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비목’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이 땅에 레저 붐이 일어났다. 대절버스를 이용하여 하루 동안 산을 찾는, 이른바 안내등반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산악회는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참가 회원들에게 마이크를 돌리며 ‘노래 부르기’를 강요했다. 신명나게 노래를 뽑아내는 회원은 문제가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는 회원은 ‘강제 하차’ 위협 등의 수모를 당하고는 했다.
산을 좋아하는 그는 주말마다 이 안내등반에 참여했다. 대절버스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목적지를 오갈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강압적으로 ‘노래’를 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시달리다 못해 “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聾兒)입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쓴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노래 부르기를 강요하는 사회자에게 그 쪽지를 내밀었다. 애교 정도로 좋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련만, 대부분의 경우 그 쪽지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노래 강요’에 따른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유행가 한 곡씩 부르게 했다. 한 아이가 “산수 시간에 웬 노래냐?”며 선생님에게 맞섰다. “노래를 하나, 안 하나 한 번 해보자!” 선생님은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라며 주먹질, 매질을 했다. 아이 얼굴이 퉁붕 부어오르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정신적 외상’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1981년 한여름, 지리산을 찾은 그는 노고단과 돼지령 갈림길에 서있는 비목(碑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쳤지만, 그는 자석에 끌린 듯이 그 비목에게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섰다. 바로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소프라노의 낭랑한 노래가 들려왔다.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성악가가 부르는 듯한 그 노래는 그의 혼(魂)을 빼내어 지리산 주능선 위의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 위로 날아오르게 하는 듯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강원도 화천,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한명희 소위는 6.25 격전장에서 무명용사들의 유골과 녹슨 유품, 돌무덤들과 곧잘 마주쳤다. 전장의 흔적으로 발견되는 돌무덤과 막대기로 묘비를 대신하여 꽂아둔 비목들…. 제대를 한 뒤 방송국에서 음악 프로듀서로 근무하던 그는 작곡가 장일남의 요청을 받고 즉석에서 그의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 ‘비목’이란 시를 짓는다. <비목>은 <그리운 금강산> 등과 함께 국민 애창 가곡이 된다.
소프라노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무릎을 쳤다. 그는 산악회의 ‘시민안내산행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노래 부르기 강요’를 더 견뎌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곡 ‘비목’을 듣고 있는 동안 문제의 해법이 떠올랐다. 그렇다, 노래를 강요하는 산악회를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산악회를 만들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뜻에 맞는 산악회를 만들어 산악문화를 제대로 정립하고 싶었다.
그가 <비목>을 들으면서 무릎을 친 것은 나무 막대기 하나에도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그 사실을 깨친 때문이었다. 우리의 산하(山河)는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산자락은 물론, 능선과 골짜기마다 역사와 민속, 자연과 문화가 묻혀 있지 않겠는가. 오로지 산정으로 오르내리기에 급급하면 산자락에 서려 있는 역사의 자취조차 읽을 수 없다. 그는 산악의 인문지리를 제대로 습득하는 산행문화 정립 사명감까지 다짐했다.
그는 ‘PEN’이란 이름의 산악회를 만들었다. 산행버스 안에서 노래 부르기를 강요하는 대신 ‘3행시’를 짓도록 했다. 술잔을 돌리지 않고 그 돈으로 등산양말 등을 사서 3행시 상품으로 나눠주었다. 유명산악인을 초청하여 산악강좌를 열고, 산악 관련 글들을 묶어 <산에산에>라는 책자를 펴내서 무료로 배포했다. 그의 산악회는 규모가 점점 커져 <우리들의 산>으로 회명과 책자 이름을 바꿨다. 그 책은 통권 82까지 펴내 무료배포를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우리들의 산’ 산행에서 노래 부르기를 원천적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산행에 나설 때마다 재능이 탁월한 성악 전공 대학생을 초청, 우리 가곡 한 곡씩을 참여 회원들에게 가르치게 했다. 이를테면 김동진의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을 배울 경우, 관현악합주 등 여러 기악곡과 성악가들의 노래를 먼저 들었다. 이어 초청 대학생이 독창을 한 뒤 한 소절씩 가르치며 노래를 익히게 했다. 그 뒤 희망하는 회원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들의 산’산악회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120쪽 안팎의 <우리들의 산> 책자도 무가지(無價誌)로 매월 4000부씩 펴냈다. “산악회에서 무슨 책을 펴내느냐?”면서 제동이 걸린 것은 PEN산악회 때였다.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아도 되는, 후원회원제의 ‘우리들의 산’을 창립, 책을 계속 펴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산행도 하고 책을 펴냈지만, 가진 것이라곤 쥐뿔도 없다 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그 스스로 감당 못할 엄청난 빚을 안았다.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는 후원회원들로부터 후원회비(특별회원 연간 10만원, 일반회원 1만원)를 받았다. 공연잡지 <객석>의 부산지사장 P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유명 연기자의 모노드라마 초청공연을 하도록 다리를 놓아주었고, 한 음악인은 부산MBC의 ‘가곡과 아리아의 밤’ 수준의 성악인들이 출연하는 ‘가곡과 아리아의 밤’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이들 공연 수익금 덕분에 그는 빚더미에 깔려 숨이 멎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6] ‘원 모어 타임(One more time)’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 그는 퇴근길을 재촉하여 낙동강 강변도로 한편에 차를 세우고 KBS 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상냥한 목소리의 진행자가 안내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 그는 울고 싶도록 아름다운 세상의 모든 선율에 빨려 들어가 끝도 없이 침잠했다. 35년이나 다닌 언론사의 퇴직 날짜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음악’에 흘러간 날들을 되새김질하거나 허공에 날려보내고는 했다.
‘If I could hold you one more time … I'd look at you Till I was blind’
(내가 너를 한 번만 더 안을 수 있다면 … 난 눈이 멀 때까지 너를 바라보고 싶어)
너무나 애절한 목소리여서 처음에 그는 여성 가수로 착각할 뻔했다. 2003년 미국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를 수상한 ‘원 모어 타임(One more time)’, 그 주인공은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미남자 리차드 막스(Richard Marx)였다. 통기타를 뜯으며 노래하는 그가 어쩌면 이토록 애절하게 뭇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지! “눈이 멀 때까지 너를 바라보고 싶어”라고 절규하는 대목에서 그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무엇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기억에 떠오르는 일은 무엇이든 자신이 잘못한 것뿐이었다. 학창시절도 직장생활도 후회되는 일만 왜 그리 많은지! 그는 가족에게도 무엇 하나 잘한 일이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실망만 안겨준 것 같았다. 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태어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원 모어 타임’의 노래에 빠져들며 그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무데도 없어
내 삶 속에는 아무도 없지 / 다만 나와 일치할 뿐
더 이상의 촛불도 / 보랏빛 하늘도 없어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아 / 나의 심장이 천천히 죽어가는 만큼
내가 너를 한 번만 더 안을 수 있다면 / 네가 나의 것이었던 날들처럼
난 눈이 멀 때까지 너를 바라보고 싶어 / 그래서 너가 머물 수 있도록
네가 손짓할 때마다 나는 기도해 / 아이 같았던 시간을 흔들어
내가 너를 한 번 더 안을 수 있다면 / 세상을 멈추고 싶어
너의 얼굴을 기억해 왔지 / 난 너의 마음의 손길을 알아
너의 포옹 속에서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 / 네가 어디 있는지 꿈을 꿔’
그의 삶은 온통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무엇이든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 세월은 온통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한 번만 더’ 기회를 갖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모두는 꿈꾸는 것마저도 민망하고 공허한 망상일 뿐이었다. 다만 이제는 자신이 실망을 안겼던 일들을 기억에서 떠올려 마음속으로나마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는 ‘원 모어 타임’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원 모어 타임!’ 이제라도 그는 ‘한 번만 더’를 외칠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 다시 후회할 과오를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다음 순간, 그는 ‘라크리모사(Lacrimosa)'와 함께 섬광처럼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성당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망설이거나 미룰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와 딸은 이미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예비신자가 되어 교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교리 공부방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