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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기모토의 바다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1992년이었다. 이이자와 코타로가 일본에서 펴내던 데자-뷰(Deja-vu)라는 사진 무크지에 ‘풍경과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총 12장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바다는 사진가로서 가장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평생을 바다와 가깝게 살아온 까닭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있던 그의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는 바다 사진의 정수였다. 95년과 96년에 전시 때문에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그의 전시가 긴자의 고야나기 갤러리와 캐나다 대사관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실제로 본 그의 사진은 충격적이면서도 차갑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깊었다. 매우 강한 인상이었다.
그의 작품이 가진 깊은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현대 사진의 또 다른 두 거장이 떠올랐다. 한 명은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58)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의 아라키 노부요시(荒木?惟·73)다.
8?10 규격 카메라의 궁극적인 정교함과 깊이를 가장 잘 구현한 현대 사진가가 두 명 있다. 하나가 스기모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다. 스기모토는 주로 긴 시간의 셔터 스피드로 사물을 오랫동안 포착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바다 시리즈와 극장 시리즈는 물론 다른 여러 작품에서 그는 그렇게 침묵을 사진에 담는다. 또 이제는 거대한 작업도 마다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전지 사이즈(50? 60cm)를 넘지 않는, 원판으로부터 얼마 확대되지 않은 크기를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사진을 제작하는 다양한 방식이 개발되었지만 그는 은염 방식으로 사진을 제작하던 옛 전통에 뿌리를 대고 있는 몇 안 되는 흑백 사진의 장인이다.
반면 구르스키는 같은 규격의 카메라를 쓰면서도 처음부터 대형 화면으로 전시했다. 프라다 매장이나 증권거래소, F1 경기처럼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부터 감옥이나 북한의 아리랑 공연까지 아우르는 그의 풍경 사진은 대형 카메라를 쓰면서도 짧은 셔터 스피드를 통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스기모토는 느린 시간을 담아내는 흑백 사진의 장인으로, 구르스키는 현대의 풍경을 순간 포착하는 컬러 사진의 장인으로 기술과 예술을 서로 만나게 해 현대 사진을 정점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일본 사진계에서 두 사람의 거장이 있다면 아라키 노부요시와 스기모토일 것이다. 극단적인 내용으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논란을 부추기며 작업해 왔지만, 아라키는 분명 일본 전통에 입각한, 즉 우키요에의 춘화 전통을 이어주는 작가다. 스기모토 역시 다분히 일본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다. 모리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 재현한 일본 전통 ‘노’의 무대나 그 후의 여러 조각과 건축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십수 년 전 미토 아트타워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있던 시미즈 토시오를 만난 적이 있다. 난 그에게 스기모토와 아라키의 2인전을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스기모토의 사진은 침묵의 선(zen)이고 아라키는 육체의 선(zen)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두 장의 바다 사진은 그저 풍광이고 또 한두 장의 누드 사진은 그저 포르노지만, 각각의 주제에 일생 동안 천착해 온 두 사람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의 경지에 올라 있다. 허무의 풍경과 허무의 육체를 담아내는 높은 경지는 어떤 미술가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매섭고 깐깐한 인상의 중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언 20여 년이 지나고 이번 전시 오픈에 맞춰 그의 근황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해보면, 그 차갑고 단단하던 인상 속에서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셔터를 누르기 전부터 프레임에 담길 상황은 물론 그것이 만들어 낼 개념적 의미까지 주도면밀하게 구성하던 냉혈한 현대 사진가 역시 점점 세월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변해 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편 세월의 변화도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새로움에 대한 실험정신을 꺾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전시에 포함된 최근의 번개 시리즈는 내게 바다나 극장 시리즈만큼 그의 카메라를 떠난, 즉 렌즈를 통해 현실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전통적 개념을 떠난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가 엿보이는 최고의 작품이다.
나의 국제 무대 경력은 90년대 중반 일본을 통해 소나무 시리즈를 전시하면서 시작됐다. 스기모토는 나보다 먼저 알려진 사진가였지만, 국제적 명성을 탄탄히 하게 된 것은 역시 그 무렵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후로 승승장구해 이제 일본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물론 일본 현대 미술에서는 구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요시토모 나라, 시라가 가즈오 등 이제껏 많은 스타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스기모토 히로시의 입지는 내겐 가장 빛난다. 아마 내가 사진가라서 그를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게 되었으니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명의 사진가로서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아낌없는 찬사와 축하를 보낸다.
“흑과 백 사이엔 수백 가지 톤과 뉘앙스가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강연서 만난 스기모토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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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만 찍는 이유는.
“컬러 사진은 화학적으로 물들이는 느낌이다. 내가 참여해서 조절할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흑백사진은 흰색부터 검정 사이에 수백 가지 톤과 뉘앙스가 있다. 나는 은빛 색조의 흑백 사진을 통해 진정성 있는 색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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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흑해건 태평양이건 이름 붙이기 전에 근원으로서의 바다를 찾는다. 그 변하지 않는 풍경을 염두에 둔 것이다. 육지 풍경은 계속 변화하지 않나. 고대인과 현대인이 시간을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바다에서 고대인이 느낀 생각을 현대인과 공유하고 싶었다.”
-사진은 언제 찍나.
“24시간 내내 기다린다. 보트나 요트가 지나다니지 않는 곳을 골라 캠핑을 한다. 전화도 인터넷도 안 되는 곳이다. 밤에, 특히 새벽에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충분히 노출을 주면서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다. 많이 가져간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초상 사진이 작은 사이즈와 큰 사이즈가 있다.
“1980년대부터 큰 사이즈를 시작했다. 그런데 선물용으로 작은 사이즈가 필요하다고 해서 작은 것도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것과 큰 것 느낌 차이가 있나.
“작건 크건 에너지는 같다. 미술관은 큰 것을 선호한다.”
-전통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교토의 옛 절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의 불상은 거의 설치미술 수준이다. 1000년 전 만들어진 1001개의 불상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종교를 이미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일본 전통 문화는 언제부터 연구했나.
“1960년대는 학생운동이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다. 다른 독일 사상가를 비롯해 서구 철학도 많이 공부했다. 미국에 가서야 내가 일본인임을 자각했다. 70년대 캘리포니아에는 히피 문화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내게 ‘깨달음을 얻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물론 얻었지, 너는 아직 못 얻었니’라고 대답하며 그때부터 다양한 일본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본과 서구와 미국의 문화를 아우를 수 있었다.”
-서구와 아시아 문화의 차이가 있다면.
“아시아는 자연친화적 문화다. 서구 문화는 좀 다르다. 자연에 인간이 자꾸 개입하려 한다. 앞으로 아시아적 감수성이 중요하다. 이것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실크에 담은 여명의 첫 번째 빛
스기모토-에르메스 협업한 스카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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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이 압도하는 개인전에서의 느낌과 달리 스카프에는 섬세하게 그라데이션으로 표현된 무지갯빛 향연이 정방형 실크에 오롯이 담겼다. 스기모토가 10여 년간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복잡한 프리즘 구조를 이용해 촬영한 여명의 첫 번째 빛을 옮겼다.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는 이를 두고 “아침마다 태양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색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이 마치 그림자처럼 하얀 벽면에 영사되는 것 같다”고 호평했다. 작업 당시 폴라로이드 사진 중 20개를 골라 7장씩 한정판으로 제작했으며 140장을 출시했다. 스카프의 크기역시 140 x 140㎝다.
‘그림자의 색’ 전시는 지난해 바젤 국제 아트 페어에서 선보였으며, 온라인(www.hermes-editeur.com)에서도 판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