어지는 핏물. 나머지 다리가 좌우로 움직인다. 끼익-끼익- 신경을 자극하는 마찰음 소리. 칼날같은 유리창 조각틀 위에 걸쳐진 다리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발목을 톱질하듯 잘라내고 있다. 마치 마네킨처럼 신부드레스와 면사포를 걸친 미희의 끔찍한 사체.
디졸브
#55. 선재 병원 안/ 낮
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전기 톱. 공사가 계속되는 병원 안. 통화를 하며 밖으로 나가는 선재. 돌아보는 인철.
#55-1. 선재 병원 계단/ 낮
나선형 계단 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선재.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멘트가 들린다.
선재
김미희. 너 때문에 우리 모녀 의절하게 생겼다.
절도로 신고하기 전에 빨리 전화해.
전화 끊고 돌아서는 선재, 인철이 서있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
인철
달라 보이네요. 어제랑은.
선재
(피식)
인철
오늘은 왜 그거 안 신었어요?
선재
......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 주머니에서 꺼내 선재에게 내미는 인철. 펴보라는 시늉을 하면,의아한 얼굴로 받아드는 선재, 잡지에서 찢은 듯한 종이 위, 마스카라 번져있는 한 여자의 묘한 사진, 분홍신을 신고 있다.
인철
맞죠? 당신이 신었던거..
선재
(사진 물끄러미 보다가) 달라요. 내가 신은 거랑은.
인철
내가 착각한건가?
선재
세상에 이런 구두가 하나는 아니잖아요.
인철
(가만히 선재 보다가) ...그렇죠. 암튼 당신이 더 잘 어울려.
인철, 가만히 선재 보는데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전화를 받는 선재. 놀라는 표정에서,
#56. 경찰서/ 낮
다급히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선재와 인철.
#57. 시체 부검실/ 낮
선재와 인철, 형사가 배석한 가운데 사체의 흰 천을 들추는 부검의. 눈알이 없어진 채 죽어있는 미희. 선재, 비명도 못 지른 채 헉-숨이 막히고, 발목 부분을 들추는 형사. 절단된 한쪽 다리와 너덜거리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붙어있는 나머지 다리. 비어있는 미희의 눈을 바라보는 선재. 그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58. 극장 앞 거리/ 낮/ 과거
인력거에서 내리는 남자, 무용 연출가.
#58-1. 극장무대 위/ 낮/ 과거
무대 위, 주인공인 두 여자의 2인무를 중심으로 그 뒤에서 군무를 연습중인 단원들. 분홍신 신은 프리마돈나에게 각별한 느낌으로 지도를 해주던 연출가, 분홍신을 소매로 슬쩍 닦아주자 부끄러운 듯 동료를 향해 생긋 웃는 프리마돈나. 강하게 질투를 느끼는 동료 무용수. 노려볼 때,
#59. 경찰서 안/ 밤
씬2에 나왔던 죽어있는 여고생의 감식 사진과 미희의 사진이 한장 한장 넘겨진다. 놀란 얼굴로 형사를 보는 선재. 그 곁에 인철.
형사
웬 고삐리가 찾아와서는, 죽은 애가 신고 있던 구두를 찾아달라 그러더라구요. 자기 꺼라고...
선재
(보면)
형사
근데 시체 수습할 땐 그런 건 없었거든..?
선재, 희생된 여고생2의 사진을 본다.
선재
이 아이도 다리가 잘려 죽은 거죠?
형사
결국.. 그렇죠.
선재
다른 아무 구두도 없었나요?
형사
네. 신발자체가 없었어요.
이 때, 대기 의자에서 끄덕거리던 취객이 쿵- 쓰러진다. 소란스런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인철. 형사들이 쓰러진 취객을 깨우느라 수선스럽다. 무심한 얼굴로 취객을 지나가는 선재. 냉담한 선재의 반응을 보던 인철, 따라가려고 하는데,
형사
잠깐만.
인철
..?
형사
(감식 사진 가리키며) 함부로 볼 수 있는 사진이 아니거든요. 남편분이 대신 사인하세요.
신원확인서를 내미는 형사. 사인하는 인철. 문득 어딘가에 시선. 가족사항에 남편의 이름과 태수의 이름이 기재되어있다.
인철
한성준.. (형사보며) 이혼.. 안했어요?
형사
(어어없단 얼굴로 인철을 본다) 네?
#60. 도심 대로변-인철 차 안/ 밤
달리는 자동차 안. 선재, 혼란스런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고, 인철은 그런 선재를 혼란스럽게 보고 있다.
#61. 오피스텔 앞/ 밤
끼이익- 멈추는 인철의 차.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선재. 바라보는 인철.
인철
정말 괜찮아요?
선재, 고개만 끄덕이고 말없이 오피스텔로 들어간다.
#62. 도로 위-인철 차 안/ 밤
깊은 상념에 빠져 운전을 하고 있는 인철의 얼굴위로 플래시 백 되는 경찰서.
#62-1. 경찰서 안/ 밤 (플래시 백)
쓰러진 취객을 무표정하게 지나치는 선재의 얼굴위로.
인철
한성준.. (형사보며) 이혼.. 안했어요?
형사
(어어없단 얼굴로 인철을 본다) 네? 남편 분 아니에요? 이거..직계가족 아니면 곤란한데...그냥 남편 이름으로 쓰세요. (취객쪽을 향해) 야! 야! 전화했어? 안 했어?
신원확인서의 서명란을 보다 남편 이름으로 서명하는 인철.
디졸브
차창에 어리는 도심의 불빛들이 상념에 빠져있는 인철의 얼굴위로 명멸한다.
#63. 오피스텔 복도/ 밤
승강기 열리고 내리는 선재.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두리번거린다. 자신의 구두소리 말고 다른 구두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는 선재.
#64. 선재의 집/ 밤
거실로 들어서는 선재, 피곤한 듯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아 몸을 파묻는다. 카메라, 선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화면가득 선재의 얼굴이 보이고, 잠시 후 선재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돌아보는 끔찍한 미희의 사체. 선재, 뭔가를 보고 본능적인 짧은 비명. 보면, 분홍신 가슴에 안고 있는 태수.
선재
이거 누가 갖고 왔어?
태수
(도리도리)
선재
태수야. 그거 빨리 엄마 줘.
분홍신, 더욱 품에 안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태수, 도리도리.
선재
그거 태수 꺼 아니야. 엄마 것두 아니구.
태수
그럼 누구건데?
선재
(머뭇-)
태수
나는 이거 신어야 돼. 이게 있어야 춤출 수 있어.
선재
태수야. 너, 그거 신으면 안돼. 한번만 더 말해.
(소리치듯) 그거 빨리 엄마 줘!
태수
싫어!
순간, 짝-태수의 얼굴을 때리는 선재. 태수, 놀람과 당황, 툭-태수의 품안에서 떨어지는 분홍신. 선재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태수. 두려움 속 분홍신 바라보다 위험한 걸 생포하듯 감싸 안는 선재.
#65. 오피스텔 지하 쓰레기장/ 밤
양손에 들려있는 분홍신. 선재, 혼란과 두려움. 분홍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돌아서는 선재, 왠지 미련이 남는 듯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돌아서는데, 코앞에 서 있는 곱추 노파. 깜짝 놀라는 선재. 도망치듯 서둘러 피하는 선재. 선재를 바라보는 곱추 노파.
#66. 엘리베이터 안/ 밤
승강기를 타는 선재. 층수 버튼을 누르려는데 어느새 타고 있었는지 교복 입은 여고생이 선재가 누를 층수버튼을 먼저 누른다. 움찔 놀라는 선재. 적막함속에 두 사람만 타고 올라가는 승강기. 여고생,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 숙이고 엠피쓰리버튼만 눌러대고 있다. 기이한 분위기에 으스스함을 느끼는 선재. 띵- 문이 열리고 여고생이 먼저 내리길 기다리는 선재. 하지만 여고생은 내리지 않고 우물쭈물 눈치 보던 선재가 먼저 내린다. 선재, 내리지 않는 여고생을 이상하다는 듯 돌아보며 걸어가는데 바로 옆 또 하나의 엘리베이터 문이 마침 열려 있다가 스윽 닫힌다. 이 때 막 닫히는 문틈으로 그 옆에 있던 여고생이 어느새 머리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든다.
#67. 오피스텔 복도/ 밤
선재. 복도를 황급히 걸어오는데 들려오는 구두소리. 또각또각-. 두려움 속 우뚝 멈춰서는 선재. 몸을 움츠린 채 뒤를 돌아보는데 텅 빈 복도. 점멸하기 시작하는 복도 등. 두려움 속에 황급히 뛰어가는 선재, 급하게 집으로 들어간다.
#68. 선재 거실-태수방/ 밤
아무도 없는 거실. 숨을 몰아쉬는 선재. 태수 방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린다. 천천히 태수 방쪽으로 가는 선재. 방문을 열자 분홍신 신고 멍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태수의 모습. 그 앞 침대에 앉아 태수를 보고 있는 남편. 못 박힌 듯 서 있는 선재. 춤을 멈추고 선재를 보는 태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는 남편.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고 있는 선재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남편. 선재를 지나쳐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수 방을 나간다. 쿵. 닫히는 현관 문소리. 태수를 바라보는 선재의 떨리는 얼굴. 이 때 마치 양수가 터지듯 엄청난 하혈을 하는 태수.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선재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때,
#69. 응급실/ 밤
분홍신을 꼭 쥐고 응급실 침대에서 깨어나는 선재. 보면, 옆 침대에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는 태수. 지켜보고 있는 인철과 의사. 그리고 그 옆에 태수를 살피고 있는 레지던트와 간호사. 두려운 얼굴의 선재.
인철
괜찮아요?
선재
(황급히 다가가며) 태수야.. 태수야... 어떻게 된거에요?
의사
의식이 없어요.. 그런데.. 원인을 알 수가 없어요. 일단 기다려 보는 수...
선재
(받아들일 수 없단 표정) 눈떠봐 태수야. (소리친다) 태수야. 빨리 눈 떠.
태수를 흔들며 소리치는 선재. 제지하는 인철과 의사.
#70. 병원 옥상/ 새벽
선재, 아직도 흥분된 얼굴로 서서 덜덜 떨며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다. 분홍신을 꼭 움켜쥔 채. 난감한 인철.
선재
맞아요. 이거, 분명 미희가 가져간 거야.
인철
(잠시 보다가) 당신 후배..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 구두 당신이 병원 올 때부터 꼭 쥐고 놓질 않았대요.
선재
미치겠어. 난 아냐. 도대체 누가 갖다 논거냐구. (상기된다) 누가..누가?
인철
(보면)
선재
..왜 태수한테만 오는거죠? 내가 처음 줏은건데, 나도 그걸 신었는데..왜 나한텐 아무 일도 없는 거냐구요.
인철
(도리도리)
선재
나... 당신 못 믿겠어.
인철
무슨...
선재
병원엔 어떻게 왔죠? 누가 연락했어요.
인철
무슨 소리에요. 당신이 전화했잖아. 아니, 당신 번호만 찍히고 끊겼지만..
반으로 접힌 분홍신 신고 있는 여자의 사진을 인철에게 내미는 선재.
선재
어디서 났어, 이 사진? 사진 속 이 여자 도대체 누구야?
인철
(이해할수 없단 표정을 짓는다) 잡지책에서 찢은건데..내가 뭘 잘못한건가?
선재
(흥분된다) 누구냐구 묻잖아. 누구야. 누구야. 누구! 누구!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선재. 인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선재를 바라본다.
인철
정말로 저 여자..누군지 몰라?
갑자기 저 멀리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키는 인철. 선재, 인철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맞은편 건물 대형 옥외 광고판. 분홍신을 신은 채 서있는 프리마돈나의 묘한 사진. 선재, 쿵!
인철
어느 기업에서 만든 홍보용 포스터에요. 요즘 도시전체가 저 여자 사진으로 도배 돼있어.
선재, 헉..헉..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순간, 머뭇-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선재의 손바닥위로 떨어지는 빨간색 눈발. 핏물처럼 번진다. 보면, 도시의 여명위로 빨간색 눈이 쏟아지고 있다.
페이드 아웃
#71. 포털 사이트 사무실/ 낮
페이드 인
홍보담당자와 마주앉아있는 선재와 인철. 두 사람의 등 뒤로 분홍신 신고 있는 프리마돈나의 포스터가 도배되어있다.
홍보
(포스터 보며) 저 여자가 누군지 우리도 모릅니다.
선재
...?
홍보
저래 뵈도 환갑이 넘은 사진이에요.
인철, 당혹스런 얼굴. 선재를 본다. 굳은 얼굴의 선재.
홍보
정확히는 천구백 사십..사십 사년이네요.
우리 직원이 인터넷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건데.. 근데 두 분은 무슨 볼 일이시죠?
선재
(무슨 말을 해야할지..)
인철
누가 찍은 사진인데요?
CUT TO
인터넷 블로그에 떠있는 프리마돈나의 흑백 사진. 사진 밑에 꼬리말이 남겨져있다. ‘정하섭이란 무용 연출가가 자기 무용수를 찍은 거래요. 근데, 정하섭 서른한살 나이에 요절을 했대요. 왠지 슬픈듯한 여자의 미소..힝~’
홍보
우리도 아는건 이게 다에요. 보다시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이고 저작권 시효도 지났구요.
진지하게 모니터 바라보는 선재와 인철.
#72. 도서관 DB자료실/ 낮
각각의 빛바랜 옛날사진들과 신문기사가 이미지컷처럼 모니터위에 스친다.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는 인철.
-혜성처럼 등장한 조선의 무용연출가 정하섭 동경에서 빛나다.
-정하섭 막강한 후원 업고 무용단 창설. 그의 프리마돈나는 누구?
#73. 패스트푸드점/ 낮
통유리 너머,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씬1에 나왔던 여고생의 모습이 보인다. 여고생을 밖에서 지켜보는 선재.
CUT TO
마주앉아 있는 선재와 여고생.
여고
(경계하는) 형사들한테 다 얘기 했거든요. 이제 그 친구 얘기 하고 싶지 않아요.
여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선재
이거..맞니?
여고
(돌아보면)
선재, 분홍신 꺼내 여고생에게 보여준다. 여고, 놀라서 분홍신을 바라본다.
#74. 도서관 자료실/ 낮
-정하섭 총독부 헌병부장 딸 게이코와 전격 결혼 발표.
-정하섭 무용단 프리마돈나 게이코. 개막공연 직후 결혼식.
-피의 결혼식. 정하섭, 게이코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인철. 손으로 짚어가며 옛날 신문기사들을 읽어내려 간다.
#75. 거리-도서관 교차/ 오후
선재, 넋 나간 얼굴로 통화중이다.
선재
(어이없단 웃음) 나는 안죽어요. 내 딸만 죽을거야.
인철
(도서관 복도를 빠져나가며) 알아듣게 설명해요. 무슨 얘긴지.
선재
발목이 잘려 죽은 여고생의 친구..
그 아이도 나처럼 분홍신을 신었는데.. 아무 일 없어.
인철
...?
선재
그 아인 분홍신을 신기만 했구, 죽은 여고생은..그 아이가 신었던 분홍신을 뺏어간 거구..
인철
(잠시 침묵) 그럼 당신 딸은.. 태수는?
선재
나한테서 뺏어갔어요. 죽은 미희가 그걸 다시 내 딸한테서 뺏어간 거구.
인철
?!!
선재
(고조된다) 그래서 너무 화가나. 내가 그걸 줍지만 않았어두.. (더이상 말 못 잇고) 미희, 우리 태수..내가 다 죽이는 거야.
선재, 거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
인철
지금 거기 어디에요.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
#76. 터널 안/ 밤
사고가 나서 막힌 터널 안. 조금씩 움직이는 자동차들. 선재, 흥분이 조금 가신 얼굴. 인철이 뽑아준 신문 기사들과 사진을 보고 있다.
인철
재밌는게 하나있어.
선재
..?
인철
정하섭이 살았던 동네. xx리..
지금 이름은 xx구 xx동..
선재
(놀란 얼굴)
인철
맞아.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야.
선재
(두려움)
인철
정하섭, 게이코. 그리고 포스터 속 여자.. 만약, 두 여자 중 하나가 정하섭의 정부면?
선재
(미간 찡그리며) 남자들은 항상 그 생각 밖에 못하나요?
인철
..이것 봐요. 남녀 사이에 치정만큼 치명적인 감정은 없어. 당신도 남편과 바람피던 그 여자 죽이고 싶지 않았어?
선재
뭐라구요?
인철
그러니까 내말은..
선재
(말 자른다) 그만해요. 억지야.
인철
좀 솔직해져요. 당신 감정만 얘기하면 되잖아. ..남편 얘기가 거슬리는 건 알지만.. 피하기만 한다고 될 건 아냐..
선재
무슨 말이에요?
인철
태수만 해도.. 저렇게 됐는데 연락해야 되잖아. 당신 남편도 알아야...
선재
(말 끊으며) 그만.
인철
당신 딸 아버지야.
선재
(소리친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인철
그거 알아? 당신 이상한 방식으로 스스롤 억압해. 그러다가도 무섭게 돌변하고. 특히 남편 얘기 할 때는...
선재
당신이 뭘 안다 그래? 한 번 잤다고 나에 대해 다 아는 거 같애? 함부로 입 놀리지마 다시는...
덜컥 차 문 열고 내려서 걸어 가버리는 선재. 뒤 따라 뛰어가 선재를 붙잡는 인철. 선재, 울고 있다. 앞차가 출발하자 빵빵- 클랙션 울려대는 뒷차들. 인철, 뒷차들을 향해 소리친다.
인철
씨팔, 조용히 안 해.
#77. 태수 병실/ 밤
여전히 의식불명인 태수곁을 지키고 앉은 선재.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떠 있는 정하섭 무용단의 사진들을 찾아보고 있는 인철. 40년대 마을 풍경. 극장 단원들과의 기념사진. 춤을 추는 프리마돈나와 동료 무용수... 선재, 문득 인철 뒷모습 보고,
선재
돌아가요. 가서 쉬어요.
말없이 고개 들어 시선 주는 인철.
선재
...석달전에 ...태수를 잃어버릴 뻔 한 적이 있어요.
인철
!!
선재
남편은 그때.. 그 여자와... 그때 알았어. 내가 태술 얼마나 사랑하는지.. 근데 맘 한구석엔.. 태수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어.. 영영...
인철
..다 버리고 싶었겠지. ..그러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자유롭게..
선재
...비웃는 건가요?
인철
아니. 누구나 그런 맘 있어.
선재
남편 땜에 그런게 아냐.. 나, 사실은 항상 그런 생각 했던 거 같애요. 아니, 했어요. 분명히... 그 때도 태수가 갈만한데가 어딜 거란 거... 생각하기 싫었어.
인철
..지금도 그래요?
선재
(고개 젓는 선재) 우리 태수.. 내가 꼭 살려 낼 거야.
선재를 잠시 보다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인철.
선재
(혼잣말하듯) 그 여잘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남편을 죽이고 싶었어..
잠시 멈췄다 다시 걸어가는 인철. 망연히 앉아 있는 선재...
디졸브
#78. 동 태수 병실/ 새벽
새벽. 카메라, 의식 없는 태수 얼굴로 천천히 다가가면, 또각또각- 구두소리. 눈을 번쩍 뜨는 태수. 스르르 일어나면 품안에 놓여있는 분홍신. 꼭 껴안는 태수. 다시 들리는 구두소리. 또각또각- 어디선가 애기 옹아리 소리, 마치 천장 위를 걸어 태수에게 다가오는 듯.. 구두소리 점점 커질 때, 고개를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태수. 투두두둑- 빠르게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찍히는 애기 발자국형상. 갑자기 의아한 얼굴, 천장위로 손을 뻗는다. 얼굴 바로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천장. 그 때, 천장에서 쑥 나오는 여자의 손. 태수의 얼굴 확 움켜쥐고 천장위로 끌어올린다.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선재. 다시 원래대로 올라가 있는 천장. 사라진 태수. 정적. 쩌어억. 금이 가는 천장. 금 사이로 배어드는 붉은 피. 소리에 잠이 깬 선재. 태수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마치 폭포처럼 터져 내리는 검은 피. 선재의 온몸위로 쏟아져 내린다. 허우적거리는 선재의 충격적인 얼굴. 그 시점으로 가득 펼쳐지는 피.
#79. 극장무대 위/ 낮. 플래시 백
피처럼 붉은 커튼막이 올라간다. 정하섭무용단 창단식 준비가 한창인 극장무대. 공연에 배경이 될 무대셋트가 지어지고 있다. 일본과의 전쟁으로 일부 부서진 거대한 동남아의 사원. 정하섭과 일제 고위 관료들, 메인 무대기둥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79-1. 극장 분장실/ 낮. 플래시 백
어두운 분장실. 몇 개의 알전구 사이로 보이는 무용수, 게이코. 화려한 의상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삐걱-! 문이 열리자 돌아보는 게이코,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문 앞에 선 꼽추소녀. 품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꼽추소녀를 부르는 게이코. 두려움 가득한 꼽추소녀, 주춤거리며 게이코 앞으로 나선다. 온화한 미소로 헝클어진 꼽추소녀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자신이 하고 있던 화려한 숄을 걸쳐주는 게이코. 꼽추소녀, 그제서야 품속에서 분홍신을 꺼낸다. 묘하게 빛나는 분홍신에 넋을 놓는 게이코, 손을 뻗어 분홍신을 잡으려는 순간, 재빨리 다시 품안에 분홍신을 감추는 꼽추소녀. 무서운 표정으로 돌변하는 게이코. 소녀의 뺨을 후려치고 분홍신을 움켜쥔다. 두려움에 떠는 꼽추소녀, 도망치듯 사라진다. 분홍신을 손에 쥔 게이코, 분홍신을 신어본다. 더욱 더 자신에 차서 포즈를 잡고 빙글 돌아본다. 점점 희열을 느끼는 게이코.
#79-2. 극장무대 위/ 낮. 플래시 백
전 스탶과 무용수들, 일본군 고위 관료들도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 기념촬영을 하려하는 무대 위 풍경. 그 중에는 꼽추소녀도 있다. 하섭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출입문쪽에 시선을 두는데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화려한 옷차림에 분홍신을 신고 등장하는 게이코. 눈살을 찌푸리는 하섭. 게이코가 하섭의 곁에 와서 팔짱을 끼면, 이 때, 맨발로 뛰어 들어오는 프리마돈나, 옥이. 게이코가 신은 분홍신을 벗기려 밀치자 쓰러진 게이코는 안 뺏기려고 반항하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된다. 고위관료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해하고 게이코의 아버지가 정하섭을 매섭게 노려보는데 정하섭이 두 여자에게서 분홍신을 뺏어들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분노한 게이코, 옥이의 뺨을 호되게 후려칠 때,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80. 숲/ 낮. 플래시 백
숲에서 울고 있는 옥이. 어느 순간 찰칵-소리에 고개를 들면, 카메라를 든 채 서있는 하섭, 분홍신을 들고 있다. 다가와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쇼올을 걸쳐주는 하섭. 뒤에서 옥이를 껴안으며 그녀의 배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이는 하섭. 위안을 느끼는 옥이.
CUT TO
분홍신 신고 마스카라 눈물자국 번진 채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 짓는 옥이. 또 다시 그 모습이 사진에 찍힌다. 광고포스터로 쓰였던 바로 그 사진.
#81. 인철의 차안/ 밤
분홍신을 꼭 쥐고 노트북 속 사진들을 보고 있는 선재. 그 중 기념사진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어린 꼽추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인철
태수는..괜찮아요?
선재
다시 의식을 잃었어요.
인철
내말은.. 혼자 있잖아요. 확인은 내일해도..
선재
아뇨. 빨리요! 빨리 해야 돼요.
분홍신을 두렵게 보다가 두 손으로 꼬옥 쥐는 선재.
#82. 오피스텔 지하 노파의 거처/ 밤
어두운 지하층, 들어오는 선재와 인철, 노파의 거처로 걸음을 옮긴다. 문을 열면, 음식물을 입안에 구겨 넣고 있는 꼽추 노파, 선재가 들고 있는 분홍신 보며, 움찔-
선재
당신 이게..뭔 줄 알죠?
노파
나는 몰라. 아무 것도 아는 거 없어..
인철
이거봐요.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야. 아는 대로 얘기 해줘요.
노파
(표정이 돌변하며 키킥댄다) 킥킥킥킥. 그러게 그렇게 예쁜건 함부로 신는 게 아냐..
선재
(노파를 흔들며 다그친다) 이봐요.. 말해줘요. 말해달란 말야.
노파
빨리 돌려줘. 안그럼 그년처럼 너두 죽을 거야..
선재
누구한테, 어떻게 돌려주란 말예요.
노파
(갑자기 선재를 두려워하는 노파)
선재
(소리친다) 빨리 말해요.
대답 않고 두려워만 하던 노파, 밖으로 뛰쳐나간다. 미친 듯 킥킥대는 노파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지하주차장을 울리며 신경을 자극한다. 그 소리에 귀를 틀어막는 선재. 그런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83. 극장 안/ 밤/ 과거
공연 개막일. 극장을 가득 메운 일본인들과 고위 관료들. 일부 페허가 된 거대한 사원을 무대로 그 배경막에는 타는 듯한 노을이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무희로 분한 주인공 게이코가 분홍신을 신고 무대 중앙에서 등장해 부상당해 쓰러진 일본 병사들을 위로하는 춤을 춘다. 그 중 한 명을 치유하는 춤 출 때 쓰러져 있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힘찬 군무를 펼친다. 군무가 끝날 무렵 배경 셋트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뒤에 숨겨져 있던 거대하고 붉은 석양이 욱일기였음이 드러난다.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치는 일본관료들.
막이 내린 다음 다시 막이 오르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게이코와 무대 앞으로 나오는 연출가 정하섭의 결혼식이 이어진다. 일본군인을 연기한 무용수들이 사열식처럼 칼을 들어 좌우에 전열한다. 관객들의 축하 속에 무대 한쪽에서는 꼽추소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성이고, 행복에 겨운 게이코의 얼굴에서 카메라,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면, 분홍신 신은 발목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춤을 추기 시작하는 분홍신. 고통스런 게이코, 원하지 않는 춤을 추는데 멈출 수 없다. 사람들 웅성거리는데 하섭이 두 팔로 게이코를 감싸 안아 춤을 멈추려한다. 이 때, 천장에 매달린 무대장치의 쇠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진다. 무대를 후려치고 하섭과 게이코의 목을 감아 공중으로 끌고 올라 가는 쇠줄. 비명을 지르는 관객들. 같이 공중에 목매 달린 하섭과 게이코. 쇠줄에 감긴 목에서 피가 배어나와 장식된 벚꽃에 배어든다. 마치 눈이 내리듯 흩날리는 하얀 벚꽃. 이윽고 게이코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분홍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숨어서 보고 있는 꼽추소녀.
꼽추노파(E)
경순이 신고 있던건..분명 옥이거야.
#84.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밤
선재
경순이 누구죠?
꼽추
게이코. 헌병부장, 친일파 딸...
인철
그럼..옥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됐죠? 그 사람들 왜 그렇게 죽은 거예요?
꼽추
(갑자기 두려움에 떨며 주춤거린다) ... (그건 니가 잘 알잖아)
선재
(뭐?) 말해줘요..
꼽추노파
(강하게 고개 저을 때)
선재
(다그치듯)말해요. 말해.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선재
...(놀라서 소리치는) 이것봐요. 의식도 없는 애가 어떻게 없어져.
순간, 등 뒤에서 뭔가 인기척을 느낀 선재. 돌아보면 저만치 뒤돌아 서 있는 태수.
선재
태수야...
선재, 천천히 태수에게 다가가는데, 인철의 시점으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걸어가는 선재. 다시 선재의 시선에 보이는 태수. 선재의 손이 서서히 다가가 태수의 어깨를 잡으면 어둠속에서 뒤돌아보는 태수의 모습은 무서운 태아의 얼굴. 이 때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선재와 태수의 얼굴을 강하게 비추면,
#85. 극장 안/ 밤. 플래시 백
과거의 극장. 무대 위. 한줄기 핀조명이 비추는 계단셋트 위에서 낮게 들리는 신음소리. 카메라 서서히 다가가면, 신음소리도 점차 커진다. 계단을 오르면 그 위에서 정사를 나누고 있는 하섭과 게이코. 목격한 선재, 주춤거리는데.. 정사 중이던 게이코, 선재를 보고 씨익 웃는다. 선재, 놀라 눈이 동그래지면 선재의 시선으로 보이는 건 남편과 젊은 여자의 정사. 선재를 향해 씨익 웃는 것도 젊은 여자의 얼굴이다. 선재, 충격 받아 뒤로 물러서는데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면, 옥이가 하섭과 게이코의 정사를 보고 너무 충격 받은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당황한 하섭이 뛰어 내려가 옥이를 안아 일으키려 할 때 게이코, 불같은 질투에 떨다가.. 촛대를 들어 하섭과 옥이를 향해 내리 찍는다. 촛대가 하섭의 어깨에 찍힌다. 비명을 지르며 하섭이 쓰러지자 게이코, 옥이의 온몸을 난자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무대 뒤에 숨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꼽추 소녀. 꽈르릉~. 천둥 번개가 친다. 온몸을 난도질당한 옥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데 어디선가 응애~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옥이의 배를 차고 있는 태아 발의 형상이 보인다. 배를 움켜쥔 옥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두려움에 떠는 선재의 눈에서도 눈물이...
#86. 숲/ 밤/ 비. 플래시 백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 하섭이 곡괭이로 땅을 파고 있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꼽추꼬마의 두려운 눈망울. 게이코가 옥이의 시체를 밀어 구덩이에 떨어뜨린다. 치솟아있는 옥이의 다리에서 분홍신을 벗기려하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게이코가 삽으로 옥이의 다리를 찍어 자르고 분홍신을 손에 쥔다. 광기어린 게이코의 얼굴이 천둥 번개에 번쩍인다. 게이코가 일어나 가려는 순간, 옥이가 게이코의 발목을 확 낚아챈다. 게이코가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러댄다. 하섭이 곡괭이로 옥이를 내리친다. 선재, 차마 못보고 외면할 때 이 광경을 보고 서 있는 태수를 발견한다.
선재
안돼. 태수야. 안돼. 보지마.
태수를 끌어안고 몸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태수 입에서 옥이의 목소리가..
(E) 억울해. 너무 원통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 그런데 다가진 저것들이 내 아기도 분홍신도 뺐었어. 내 걸 뺏어가는 것들은 모두 죽일거야.
선재
(두려움 속 눈물을 흘리며) 제발.. 제발 그만 하세요.
다들 충분히 고통 받았잖아요. 제발, 제발...
천둥 번개 쳐서 하얗게 밝아질 때 고개를 돌려 선재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태수의 섬뜩한 얼굴.
(E) 난, 꼭 다시 태어날 거야.
무표정한 태수의 얼굴을 두려움 속에 바라보는 선재.
#87.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밤
자동차 불빛이 선재를 향해 급정거 할 때 쓰러지는 선재를 안아주는 인철.
페이드 아웃
#88. 숲/ 낮
페이드 인
흰눈이 내린 곡성역 전경. 카메라, 이동하면, 지하철역 근처 옥이가 묻힌 숲이 보인다. 그 속에서 땅을 파고 있는 인부들. 선재와 태수. 저 멀리 지켜보는 꼽추노파.. 이윽고 나오는 앙상한 유골.
언덕 위 자동차 안. 차창 너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인철의 고통스런 시선. 옆 좌석에 놓여있는 구두 박스하나.
#89. 화장장/ 낮
옥이의 유골과 함께 타들어가는 분홍신. 지켜보고 있는 선재.
#90. 선재 병원/ 낮
선재의 개업식이 진행중이다. 축하 화환들.. 손님을 맞이하는 선재, 인철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보이지 않는 인철의 모습.
#91. 인철의 집 앞/ 낮
인철의 집으로 걸어오는 선재. 젊은 여자가 차를 타고 빠져 나가고.. 직감적으로 느끼는 선재.
#92. 인철의 집 안/ 낮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안. 시멘트벽에 새로 그려진, 한 여자의 그림을 덧칠하고 있는 인철. 여자의 발에 분홍신이 신겨져 있다. 인철, 많이 취해 있다.
선재
좀 전 여자.. 여기서 나갔나요?
인철
(끄덕끄덕) ...
선재, 배신감과 모멸감이 치밀어 올라 뛰어가 인철의 뺨을 강하게 후려친다. 눈물이 그득해서..
선재
왜 그랬어?
인철
...널 잊고 싶으니까..
선재
?.. 무슨 말이에요.
인철
날 때린건 날 사랑해서야.. 남한테 날 뺏긴 게 분해서야?
선재
......
인철
난.. 당신이 무서워..
선재
??
포장된 선물상자 하나를 선재에게 내미는 인철. 열어보는 선재, 그대로 굳어지며, 툭-바닥으로 떨어지는 파란색 하이힐 한짝.
인철
태수가 줬어. 아빠가 왔었대. 근데..엄마는 자기말 안믿을 거라면서.. 내가 전해주면..
선재
거짓말. 그 사람 지금 여기 없다고 했잖아요.
인철
(소리치는) 그럼, 어딨는데? 당신은 알거 아냐. 아직 이혼도 안했으니까.
선재
(머뭇-)
인철
공항 출입 기록에도 남편은 없어. 호적상에도 이혼이 안돼있구. 도대체 당신..비밀이 뭐야?
선재, 굳어진 얼굴..
선재
관심이 좀 지나치시네요.
인철
태수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아빠가 너무 추워한다고, 빨리 꺼내줘야 한다구 그랬어.
선재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면서도 침착하게) 도대체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다시는 보지 마요.
인철
(눈물이 흐르는) 그래도 놀라긴 하시네. 고상한척, 깨끗한 척, 욕심없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넌 위선 덩어리, 발정난 암캐야.
충격 받은 선재.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지만 안간힘 다해 버티는데, 덜덜-한기가 끼쳐온다.
선재
나한테..왜이래.
인철
나는..알아야 되잖아. (소리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야 되잖아.
선재
..왜?
인철
그걸..몰라서 물어?
울컥-눈물을 쏟아내는 인철.
인철
당신이란 여자..다 알고 싶어. 무슨 짓 했던 상관없어. 그러니까 빨리..(소리친다) 말해!..당신 입으로 직접..
넋 나간 얼굴로 인철 보는 선재, 천천히 입을 뗀다.
선재
맞아. 내 딸이 당신한테 거짓말 했어.. 그 사람 못 와. (정말로 힘에 겹다) 당신도 짐작하잖아. 그 사람 어떻게 됐을지..
또다시 울컥-터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는 인철, 고개를 가로젓는다.
인철
아니라고 하지..그냥 다른 핑계 대지...
선재
(힘겨운 미소)..모른 척 해줬으면..그냥 나만 봐줬으면...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당신두...나두...
천천히 뒤돌아 집을 나가던 선재, 벽에 인철이 그리던 분홍신 신은 여자 그림을 보고..
선재
나..그린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인철의 눈물 섞인 시선.
#93. 인철의 집 앞/ 석양
인철의 집을 걸어 나오는 선재. 손에 들린 파란힐 한 짝을 멍하니 쳐다본다. 갑자기, 울컥-터지는 눈물...
#94. 선재 거실/ 밤
발레복에 토슈즈 신고 춤을 추고 있던 태수, 돌아보면 서 있는 선재. 차가운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 한 손에 파란 힐을 들고 있다. 태수, 그런 선재의 모습에 움찔-뒷걸음치면,
선재
말해. 이 신발 어디서 났어..?
태수, 겁에 질린 채 뒷걸음치면, 선재, 살기 서린 얼굴로 태수에게 다가온다.
태수
아빠가...
선재
(침착하다) 태수야. 엄마는 태수 많이 사랑해.
근데..엄마는 싫어. 우리 태수가 거짓말 하는거..
태수
진짜야. 진짜 아빠가 줬어. 너무 춥다고.. 빨리 꺼내 달라고...
선재
거짓말 하지마---
갑자기 구두 진열장을 밀어 쓰러뜨리며 광기를 부리는 선재. 와장창- 깨져나가는 유리 진열장. 겁에 질리는 태수
선재
(다시 달래듯) 우리 태수..괜찮은거야..? 엄마가 잘못했어. 근데 엄마는..우리 태수 거짓말 하는 거 정말 싫거든..?
다가가며 점점 섬뜩한 표정으로 변하는 선재, 태수의 어깨를 움켜쥐고
선재
말해. 똑바로 말해. 어서. 어서..
엄마의 무서운 얼굴에 질려 도리질하며 몸을 빼 밖으로 뛰쳐나가는 태수.
선재
태수야..태수야...
#95. 지하철 곡성역 앞/ 밤
지하통로로 뛰어 들어가는 태수. 그 뒤를 따르는 선재.
#96. 지하철 환승통로/ 밤
지하철 환승통로를 도망치는 태수. 그런 태수를 쫒는 선재의 무표정함에서..
#97. 지하철역 플랫폼/ 밤
겁에 질린 채 뒷걸음치는 태수. 다가오는 선재. 의식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하게 선로 가까이로 다가가는 태수.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원의 메시지. 선재, 아직도 넋이 나갔다.
선재
태수야. 엄마한테 와. 엄마가 혼내려고 하는 거 아냐. 엄마는 정말 궁금해서..진짜 아빠가 태수한테 온 건지..
이때, 굉음을 내며 진입하기 시작하는 지하철, 멈칫-뒤를 돌아보는 태수. 난간 끝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거리는데,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선재.
선재
안돼... 안돼...
손을 내미는 선재. 하지만, 태수 고개를 저으며 피하려고 물러서다가 한쪽 발이 허공을 딛는 순간, 굉음을 내며 빠르게 들어오는 지하철. 태수의 발이 플랫포옴과 지하철 사이에 끼면서 순식간에 지하철이 태수를 끌고 가버린다. 우드득.. 선재의 얼굴위로 튀어 오르는 태수의 잘린 다리와 핏물. 선재, 순식간의 상황에 정신이 번쩍 들 때,
CUT TO
이제 막 진입하기 시작하는 지하철. 선재의 상상이었던 것. 태수의 발이 막 허공을 딛는 좀 전의 상황 반복. 선재, 힘차게 손을 뻗어 태수의 손을 탁- 잡아 끌어안을 때, 가까스로 태수를 피해 밀려들어오는 지하철. 태수를 안고 주저앉는 선재. 그런데, 멈춰 선 지하철의 문이 일제히 열리지만 손님이 아무도 없다. 그 때 지하철, 플랫포옴 안의 모든 형광등이 도미노처럼 터져나간다. 팡-팡-팡-팡-팡---. 치이익- 소리를 내며 다시 닫히는 지하철문. 그중 하나가 마치 뭔가 낀 것처럼 열렸다 닫혔다하고 있다. cctv에서는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이윽고 닫히는 문. 어두운 지하철 플랫포옴에 한기가 으스스하게 흐르고 어디선가 바람이 휘이잉 불고 지나간다. 들려오는 애기 옹아리소리. 또각또각- 걸어오는 구두소리.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공포에 질린 선재, 태수 끌어안고 주저 앉은채 뒤로 물러서다가 뭔가에 툭- 부딪히고 덜덜 떨면서 천천히 돌아보면- 분홍신. 기겁한 선재, 극단적인 공포에 질려있는데 들려오는 아기의 옹아리소리. 고양이 소리처럼 부르는 ‘엄마.. 엄마...’ 다름 아닌 태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 이 때, 태아원혼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선재의 머리카락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선재, 비명 지를 때 화면 커지면, 선재의 뒤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어깨 위에 태아원혼이 붙어있는 옥이의 다리 잘린 원혼. 선재를 향해 무섭게 기어올 때,
선재
왜.. 왜이래. 난, 뺐지 않았어. 그냥 줍기만 했어. 저리 가... 난 아냐. 나한테 왜이래.
옥이(S.O)
아직도 모르겠어? 니가 원했던 거잖아.
선재
뭐?...
옥이(S.O)
니가 바로 나야.
충격 받은 선재의 얼굴 위로 보여 지는 플래시 백 컷들.
#97-1. #51에서 분홍신을 신고 있는 선재를 보고 꼽추노파가 놀라 도망친다. ‘옥.. 옥이...’
#97-2. #27에서 선재가 분홍신 처음 신고 춤 출 때 거울 속 반영으로 서 있던 여자는 옥이.
#97-3. #2 여고생이 다리가 잘린 채 죽어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선재.
#97-4. #54 미희의 처참한 시체 옆에서 분홍신을 집어 드는 선재.
#97-5. #64 미희가 신었던 분홍신을 자기 진열장에 놓는 선재.
#97-6. #68 태수 하혈하고 쓰러진 앞에서 인철에게 전화하는 선재. 통화음 연결될 때 끊어버린다.
#97-7. 남편과 젊은여자의 정사. 잠든 남편의 얼굴을 표정 없이 바라보던 선재, 점점 부들부들 떨며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 못하다가 앰플액을 따서 가습기에 약을 탄다. 잠든 남편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가습기 포말. 한쪽 손에 들고 있는 파란색 하이힐. 남편의 눈알에 박혀 있는 파란 힐. 선재의 어깨 뒤에 드러나는 낙인같은 문양.
디졸브
#98. 숲 속/ 낮. 플래시 백
옥이에게 다가와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쇼올을 걸쳐주는 하섭. 옥이의 어깨 뒤에 살짝 드러나는 낙인같은 문양. 바로 선재의 것과 같은.
#99. 극장 안. 플래시 백
조명이 켜진 상태의 완성된 무대 위.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는 옥이. 공연날 게이코가 춤추던, 원래 자기가 추어야 했던 그 춤을 아름답게 추고 있다.
#100. 도시의 거리/ 낮
옥이의 광고포스터, 바람에 날려 떨어질 때, 그 거리를 걸어가는 하이힐 신은 누군가의 다리. 여전히 뿌연 황사가 끼어있는 도시의 전경.
#101. 선재 병원/ 낮
인철이 그린 벽화가 있는 안과 병원. 창문 앞에서 황사 낀 도시를 내다보고 있는 선재의 뒷모습. 화려해진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에, 과감한 디자인의 구두를 신고 있다. 선재의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간호사 들어서며,
간호
환자 들여보낼까요?
선재
조금만 기다릴래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간호사. 창문을 닫는 선재. 뿌연 성에가 끼어있는 창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먹 쥔 손으로 투명한 틈을 만들면, 투명한 틈사이로 창 밖 광고탑 옥이의 얼굴이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재..
#101-1. 인서트- 씬92 인철 집에서의 선재와 인철.
선재
나... 그린건가요?
고개 끄덕이는 인철의 눈물 섞인 시선. 선재, 그런 인철을 바라보다가 다가와 인철을 안는다. 인철, 힘주어 선재 껴안아 줄 때,
인철
그 구두... 잊어버려요. 분홍신이 아니라 당신이 좋았으니까...
선재의 무표정한 얼굴.
디졸브
현실의 무표정한 선재의 얼굴로 디졸브되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후-입김을 불어 유리창 투명한 틈을 메워버리는 선재. 사라지는 광고탑 옥이의 얼굴.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묘한... 흐릿해져가는 선재의 얼굴도 마치 옥이의 표정처럼 웃는듯 우는듯 묘한...
#102. 선재 거실/ 낮
선재의 오피스텔. 춤추고 있는 태수. 카메라 천천히 줌인-. 태수의 얼굴로 다가가면, 립스틱 바른 빨간 태수의 입술, 씨익- 미소 짓는다.
엔딩 크레딧 오를 때, 크레딧 잠시 멈추면, 어두운 공원. 걸어오는 두 사람. 산책하듯 여유롭게 다가오는 선재와 태수, 공원 벤취 위에 분홍신 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달려오던 여자, 분홍신 발견하고 멈춰 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점차 분홍신의 매력에 빨려드는 여자, 손을 뻗어 분홍신 집어들 때 블랙아웃- 아악-- 비명소리. 어둠속에서 또각-또각-또각--- 멀어지는 구두소리...
다시 크레딧 오른다.
-FINE-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