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본문 : 왕상 18장 1-2, 38-40, 19장 1-4절
설교제목 : 팽창의 결과
무엇이 미래에 펼쳐질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이제는 제법 선선해지고 있음을 바람 끝에서 체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계절 앞에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실이 있으시길 빕니다. 청명한 하늘과 달리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전쟁의 불꽃은 탈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듯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가 가져온 네팔의 빙하 쓰나미는 수천명의 실종자와 사상자를 내었고, 제반시설과 건물들을 처참하게 붕괴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닥칠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1956년, C.G. 융도 “발견되지 않은 자기Undiscovered Self: 현재와 미래Present and Future”에서 동일한 질문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처한 곤경’이란 첫 소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래는 무엇을 가져올까? 태고적부터 이 질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으나, 그 강도는 항상 같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시선이 미래에 대한 불안한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은 주로 물리적·정치적·경제적·영적 고통이 처했을 때이고, 이때 예언과 유토피아, 종말론적 비전이 쏟아져 나온다. 예를 들어, 기독교 초기 시대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있었던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나, 첫 번째 천년이 끝날 무렵 서구에서 일어난 영적 변화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오늘날, 두 번째 천년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다시 한번 전 지구적 파괴를 묘사하는 종말론적 이미지로 가득 찬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를 두 갈래로 나누는 ‘철의 장막’으로 상징되는 그 분열의 의미는 무엇일까? 만일 수소폭탄이 터지기 시작하거나, 국가 절대주의의 정신적·도덕적 어둠이 유럽 전역에 퍼진다면, 우리 문명과 인간 그 자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위협을 가볍게 여길 이유가 없다. 서구 곳곳에는 우리의 인도주의와 정의감에 숨어 선동적인 횃불을 들고 있는 전복적인 소수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구의 한 계층, 즉 상당히 지능이 높고 정신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의 비판적 이성뿐이다. 이 계층의 규모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규모는 각국의 국민성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다. 또한 지역별로 공교육 수준에 따라 달라지며, 정치적·경제적 성격의 극도로 불안정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CW 10, Civilization In Transition, paras.488-489]
우리 세계에도 여전히 불안한 희망이 예견되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부추기는 독재적인 지도자가 이 세계를 흔들고 있고, 전지구적 기후 위기로 자연적 재난의 위협이 거세지고 있으며, AI가 이제는 인간 삶의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융은 글의 말미에 만일 인류가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미래 세대들은 이런 중요한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현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자기 인식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나의 무의식성을 통찰할 때라야 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만족, 영혼의 평안, 삶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팽창의 결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평가받던 아합왕의 치세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막강한 부를 행사하며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위세를 떨친 시기였지만, 영적,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린 시대, 무의식과 소통할 수 없었던 정신적 가뭄과 빈곤의 시대였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장려하고, 바알 신전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바알과 아세라를 향하게 하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모두 이세벨의 식탁에서 밥을 먹을 정도였습니다(왕상 18:19). 엘리야는 아합왕 앞에서 극심한 가뭄을 경고하였고,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의 도움을 받고, 사르밧으로 가서 한과부의 공궤를 통하여 가뭄과 기근의 때를 피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후, 주님은 엘리야에게 가서 아합을 만나서 땅위에 비가 내리겠다고 선포하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가서 갈멜산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바알 예언자 사백쉰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도 불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 850명과 겨룹니다. 서로의 신을 부르며 제사를 드려 불의 응답을 받는 신이 참 신임을 가리는 싸움이었습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는 두 마리의 소를 끌고 와, 한 마리를 엘리야, 다른 한 마리는 바알 예언자들이 선택하였습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소의 각을 뜨고 제단을 쌓고 불이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들의 신을 부르며 아침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외치고 칼과 창으로 피를 흘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18:25-29).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파수대로 열 두 개의 돌을 모아사 제단을 쌓고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도랑도 파고 나무를 쌓고 각을 떠서 소를 올리고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았습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하니 도랑에 주위로 물이 가득찼습니다. 엘리야는 앞으로 나아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부르며 응답하여 주시고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간절히 간청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뭇단, 돌들과 흙을 태웠습니다. 온 백성을 땅에 엎드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고 외칩니다. 그때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를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고 잡으라고 명하고 기손 강가로 데리고 가서 바알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게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갈멜산에서 이 놀라운 영웅적인 엘리야의 불의 응답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의 불을 간구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군중들을 자극하고 선동하여 바알 예언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능력은 한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단적인 배경에서 행해질 때는 군중 집단은 원형적 감정에 자극받아 야훼의 분노를 행사하는 복수하는 군중으로 바꾸어 놓꾸어 놓습니다. 모든 성전聖戰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이와 같은 신의 대리자로 복수를 감행하는 일이 자행되는 것입니다. 원형적 불에 사로잡힐 때 군중집단은 피를 부르는 보복을 감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기 전에 이세벨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한 일을 오바댜로부터 들었고, 그 복수심에 불탔을 것입니다. 그가 신과 동일시하는 일종의 야훼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종의 팽창이 군중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대량학살을 감행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가 주의해야할 것은 일종의 전제적 군주같은 지도자가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복수를 감행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베네주엘라, 이란전쟁, 우크라이나전쟁 등). 한번 불이 타오르면 그 불은 그를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로 인해 엄청난 재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브엘세바 광야로
엘리야는 비가 내리길 간구하고 기도하였고,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신이 아끼던 예언자들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운 나머지 브엘세바로 도망을 쳤고 자기 시종을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간청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에난치오드로미아, 즉 대극의 반전현상입니다. 팽창에서 우울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엘리야가 일종의 팽창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큰 비가 오고, 매우 높이 날 듯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서, 이스라엘 어귀까지 달려갔습니다.”(18:45-46)
그에게 주님의 능력이 깃들면서 엄청난 능력으로 먼저 내려간 아합의 병거보다 빨리 날아가듯 달린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부푼 상태는 일순간에 이세벨의 칼 앞에서 수축되고 맙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될까요? 이것은 마치 조증과 우울증을 극심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형태입니다. 정신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는 자신이 마치 위대한 예술가나 신과 같은 상태에서 과도한 들뜸이 일어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너지가 사그러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괴로움과 무력감의 상태로 빠져듭니다. 엘리야에게 나타난 능력은 자신의 능력으로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적인 힘이 그를 사로잡은 상태입니다. 예언자는 그것을 분별하여 의식적으로 붙잡고 있지만, 병자는 그것에 압도되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또다른 구도에서 엘리야는 예언자의 옷이라는 옷과 개인의 옷을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언자의 옷은 일종의 마나 인격(초개인적 능력)의 활성화시키고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현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는 법입니다. 오늘 현대인도 지나치게 페르조나에 의지하게 되고 동일시하게 되면 팽창의 상태로 빠질 수 있음을 우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개성과 사회적 역할이 혼동될 때, 현실 적응이 충분히 개인적이지 못하고 전적으로 집단적일 때, 그 결과 팽창 상태가 될 수 있다. 팽창 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공적으로 볼 때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대하고 힘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하거나 아니면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첫걸음도 내딛지 못한 것이다. 페르조나에 지나치게 의지하여 팽창상태가 되면 결국 사람이 경직되고 참된 감응이 결여되어 버리는 것이다.[Edward C. Whitmont, The Symbolic Quest, Princeton University Press. p158]
전반기인생은 페르조나를 통하여 자아를 견고히 세워야한다면, 후반기 인생은 페르조나의 철가면과 두꺼운 갑옷을 벗으며 나와 페르조나를 분별하며 사는 길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시종을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간 것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광야로 들어간 것은 위대한 승리 앞에서 자만, 팽창된 마음이 이내 지치고 두려움에 빠진 탈진된 그가 스스로 정신적 내향을 위해 취한 영적 자세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정도의 팽창과 수축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고단하고 지치고, 무언가 성공적인 성취 뒤에, 자신의 껍데기를 벗고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9.07 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