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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내러티브’에 대응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설득시키기 위한 팀 켈러의 6가지 변증설교 방법
<팀 켈러의 설교> 팀 켈러/ 두란노/ 380쪽/ 20,000원
“한 세대만 지나가도 내 손자들조차 할아버지인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유명하다는 건 정말 덧없다.” 한국을 방문한 저자가 목회자 컨퍼런스의 토크 타임 중에 남긴 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오래 기억되는 인물로 남고자 하는 생각이 실은 얼마나 허망한지, 죽고 나서 이 땅에서 받을 칭찬이 무슨 소용인지를 일찌감치 체득한 듯싶었다.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그의 표정과 어투의 분위기에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지나온 진실한 세월을 느꼈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설교에서 추구한 것은 오직 하나였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양한 테마의 변증설교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오직 그 한 분을 모든 문제의 해답으로 일관성 있게 드러내는 데 전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40년 동안의 설교 사역에서 얻은 지혜로 잘 조직된 경험적 설교론을 담아낸 이 책에도 그의 평생의 강조점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설교론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다. 그런데 설교는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그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중요하다. 바로 여기에 변증전도와 설교가 만나는 지점이 있다.
‘문화 내러티브’ 넘어서기
변증전도가 중시하는 두 개의 핵심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와 ‘나는 누구인가?’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복음이다. 이는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설교의 두 가지 대상과 설교자의 두 가지 책임과 일치한다. “설교가 염두에 두어야 할 두 가지 근본 대상은 ‘성경 말씀’과 ‘듣는 사람’이다”(p.27). “설교자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다. 성경 진리를 향해 가진 책임과, 듣는 이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한 책임이다”(p.83).
성경을 섬기려면 그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해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건이 못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왜곡된 세속적 환경을 가리켜 ‘문화 내러티브’라고 명명한다. 이는 각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전제들을 형성하는 세계관이나 세계관적 역사를 의미한다(p.33).
“우리의 설교는 기독교에 대한 통상적인, 직접적인 반대들을 꼭 다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문화 내러티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말로 뱉은 반대들과 달리, 사람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주제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문화 내러티브란 ‘모두가 아는’ 것들, 너무나 자명한 전제들이어서, 그걸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보이지도 않고 의문의 여지도 없는 것들이다”(p.154).
이런 내러티브는 보통 슬로건이나 풍자적인 상투어들로 표현되는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거나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말들이다. 저자는 이런 내러티브들이 설교자들에게는 오히려 복음을 증언할 기회라고 본다.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성찰해보거나 그 타당성을 확인해보지 않아서다. 그 슬로건 배후의 허점들을 평가하고 도전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성경 주제와 교리와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 청중의 삶의 상황을 중시해야 할 설교자의 주된 사명이다(p.155).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변증설교의 방법론을 알려주는 책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그나마 기독교변증에 관심이 많은 저자의 설교론에서 우리 시대의 청중들이 누구인지를 진단하는 대목 중에 변증설교의 중요한 방법론이 자연스럽게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책의 2부에 있는 내용(p.127-251)을 중심으로 변증설교에 관심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현실적으로 참조할 만한 6가지 방법론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이 방법들만 숙지해도 변증설교뿐만 아니라 특히 청중의 삶의 컨텍스트를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적으로 바로잡아주는 데 초점을 둔 목양 설교를 잘 다듬어나가는 면에서도 유익할 것이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6가지 변증설교 방법
첫 번째 방법은 ‘복음주의 특유의 상투어나 내부인 언어를 조심하는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 ‘영적 전투’, ‘축복’ 같은 말은 복음주의 특유의 상투어나 전문어에 속한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이런 경계표시어나 내부인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경멸조로 말하거나, 다른 종교와 교파, 자신의 신앙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희화화거나 업신여기는 말투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다른 지류에 속한 자들에게 너그러이 말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임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단지 기독교 공동체에만 제한시키지 말고 이웃들과 도시, 지역의 관심과 필요에 대해 언급하고, 종종 다양한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가난한 자들과 낮은 자들,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시민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평범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과 삶을 활용해 설득시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 자체의 권위가 사람들을 파고들어 확신을 심어주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강화하기 위해 예화를 사용하듯 다른 사상가들의 말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의 인격적인 모범과 주장은 세속적인 청중을 효과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설교의 논지에 대해 확실히 고려하게끔 만든다. 원죄에 대해 설교한다면 유명한 무신론 지성인이 사람들의 본래적인 죄성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한 말을 인용할 수 있다. 이것이 문화의 심장부를 향해 설교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 방법은 ‘비신자들과 꾸준히 접촉하며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기독교 설교자는 비신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들의 회의적인 입장을 그들만큼, 심지어 그들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그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분이 이것을 믿는다면 저것은 왜 안 믿는가?’ 하는 논리로 접촉점과 대항점을 동시에 살려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심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대항점)은 비폭력을 위한 핵심 자산(접촉점)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한 예다.
이렇게 하려면 비신자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듣고 그들을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기독교를 비판하는 양질의 자료들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대다수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글만 읽고 그들과만 교제한다. 그러나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설교를 듣고 비신자 이웃을 교회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없다.
네 번째 방법은 ‘세속의 문화 내러티브에 저항하는 공감적 고발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위다’와 같은 문화 내러티브 또는 새로운 ‘대안 신념망’ 배후에 도사린 기본 믿음은 모두에게 자명하지도 않고 경험적으로 더 신빙성 있지도 않다. 이것들을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들과 대조해보지 않으면 그 문화 안에 사는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 무의식적으로 그 영향권 아래 살게 된다.
설교자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세속주의의 자기 이해에 저항하는 ‘공감적 고발’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현대인들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정의가 통하는 개방되고 다원화된 사회를 원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모든 열망이 바르게 성취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먼저 그 내러티브들을 청중들이 눈으로 그려볼 수 있도록 잘 묘사하고, 이어서 성경을 사용해 그 내러티브에 대해 기독교가 긍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점들을 지목해준다. 그 다음, 그 문화가 존경하는 권위 있는 목소리를 활용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 내러티브에 도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가 기독교 사상의 열매로 도덕적 가치의 매트릭스를 창출해놓고는 이내 그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렸다며 세속적 휴머니즘을 비판한 철학자 니체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만물의 조성자에 대한 믿음의 부재 상태에서 어떻게 많은 선한 것을 섣불리 절대화하고 본질적으로 신격화했는지를 보여주면서 그 내러티브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복음의 유익을 제시해야 한다.
다섯 번째 방법은 ‘세상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긴장과 부조리에서 복음의 접촉점을 찾는 것’이다. 문화 내러티브나 신념을 일단 긍정하고 도전한 후에는 기독교가 훨씬 더 강력한 자산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기독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압점이라고 할 만한 아픈 데가 있다.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정작 그들의 직관이나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설교자는 바로 이 아픈 데를 파악하고 질문과 제안과 예화와 예들을 동원해 그곳을 눌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느끼는 긴장을 더 뼈아프게, 그들이 느끼는 부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용서에 관해 설교할 때 자기 주장과 자존감을 촉진시키는 현대 문화가 용서를 특히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사회학자들의 글을 언급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감사와 겸손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다.
여섯 번째 방법은 ‘삶에 관한 복음의 만능성과 확실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비신자와 신자에게 동시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복음이라는 동기로 초대해야 한다. 삶에 관한 복음의 만능성과 확실성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설교는 메마른 강의를 넘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실재하는 진리의 선포와 예배로 나아간다.
복음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모든 단계에서 성장하고 진보를 이루는 방편이기도 하다.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살라’라는 문장으로 끝내지 말고, 대신 ‘우리는 이렇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도 이런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로 마무리해야 한다.
설교자가 그리스도인의 문제를 온전히 복음으로 해결할 때, 그들을 더 열심히 하라고 촉구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더 깊은 믿음을 가리킴으로써 비로소 신자들은 세워지고 비신자들은 복음을 듣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이뤄지며 이 원리는 모든 주제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진정으로 회개할 때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이르는 기독교적인 정체성은 우리 안에 심오한 겸손을 창출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고귀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이렇게 기독교적인 정체성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내면적인 느낌에 기초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욕구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완성한다.
변증설교, 어디서부터 시도해볼까?
변증전도에서는 때로 내용보다 태도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던지는 기독교에 대한 반대 질문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 내면에 잠긴 더 깊은 상처의 표현이다. 답이 아무리 또렷해도 태도가 거슬리면 논쟁에서 이겨도 사람을 놓친다. 비신자들에게 호소력 있는 태도는 결국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속한 삶의 정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서 우러나온다.
표면적인 질문 너머에 있는 기독교나 하나님에 대한 상처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면 먼저 그들의 삶의 컨텍스트에 눈높이를 맞춰 복음을 육화 또는 상황화시켜야 한다. 그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경 본문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청중이 속한 문화의 근본 신념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곧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아,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p.34). 변증설교는 이 깨달음을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예수님만이 삶의 해답이 되심을 설득력 있게 전해주는 설교다.
한국에서는 신자나 비신자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서부터 변증설교가 시도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현대 문화의 약점들 또는 문화 내러티브들을 드러낸다면, 지금 한국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다.
주제별 시리즈 설교를 통해 요즘 신자들의 관심을 끄는 신앙적 이슈들에 대해 하나씩 성경적인 답을 전하는 변증설교도 시도해볼 만하다. 이런 시도를 통해 포스트모던 문화 내러티브에 깊이 영향 받고 있는 기존 신자들을 복음으로 일깨우고, 그들이 자신의 믿음을 이웃과 담대히 나눌 수 있는 변증적인 방법 또한 전수할 수 있을 것이다.
- 안환균, <목회와 신학>(두란노) 2018년 5월호 '변증서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