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유럽의 중세와 영국 고대역사 (AD500-1500) 1] 영국의 고대와 중세 [영국지도] [튜더 왕조참조] 영국의 역사는 튜더왕조 전까지 여기서 다루고 남어지는 5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1)초기와 로마 영국은 5만전에 인류가 살았다고 하며, 남쪽의 브리튼인이 북쪽에는 게르인이 살았는데 남쪽이 진보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은 로마의 침입이다. 로마의 시저는 프랑스의 갈리아(겔트족)인 영국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근거지를 정복하려고 두 번이나 원정하여 AD80년대에는 스코틀랜드까지 진격하였다. 로마가 5세기까지 지배하였는데,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등은 로마 병영지로 라틴어의 성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로서 라틴문명이 영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런던(London)은 라틴어로 '소 택지의 성'의 뜻인 '론디니움(Londinium)'이 어원이다. 영국을 그레이트 브라이튼(Great Britai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3가지 설이 있다. 1. 로마장군 '부루트스'에서 왔다는 설이다. 2. 로마가 영국정복 시에 처음 접촉한 족속이 브리튼인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인데 이 설을 정설로 여긴다. 겔트족 중에 브리튼인은 BC7-1세기에 영국과 북프랑스 지방에 이주하여 프랑스에서는 '브루타뉴'지명이 되었다. 3. 그리스 탐험가 *피테아스가 영국을 다녀와서 그들의 몸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는 뜻인 '프레타니카이(Pretanikai)'라고 한 것이 브레타니아(Britania)으로 변화되었고, 또 이것은 브리튼(Bretain)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76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초판이 발행되기 시작한 브리태니커(Britannica) 백과사전의 이름을 보아도 이해 할 수가 있다. *피테아스 피테아스는 BC 300년경에 활동한 그리스의 항해가, 지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리스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의 섬들과 유럽의 대서양 해안을 돌아보고 기술하였다. 그의 저서 '대양에 관하여 (On the Ocean)'는 원본은 없어지고 그의 탐험담의 일부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BC 200경-118경)를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피테아스는 페니키아의 도시 가데스(지금의 스페인 카디스)에 들렀다가 영국의 브르타뉴 끝까지 간 뒤 벌리리엄(콘월)까지 많은 지역을 걸어서 탐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거리를 정확히 6,400㎞로 측정하였다. 또한 영국북부에서 마살리아(마르세유)까지의 거리를 1,680㎞로 측정했는데 실제 거리는 1,792㎞이다. 그는 북유럽의 발트 해와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까지 가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세한 기록은 예를 들면 곡물과 꿀로 만든 원주민 음료라든가 지중해 지역에서의 야외 탈곡과는 달리 탈곡을 헛간에서 한다는 등은 그의 빈틈없는 관찰자임을 알 수 있다. 하지에 해시계를 이용한 계산법이나 북부로 여행하면서 길어지는 낮 시간에 대해 주목한 것은 그의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북극성이 정극(正極)의 위치에 있지 않으며, 달이 조류(潮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
|
(2)7왕국시대(5세기-829) 4세기 고트인의 게르만인과 켈트인이 침입하였다. 5세기에 로마군대가 철수하여 로마의 지배는 끝났다. 5세기 중반부터는 앵글로색슨인이 잉글랜드지방에 침입하여 선 주민 브리튼을 쫓아내고 829년까지 7왕국시대가 되었다. 7왕국 시대에 기독교도 전파하여 농촌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나, 이들이 문자를 갖지 못하여 정확한 역사의 문헌이 없어 잘 알 수가 없다. 8세기경에 고대 영어로 쓰인 교회사를 통하여 역사를 가늠할 뿐이다. (3)앵글로색슨왕조(827-1066) 웨식스의 엑버드(에그베르트, 827-839)가 영국을 통일하여 앵글로색슨왕조가 시작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은 현재 영국을 이루고 있는 민족으로 앵글로인, 색슨인, 유트인이 주류를 이룬다. 색슨(Saxen)족은 덴마크 남쪽이고 독일 북부에 있는 작센 지방을 영어로 색슨이라고 한다.[작센지도] 앵글(Angle)은 작센 지방에 이웃에 있는 민족으로 둘다 성질이 거칠고 사나운 야만족으로 이들에게 평야와 남쪽을 내어주고 켈트의 스콧족은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산지나 북쪽으로 쫓겨났다. 잉글랜드는 '앵글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앨프레드(871-899)대왕은 잉글랜드가 데인족의 침략을 막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데인족은 덴마크에서 온 민족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데인족의 전설적 왕자를 소재로 하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편찬은 그의 재위중인 890년경에 시작되었다. 1014년 덴마크 왕의 동생 크누트가 영국을 점령하여 1016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덴마크왕인 형이 죽자 1019년 덴마크왕도 겸하였다. 노르웨이도 점령하여 1028년 왕위에 올라 3개국을 1035년까지 다스렸다. 서자 해럴드가 잉글랜드를 이어 받았으나 아무도 그의 자질을 이어 받지 못하여 1042년에 다시 옛날 왕통으로 돌아갔으며, 1066년부터는 노르만왕조가 시작되었다. (4)노르만왕조(1066-1154) 영국의 에드워드(1042-1066)는 어머니 친정인 노르만 공국에서 보호받고 자랐다. 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웨스트민스트 대성당을 건설하여 '참회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후계자가 없이 죽음으로 노르만의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에 침입하여 앵글로색슨의 해롤드왕을 격파하고, 즉위하니 윌리엄1세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윌리엄1세의 부인은 플랑로드 백작 보두앵 5세의 딸이다. 프랑스어를 쓰고 완전히 프랑스화 된 노르만족이라 프랑스 문화가 영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귀족은 색슨계에서 노르만으로 옮겨졌고, 앵글로색슨인은 토지를 주었으며, 노르만에게는 다스릴 영토를 주었다.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하였고, 유럽대륙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영국성립의 기초를 닦았다. 프랑스어를 쓰는 귀족과 영어를 쓰는 평민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노르만공국은 프랑스와 신하관계가 영국왕이 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유는 영국의 인구는 200만, 프랑스 인구는 800만으로 인구의 열세 때문이었다. 헨리 2세는 프랑스 안의 영토를 프랑스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백년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윌리엄1세의 아들 윌리엄1세의 아들 헨리1세는 아들이 없었다. |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을 다스린 크누트왕> |
윌리엄 1세의 딸 애덜라와 블루아 샤르트르 백작 에티엔 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인 스티븐은 많은 대 귀족들과 함께 이종 4촌인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를 왕위 계승자로 지지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영주들은 마틸다가 앙주 백작 가문으로 시집간 것에 분개하여 잉글랜드 귀족들과 여왕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및 불로고뉴 지방을 지배하던 스티븐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영국해협을 건너오자 대 귀족들과 주교들은 그를 환영하였다. 헨리 1세의 외손자이며, 마틸다의 아들 앙주가 프랑스에 있다가 영국으로 쳐들어와 스티븐(1135-1154)은 그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스티븐이 죽고 노르만왕조는 끝나고 플란타지네트의 혼혈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헨리 1세 1 feet(약 30cm)는 헨리 1세의 팔 길이의 1/3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의 팔 길이가 길거나 짧았다면 지금의 1 feet도 달라졌을 것이다. (5)프란타지네트왕조(1154-1399) 윌리엄1세의 손자 스티븐이 죽고, 헨리1세의 외손자이며, 헨리 플랜태저넷 가문 마틸다의 아들 앙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헨리2세(1154-1189)라고 하였다. 이것이 프란타지네트(앙주)왕가의 시초로 이름은 라틴어로 프란타게니스타(플랜태저넷)가 어원인데 이것은 가문의 이름이라고 한다. 헨리 2세는 19세 때에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와 사랑하게 되어 루이와 이혼하고 엘리노아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프랑스 남쪽의 큰 영토를 가지고 오게되었다. 헨리 2세는 영국, 노르만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왕 루이 7세 보다 더 큰 영토를 다스렸고, 영국 내에도 정치를 안정시키고 법과 재판제도 마련하여 현군으로 존경받았다. 헨리 2세의 3째 아들 리처드1세(1189-1199)는 아버지가 동생 존을 사랑하여 가장 좋은 프랑스 남부를 주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다. 그가 십자군 3차 원정 시 사자왕으로 이름 날렸고,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리처드1세이다. 예루살렘근교에서 살라딘과 싸워 물리치고, 그의 용맹성이 별명이 되었으며, 살라딘이 그의 용맹성에 탄복하여 3년간 휴전협정(1192)을 맺고,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였다가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체포되었다.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15만 마르크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1194년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프랑스에서 필리프(필립스)2세와 싸우다가 1199년에 사망하였고, 동성연애자였던 그는 자식이 없었다. 그는 10년 재위 중 6개월 동안 영국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살았다. 탁월한 군인이자 능숙한 정치가였으며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형의 아들이자 조카인 아서 1세(아르튀르)를 리처드가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하였다. 존은 아서를 살해하고 뒤를 이어 동생인 존(1199-1216)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형들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강한 형님들 편을 들어 자기를 사랑한 아버지를 배반한 불효자로 낙인찍히어 백성은 비겁한자로 여겼다. |
<프랑스 영토 안에서 프랑스 왕 루이7세보다 더 큰 영토를 가진 헨리2세> |
그의 실정과 무거운 세금은 귀족들이 1215년에 49개조로 된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에 서명하게 하였다. 존 왕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여 대헌장의 서명을 할 수 없어 대신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뿌리로 획기적인 사건이다. 목적은 봉건제후들의 권력확인이 목적이지만, 런던과 자유도시의 시민의 특권을 인정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다. 존은 의심이 많고 복수심이 강하며 믿을 수 없는 인물여기며, 1204년에 노르망디를 잃어버렸고, 1206년까지 많은 대룩의 영토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넘겨 주었다. 헨리 3세(1216-72)는 존 왕의 큰아들로 9세에 즉위하였고, 성인이 되어 효율적으로 정부를 통제하였다.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는 헨리 3세의 큰아들로 부왕이 마그나카르타의 헌장을 무시하여 여동생 엘리너와 결혼한 프랑스인 총신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1264년 반란을 일으켜 부왕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시몽을 패사(敗死)시키고 부왕의 지배를 회복하여 나라를 다스리다가 헨리 3세가 죽은 후에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하여 하였다. 그는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이 분명하지는 못하였지만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국왕재판소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1295년 시민대표도 포함시키는 모범의회를 열었다. 이것이 후에 영국의 의회의 기원으로 이 때부터 왕과 국회라는 두 세력이 갈리게 되었고, 승려와 귀족은 상원이 되었고, 농민과 상인 또는 평민의 대표는 하원이 되었다. 에드워드 2세(1307-27)는 동성연애자로 부인 이자벨라는 1325년 외교사절로 파리에 갔다가 에드워드 2세를 반대하여 망명한 귀족 로저 모티머와 사랑하게 되었다. 1326년 9월 이자벨라는 로저와 함께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에드워드를 폐위한 뒤 아들을 에드워드 3세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에드워드 2세는 투옥되었다가 1327년 폭행으로 숨진 것으로 짐작된다. 에드워드3(1327-1377)세는 왕위계승을 구실로 백년전쟁(1337-1453, 116년간)을 일으켰다. 1341영국의회가 상하의원으로 나누었다. 리처드2세(1377-1399)는 흑태자의 아들인데 랭커스터가의 헨리4세에게 패위 당하여 왕가는 끝난다. 흑태자는 백년전쟁시에 입은 갑옷이 흑색인 것에서 별명을 얻은 에드워드이다. 리처드2세와 이사벨의 이야기 리처드 2세는 1394년 사랑하는 앤이 죽어, 1396년 29살 되는 그는 7살의 프랑스 귀족 소녀 이사벨(1389-1409)과 결혼하였다. 리처드가 99년에 죽음으로 그녀는 11세에 과부가 되었고, 16세에 다시 2살이나 적은 앙굴렘의 샤를에게 재혼하였으나 20세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녀의 짧은 생애가 많이 기구하였는데 2살에는 아량송 백작의 아들 존과 약혼도 하였으나 리처드와 결혼하게 되어 존과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6)랭커스터왕조(1399-1461, 1470-71) 헨리 4세(1399-13)는 랭커스터왕가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그는 랭커스터공 존 오브 곤트의 맏아들로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며, 리처드 2세의 4촌 동생으로 1397년 헤리퍼드 공작에 봉작되었다. 그 동안 대륙의 독일기사단 군대에 참가하여 기사도적 행위에 열중하였으며, 1399년 아버지가 죽자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공령(公領)을 몰수하였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을 일으켜 왕군을 무찌르고 리처드 2세를 체포하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면서 의회발전에 공헌하였다. |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존왕> |
노르만족이 점령하여 300년 동안 공식언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여 왕궁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
<무능한 헨리6세, 백년전쟁에 패하고 장미전쟁이 시작되었다.> |
문장은 귀족들이 자기가계의 표현으로 대문이나 상징되는 곳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며, |
<1486년 헨리 7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가 '튜더 장미'를 들고 있다. > <튜더 장미> |
(2)초기 에드워드3세의 장자 에드워드는 검은 갑옷(흑태자)을 입고 프랑스로 진격하여 기사군을 격파하고 칼레 시를 함락하였다. *페스트의 만연으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1355년에 흑태자가 남프랑스를 공격하였다. 페스트로 죽은 사체를 적지의 샘에 투입시켜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도 한다. 당시 프랑스는 석궁을 너무 위험한 무기라고 금하였는데, 영국의 보병은 석궁을 사용하였다. 석궁은 일반화살이 뚫을 수 없는 갑옷을 뚫을 수 있었고, 거리도 활보다 2-3배나 길었다. 석궁 앞에 프랑스 기사들이 맥을 못쓰고 패하여 국왕 존(장)2세는 포로로 잡혔다. 브레티니 조약으로 왕은 300만 크라운의 석방금을 약속하고 석방되었다. 아키덴지방과 칼레시 등을 영국에 주었다. 네덜란드의 부르고뉴공국이 영국을 도왔다. *페스트(호열자) [페스트지도]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빈의 콜마르크트 거리와 카알 성당이나 여러 도시에서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조각물을 만나게 된다. 페스트를 흑사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검게되어 죽게 되는데서 연유한다. 페스트는 쥐에서 사는 벼룩에 의하여 전염되는 병으로 쥐와 사람이 함께 걸이는 병이다. 페스트는 공기나 환자에 의해서 전염됨으로 법전염병으로 격리시키게 된다. 쥐가 페스트로 감소하면 쥐벼룩이 갈 곳이 없어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전염된다. 유럽 인구의 1/3인 2,500만 명 정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영국 런던에서는 흑사병 때문에 쥐, 고양이, 개 등을 모두 태우다가 1666년 런던의 대 화재로 흑사병 기세가 수그려 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페스트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회시간에 단체로 흡연하기도 하였다. 또 마을 전체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여 유럽에서 페스트 공포는 대단하였다. 1346년 중국은 한 해에 1,300만 명이 죽었다. 중국과 남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흑사병은 1347년 몽골의 킵차크 군대가 일종의 세균전쟁으로 크림의 한 성을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 시체들을 도시를 향해 쏘아보냈다. 당시 크림반도에 정박 중인 제노바 선박에 의하여 유럽인들에게 전파된 것으로 보고있으며, 페스트나 콜레라 등의 지역 전염병이 무역으로 전세계에 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1361-63, 1369-71, 1374-75, 1390, 1400년부터는 뜸하다가 1664-65년에 다시 유행하였는데 이 때에 독일의 쾰른에서는 속죄양으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였고, 그 수가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페스트 때문에 서양의 중세가 몰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몽골제국 멸망을 페스트로 인한 인구감소로 보는 학자도 있다. 페스트를 주제로 한 소설은 1349-51년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이다. 데카메론은 10일간의 이야기란 뜻으로 피렌체의 세 청년과 일곱 숙녀가 페스트 병을 피해 교외 별장에 있으면서 10일에 걸쳐 순번대로 익살, 외설, 비극 등 다양한 이야기 100개의 화제를 수록하였다. 등장인물은 왕후, 귀족, 악한, 가난뱅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되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7년 발표한 '페스트'이다. 알제리의 해변도시 오랑 시에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 하에 페스트가 상징한 악과 억압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항을 하면 인간 사이의 진정한 연대가 이룩되어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3)중기 샤를5세가 아키덴 귀족을 선동하여 영국에 반항하게 하여 영국은 1369년에 다시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여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1375-1399년까지는 양국 사정으로 전쟁이 없었으나 영국의 헨리4세가 즉위하면서 전쟁을 재개하였다. |
<페스트를 피하여 온 아름다운 산골 '오브라' 마을 독일 퓌센지방> |
(4)후기 1415년 영국 헨리 5세는 내전의 한파인 부르고뉴파와 결탁하여 노르망디를 공격하여 북프랑스 여려 도시를 장악하였다. 샤를 6세는 자신의 아들 샤를 7세를 사생아라고 여겨 왕위계승을 반대하였다.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어 헨리 5세는 프랑스 샤를 6세의 딸 카드린과 결혼하여 자신이 프랑스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연이어죽자 10개월 된 아기가 영국과 프랑스의 2왕국의 국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헨리6세이다. 따라서 샤를 6세의 아들 샤를7세도 프랑스왕위를 올랐다고 선언하여 프랑스는 2왕이 존재하게 되었다. 영국은 1428년에 샤를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때에 유명한 *잔다르크는 적은 수의 군사로 영국군을 격파하였는데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샤를7세는 정식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국왕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430년 잔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 체포되어 영국으로 넘겨져 마녀재판을 받고 다음해 화형 당하였다. 1444년 툴 협정으로 영국의 영토 칼레와 노르망디 등은 계속보유 하였다. 양국의 타협이 잘되지 않자 샤를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내의 영국영토를 공격하여 칼레만 남기고 모두 점령하였다. 1453년 프랑스가 유리하여지자 부르고뉴파도 35년간의 내전을 화해함으로 백년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 동안 프랑스 승리의 원인은 영국이 지배하는 동안 가혹한 지배와 약탈로 시민과 농민이 영국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의 국왕 군대가 보병과 포병을 강화 한 것도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1558년 프랑스 땅에 잉글랜드가 최후까지 가지고 있던 거점인 칼레도 프랑스로 넘어갔다. *잔다르크(1412-1431)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시농성의 황태자 샤를(샤를7세)만났다. 트루아 조약에 의하여 영국 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죽으면 왕위를 물려받고 그의 아들 헨리6세가 연속으로 왕위를 받게 되어 있어 샤를7세 황태자는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그렇게된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이사보인데 바람 둥이어서 사생아라고 단정하여 샤를6세가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잔다르크는 황태자가 계승자임을 샤를 6세에게 증명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아 그가 시골 출신이 아니고, 잔다르크는 샤를 6세와 오레이트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잔다르크는 황태자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그에게서 군대를 얻어 연전연승하여 황태자가 대관식을 치르게 하였다. 선두에 흰 옷과 흰 갑옷을 입은 그녀를 보기만 하여도 영국군은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승리에 비례하여 시기하는 자가 많아졌다. 출군 하여 늦게 들어오는 사이에 퐁피기니 성의 문을 닫아 영국군의 포로가 되게 하였으며, 그녀가 포로가 되어도 누구하나 구출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없었다. 그녀의 승리는 악마의 도움이라고 *마녀재판에 회부되어 화형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화형 당할 때도 당당하였고, 고문 받을 때도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으나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살아 남아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였다. 1456년 샤를7세는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고, 1920년 천주교에서는 성녀로 시성 하였다. |
<백년전쟁의 영웅 잔다르크> |
*마녀재판(대리 희생물) 일명 '마녀사냥'이라고 하며, 고대로부터 현재까지도 '대리 희생'으로 자행되는 잘못된 인간심리이다. 유럽에서는 십자군전쟁이 실패로 돌아가 사회적, 특히 종교적으로 불안하자 위기극복 수단으로 마녀재판이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마녀사냥은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의 교서로부터 시작하였다. 교서 내용은 '마녀가 요사스런 마술로 농작물과 과일을 시들게 하고, 태아나 가축을 죽이며, 남편을 성적 불능으로 만들어 아내를 불임하게 하여 재난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들은 신문관이 마음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누구라도 교정하며, 투옥하고 처벌할 권한을 가져야함을 명한다' 이 교서로 300년 동안 마녀로 지목되어 처벌된 사람은 30만 내지 수백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대부분이 여자였으며, 서너 살 된 어린아이도 상당수 있었다. 재판의 비용은 마녀가 부담하고, 재산은 몰수하여 영주, 주교, 심판관이 나누어 가지게 되어 있어 그들은 재산증식을 위하여 마녀사냥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과 마녀감별 법을 고안하였다. 마녀의 흔적을 찾는다고 체모를 모두 깎고 음부와 온몸을 뒤지고 고문하면서 사디즘을 즐겼다. 마녀의 대상자는 남다른 특성을 가진 사회적 이탈자로 미인, 추녀, 과부, 못된 성품, 신체적 결함, 병을 잘 고치거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대상자로 삼았다. 마녀의 정의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교접하고 악마의 마력을 행사하며, 마녀 집회에 참석하는 자를 마녀로 정의 하였다. 마녀 집회를 사바트라고 하며, 독일 브로켄산이 유명하였다. 마녀는 손톱자국이나 흔적이 있다고 가정하여 자백이나 감별 법으로 마녀를 만들었다. 고문은 지독하여 강제로 허위자백을 만들어 내었고, 감별 법은 너무 많은데 예를 들면 바늘로 찔러 피가 나지 않으면 마녀인데, 바늘은 뒤로 밀리는 바늘을 사용하여 모두가 마녀가 되었다. 12-17세기에 행해지고,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시대인 16-17세기에 절정에 달한 것을 아이러니(반대 현상)하다고 한다. 마녀사냥은 소도시나 시골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대도시는 문예부흥으로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질서가 형성되었으나 소도시나 시골은 구질서(교황통치)을 지키기 위한 발악으로 마녀사냥이라는 폭력을 자행하여 유지하려고 하였다. 18세기에 와서 공포에서 벗어났고, 사회의 병리학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마녀에는 소수의 남성도 있으며, 마녀는 교수형에 처하고 시체는 불태웠다. (5)결과 양국 귀족의 몰락으로 영국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으로 귀족이 모두 몰락하였고, 프랑스는 내전으로 봉건귀족이 몰락하였다. 이것은 양국 국왕권력이 신장하였으며,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여 다음왕조의 절대왕권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영국은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여 대륙의 복잡한 문제에 휩쓸 이지 않게 되어 독자적 국가를 형성하였다.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플랑드르의 견직기술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플랑드르 보다 능가하는 견직물공업이 발전되어 영국이 후에 세계적인 견직물 수출국이 되는 기초가 되었다. 양국의 *봉건기사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과 *부르조아 계급이 대두되었다. 노르만왕조는 영어를 몰라서 프랑스어만 사용한 것이 300년 동안 영국 귀족들은 언어이었다. 그러나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어 1339년 헨리4세가 영어를 부활시켰다. 영국 귀족은 프랑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나 전쟁 중에 대학생을 철수시켜 옥스퍼드(oxford)에 유치하여 지금과 같은 학술 도시가 되었다. 옥스퍼드(oxford)는 템스강을 '소가 건너 갔다'는 뜻으로 지금은 주와 도시 명칭이 되었다. |
<마녀 재판으로 화형 당하는 잔다르크> |
*봉건제도와 기사도 봉건제도 게르만족이 세운 여려 나라의 정치와 구조를 말하며, 8-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왕 아래 대 제후(영주)가 있고 대 제후아래 소 제후가 있으며, 소 제후는 기사들이 받들고 있었다. 땅의 분배도 마찬가지로 왕은 대 제후에게 대 제후는 소 제후에게 소 제후는 신하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라라고 해도 제후의 모임에 불과하여 제후의 다툼으로 질서의 유지가 어려웠다. 장원제도 제후(영주)가 다스리는 토지를 장원이라고 하는데, 농민은 영주로부터 토지를 할당받아 농사, 목축, 베 짜는 등의 일을 하고 세금을 영주나 예배당에 받쳤다. 농민은 다른 직업, 다른 곳으로 이사, 농토의 소유도 허락되지 않아 이를 농민노예라고 한다. 다만 노예만큼 학대받지는 않았다. 기사도 영주사이에는 개인적으로 군사훈련도 활발하여 기사가 생겼고, 이들은 규율을 존중하였다. 왕과 제후도 포함되며 이상적이 규범으로 환영받는 기사도가 생겼다. 지혜와 인자한마음, 두터운 신앙, 여성과 노약자를 돕고, 용기와 무술의 찬양을 덕목으로 여기며, 일정한 수양과 엄숙한 의식을 거쳐야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성인이 되어 의식을 마치면, 군주로부터 무기와 갑옷을 선사 받아 귀부인의 도움으로 기사 옷을 입으면 왕과 군중의 축복을 받고 무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사는 싸움터에서 싸우는 것이 임무지만, 때로는 신사숙녀 앞에서 무예를 겨루는 시합을 하였다. 이 시합은 혈투여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으며, 승자에게는 잔치와 명예로운 자리가 마련된다. 색다른 것은 기사도에 여인(부인) 숭배사상으로 이것은 기독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도입된 것이라고 하며, 숭배할 여인을 골라 여인에게 선택되면 여인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그의 남편이 되었다. 기사는 이 부인의 명예를 걸고 시합이나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풍습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여인을 걸고 시합에 이기면 부인을 하사 받기도 하였으며, 십자군기사단과 독일기사단이 유명하였다. 리처드1세나 프리드리히1세 등은 왕으로 보다 기사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우리 나라 신라의 화랑5계가 기사도와 공통점이 많다. |
<20~30kg 정도의 갑옷을 |
기사 이야기 백년전쟁 때는 급여를 받고 싸웠지만, 평화시는 무소득이라 그들은 도적 떼로 돌변하여 사회가 전쟁시 보다 더 불안하였다고 한다. 독일의 기사 도적 떼가 유명하여 라인강을 따라 상선이나 가축을 약탈하였다. 기사들의 갑옷은 기계와 철재의 화살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게가 70Kg정도 된다고 한다. 혼자 입을 수도 없고 혼자 말을 탈수도 없었다. 한번 낙마하면 일어나지 못하였고 또 갑옷은 목과 가랑이가 가장 취약하였다고 한다. 포로가 되어도 수치가 아니었다고 하며, 포로는 몸값 때문에 죽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존(장)2세(1350-1364)의 몸값은 300만 크라운인데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롬바르드 여왕과 결혼하여도 턱없이 부족하여 다시 영국으로가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그는 국왕의 대접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부르조아 부르조아 어원은 성(城)을 프랑스말로 부르(Bourg)라고 하고 성안에 사는 사람을 부르조아 (Bourgeois)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성안에 사는 사람은 귀족, 부호상인, 은행가 등으로 이들을 부르조아 계급이라고 한다. 후에는 사업을 하여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주나, 가진(자본가)자의 상류계급을 지칭하여 부르조아라고 불렸고, 공산주의는 근로자를 착취하는 악질 원수로 취급하였다. 부르조아는 봉건적 사회경제체제를 붕괴시킨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말한다. 산업혁명주체는 부르조아 즉 가진자로 상류계급이다. 이 계급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공산주의를 표방한 러시아, 중국(중공) 등으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들어와 실패하였다. 그들도 지금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버리고 수정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과도기를 걷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칼 마르크스가 처음 사용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을 말한다. 라틴어로 로마의 최하위 계층(프롤레타리-proletari)에서 어원이 왔는데 무산계급이라 한다. 경제의 3원칙은 생산, 분배, 소비이며, 생산의 3원칙은 자본, 물자(토지), 노동인데, 자본과 물자를 가진 자가 부르조아이며, 노동만을 가진 자가 프롤레타리아이다. K. 칼 마르크스는 부르조아가 노동력(근로자)을 착취하여 소비자(근로자)가 빈곤하여 소비가 일어나지 못하므로 결국에는 망한다는 이론을 주장 하여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소비를 주장 한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다. 부르조아의 혁명은 민주주의 기초가 되었다. |
<여인에게 명예를 걸고 마상 시합하는 기사> |
3] 중세의 문명과 항로 개척 [노예무역 참조] [지리상의 발견참조] 건축은 장중하고 엄숙한 로마네크 방식이 발달하였고, 후에는 날카로운 고딕식(쾰른 성당, 노트르담)이 나타났다. 12-13세기에 걸쳐 '원탁의 기사'와 같은 기사들의 이야기가 소설화하였다.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친 단테의 신곡이 1321년에 완성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지리상의 발견의 원동력이 되었고 1440년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어 대량으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명문 *대학들이 나타났는데, 이탈리아는 볼로나, 프랑스는 파리, 영국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이다. 또 항로의 개척이 시작되었는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앞장섰다. 1488년 포르투갈의 디아스가 남단 아프리카 희망 봉에 도달하였다. 1492년 이탈리아의 *콜롬버스가 서인도제도 발견하였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는 희망 봉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여 인도항로를 개척하였다. 1499년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픗치는 에스파나 후원을 받아 아마존 하구를 탐험하였다. 3 대(大) 항해사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를 말할 때에 15-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선이 새로운 무역항로(향료무역 참조)를 찾아 나섰다가 새로운 지리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항해사에서는 3차 대(大) 항해사에 해당 할 뿐이다. 이에 앞서 1차 대(大) 항해사는 8세기 후반부터 이슬람 상인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이들은 중국의 광주를 지나 양자강 하구의 양주에 이르러 그곳에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한반도의 신라와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신라 헌강왕5년(879년)에 개운포(開雲浦:울산)에 있었던 처용설화가 뒤 바침 한다. 이슬람 상인들이 타고 다닌 배가 '다우'선(船)으로 이를 '다우 교역권'이라고 한다. 이들이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까지 무역을 하였다. 이들 중에 중국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 등에 상륙하여 회교를 전파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2차 대(大) 항해사는 정화(정화 참조)함대로 이들이 타고 다닌 배가 '정크'선(船)으로 이들이 교역한 것을 '정크 교역권'이라고 한다. 정화 함대가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에 도달한 것보다 80-90년 앞섰다. 3차 대(大) 항해사는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 마젤란에 의한 것이다. *마르코 폴로 [정화의 원정항로, 실크로드, 마르코 폴로 지도] '동방견문록'은 마르크 폴로(1254-1324)가 1271-1295년에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여행기이다.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 그리고 삼촌 마테오 폴로와 함께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에 이르러 쿠빌라이에게 알현하고 벼슬자리를 얻어 17년간 중국각지를 여행하였다. 양차우 시장도 하였으나 1290년에 일 한국으로 시집가는 왕녀 코카친을 수행하고 해로를 따라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다. |
<정크(junk)선,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정범선으로, 돛에 대나무의 살을 넣어 돛을 펴는 것이 특징이다.> |
1295년에 귀국하여 제노바의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었고, 3척의 배에 120명 승무원이 스페인 세비야의 팔로스 델라프론테라 항을 출발하여 10월 바하마제도의 |
<1492년 1차 항해 때 복원된 기함 '산타 마리아'호> |
*대학 |
<옥스퍼드 신학(Christchurch) 대학> |
|
|